총회의 잘못된 결의 - 한부선 선교사
미국인 선교사인 언더우드(장로교)와 아펜젤러(감리교)가 1885년에 들어와서 고아원과 병원과 학교를 세우며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런 일을 좋게 보기도 했지만 저항과 갈등도 컸다. 토속 종교와 전통적인 민속과도 대립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를 받던 때는 총독부가 교회를 간섭했다. 기독교가 용납할 수 없는 천황숭배나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거부하는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투옥하고 교회를 폐쇄했다. 총독부의 교활한 회유와 강압으로 교계 지도자들 상당수가 친일로 변질되거나 굴복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1938. 9. 10 평양서문밖교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가결하기도 했다. 총독부는 각 노회에 파송하는 목사와 장로 총대들을 협박했다.
첫째, 총회에 출석하면 신사참배는 죄가 아니라는 것을 동의할 것.
둘째, 신사참배 문제가 상정되면 침묵을 지킬 것.
셋째, 첫째와 둘째를 실행할 의사가 없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출석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총회에서 신사참배 제안자만 아니라 '동의합니다', '재청합니다' 할 사람까지 지정했다고 한다. 총회는 그 각본대로 진행되었다고 전해진다. 박응률 목사가 제안 설명을 하고 총회장이 가부를 물으니 소수가(10여 명) "예"라고 했고, 회장이 이어서 "아니면 아니라 하시오" 라고 물어야 하는데도 묻지도 않고 의사봉을 탕 탕 탕! 두드렸다는 것이다.
그 순간에 항의하고 일어서는 회원이 있었다. "의장, 불법이오! 항의합니다" 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봉천노회(만주)에 속한 한부선(Bruce F. Hunt, 1903-1992) 이었다. 다른 선교사들 30여 명도 홍택기 총회장에게 불법결의를 항의했다. 회의가 소란해지자 총대들 사이에 끼어 앉았던 경찰들과 대기했던 무술경관들이 선교사들을 희의장 밖으로 끌어냈다. 한부선은 끌려 나가면서도 "나는 하나님께 상소합니다." 소리치며 불법적인 회의 진행과 잘못된 결의에 강하게 항의했다.
동아일보(9월 11일) 기사이다. '평양노회 박응률 목사의 발의로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의식이다. 하자 평서노회장 박임현 목사의 동의와 안주노회 길인섭 목사의 재청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하였다. 이에 방위량 평서노회 선교사 원세열 한부선 선교사 등이 반대하였으나 그대로 통과되매 30여 선교사는 퇴장하였다. 이어 총회 부회장 김길창 씨의 인솔 하에 각 노회장 28명이 평양신사로 가서 참배하였다' 하는 내용이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일제의 강압과 잘못된 지도자들에 의해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가 신랑 되신 예수께 지켜져야 할 믿음의 정절을 유린당했던 것이다. 한국 장로교 역사에 가장 부끄러운 불법적 결의요 진리를 왜곡한 오점이 되었다.
선교사들이 총회 결의가 하나님의 계율과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에 위반될 뿐 아니라, 회원에게 반대 발언권을 주지도 않았으니 불법이며, 일본헌법에 부여한 종교 자유의 정신에도 어긋난다고 항의서를 제출했지만 총회는 이 문서도 기각했다.
총회의 이런 결의에 불구하고 일부 목사들은 변함없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나섰다. 평안북도 이기선 목사, 평안남도 주기철 목사, 경상남도 한상동 목사, 전라남도 손양원 목사, 만주 한부선 선교사 등이었다. 목회자들만 아니라 많은 교인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하는 예배를 거부하고 교인들이 따로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이런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고 심한 고문을 받았다. 옥중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와 보성여학교(평북 선천) 교사였던 안이숙 선생 등이 있다. 한부선 선교사도 1941년에 체포되어 9개월간 감옥생활을 하다 1942년에 강제출국을 당했다.
기독교 역사에 공교회 결의가 잘못된 경우가 많았다. 이단적인 주장을 채택하고, 교권의 불법과 횡포도 있었다. 비성경적인 결의나 교권주의에 저항하는 자는 다수의 소리에 묻히거나 무시되어버렸다. 오히려 퇴출되거나 처형되었다. 슬픈 일이다.
교회나 노회나 총회를 지도하는 목사나 장로들은 신학과 신앙에 관한 안건을 처리할 때 '예, 아니오'에 진실해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과 역사 앞에 결코 부끄럽지 않아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