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사람 조덕삼 장로
조덕삼(趙德三 1867~1919) 장로와 이자익(李自益 1882-1959) 목사 이야기는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장로만큼이나 대한민국 기독교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신앙의 표상들이다.조만식 장로가 오산학교 제자 주기철을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죽도록 충성하여 섬겼다면 전라북도 김제의 금산교회 조덕삼 장로는 자기 집 머슴 이자익을 목사로 수학케 하고 담임목사로 평생을 섬겼던 믿음의 사람이다.
조덕삼 장로는 평안도 출신의 할아버지 때부터 중국의 봉황성과 고려문을 드나들면서 무역을 하는 거상 집안으로 금광이 있는 김제에 와서 금광업에 투자하면서 금산의 땅을 거의 다 매입하고, 금산지역의 최고의 유지가 되었다. 당시에 금산에서는 조덕삼의 땅을 밟고 다니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조덕삼의 논과 밭을 빌어서 먹고 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904년 봄, 미국인 선교사 데이트(한국 이름은 최의덕)가 말의 안장을 고치기 위하여 마방에 들리게 되었고, 그 때 마방의 주인이었던 조덕삼은 데이트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영접하고 자기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보게 하였다.
오늘날의 전라북도 김제 금산교회(전북문화재 136호)의 시작점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가 있는 금산사(600년에 창건)가 있는 사교(邪敎)의 고장이던 금산에서 예수를 믿고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조덕삼이 교회를 나가니 조덕삼의 논과 밭을 경작해서 먹고 살던 사람들도 조덕삼을 따라 모두 다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모이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자 조덕삼은 자기 땅에 예배당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했다.
지금도 보존되어 있는 옛 금산교회는 ‘ㄱ’자 교회로 유명하다.
옛날에 남녀가 유별할 때에 예배당을 ‘ㄱ’자 형태로 지어서 한쪽은 남자가, 다른 쪽은 여자가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도 서로의 얼굴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중앙에 흰 천으로 가려두었다.
이즈음에 조덕삼의 머슴이었던 이자익이란 자도 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사람이 총명하고 신실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무학의 이자익은 어깨너머로 배운 천자문을 줄줄 외웠다. 그 모습을 지켜본 조덕삼은 비록 자신이 부리는 머슴이지만 사람이 너무 총명하고 신실하여 아들(조영호)과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신앙생활도 같이 했다.
조덕삼과 이자익이 함께 믿음을 키운지 3년이 지난 1907년 금산교회는 세례교인이 30명이 넘게 되자 장로 투표를 하게 되었는데, 대상자는 조덕삼과 이자익이였다. 결과는 놀랍게도 조덕삼은 떨어지고 머슴 이자익이 장로로 피택이 된 것이다.
술렁이는 성도들을 향해 조덕삼이 겸손히 말했다.
"우리 금산교회 성도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 영수(장로보다 낮은 직분으로 교회의 살림과 행정, 설교를 맡아서 함)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다”고 선언하였다.
두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집에서는 주인과 머슴으로 교회에서는 평신도와 장로의 관계로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감당하면서 살아갔습니다. 조덕삼은 그다음 해에 금산교회의 2대 장로로 취임하게 되었고, 자기 집 머슴인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에 보내 신학공부를 하는 동안 필요한 일체의 경비를 담당했다.
이자익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목사를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평생을 금산교회와 이자익 목사를 섬김으로 기독교 역사에 섬김의 표본이 되었다.
이자익 목사는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목회를 하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제13대 총회장으로 당선되고 총회장을 세 번이나 지냈다. 현재 3대에 걸쳐 목회를 하고 있다. 이러한 입지전적인 사람을 키워낸 인물이 바로 조덕삼 장로였다.
하나님은 의인의 자손들에게 복을 주신다.
조덕삼 장로의 아들은 조영호 장로이고, 조영호 장로의 아들 조세형 장로는 할아버지를 이어 삼대 째 금산교회 장로가 되었고, 국회의원과 일본 대사를 역임하였다. 이자익 목사의 손자 이규석은 목사가 되어 교회를 섬기고 있고, 이규완 장로는 독일 칼수르해 대학교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유성의 화학연구단지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고, 2004년부터는 중국 연변에 있는 연변과학기술대학교 초빙교수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2005년 4월 19일에 조덕삼 장로의 후손들과 이자익 목사의 후손들이 대전신학대학교에서 이자익 목사를 기리는 출판행사 자리를 마련한 자리에서 이자익 목사의 손자 이규완 장로는 조덕삼 장로의 손자인 조세형 장로에게“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 만났습니다. 만약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못 만났다면 우리들도 없고, 우리 할아버지도 안계셨을 것입니다.”라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심은대로 거두고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잠37:25)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시37:3)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