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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07년 10월 29일 6시 30분 장소 : 본교 2학년 4반 교실 대상 : 통합논술에 관심있는 광문고 학생 강사 : 오형진 교수님
다음 자료를 미리 읽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오세요. -진중권, 앙겔루스 노부스
창조적 개새끼 하지만 정작 저 장면에 속하면서도 저기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따로 있다. 계단 위에 널부러져 있는 저 괴상한 인물. 바로 디오게네스다. 사실 이 그림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엇갈리는 손의 제스처가 아니다. 외려 이 두 고매한 철학자와 개처럼 계단에 널부러져 있는 저 기인 사이의 대립이다. 라파엘은 이 작품으로써 철학과 자연과학의 조화로운 발전을 얘기하려 했다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디오게네스는 이 조화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조화? 당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이미 지식권력이 되어 있었다. 디오게네스에게 중요한 것은 이들과의 조화가 아니었다. 외려 이들과의 창조적 불화였다. 그리하여 권력으로 화한 이 고매하고 영원한 진리에 그는 마구 냉소와 독설을 퍼부어댔다. 디오게네스의 철학을 흔히 견유주의라 부른다. 글자 안에 들어 있는 ‘개’라는 말은 디오게네스가 자기를 ‘개’라 부른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느 날 알렉산더가 그를 찾아와 말하기를 “나는 알렉산더, 대왕이다.” 디오게네스 왈, “나는 디오게네스, 개다.” 왜 자기를 ‘개’라 부르느냐고 묻자, “내게 뭔가를 주는 자는 꼬리를 치며 반기고, 아무 것도 주지 않는 자에게는 시끄럽게 짖어대고, 내게 나쁜 짓을 하는 자는 물어버리기 때문이지.” 정말로 그는 개였다. 일정한 거처 없이 통 속에서 살며 주인 잃은 개처럼 남의 것을 얻어먹으며 살았으니까. 어느 날 그가 아고라 광장에서 밥을 먹고 있을 때 사람들이 그를 에워쌌다. 개처럼 공공장소에서 밥을 먹는 그를 향해 사람들은 “개”라고 욕을 퍼부었다. 그러자 대꾸하기를 “식탁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너희야말로 개다.” 어느 날 누군가 그에게 마치 개에게 던져 주듯 고깃덩어리를 던져 주고 갔다. 사내가 사라지자 디오게네스는 개처럼 거기에 오줌을 쌌다. 그는 정말 개새끼였다. 철학을 배우겠다고 찾아 온 젊은이에게 그는 소금에 절인 생선을 한 마리 주며 그걸 들고 자기를 따라 다니라고 말했다. 젊은이는 생선을 슬그머니 땅에 내려놓고 도망쳤다. 우연히 길거리에서 그를 다시 만난 디오게네스, 빙그레 웃으며 “겨우 생선 한 마리 때문에 우정이 깨지다니” 그에게 친구가 뭐냐고 물으면, “돈주머니 같은 거라고 할까? 가득 차 있으면 달고 다니다가, 텅비면 내던져 버리는” 언젠가 그가 플라톤에게 포도주와 말린 무화과를 좀 달라고 부탁했다. 통이 큰 플라톤은 부탁 받은 물건을 항아리에 차고 넘치도록 채워 그에게 보냈다. 그러자 얻어먹는 주제에 한다는 소리, “너는 ‘ 2+2는 얼마냐’고 물으면 20이라고 대답하냐?” 불편한 개 ‘견유주의.’ 사전을 보니 이렇게 나와 있다. ‘신랄한 조소, 야비하도록 솔직함, 철면피, 기성도덕이나 관습에 경멸적 태도.’ 물론 이런 태도를 갖고 원만한 사회생활을 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저 그림 속에 들어 있으면서도 거기에 속하지 않듯이. 그는 사회 안에서 살면서 동시에 사회 밖에서 살아야 했던 것이다. 몸에다 멍석과 식기를 달고 다니며, 신성한 제우스 신전에 앉아 밥을 먹으며, “이 집은 아테네 시민이 특별히 나를 위해 지어준 것 같애” 그는 개였다. 굳이 어떤 종자냐고 물으면, “사람들이 칭찬을 하나 사냥을 갈 때는 불편하다고 데려가지 않는 몰로스 종. 너희들은 나와 함께 살 수가 없지. 그 불편함이 무서워서.” 개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재미에 살았다. 어느 날 올림픽 경기를 보고 나오는 길에 누군가 ‘사람들이 많았냐’고 묻자 “떼거지는 있고 사람은 없더군.” 목욕탕에서 나오는 길에 “그 안에 사람이 얼마나 있나”고 묻자, “사람은 없고 천민들만 있던데.” 광장에서 ‘어이, 사람들’이라 소리치자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여 그에게 우르르 몰려 왔다. 그러자 이들을 막대기로 마구 내려치면서 “난 사람을 불렀지, 속물을 부른 게 아니라니까.” 벌건 대낮에 손에 램프를 들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그에게 뭐하냐고 묻자, “인간을 찾고 있다네.” 옷을 훔치려는 도둑을 향해 “여기서 뭐하는 거야? 전쟁터의 시체들을 털려고?” 한 마디로 동료인간들이 시체라는 얘기. 나무에 교수형을 당한 여인들의 시체를 바라보면서 “모든 나무가 저런 열매를 맺었으면” 인간 혐오증에 가까운 고약한 유머로 사람들의 약을 올리는 재미에 살다가, 결국 고향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시노페의 시민들이 그에게 추방형을 내렸다는 말을 듣고 태연하게 대꾸하기를 ‘그럼 나는 그대들에게 체류형을 내리노라.“ 누군가 자기의 집의 문에 “나쁜 놈 출입금지”라 써 붙이자, 그럼 “집주인은 그 안에 어떻게 들어가려고?” 누군가 성수(聖水)를 뿌리자 “이 돌대가리야, 성수가 너의 논리적 오류나 도덕적 오류를 고쳐줄까 봐?” 꿈의 해몽에 골몰하는 자들을 향해서는 “깨의 있는 상태의 일에는 관심이 없고, 기껏 꿈속의 환영에만 골몰하다니.” 누군가 그에게 “대체 너는 신을 믿고 있느냐 물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너 혹시 빨갱이 아니냐?”는 질문. 대꾸하기를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지금 신의 뜻을 거스리고 있음을 내 어떻게 알겠느뇨?”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언젠가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어 필립 대왕 앞에 끌려나갔다. 대왕이 “그대는 누구뇨?”라고 묻자, “그대가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의 관찰자.” 이 말 한 마디로 그는 석방이 된다. 항해를 하다가 해적선에 걸려 크레타의 노예시장에 팔려 나간 적도 있었다. 노예 상인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 묻자 , 태연히 “사람을 다스리는 일”이라 대답했다. 그리고 좌중을 둘러 보며 “혹시 이 중에 주인을 살 사람이 있는지 물어 보시오.” 그러더니 한 사람을 가리키며 “나를 이 자에게 파시오. 이 자에게는 주인이 필요한 것 같소.” 노예를 사러 왔다가 졸지에 주인을 사게 된 크세니아데스. 그에게 디오게네스는 자기 말에 따를 것을 요구했다. 주객이 전도된 이 황당한 요구에 크세니아데스가 “강이 근원을 향해 거꾸로 흐르는 격”이라는 옛 속담을 인용하자, 디오게네스는 그를 나무랐다. “병에 걸려 의사를 샀을 때에도 너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또 ‘강이 거꾸로 흐른다’는 엉뚱한 소리를 할 거냐? 이렇게 그의 집에 들어온 디오게네스는 아이들의 교육은 물론이고 집안의 습속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크세니아데스는 후에 ”훌륭한 정신이 우리 집에 들어 왔다“고 말했다. 노예로 팔려가는 주제에 이렇게 당당할 수 있었을까? 그가 노예 시장에 상품으로 전시되었을 때,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의 몸값을 치르고 그를 다시 자유민으로 만들려고 했다 한다. 그는 이들의 행위를 “순진하다”고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사자는 사육사의 노예가 아니다. 진리는 그 반대다.” 그리하여 그는 자유의지로 기꺼이 “사자”로 팔려갈 수 있었다. 그는 이를 수치로 생각하지 않았다. 왜? 진정한 노예란 따로 있기 마련이다. “노예가 주인의 시종이라면 저속한 사람은 자기 욕망의 시종.” 왕과 개 그는 쓸데없는 욕심을 버리고 자연에 적합한 것만 취하면, 인간은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쾌락의 경멸이 외려 가장 큰 쾌락을 가져다준다.”는 이 모순적 깨달음을, 그는 생쥐에게서 배웠다. 아무 데서나 자고, 어두움도 싫어하지 않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어 하지 않는 생쥐를 보고, 자기의 실존적 상황에서 탈출구를 찾았다. 그리하여 이 날부터 그는 외투를 두 배로 늘려 입고 다니며 이불을 삼았고, 가재도구가 담긴 꼴망태를 메고 다녔다. 어느 날 한 소년이 두 손에 물을 담아 마시는 것을 보고, 그 꼴망태 속의 물잔마저 집어던져 버렸다. “분수를 안다는 점에서 저 꼬마가 나를 능가하였노라.” 기성도덕과 관습을 우습게보았던 디오게네스 그의 태도가 알렉산더 대왕에게 짜증이 나게 했던 모양이다. 모든 이의 부러움을 받는 자기의 부와 권력. 그런데 그런 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 하나 존재한다니, 얼마나 자존심 상하겠는가? 그래서 그 유명한 사건이 벌어졌다. 어느 날 대왕이 통 속에 들어 있는 개를 찾아가 말한다. “한 가지 소원을 들어 줄 테니, 말해 보라.” “좀 비켜 줘. 햇빛 좀 쬐게.” 이 말 한 마디에 대왕이 일생의 목표로 추구해 온 것이 졸지에 허망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얼마나 허탈했겠는가? ‘부’가 통하지 않자 ‘권력’을 가지고 은근히 협박을 하기도 했다. “너는 내가 무섭지 않냐?” 좋은 질문. 만약 ‘무섭다’고 하면, 천하의 디오게네스는 체면을 잃게 되고, 반면 ‘무섭지 않다’고 하면 대왕에 대한 모독이 되니까. 이 곤란한 상황을 디오게네스는 교묘하게 헤쳐나간다. 대왕에게 디오게네스가 되묻는다. “네가 뭔데? 뭔가 좋은 것, 아니면 나쁜 것?” 대왕이 생각하기에 당연히 자기는 선인이다. “물론 좋은 것이지.” 그러자 디오게네스, “세상에, 좋은 것을 왜 무서워 해?” 이로써 대왕의 군위는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만다. 대왕과 개. 대왕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 개는 그 어느 것도 갖기를 거부했다. 대왕은 다른 이에게 권력을 행사한다. 개는 권력을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휘두른다. 그러나 부와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대왕의 위력도 개에게는 아무 감명을 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알렉산더는 후에 말하기를 “내가 알렉산더만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 대왕이 되고 싶지 않은 개. 그러나 개가 되고 싶은 대왕. 여기서 우리는 대왕의 것보다 더 컸던 개의 ‘영혼의 크기’를 볼 수 있다. 우연과 필연 그가 철학을 하는 방식 역시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는 학파도 세우지 않고, 후계자를 남기지도 않았고, 변변히 읽을 만한 글도 남기지 않고, 그럴싸한 이론의 체계도 세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기행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을 비웃어 버리고, 이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기존의 가치관을 한 번 의심해 보게 만들 뿐이었다. 하긴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때로는 진지한 숙고보다 횡경막의 발작이 우리에게 더 많은 지혜를 주는 법”이다. 누군가 디오게네스를 빗대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철학을 한다고 비꼬자, 그는 “내가 지(知)를 추구한다면, 그게 곧 철학”이라 대꾸했다. 누군가 “사람들은 왜 거지에겐 돈을 주는데 철학자에게는 돈을 주지 않는가?”하고 은근히 철학자를 거지에 빗대어 그를 모욕하자,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건 사람들이 언젠가 자신이 마비되거나 눈이 멀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반면, 철학자가 될 가능성은 없다고 믿기 때문이지.” 그가 논증을 하는 방식 역시 예술적이다. 그는 결코 쓸데없이 복잡한 증명이나 추론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고상한 논리를 단 한 수에 날려버리는 독설, 말놀이, 행위예술을 선호한다. 가령 언젠가 플라톤이 “인간이란 깃털이 없이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동물”이라는 정의를 내려 청중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 자리에 나타난 디오게네스, 깃털 뽑은 닭을 들이대며 외치기를 “여기에 플라톤이 말하는 인간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랴부랴 그 정의에 한 가지 규정을 더 첨가해야 했다. “넓은 발톱을 가진.” 누군가가 그의 앞에서 ‘운동’을 부정했다.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것이 움직이는 듯이 보이나 실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제논의 역리?)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폴짝폴짝 뛰며 그 말을 한 자의 주위를 뱅뱅 돌았다 한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데에 정신을 팔려 땅의 구덩이에 빠진 사람에게는 ‘제 발 밑도 모르는 주제에 하늘을 연구하냐?’며 비꼬았다. 언젠가 플라톤이 ‘이데아론’을 설파하며 책상성과 물잔성에 대해 얘기하자, “헤이, 플라톤. 내 눈에 책상과 물잔은 보이지만, 책상성과 물잔성은 전혀 안 보이는데?” 언뜻 보면 장난처럼 보이지만, 이 장난 속엔 실은 적확한 논증이 들어 있다. 가령 ‘운동’을 부정하며 세계를 고정시키려는 보수주의에 대한 논박, 현실을 보지 못하고 눈을 천상으로 돌리는 형이상학에 대한 반박, 개별적 사물의 다양성을 개념의 서랍에 집어 넣어버리는 관념론적 폭력에 대한 반박.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연적인 것 속에서 필연적인 것을 찾아내려 했다면, 디오게네스에게 중요한 건 우연성 그 자체였다. ‘너의 철학이 어떤 것이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적어도 나는 모든 우연에 준비가 되어 있지.” 영원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구체적 상황 속에서 돌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우연에 맞서는 재치와 기지, 그리고 용기. “우연에는 용기를.” 그는 결코 조화를 바라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그저 확립된 모든 권위와의 창조적 불화였다. 개처럼 물어 뜯는 ‘한 줌의 부도덕’을 가지고 이미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은 낡은 권위와 관습과 도덕에 균열을 내고자 했다. 그 결과 지성계에서는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누군가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고향에서 추방을 당했냐?’고 그를 비난하자, “이 돌대가리, 바로 그걸 통해서 난 철학을 시작했는데.” 그는 자기를 모든 것에 대립시키고,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추방당함으로써 철학을 시작했다. 다른 철학자들이 ‘본질’, ‘불변자’, ‘영원한 진리’를 위해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것을 지워버리는 동일성의 폭력을 저지를 때, 그는 ‘차이’의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미친 소크라테스 “미친 소크라테스” 플라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맞다. 디오게네스 역시 위대한 스승 소크라테스다. 하지만 “미친”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가 겸손함의 미덕과 합리적 논증으로 사람을 설득시켰다면, 디오게네스는 오만함의 악덕과 가시 돋힌 행위예술로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소크라테스가 영원한 진리의 체계를 구축하려 했다면, 디오게네스는 결코 거기에 포섭되지 않는 구체적 현실 속에서 우연의 놀이를 즐겼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하는 데에 정신적 수단을 사용했다면, 디오게네스는 철학을 위해 몸을 사용했다. 그의 수단은 유리처럼 맑고 투명한 논리가 아니었다. 뭔가 혼탁하고 끈적끈적한 것이었다. “미친 소크라테스.” 다른 말로 하면 광기의 지혜. 예로부터 광기는 예술가의 기질로 알려져 왔다. 광대는 광인, 그 광기의 힘으로 진리를 말하는 예술가. 디오게네스는 이런 의미에서 최초의 광대였다. 요즘의 표현을 빌면 최초의 행위예술가였다. 그가 동료인간들에게 독설을 퍼부을 때, 정말로 인간을 혐오했다고 보면 착각이다. 그의 반사회적 행동과 그 가시 돋힌 공격성에 쓸데없이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된다. 우리는 그의 행위를 일종의 예술로, 즉 퍼포먼스로 보아야 한다. 그의 건방짐을 비난하는 대신, 위선적 권위를 단 한 칼에 날려 버리는, 그 퍼포먼스의 미학성에 주목해야 한다. “미친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지혜가 합리적 이성이라면, 디오게네스의 그것은 냉소적 이성이다. 소크라테스가 입으로 논증을 했다면, 디오게네스는 몸으로 논증을 했다. 그는 이론과 실천의 구별을 몰랐다. 그리하여 그의 이론을 우리는 그가 저지른 행동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칸트는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을 나누고 미학이 이 두 왕국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디오게네스의 몸속에서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은 애초에 하나였고, 이 하는 동시에 미학이었다. 그의 기행은 그가 자기의 존재를 예술적으로 양식화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이 우리의 창조적 개새끼가 실존하던 방식, 그의 존재미학이다. “미친 소크라테스.” 다시 맨처음 그림으로. 중앙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서 있었다. 두 손의 엇갈리는 방향은 플라톤의 이상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주의의 대립을 의미한다. 이 둘의 조화로운 대립이 이 그림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림의 소실점도 두 사람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그에 비하면 디오게네스는 눈에 띄지도 않는다. 이제까지의 서구의 철학사는 이런 식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립이 철학사의 두 기둥이라고 이해되어 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서구의 이성중심주의의 상징. 하지만 진정한 대립은 두 소크라테스의 후계자들과 계단에 널부러져 있는 저 “미친 소크라테스” 사이에 있었다. 논증적 이성 대 냉소적 이성. 정신․ 신성․ 보편자․ 필연성 대 광기․ 육체․ 동물성․ 개별자․ 우연성 자유로운 세계시민 누군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뭐냐고 묻자, 그는 대답했다. “말의 자유!” 누군가 출신을 묻자 “나는 세계시민이다.” 이 세계시민에게 “원시부족들이 보여주듯이 인간의 고기를 먹는 것도 신성모독”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것은 신에게 속하며, 신은 현자의 친구이며, 친구는 모든 것을 나눠 갖는다.”고 믿었다. 또 “가치있는 것은 값이 싸고, 가치 없는 것은 값이 많이 나간다”고 투덜거렸다. “동상은 3천 드라크멘이나 하는데, 밀가루 한 부대는 동전 두 개의 값밖에 안 되는” 현상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그는 맑스가 얘기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대립을 얘기하고 있는 거다. 그는 “결혼이란 쓸데없는 것이며, 따라서 여자들도 자기들의 공동체를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남자들은 여자들과 상호동의 하에 교제를 해야 하며” 이를 위해 “어린이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유로부터 자유로웠을 뿐 아니라 또한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는 귀족이나 작위, 훈장 따위의 장난을 조롱하며 “유일하게 옳은 법은 우주”라고 말했다. 누군가 알렉산더 대왕의 녹을 먹게 되었다고 자랑하자, “알렉산더 눈치를 보아가면서 아침을 먹거나 점심을 먹어야 하는 불쌍한 돼지”라 말해 주었다. 그는 권력이란 남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에게 행사해야 하는 어떤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노예로 팔려 가는 순간에 조차 그는 당당하게 자신이 진정한 의미의 주인임을 입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인이 된 노예. 어차피 자본주의하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 노동력을 팔아야 먹고 살 수 있는 자본의 노예. 이 노예들이 주인이 되는 길은 없을까? 앞에서 나는 숭고에 대해 얘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날의 대중 민주주의 시대에, 독배를 마시는 소크라테스가 연출하던 비장한 숭고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평민 디오게네스의 웃는 진리는? 그는 우리에게 골계미(희극성)와 결합된 가벼운 숭고도 있을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희극적 숭고함으로써 제 몸을 팔아 사는 노예들 역시 자기 주권을 가진 진정한 의미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디오게네스의 유물론. 그것은 학설이 아니라 존재미학이었다. 그는 관념론에 반대하여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거기에 반대하여 ‘살았다’. 후에 플라톤에 반역을 한 니체가 하게 될 일을, 2천년 전에 먼저 했던 사람. 최초의 자유사상가, 최초의 세계시민, 최초의 변증법적 유물론자, 최초의 사회주의자, 최초의 실존주의자, 최초의 행위 예술가, 대왕이 부러워한 개새끼, 디오게네스. 위대한 영혼, 메갈로프쉬키아. 문 앞의 두 사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천상의 이데아를 지향했던 플라톤의 손가락은 하늘을 향하고, 현실의 문제를 놓고 철학을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손바닥은 땅을 향한다. 이들의 손엔 책이 들려 있다. 잘 안보이지만 플라톤의 손에 든 책은 『티마이오스』,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은 『윤리학』이다. 하나는 세계의 본질을 논하는 형이상학, 다른 하나는 인간의 지혜로운 처신을 논하는 책. 예술과 신화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합리적인 철학의 시대를 열었던 이 두 철학자.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철학은 저 엇갈리는 손의 방향처럼 ‘하늘’과 ‘땅’의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자, 이제 화면 오른쪽 구석을 보라. 늙은 노인이 쭈그리고 앉아 책을 보고 있다. 누구일까? 피타고라스 정리로 유명한 수학자 피타고라스다. 그 반대편 구석에서는 한 사내가 컴퍼스를 들고 바닥에 도형을 그리고 있다. 목욕을 하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 ‘유레카!’라고 외쳤다는 과학자 아르키메데스다. 그러고 보면 전성기 그리스의 시대정신이 여기에 모두 모여 있는 셈이다. 수학․ 기하학․ 자연과학․ 형이상학. 실제로 이 그림으로써 라파엘은 철학과 자연과학의 조화로운 발전을 얘기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림 속의 플라톤의 얼굴, 어디서 본 듯하다. 맞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또 그림 속의 아르키메데스. 그는 브라만테를 닮았다. 이렇게 라파엘은 저 그림 안에 자기의 동시대인들을 배치했다. 고대의 부활을 꿈꾸며 당시의 이탈리아와 고대 그리스를 서로 대응시키려 했던 것이리라. 물론 자신의 모습을 집어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디에? 찾아보라. 그림 속에서 화가의 자화상을 찾아내는 방법. 등장인물들 중에 그림의 관찰자와 눈이 마주치는 자를 찾는 거다. 자화상을 그리려면 거울을 이용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눈 맞춤이 이어지는 것이리라. 화면 밖으로 던지는 이 시선을 통해 화가는 그림에 속하면서 동시에 거기서 벗어난다. 그는 어디 있는가? 찾아보라. 피타고라스의 뒤로 기념비처럼 서 있는 인물? 하지만 그 사람은 여자이지 않은가? 내가 아는 한 라파엘은 남자였다. 다시 찾아보라. 아마 힘들게다. 화면 오른쪽 기둥 옆에서 두 번째 인물, 하얀 옷을 입은 남자의 뒤로 고개를 빼꼼 내민 남자, 그가 바로 라파엘이다. 저 그림 속엔 이렇게 화면에 속하면서 동시에 속하지 않는 인물이 둘 있다. 하나는 저 여인, 또 하나는 화가 자신. 아마도 저 여인은 화가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졌던 사람이었을 게다. -진중권, 앙겔루스 노부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