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니 시인의 이 책은 시가 아닌 언어로 자기 자신과 삶, 그리고 감각을 천천히 더듬어가는 산문집입니다.
총 2부로 나뉘어 있으며, 각각의 부에 12편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1부는 음악, 불면, 고독, 젊은 시절의 기억, 그리고 어머니의 부재처럼, 개인적인 삶의 조각들이 조용히 놓여 있는 구성입니다. 이 글들은 강하게 주장하거나 정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감정이나 이미지가 흘러나올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문장들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시인은 어느 날의 새벽에 쏟아지는 음악을 이야기하고, 오래전 슬픔이 묻어 있던 플레이리스트를 떠올리며, 문득 시 한 구절을 꺼내듭니다. 감정은 격렬하지 않지만, 그만큼 더 진실하게 느껴집니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이 책에서 가장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말기 암 선고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를 회상하는 문장들에는 슬픔보다 더 오래 남는 정적과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시인은 과거와 현재, 먼 장소와 가까운 감정 사이를 분리하지 않고, 그저 하나의 결로 받아들이며 씁니다. 이 덕분에 글은 독자에게도 자연스럽게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도록 합니다.
2부에서는 보다 시론적인 성격의 글들이 이어집니다. 고통에서 출발한 글쓰기, 병든 몸으로부터 시작된 언어, 무뎌짐과 노화에 대한 사유 등은 시인이 글쓰기를 단지 창작의 행위가 아니라 존재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무뎌지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는 문장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감정의 결을 이해하게 된 사람의 고백처럼 다가옵니다.
『새벽과 음악』은 무엇을 쓰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서, 쓰는 행위 자체를 멈추지 않으려는 사람의 태도가 담긴 책입니다. 감각은 예민하지만 과하지 않고, 언어는 정제되어 있으면서도 따뜻합니다. 이 책의 문장들은 독자를 몰입하게 만들기보다는, 그저 곁에 앉아 조용히 감정을 꺼내보게 합니다. 시인이 삶의 일부로서 글을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를 함께 지켜보게 해주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문장수집✍
시간 속에서 지치다 보면 사람들을 놓치기도 하고, 같은 이유로 사람들이 떠나기도 하고. 기대를 품은 응원의 말을 해줄 사람도 점점 줄어드는데, 오지 않는 희망 과 잡을 수 없는 소망 앞에서는 다들 지치니까. 주위에 그런 굳건한 지원군이 없다면 자기 자신을 가장 든든한 친구로 만들면 된다. 이것이 내가 삼십 년 가까이 매일 일기를 써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무언가 함께 나 늘 만한 사람이 없는 사람은, 자신과 대화하세요. 그러면 조금 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걸어갈 수 있 습니다. 다가올 미래에 무엇이 되려고 하지 말고,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바라는 그것이 되어. 조금씩 나아가봅시다. 지금 바로 행복해집시다. (나 자신에게 하는 말) 어둠으로 기우는 마음을 전적으로 다 믿지 말고, 그 감정의 결을 보다 세심하고 다정하게 들여다보면서, 어두운 감정에 속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들에 대해 좀 더 섬세하고도 고유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언어 로 이름 붙일 수 있다면. 역시나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 -p54
글쓰기는 개인의 고독과 병증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글쓰기는 한 개인 내부의 가장 허약한 지점에서 떠오른다. 백지 위로. 불쑥. 하나의 신음처럼. 어떤 고통들, 어떤 결핍들, 어떤 충격들.
그 글쓰기가 나아가는 지점은 개인의 더 큰 고독과 병증,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는, 아직 자신에게조차 밝혀 지지 않은 심연의 저 밑바닥이다. 글쓰기의 치유의 힘이나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순진하고도 단 순한 낙관이 아닐까. 말하지 못한, 말할 수 없는, 함구 되어진 내부의 내부, 그 내부의 닫힌 문틈 사이로 위험 을 무릅쓰고 기어이 들어가려고 하는 것,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내려가는 것. 글쓰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구원이라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고통과 상처를 직시하는 순간에 얻을 수 있는, 그 순간과 정면으로 맞부딪침에서 오는 벼락과도 같은 충돌의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상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바로 그 순 간의 불빛에 있는 것은 아닐까-p145
내게 있어 글쓰기는 언제나 알 수 없는 그 너머에 있다. 미지의 것, 완전히 써 내려가기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무엇, 그러나 이미 내 속에 있는 그 무엇. 관습화된 언어의 구조에서, 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일. 익숙한 언어의 규칙 혹은 질서를 내려놓고 하나의 패턴으로 굳어진 의식의 통제에서 벗어나 무의식의 입 구에 서 있는 일.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의미나 무의미 함을 발견하게 되는 일. 그 너머와 만나는 일. 그리하여 나는 아직 내가 쓰지 않은 글만을 편애한다. 쓰이지 않은 문장들만 편애한다. 이미 내가 만들어놓은 얼룩 같은 문장들을 디디고 또 다른 얼룩을 만들어내면서. 내 글쓰기가 언어의 황폐함의 극단만큼이나 언어의 숭고 함의 극단까지 나아가기를 바라면서. 황폐함과 숭고함 의 극단은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쓸모없는 아름다움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계속 실패하고 실수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 나는 여전히 허기를 느 끼면서 글을 쓰고 더 큰 허기를 느끼면서 문장을 마친 다. 그 어떤 구원도 없지만, 글을 쓸 때의, 몰입하는 순 간을 즐기면서. 깨어 있고자 하는, 명상의 한 방식으로 여기면서. 마침표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리 하여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결국 나에게로. 그리고 가능하다면 너에게로. -p153
첫댓글 저녁에 마음 좀 내려놓고 다시 댓 닮게요~~
글 쓰는 태도에 대한 글을 보니 작가가 천직이다 싶네요.
저도 좋아하는 책인데 반갑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