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6일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주 크로머초등학교. 영문학 수업이 한창인 3학년 교실에서 학생들은 한쪽 팔에 털실과 색종이로 꾸민 양말을 끼고 마지막 대본을 수정하느라 분주했다. “저희 그룹은 오늘 ‘바닷속 인어공주’를 공연할 거예요. 심술궂은 계모 왕비가 남편에게 귀여움 받는 인어공주를 바다 밖으로 쫓아낸다는 이야기죠.” 왼손에 인어공주 모양의 양말을 끼운 캐시 양이 말했다.
이날은 인형극을 발표하는 날이었다. 지난달 초부터 2주 동안 학생들은 서너 명씩 짝을 지어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에 맞게 이야기를 구성했다. 인터넷 동영상을 보고 양말인형도 직접 만들었다.
캐시 양의 그룹이 연극을 마치자 셜린 로러 교사는 다른 학생들에게 연극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하도록 했다. 학생들의 발표가 끝난 뒤에는 마지막 조언을 했다. 로러 교사는 “이 수업을 통해 학생들은 영문학 내용 외에 협동심, 의사소통, 행동 계획, 문제해결 능력 등을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막대그래프 가로축과 세로축을 구성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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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뒤 4학년 수학 교실. 학생들은 멀티스크린 앞에 모여 앉아 낸시 채퍼 교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채퍼 교사는 막대그래프의 가로축과 세로축을 구성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 후 트럼프 카드를 나눠주고 그룹별로 막대그래프를 그려보라고 했다. 학생들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 그룹은 막대그래프의 가로축을 다이아몬드, 하트, 클로버, 스페이드로 하고 세로축을 개수로 했다. 반면 다른 그룹은 가로축을 색깔로, 세로축을 개수로 했다.
채퍼 교사는 “학생들에게 절대로 지식을 바로 전달하지 않는다. 먼저 기본 개념을 설명하고 그룹별로 풀어본 뒤 다시 전체가 토론한다”며 “이런 방법을 통해 학생들은 스스로 어떤 것을 잘 했고 어떤 것을 잘못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것은 콘텐츠(교과내용)와 스킬(핵심역량)을 결합하려는 노력이다. 모든 수업이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수학을 배우면서 문제해결 능력과 협동심, 대화 능력이라는 핵심역량을 기를 수 있다”고 덧붙였다.
○ 교과과정 운영은 교사 몫‘콘텐츠와 스킬을 결합하려는 노력’은 뉴사우스웨일스 주 핵심역량 교육과정의 기본 철학이다.
뉴사우스웨일스 주정부는 핵심역량을 도입하면서 △영어 △수학 △과학 및 기술공학 △인간사회와 환경 △창작 예술 △개인적 발달과 보건체육 등 6가지 핵심 학습영역을 5가지 핵심역량과 연결하는 방법으로 교과과정(실러버스)을 개편했다. 각 학교가 따라야 하는 교과과정 문서를 보면 학습목표와 성과는 물론이고 해당 과목에서 꼭 알아야 할 내용과 함께 구현될 수 있는 핵심역량이 기술돼 있다.
그러나 수업을 어떻게 하느냐는 철저히 교사에게 달렸다. ‘무엇을 가르칠지’에서 ‘어떻게 가르칠지’가 중요해짐에 따라 교사들의 변화 의지가 중요하게 됐다. 뉴사우스웨일스 주 교육부의 릭 실로나 커리큘럼 디렉터는 “핵심역량 교육과정을 잘 운영하기 위한 교사 지원은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뉴사우스웨일스 주 교육부는 매 학기 두 번씩 교사들에게 커리큘럼 정보를 보내주고 관련 연수도 해준다. 웹사이트에 교습 자료를 축적해 두기도 한다.
1990년대 중반 핵심역량 교육과정을 도입한 크로머초등학교 그레그 존스 교장은 “변화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21세기가 이전 사회와 다르다는 것을 안 교사들이 이제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며 “학교는 교사들의 노력을 계속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학교에서는 매 학기 두 번씩 모든 교사들이 모여 수업 방식을 연구하고 공유하는 ‘교사 발전의 날’이 있다. 매일 오전 20분간 모여 차를 마시며 의논하기도 한다. 2007년 파나소닉과 기술제휴를 하고 모든 수업에 컴퓨터 기기를 도입하면서부터는 1주일에 한 번 교사들에게 기술교육도 한다.
○ 교과 외 활동으로 핵심역량 길러
영문학 수업을 위해 학생들은 2주간 팀을 구성해 연극 대본과 양말인형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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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역량 교육과정에 대한 우려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특히 전국의 3, 5, 7, 9학년을 대상으로 치르는 읽기·쓰기 및 수리능력시험(NAPLAN)과 대학입학시험(HSC)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내용 중심의 수업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중고등학교에서 모든 수업을 핵심역량 중심으로 한꺼번에 바꾸는 것은 한계가 있다.2001년 공교육 혁신을 위해 주변 지역 5개 중고교가 연합해 만든 ‘프레시워터 캠퍼스’는 학생들이 캠퍼스 내 다른 학교의 수업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과목은 드라마, 목공, 시각예술, 댄스 등 70여 가지나 된다. 이 캠퍼스의 가장 큰 장점은 학생들은 지원할 대학과 분야에 맞게 다양한 과목을 선택해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교사들도 아이디어와 자원을 공유한다.
이 캠퍼스의 프랭크 피카드 교장은 “학생들이 저마다 잠재력과 자질이 다른데 똑같이 수학이나 과학만 공부하라고 할 수 없다”며 “학생들은 스스로 선택한 과목의 내신 성적과 대입 시험 점수를 토대로 희망 대학에 입학원서를 내면 된다”고 말했다.
특히 이 캠퍼스 내 노던비치중고교는 교과외 활동으로 핵심역량을 키운다. 대표적인 것이 7학년 학생들을 위한 ‘6일 프로젝트’다. 7학년 학생들은 첫 번째 학기가 끝날 무렵 6일 동안 수업을 듣지 않고 캠퍼스 내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는 데 열중한다. 앤 양은 “우리 그룹은 지구온난화를 주제로 늘어나는 이산화탄소 양과 그에 따른 문제점을 그래프로 만들고 해수면이 2m 상승하면 마을에 어떤 일이 생길지 동영상을 제작해 발표했다”고 말했다. 노던비치중고교의 스티브 피커링 교장은 “이 프로젝트로 수학, 과학 등 교과목 이해는 물론이고 대화 능력, 협동심, 문제해결 능력 등의 핵심역량을 기를 수 있다”고 말했다.
뉴사우스웨일스=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한번 사고력 키우면 평생 스스로 학습”▼
■ ‘8가지 사고과정’ 도입한 서울 운현초교
운현초교는 2004년부터 모든 수업에 8가지 사고과정(Thinking Maps)을 도입했다. 사진 제공 운현초교 |
“수학문제를 잘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이야기해보자. 어떤 사고과정을 이용하면 되지?”
방학을 하루 앞둔 15일 서울 종로구 운니동 운현초등학교 6학년 교실. 이보용 교사가 ‘묘사하기’ 표본을 꺼내 한가운데 원에 ‘수학문제 잘 해결하기’라고 썼다. 표본에는 흔히 보던 브레인스토밍처럼 주위에 가지를 친 원들이 그려져 있었다. 학생들은 손을 들고 “문제를 잘 읽어야 한다” “예전에 어떻게 풀었나 생각해 본다” 등 대답을 쏟아냈다.
이후 그룹으로 나뉜 학생들은 이 교사가 내준 문제를 어떤 방법으로 풀 수 있을지 토론했다. 그 다음 다시 전체 학생이 모여 그룹별로 찾아낸 방법을 공유하고 문제에 대한 답을 편지나 이야기 등으로 풀어 썼다.
운현초는 2004년부터 모든 수업에 사고과정(Thinking Maps)을 도입했다. 사고력과 문제해결 능력을 키워 학생들이 평생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고과정은 △정의하기 △묘사하기 △비교·대조하기 △분류하기 △부분과 전체의 관계 짓기 △순서 짓기 △원인과 결과로 분석하기 △유추하기 등 여덟 가지다.
이 교사는 “처음에는 학생들이 사고과정을 어려워했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 길러지자 자기주도학습은 물론이고 글쓰기도 잘하게 됐다”고 말했다. 운현초는 학생들의 지능을 골고루 발달시키기 위해 주제중심 통합학습도 하고 있다. 1학년 학생들이 동식물에 대해 말하기(언어적 지능), 동물원 방문(자연탐구 지능), 동물소리 흉내 내기(음악적 지능)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동식물과 우리 생활’ 공부를 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운현초는 매주 월요일 교육과정 회의를 하고 방학 때는 연구 연수를 한다. 박정희 운현초 교장은 “학교의 자율권과 창의성을 존중하는 2009년 개정 교육과정으로 일선 교사들은 어떻게 가르칠지 부담을 호소하기도 한다”며 “동일한 콘텐츠라도 다양한 방법으로 가르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