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탈출
역병이 창궐하여 운신을 억제당한 기간이 그 얼마이더냐. 하도 세월이라 좀의 농도가 깊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국내의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섬으로 탈출을 통해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 신선한 생기를 충전하려 한다. 생각해보면 애써 살아온 삶의 길이 고달프고 힘들었어도, 산에 올라 계곡을 건너고 망망한 바다에서 멍 때리고 나면 삶의 의지가 더 진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사람마다 그 답을 찾아 일상의 탈출로 산이 있고 물이 있고 또 걸을 수 있는 길에서 다리품을 팔아 삶의 의미를 애써 찾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부부가 찾아 나선 길이 강원도 동해시 두타산(頭陀山) 계곡이었다.
*두타산 베틀바위 산성길
두타산(1353m)은 강원도 삼척시와 동해시를 가로지른 이름난 산으로 이웃의 청옥산(1404m) 고적대(1354m)와 함께 백두대간 길에 있다. 베틀바위 산성길을 한국의 장가계(張家界)라 하고 있다. 이 길이 부분적으로 개방되었다가 지난 6월 10일에 미개방 두타산 협곡마천루길 2.7km 구간이 전면 개방되어 산성길 11.5km가 완성되었다.
등산로가 없던 때에 투타산 비경을 볼 오기(傲氣)로 등반을 감행하여 추락사고가 빈번했다고 한다. 산성길 전체가 열렸지만, 위험 구간은 곳곳에 있어 여간 주의를 요하지 않는다. 기왕의 관광명소로 거듭나려 한다면 조금 더 다듬고 고쳐야 할 지점과 구간이 있다.
산성길 탐방코스는 무릉계곡 관리사무소(출발)→삼공암→베틀바위→미륵바위→거북바위→12폭포 윗길→두타산성→석간수(石間水)→두타산 협곡 마천루(摩天樓)→박달계곡→쌍폭포·용추폭포·선녀탕→학소대(鶴巢臺)→삼화사(三和寺)→무릉반석→무릉계곡 관리사무소(도착) 총연장 약 11.5km로 신선이 놀았던 계곡이라 하여 무릉계곡이란다.
*베틀바위 전망대 구간(1.5km)
2021년 10월 27일 아내와 함께 서울역에서 동해행 7시 KTX가 9시 30분에 동해역을 들어섰다. KTX 차창 밖 만추(晩秋)를 보노라니 서울탈출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오는 동안 그놈의 역병으로 물 한 모금조차 마실 수도 없었다. 역 앞 생선구이는 값도 비싸고 정말 맛이 없었다. 택시로 산성길 초입 10시 50분이다. 이정표를 따라 숲길을 오르니 삼공암 전면에 동해안이 보이고 30분쯤 가파르게 오르니 장관이다. 우리 강토가 이렇게 아름답구나!
과연 한국의 장가계라고 할만하다. 병풍을 두른 듯한 기암괴석의 위용에 압도된다. 이곳에서 선녀들이 비단베를 짰다 하여 붙여진 베틀바위 지대다. 껍질이 유별나게 붉고 마디가 길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금강송과 늙은 회양목의 그윽한 향이 상큼하여 피로감을 덜어주었다.
*두타산성길 구간(2.7km)
두타(頭陀)는 ‘버리고, 씻고, 비운다’라는 인도어 Dhuta에서 유래된 말이라 한다. 이 산에 오신 모두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정신을 배워 갔으면 한다. 베틀바위 전망대에서 더 넓은 무릉(武陵)계곡이 조망된다. 산이 깊으니 골이 깊을 수밖에, 산과 골은 인간의 불평을 품어준다. 객들이 산길이 험하다며 불평불만을 토해내지만, 소리 없이 받아주는 산이 있어 계속 산을 오르는지 모른다. 누가 그랬다. “산이 있어 산에 간다.”라고….
베틀바위 전망대를 돌아 나오니 자비한 부처님 형상을 한 미륵바위가 우뚝하다. 두타산성은 태종 14년(1414년)에 쌓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이 왜적과 맞서 전투를 했던 곳이라 한다. 백곰바위와 바위틈 외로운 소나무의 질긴 생명력에 놀랄 뿐이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가을이 묻어난다. 마음이 하자는 대로 몸을 산에 맡긴다. 평일인데도 탐방객이 시끌벅적이다. 완만한 숲길이 12폭포 윗길까지 이어진다. 12폭포 천 길 낭떠러지 아래가 지옥인가 천당인가를 가늠할 수 없다. 벼랑 끝에 매달린 거북바위는 금시 아래로 뛸 자세다. 비경이 가슴을 저민다.
←<두타산의 웅장한 베틀바위 전경>
*산협곡 마천루길 구간(4.7km)
가장 늦게 개방한 길이라 탐방객 수가 줄어 한적하다. 바위중턱에 나무계단을 설치한 잔도가 이색적이다. 사람의 손길을 거부했던 거대한 반석길이 바위에 붙어 골짜기로 이어진다. 돌너덜과 벼랑을 타고 오금을 저리며 걸었더니 높은 산 바위 아래 찰랑거리는 물을 품은 석간수(石間水) 암굴 앞이다.
거대한 바위틈을 지나니 해발 470m 협곡마천루다. 빌딩 숲처럼 암릉과 기암이 절경을 이루고 발바닥바위 고릴라바위가 요상하다. 길목에 거대한 바위를 받친 작은 나뭇가지들이 앙증맞고 재미있다. 작은 나뭇가지가 헤라클레스보다 힘이 더 센듯하다. 길목에서 폭포수가 언뜻언뜻 보인다. 점점 소리가 크게 들리는 방향의 작은 다리 왼편으로 쌍폭포와 용추폭포가 자리한다.
쌍폭포는 두타산 계곡의 물이 모여 폭포를, 청옥산계곡 물이 모여 또 하나의 폭포로 쌍을 이루고 있다. 쌍폭포 위쪽에 용추(龍湫)폭포가 우렁찬 소리를 토해낸다. 폭포를 지나 선녀탕 아래 좋은 물가에서 우리 부부는 탁족(濯足)으로 지친 피로를 풀었다. 손이 닿을 돌 틈 사이에서 다람쥐가 시샘하고 있다.
*마지막 구간 용오름길(2.6km)
상쾌한 발걸음으로 학이 둥지를 털었다는 학소대를 지나 자장율사가 642년에 창건하기 시작했다는 삼화사(三和寺)와 사찰 일주문이 일품이다. 일주문 옆 무릉반석에는 지식인들의 허세(虛勢)요, 과시욕(誇示慾)의 흔적인 암각이 즐비하다. 이승휴 양사언 김시습도 끼어있었다.
←<두타산 협곡마천루 아래 바위벽 잔도>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 신선이 노니는 이곳 무릉, 반석 위로 물이 흐르는 중대계곡,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두타산이 여기 있도다” 양사언의 초서(草書) 암각이 선명하다.
이번 탐방길에는 솔숲 바람 소리, 계곡 물소리, 산새 지저귐 소리 그리고 아내가 들려준 ‘서로 그리워합시다’라는 말에 고맙기도 하고 감사하다.
오후 4시 20분 하산, 점심 겸 저녁으로 산채 정식과 막걸리 한 사발로 서로에게 감사를 표했다. 저녁 7시 KTX, 서울역 밤 9시 30분, 집에 오니 밤 10시 20분이다. 하루 참 좋았다. 그리고 감사하며 읊는다.
산길에서 배우다.
신선이 머문다는 동해 끝 베틀계곡
頭陀靑玉 비경은 바위벽에 그려지고
산객이 뱉어낸 風塵 산령품에 기어든다.
산바람에 깎인 반석에 끼인 솔나무 버팀
솔가지 바람이 불러낸 낙엽의 그리움
우리네 삶 이만하면 족하지 뭘 바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