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꼭 하고 싶었던 이 길(화가)을 한눈 팔지 않고 걸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물주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9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화가로서 한 길을 걸어온 하반영 화백. 졸수(90세)를 앞둔 지금도 그의 그림인생은 멈추지
않는다. 아니, 아직 미완성이라고 노 화백은 겸손하게 말한다. 7살때 서당에서 서예를 배우면서 쌓아 온 화력이지만 최종 지향점인 이른바 ‘마하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 불교에서 말하는 영겁의 세계이자 현실속의 기나긴 여정을 뜻하는 마하의 세계를 이뤄내기
전까지 그의 작업은 마침표가 없다.
“어린 나이에 단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김씨 집안을 뛰쳐 나와 ‘고아 아닌 고아’로 살아
왔다. 성을 바꾸고 조상을 버리면서까지 이 길(화가)을 고집했다. 후회는 없다. 고생도 숱하게 했지만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이 있어 더욱
보람있었다”
스승·선배는 후학이나 후배들에게 무한한 발전을 가져다 줘야 한다는게 나의 생각이다. 이는 나의 애제자인
탁무송(전업작가)이나 강정진(예원예술대 회화과 교수), 장효순(전업작가) 등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다. 탁무송은 지난 70년대 중반부터 나와 함께
했다. 당시 그는 그림보다는 술을 더 좋아했고 불량한 친구들과도 자주 어울렸었다. 이런 그에게 어느날 내가 만든 일요화가회에 회원으로 가입할
것을 조언했다. 나의 제안을 혼쾌히 받아 들인 그는 그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치열한 노력끝에 그는 국전과 도전에서 수상하게 됐다. 이후 그는
예전에 어울리던 뒷골목 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건실한 화가로서 탈바꿈했다.
“‘그림으로써 인간 하나를 만들었구나’라는 생각에
감격스러웠다. 예술이라는게 이처럼 위대하다는 것을 이때 깨달았다. 예술이나 사상은 어떻게 가르치냐에 따라 상대방을 얼마든지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지난 30여년전 중학생 시절부터 나와 인연이 닿은 강정진도 마찬가지. 당시 그는 그림에 상당한
소질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한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그래서 내가 직접 그의 형과 만나 싸우면서까지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게 했다. 심지어는 집안의 반대때문에 그림을 포기하려 한 그를 때리면서까지 독려했다. 따라서 그는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고 아끼는 제자이다.
여류화가인 장효순도 서양화뿐 아니라 서예·사군자·수묵화 등 여러 분야에 참 열심인 제자다. 실력은 출중하지만 대학교를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부 미술단체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노
화백의 그림인생은 아직 현재 진행형’
하반영 화백은 “인생에서 겪는 고생은 하나의 즐거운 교육이자 가르침이고
낙(樂)이다. 고생이 있어야 인생의 즐거움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며 “특히 그림 그리는 사람은 더러운 빛깔을 칠할 줄 알아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을 칠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예술(그림)은 남의 것이 아니다. 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남보다 더 잘
그리려고 욕심내거나 무리하면 빗나갈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작가들보다 그림을 못 그리더라도 차분히 자신의 혼과 사상, 철학을 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신의 것을 담으며 꾸준히 그리는 사람이 바로 훌륭한 화가이다.”
지난 80여년 동안 이처럼 올곧은 예술관을 지켜온 그는
현재 관객과의 또다른 만남을 준비중이다. 다음달 1일부터 내년 2월까지 석달간 군산 철새전망대 전시실에서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며 따르는 일본
마찌다 도오루 작가와 함께 2인전을 연다. 이 전시에서 그는 ‘생성’ 연작 등 ‘마하의 세계’가 담긴 작품 20여점을 선보인다. 작품 판매비
일부는 군산시를 통해 어려운 형편에 있는 이웃들에게 전달될 예정이다.
이처럼 오래 전부터 결식아동이나 유공자 자녀 등을 묵묵히
도와온 그는 내년에도 그림을 통한 사랑의 마음을 계속 전달할 계획이다. 내년 2월초 충남 서천을 시작으로 추석과 연말에 남원의 한 교회·원불교
단체와 함께 어려운 이웃들을 돕기 위한 사랑의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지난 80여년 동안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눈감는 그
날까지 계속 그림을 그릴 것이다. 기약이나 예상할 수도 없는 그 세계(마하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고 갈 길이
멀다.”
하반영 화백은 지난 3월말 오랜만에 전주에서 개인전을 열었었다. 당시 전시는 미수를 맞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이른바 ‘미수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변에서 미수전이라는데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하는 것을 달갑지 않아 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지난 세월 동안 늘 그렇게 해오던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을 단지 선보이는 자리이기 때문이다”며 “굳이 변한게 있다면 한
인간이자 예술가로서 살고 있는 나 자신의 사상성과 철학이 약간 전진했을 뿐이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이처럼 관념을 탈피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그는 그림 입문 당시 사실적인 구상계열로 시작해 중년에 이르러 자신의 사상·철학이 담긴 초현실주의적인 화풍으로 변했다.
70대였던 지난 10년 전부터는 지난 날에 창조한 화력을 바탕으로 미래의 기원이 담긴 추상계열로 정착했다.
“구상계열과
초현실주의를 착실히 거쳐야만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과 혼이 담긴 진정한 추상화를 그릴 수 있다”는 작가는 10년 주기로 화풍이 변했다. 이는
자신이 그림에 남기는 사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게 그의 설명. 20∼40대에는 영어로 ‘반영’을 썼지만 50대에 이르러 “내 것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한글로 ‘반영’을 쓰기 시작했다. 60대에 다시 ‘영’으로 바뀌었다가 현재는 흘림체로 ‘영’이라는 사인을 남기고 있다. 이
사인을 통해 자신의 지난 그림인생의 족적을 쉽게 되짚어볼 수 있게 하자는 노 작가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그가 20여년전 유럽 각국을 돌며
화가로서의 감성과 견문을 넓혔던 그때로 돌아가 보자.
△“유럽에서 화가로서 내가 진정 가야 할
길을 깨달았다”
지난 1979년부터 이탈리아 나폴리를 비롯해 프랑스, 스페인, 베네치아, 네덜란드, 스위스, 덴마크 등
유럽으로 스케치 여행을 떠났다. 이탈리아 폼페이 유적에서는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고 발달한 로마문화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외설적인 그들의 문화에서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 맞구나’라고 실감했다. 베네치아에서는 너무나 아름다운 주변 풍경을 스케치하다 유람선을
놓치기 일쑤였다. 유럽 각국을 돌다가 여비가 떨어지면 동양화를 그린 뒤 팔아서 생활하기도 했다. 견문을 넓히기 위해 떠났던 당시 스케치여행은
나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줬다.
바로 “동양에서 태어난 내가 수 천년 역사를 지닌 서양화가들의 기술을 따라갈 수 없다. 따라서
서양 문명의 이기는 따르되 정신이나 사상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나의 생각은 정확히 적중했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프랑스 르싸롱 공모전에서 극사실주의에다 동양적 분위기가 풍기는 ‘바르비종의 가을’로 영예의 금상(79년)을 차지했다. 자신들과는 다른
낯선 동양 화가의 이색적인 그림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상을 준 것이다.
△“내가 아는 박정희는
친일파는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 박정희는 애증이 교차하는 인물이다. 그와의 인연은 해방전 만주에 갔을 때로 거슬러 올라
간다. 당시 박정희는 나의 친구 전상록과 함께 만주군관학교에 재학중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우리 세 사람은 봉천 등지에서 자주 어울렸다.
어느날 내가 “너는 조선 사람인데 왜 일본 군인이 되려고 하느냐”고 따져 묻자 그는 “일본을 알아야 그들을 이길 수 있다. 일본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 길(군인)이 상책이다”고 말했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 “뜻은 컸지만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친일파는
아니었다”는게 내가 기억하는 박정희다. 하지만 그가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직후부터 나는 그를 미워했다. 4.19혁명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오려는 순간 쿠데타로 역사를 거꾸로 되돌려 놨고 안정이 되면 다시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조차 어기고 장기 집권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그와의 만남을 피했다. 이후 당시 신석정·오지호 선생 등이 주축이 됐던 일종의 교사노조인 ‘교육연합회’결성에 내가 관여해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3개월 동안 투옥되면서 다시 그와 만나게 됐다. 10.26사건이 나던 그해(79년) 어느날 밤 나를 찾아온 그를 김제 한
양조장에서 만났다. 그는 나에게 “원하는게 무엇이냐”고 물었고 나는 “다 싫고 프랑스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 나는 유럽으로 스케치여행을
떠나게 됐다.
“유럽으로 여행을 떠난 후 얼마 안 있어 박정희가 암살됐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토록 미워했던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 이게 인간의 정이로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후배작가들을 위해 반영미술상을 제정했다”
지난 94년 그림을 그리는 후배 작가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힘을 복돋워주기 위해 반영미술상을 만들었다. 지난 해까지 8명이 이 상을 수상했다. 앞으로 이 상은 10회가 넘으면 역대 수상자들이
직접 운영하게 된다. 이미 60대를 훌쩍 넘긴 수상자들이 같은 길을 걷는 후배화가들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일종의 ‘내림사랑’을 실천하게 하자는
취지이다. <다음에 계속>
예술의 세계는 고단하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한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이자 고독한 창작의 연속이기 때문. 예술가들의 삶도
화려하지만 그만큼 험난하다. 배우는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하고 작가들은 세상의 이야기를 대변한다. 화가들은 세상을 담는다. 하지만 이 안에
자신만의 혼과 철학을 담지 못한다면 그 예술은 생명력이 없다. 이 때문에 예술의 길은 멀고 험하다. 어린 시절 단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집을 뛰쳐 나왔던 하반영 화백의 예술인생도 만만치 않은 역경의 나날이었다. 이런 그가 인생의 황혼기인 50대에 작가로서의 중요한 전환기를
맞는다.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텐트 안에서 그림을 그리며
생활했다”
지난 1950년 9월 한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되찾자 마자 곧바로 서울로 올라 갔다. 아내와
아이들은 전주에 남았다. 일단 왜정(일제 강점기)때 극장 간판일 등을 하며 푼푼히 모은 돈으로 생활했다. 당시 명동·충무로에는 국립극장이나
한국은행 등을 제외하고는 온전한 건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따라서 명동 한 켠에다 텐트를 친 뒤 이 안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1년 후께
영화배우 김승호씨(작고) 등을 통해 알게 된 친구 유탁(탤런트 유인촌씨의 아버지·작고)의 도움으로 충무로 해군사령부 PX(구 삼중정) 근처
다방(새마을)건물 3층에다 작은 화실을 마련했다. 이 화실은 오랜 친구인 배형식·윤환기·허원·박철교·이의주 등과 함께 사용했다.
이들은 왜정때 전주의 유명한 미술학원이었던 ‘동광미술학원(박병수씨(월북) 운영, 교사 이응로·김영창 등)’에서 같이 그림을
공부했던 친구들이었다. 미대가 없던 당시 학생들이 함흥·평양에서까지 그림을 배우기 위해 몰릴 정도로 최고 권위였던 동광미술학원은 이후
사회주의자들이 많이 다닌다는 이유로 강제 폐쇄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화실은 마련했지만 그림만 그려서는 생활이 안됐다.
장농에다 붙이는 일종의 공업미술인 유리그림을 그리며 틈틈히 돈을 벌었다. 혼례장농에다 학이나 십장생 2쌍을 그려주고는 300원 가량을 받았다.
이마저도 생활하는데 부족해 미군부대 PX 근처에서 미군들을 대상으로 초상화를 그려주며 돈을 받거나 물감같은 그림도구를 구했다.
△“50대에 전업작가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지난
60년대 전주로 돌아와 구 도청 옆 열매다방에서 전람회를 열었다. 더이상 그림의 순수성을 훼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나 자신만의 다짐이 담긴
의미있는 자리였다. 대규모로 열린 당시 전시회에는 신석정 선생이나 미당 서정주 선생, 백양촌 선생 등이 참석해 나의 의지에 힘을 보태 줬다.
이후 목우회에서 활동하던 친구 천칠봉·이의주의 권유로 72년에 목우회(회장 이마동) 회원으로 가입했다.
이때부터 나는 그동안
해오던 그림 이외의 모든 일을 접고 완전한 전업작가로 변신했다. 의지를 다지기 위해 이 해부터 74년까지 충북 화양계곡과 강원도 정선 산속에
들어가 그림만 그렸다. 당시 머물던 민박집에 전기가 들어 오지 않아 밤에는 촛불을 켜놓고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림을 그리다 지치면 근처
환장사라는 절로 스케치를 나가기도 했다. 배가 고파 라면을 끓여 먹다가 절 사람들로부터 “고기 냄새가 나니 나가라”는 타박을 받기 일쑤였다.
4년간 모든 것을 잊고 그림만 그리다 보니 75년 5월 전주로 돌아왔을때 가지고 온 그림이 트럭 1대 분량(500여점)이나 됐다. 또한 사실적인
것에서부터 나의 혼과 사상이 담긴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그림을 그렸던 당시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다. 지난 79년 이때의 노력이 바탕이 돼
프랑스 파리 르싸롱 공모전에서 금상을 수상하는 소중한 성과도 거뒀다.
△“세대간
미술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 3인전을 시작했다”
강원도에서 돌아온 75년 어느날 전주 객사 근처에 있던 단골술집
‘정읍집’에 들렀다. 이 술집은 당시 많은 대학 교수들이 단골로 애용해 일명 ‘정읍대학원’으로 불리던 곳이었는데 나도 스케치 여행을 하고 돌아올
때면 언제나 들르던 곳이었다. 그날 술집에는 예전부터 자주 만나온 후배 유휴열(당시 전주대생)과 성심여중 교사였던 박민평이 있었다.
이날 함께 술을 마시던 중 우리는 “매일 이렇게 술만 마시다가 끝나지 말고 조직을 가지고 그림 발전을 위해 의미있는 일을
해보자”며 3인전을 열기로 의기투합했다. 추상계열의 작업을 주로 해오던 유휴열과 반추상계열인 박민평, 극사실주의(초현실주의)를 표방하던 나,
이렇게 세 사람이 뜻을 모은 것. 각각 20대와 30대·50대였던 우리들이 함께 작업함으로써 세대간 미술의 차이와 벽, 낯설음을 허물어 보자는
취지였다.
이후 우리 세 사람은 지금까지 20여차례에 걸쳐 꾸준하게 3인전을 열어왔다. 도내 화단에서 3인전의 출발이자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이 3인전은 내 그림인생중 가장 보람된 일중 하나로 기억된다.<다음에 계속>
올해 미수를 맞은 하반영 화백. 한쪽 눈의 시력이 약해지고 거동이 약간 불편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그림작업도
여전히 왕성하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오전 시간에 2∼3시간 동안 그림을 그릴 정도로 예술에 대한 치열한 열정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계단에서 낙상을 해 통원치료를 받는 바람에 건강 관리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하지만 그림 인생의 마지막 지향점인 ‘마하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겨울 칼바람 만큼이나 여전히 매섭다.
제자 탁무송(65) 화백은 스승에 대해 “평생 앞에 나서서 명예를 쫓기
보다는 그저 묵묵하게 그림만 그리신 선생님의 기억력이나 정신력은 아직도 저희들(제자들)이 따라 가지를 못해요. 지금도 아침 일찍부터 주무실
때까지 절대 붓을 놓지 않으시는 선생님의 열정은 진정한 예술장인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지요”라고 말했다.
화려했지만 고달펐던
그림인생의 출발점이자 고단한 역경의 나날이었던 그의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 보자.
△“평생지기 이강천·신상옥은 나보다 그림을 더 잘 그렸다”
우리 나라 대표
영화감독인 이강천과 신상옥. 둘은 어린 나이에 집을 나와 어렵게 생활하던 나와 함께 배고픈 시절을 보낸 단짝 친구다. 당시 우리 셋은
선창가·간판집 허드렛일을 하며 하루 하루를 버텨 나갔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처럼 둘은 어린 나이였지만 영화에 미쳐
있었다. 결국 둘은 군산에서 2∼3년을 산 뒤 19살때 영화를 배우기 위해 당시 많은 영화인들이 몰려 있던 함흥으로 떠났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영화 못지않게 그림에도 상당한 소질이 있었다. 당시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아세아전람회에서 둘은 특선을, 나는 입선에 그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 이론이나 실기 등 모든 면에서 나보다 나았었다. 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절대 누구한테 그림을
배우지 않는 내 성격 때문에 그들에게 도움을 받지는 않았다.”
이 때의 인연으로 두 사람은 훗날 자신이 만들거나 출연한 영화에 나를
단역으로 참여할 수 있게 배려해 줬다. 이강천이 메가폰을 잡았던 그 유명한 ‘피아골’이나 ‘모정’, ‘밤은 통곡한다’, ‘성벽을 뚫고’등 수많은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영화에 출연하고 받는 돈은 생계에도 적잖은 도움이 됐다. 35mm영화중 국내 최초의 컬러영화였던 ‘선화공주(최성관
감독·1957년)’에서는 신라시대의 건축물 세트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수입은 식비를 제외하고 모두 그림에 쏟아 부었다”
20대 초반이던 당시 나의 전부였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뭐든지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대전을 비롯해 대구(만경관), 여수, 부산(부산극장) 등 각 지역을 돌며 극장 간판을 그렸다.
당시 장정 하루 품삯이 70전이었지만 나는 이보다 많은 2원을 받았다. 마네킹 하나를 그려 주고 3∼5원(쌀1가마 3원)을 받았는데 대략 한달
수입이 45원 정도는 됐다. 당시로서는 꽤 많은 돈이었다. 극장 간판은 왠만한 숙련자가 아니면 그리기 힘들기 때문에 친구들을 만나러 만주에 갔을
당시 가게 간판글자를 써 달라는 현지 상인들의 요청이 쇄도하기도 했다. 이 당시 본가에서 나를 찾는다는 소문이 있어 “신분 때문에 그림을
반대하는 집안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성을 ‘하’가로, 이름을 ‘반영’으로 바꿨다.
이렇게 해서 번 돈은 식비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제 물감이나 붓같은 그림도구를 사는데 사용했다. 광목 천에다 아교를 칠해서 캔버스를 직접 만들어 쓰기도 했다. 당시에는
하루라도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못 견디던 시절이라 끼니도 거른 채 2∼3일 동안 그림만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림에만 전념하지 못하고 일과
병행하다 보니 힘든 점도 많았다. 그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 바로 김영창 선생님이다. 학교 졸업후 전주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선생님은
“너는 재주는 있지만 이처럼 그림에 전념하지 못하니 다른 사람보다는 그림이 늦게 될 것이다. 하지만 끈기를 갖고 너의 사상과 혼이 담긴 그림을
그려라”는 말로 나를 격려해 주셨고 그림지도도 해 주셨다.
△“‘비운의 화가’
이중섭과 만났다”
23살 되던 해 당시 21살이던 아내(작고)를 의주에서 만나 이듬해 10월 결혼했다. 하지만 식구가
늘면서 나의 삶은 더욱 고달퍼졌다. 당시 전주시 중앙동 2가에 있던 고암 이응로 선생의 간판집에서 일하기도 했다.
이후
6.25전쟁이 터졌고 피난민들이 몰렸던 부산에서 화가 이중섭을 만났다. 우리는 1년 남짓 국제시장 근처 목마술집과 국수집 등에서 송해수,
이수억, 이득찬 화백과 함께 자주 어울렸다.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아내와 자식들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돈이 생기면
자갈치 시장에서 재료를 사다가 직접 찌개를 끓여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는 ‘이 화백’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할 정도로
겸손했고 말이 없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돈이 없었기 때문에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종이나 담뱃갑에다 그림을 그렸었다. 그림마다 그의
한과 설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다음에 계속>
어떤 이에게는 나이가 굴레이고
어떤 이에게는 나이가 자유다. 여든 여덟, 미수(米壽)의 나이. 일곱 살 때 붓을 잡기 시작했으니 화력(畵歷) 80년!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 속을 들여다보는 아이처럼, 나는 여든 해의 생애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섰다. 대체 이 거대한 깊이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사람들이 “하도 들끓어 싸서” 익산에 있던 화실을 군산으로 옮겼다는 노화백은 여전히 손에 붓을 들고 있다. 나이가 주는 억압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한 나는, 여든 여덟의 화백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자못 걱정스러운 채다. 허나, 나이가 들면 아이가 된다고 했던가.
그는 소년처럼 경쾌하고 청년처럼 활달하다. 뇌종양으로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고 지금도 뇌혈관이 9개나 막혀 있어서 날마다 약을 먹어야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관자놀이 옆쪽으로 수술 당시 꿰맨 상처가 깊게 패여 있다. 오른쪽 눈이 거의 감겼다가 이제 겨우 뜰 수 있게 됐지만
“아픈 것엔 관심 없어! 내 나이가 여든 여덟인데… 죽어도 원이 없지.” 하며 보는 이의 걱정을 날려버린다. 다만, 이라고 노화백은 단서를
단다. 다만… 작품을 더 못해서 한(恨)이지. 여든 해 동안 그려온 것으로는 부족하단 말인가. 더 이상 그릴 무엇이 있을까 싶지만,
그림에 대한 노화백의 집념은 세월을 거꾸로 세는 것인지 청년의 그것보다 더 파릇하다. 그 동안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만을 주로 그려와 놔서
앞으로는 추상계열의 작품을 많이 그려보고 싶다는 하반영 화백. 화가의 그림에 무슨 단계야 있겠는가마는, 지금까지의 것을 뛰어넘는 “쉬르 레알리즘”을 꼭
추구해보고 싶다는 노화백의 열정은 아직도 봄날 아지랑이처럼 살아 꿈틀거린다. “쌍놈 소리 들어가면서, 부모 속 있는 대로 썩혀가면서 선택한
길인데, 화가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세계를 다 섭렵해보고 가야 하지 않겠어? 하나의 사실을 정밀하게 묘사도 해보고 현실세계를 기록도 해보고…
그것도 아니면 ‘쉬르’도 해보다가, 그것도 아니면 미지의 세계, 뭐 우주의 생성과 근원에 이르기까지, 누가 본 것도 아니고 사진으로 찍어둔 것도
아니지만 그런 미지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내 관심은 끝이 없어.” 그의 관심을 반영하는 양, 올해만 해도 전시 계획이 빽빽하게 잡혀 있다.
3월 25일부터 전북예술회관에서 미수기념전이 계획돼 있고, 5월에는 일본 작가 20여명과 함께 하는 한일전을 연다. 곧이어 캐나다 초청 전시회도
이어진다. 5월 21일에는 군산 시청 전시실에서 한일전 일본측 위원장과 2인전도 가질 계획이다. 그런 작품전이 아니더라도 해마다 상이용사,
결식아동을 돕기 위한 작품기증을 하기 때문에 그의 붓질은 하루도 쉴 날이 없다. 그림을 기증하여 그 판매 수익금으로 불우이웃을 도와온 지는 벌써
수십 년이 넘었다. 그렇다고 화백의 삶이 특별나게 풍족하고 여유로운 것도 아니다. 예술은 학교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7살 때부터
서예를 시작한 그는 서당에서 사군자며 수묵화를 익혔고 보통학교 4학년을 중퇴했다. 온통 그림에 혼이 팔린 그에게 학교교육은
불필요했다. “선생 한 사람한테 기계처럼 배우는 것이 싫었어. 내 혼, 내 사상, 내 철학은 오직 하나뿐인데, 어떻게 기계처럼 다른
사람에게 배우겠냐고. 그건 내 것이 아니지.” 예술가에게 그런 자기고집이야 있음직한 것이고 누가 뭐랄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고달픈 길을
자초한 꼴이 됐다. 글이야 쓰고 싶을 때 쓰면 그만이지만, 죽도록 그리고 싶어도 재료가 없으면 못 그리는 것이 그림이다. 얼마나 고달팠던지 그는
지금도 어린애들한테 그림을 그리라고 권하지 않는다. “그림 하는 데 돈이 엄청 들어가. 돈이 들어간 만큼 성과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거든.
대학에서 배출하는 화가 지망생들이 한 해에 수 천 명인데, 그 중 한 두 명을 제외하고는 다 도태해. 취미가 아닌 이상 직업으로 갖지는 말라고
하고 싶어. 더러 선생이나 교수하면서 미술을 겸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화가가 아니야. 그냥 선생이지.” 그런 고집이 있었기에 그는
절대로 직업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돈이 필요했기에 요즘말로 ‘알바’를 뛰었다. 주로 영화, 연극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제법 연기력이
돋보였던지 신상옥이며 김진규며 김희갑이며… 유명짜한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었고 주연으로 캐스팅하겠다는 이도 여럿 있었지만 그는 손과 발의 출연으로
만족했다. 손이 세 번 나오면 세 몫의 출연료를 받았고, 그 돈으로 그림을 그렸다. “가난을 면하려면 영화를 해야 한다”는 유혹의 손길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는 영화 일에 시간을 뺏기는 것이 아까웠다. 하기사, 지금도 밥을 먹는 시간이 아깝다는 그다. “나는 먹기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살기 위해서 먹는 것도 아니야. 그저 그림을 위해 조금 먹어둔다, 이거지. 생명을 유지해야 그림을 그리니까.” 일상의 모든 행위는
철저히 그림으로 귀속되고 그림으로 귀결되지 않는 일은 그에게 무의미하다. 돈을 따랐다면, 명예를 따랐다면, 사람을 따랐다면, 지금의 하반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노동자는 노동으로, 화공은 그림으로 80년 동안 그림을 그려왔고 머리 속에는 늘 그림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림 속에 갇혀 살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매우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해온 축에 속한다. 올해로 9회째를 맞이한
‘반영미술상’이며 장애인들의 사회체육 활성화를 위해 마련한 ‘하반영배 전국 론볼링 대회’가 그것을 말해준다. 반영미술상 운영위원회가 있고
하반영 화백 기념사업회가 있지만,
사실 그는 실무적인 일에까지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 “내 입김이 들어가면 수상자들이 어용이 돼버려서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의
그림은 그렇듯 사회적인 공익을 위해 아낌없이 쓰여진다. 지금까지 그림을 통해 기부한 액수를 따져보면 수십 억은 족히 넘을 것이다. 그러한 행동의
기저에는 “그림을 그리는 것 역시 하나의 사회생활”이라는 것의 그의 철학이 깔려 있다. “나는 화공이야. 화공은 그림으로, 노동자는
노동으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나는 종교는 없지만 나에게 그림을 그리면서 밥을 먹게 해준 조물주에게 감사해. 그래서 그
보답으로 그림을 그려서 사회에 이바지를 하는 것 뿐이야.” 쉽고 단순한 말처럼 들리지만 자신의 혼이 들어간 작품을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선뜻 내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집착 없이 비울 줄 아는 도인적 자세가 있지 않고서야 평범한 필부들은 흉내내기도 어려운 일.
“인간이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있기 마련이야. 그런 걸 빨리 알고 속을 비워야해. 나는 무(無)를 좋아해. 무는 유의 싹이거든. 속을
비웠다고 못 사는 것이 아니야. 오히려 과욕이 병이지. 남보다 앞서려고 하는 것도 병이고… 자라는 천천히 천리를 가지만 토끼는 빨리 가려다가
지쳐서 죽어.”
그림의 생명은 작가의 개성과 영혼 그것은 세월이 얹어준 현명함일지도 모른다. 여든 여덟. 생에 대해 어떤
기대와 설렘이 있을까 싶지만 그는 젊음 못지 않게 나이듦도 좋다고 말한다. 나이를 먹어서야 그것을 알게 된다고. 그러니 그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한 채로, 어찌 나이듦의 자유를, 그 끝자락이라도 만져볼 수 있으랴. 그 자유는 그림에 대한 잣대에서도 보여진다. “그림만 그리는 것은
기교요 기계일 뿐이며, 자신만의 사상과 철학이 깃들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노화백은, 어린아이의 그림이 서툴다고 하여 기교만 왕성한 어른의
작품보다 못하다고 평할 수는 없다고 못 박는다. 남의 작품을 평가하는 것 자체를 “죄”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더러 심사위원도 해봤지만 몇 분만에
많은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작가 개인의 개성과 영혼을 강조하는 그는, 그래서 일부러 작심하고 제자를 기른 적이
없다. “지금도 학교 선생들이 찾아와서 가르쳐 달라고 하지만, 느그들 허고 싶은 대로 해라, 하고 말아.” 하지만 그가 꼭 하는 한
마디가 있다. 서양에서 공부하고 왔다고 서양화 그리지 말라는 것이다. 서양에 없는 것을 지니고 있어야 진정으로 인정받을 수가 있다는 것.
동양화에서 출발했지만 서양화 역시 많이 그렸던 화백인지라 “선생님 서양화가 아니신가요?” 했더니 단박에 답변이 돌아온다. “나는 화공일 뿐이지
서양화가 아니야.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내 신조야.” 비록 ‘서양물감’을 사용하지만 동양적인 뿌리를 찾아서
작업을 한다는 노화백은 “서양화가는 다 서울에 있고 이런 촌구석에는 서양화가 없다”고 뼈 있는 한 마디를 남긴다. “대학교수며 이름난
화가들이 정작 붓으로 자기 이름하나 못 쓰는 게 현실이야. 소위 대가라고 하는 놈들도 마찬가지야. 붓에는 정신이 들어있어. 붓 글자 하나 못
쓰면서 서양화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히지.”
미수의 청년화백 그가 요즘 자주 되뇌이는 말은 “진인사대천명”이다. ‘천명’을
기다리는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진인사’ 밖에 없다고. 허나 천명을 기다리는 자리가 이토록 허술한 화실이라는 게 마음에 걸린다.
노화백의 화실은 커피숍이었던 자리에 화구들만 덩그러니 옮겨놓은 채다. 벽면마다 박혀있는 거울도 안 떼어낸 데다 기역자 주방도 그대로다. 가족들은
모두 어디에 계시나요? 했더니 뭐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 귀찮은 눈치다. “가족들은 다 분산(分散)해서 살아. 여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다 내
가족이야. 한 방에 있으면 가족이지.” 깨달음이란 자유에서 오는 것일까. 노대가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이미 선승(禪僧)의 경지에 들어선
것 같다. 거창한 전시실도 필요 없고 명토 박은 멋진 화실도 필요 없다. 찢어진 도화지에 서양물감으로 흘려 쓴 ‘하반영 화실’이라는 글자가
전부인 작업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세상사의 어떤 그물에서도 자유로운 영혼 하나가 지금 우리 곁에 있다. 베레모에 희끗한 수염,
약간 구부러진 등… 여든 해 넘도록 화공으로 살아온 자유인, 미수의 청년화백 하반영의 모습이다. |
JTV 구성작가
하반영(河畔影·사진) 화백은 전북 서양화 한 세기의 산 역사. 80대 들어서도 밥 한 공기를 거뜬히 비우는 왕성한 식욕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화실을 뜨지 않고 부지런히 그림을 그린다.
지난해 큰 수술 뒤, 걸음이 불편해지고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지만, 쉴 때도 붓을 놓지 않고 글씨를 쓴다. 그는 병상에서도 그림을
그렸다.
하 화백이 88세를 맞아 31일까지 전북예술회관에서 미수(米壽)전을 열고 있다. 전북 화단의 큰 경사로,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일이다. 일곱
살 때 서당에서 서예와 수묵으로 붓을 잡아, 소학교에서 크레파스를 시작한 뒤, 평생 그림과 동반했다.
청년시절 금릉 김영창으로부터 서양화를 익힌 그는 1937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선전(鮮展)’에서 ‘나팔꽃’으로 최고상을 받으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79~84년엔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르 싸롱’ 및 ‘꽁빠르종’ 공모전에서 금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서예에서 한국화,
도예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국내외에서 개인전만 100여차례 열어왔다.
“젊은 시절 간판도 그렸고, 극장 그림도 그렸어. 화가의 삶은 언제나 고단하지만, 옛날에는 ‘쟁이’라 불리며 천대받았지. 그럴수록 완성도
더 높은 그림을 추구하기 위해 스스로 채찍질했어. 소리 등 다른 예술세계를 섭렵한 것도 그 때문이야.”
그는 “미지의 세계, 무한의 변경을 개척하면서 완성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게 예술 종사자 업”이라며 “지금도 배우고 있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인생과 자연, 그리고 보편적인 것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을 담아 ‘생성’ ‘빛’ ‘착각’ 시리즈 등 30여점을 내걸었다. 그는
2000년 이후 매년 겨울 그가 사는 익산에서 결식아동을 돕기 위한 전시도 열어오고 있다.
동서양
넘나든 米壽의 화업
2005년 03월 28일 00시 00분 입력
전북 출신 하반영 개인전
전북 화단의
대표적 원로작가인 하반영 화백(河畔影·88)이 올해로 88세를 맞아 이를 기념하기 위한 미술전을 열고 있다. 오는 31일까지
전북예술회관에서 선보이는 미수전은 `나의 인생 나의 예술´이라는 주제로 이번 전시회에는 인간과 자연, 사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생성(生成)’과 `빛’, `착각’ 시리즈 등 30여점을 감상할 수 있다. 도내 예술가가 미수 전을 연 것은 1985년 서울
롯데미술관에서 가진 서예가 석전 황욱 선생에 이어 두 번째며 한국을 대표하는 회화 대가들을 따져보더라도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문화계의 큰
경사로 꼽히고 있다. 하 화백은 서양화가이면서 서예와 한문, 한국화, 구상화, 풍경, 인물화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면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해왔다. 일제 때인 1937년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선전(鮮展)에서 `나팔꽃’이란 작품으로 최고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프랑스 파리 공모전에서
금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외의 화려한 수상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임종근기자
세개의 작가군 전북 화단
조명
2005년 03월 14일 00시 00분 입력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기획 원로·중진 9명 3개
동인전 작품으로 서양 미술사 반추
원로 중진 미술 작가 9인의 독특한 미학 세계를 통해 전북 현대 미술사를 재조명해
본다. 오는 17일부터 4월 10일까지 전주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기획으로 전당내 전시장에서 선보이는 ‘돌아보다’전이 그것. 지난
2004년 ‘차이-형형색색’전에 이어 ‘전북현대미술 다시읽기’라는 의도를 갖고 연속 기획하는 이 전시는 풍성한 미술창작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미약한 미술사-비평의 기초를 세우기 위한 단계적 점검 일환이다. 이번 전시는‘세 개의 삼인전을 통한 전북미술의 회고와 전망’이란 부제가
붙은 것 처럼 ‘3인전’이라는 동인 형식으로 짜여진다. 또 전북 현대미술사에서 한 획을 그은 작가들을 통해 전북의 서양미술의 걸어온 길과
오늘의 시점을 반추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참여 작가는 최고령 작가군인 하반영·박민평·유휴열씨를 비롯 이동근·오무균·이종만,
김두해·선기현·이흥재씨 등. 이들 모두 전북 화단에서 자기 색채가 뚜렷한 조형감각으로 전업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화가로
통한다. 지역미술계의 ‘산 증인’으로 불러도 무리 없다고 할 만큼, 끊임없이 작업에 매진해 온 이들 9명 작가들은 실험적이고 현대적인
어법을 구사하며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방식에서부터 향토성을 가득 담아내는 등 풍부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특히 도내에 처음으로 3인전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75년에 첫 동인전을 연 하반영·박민평·유휴열씨는 초기의 구상계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입체와 추상을 넘나들며 전북 화단의
발전을 드높인 작가들로 눈길을 끈다. 여기에 이동근·오무균·이종만씨는 고등학교와 대학이라는 동일의 학연은 물론 동문수학한 작가들답게 비슷한
화풍으로 전북 구상 미술의 과거와 오늘, 미래를 바라보게 한다. 이와 함께 사진은 물론 구상과 비구상계열로 각기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1988년부터 지난해까지 매년 3인전을 열어온 이흥재·김두해·선기현씨의 작품 세계 역시 독창적인 시각으로 전북미술의 외형을 튼실하게 다지고
있다. 출품작은 최근 제작된 작품들 뿐 아니라 청년시절의 모색기 작품, 각종 공모전 입상작 등 과거의 작품들로, 작가들의 각 시기별 작업
경향의 흐름을 읽어볼 수 있도록 했다.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유대수 전시기획자는 “각기 다른 공간에서 다른 형식과 내용을 십년 넘게 지속시킨
세 개의 삼인전을 통합, 한 자리에서 만나고자 하는 이 전시는 전북 미술의 성장 역사를 살펴보고 줄기를 더듬어보는 기회”라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한편 이번 기획전에는 김선태, 손청문, 구혜경씨가 각기 3명씩의 작품에 대한 평을 상론해 감상의 폭을 넓힐 예정이다.
입력 : 2005.03.17 22:47 23' / 수정 :
2005.03.18 04:20 27'
전북 현대미술은 1970년대 들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69년 월담미술관에 이어 71년 첫 상설전시장인 ‘백제화랑’과 ‘전북화랑’이 생기면서 작가와 시민의 만남이 잦아졌다. 전시메뉴가
다양해지고, 작품활동 기반이 넓어지면서 지역의 화풍도 생겨날 수 있었다.
70년대 이후 10년 단위로 전북 대표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지역 서양화의 흐름을 조망케 할 ‘돌아보다’ 전이 17일부터 4월10일까지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다. 지역 화단의 구심으로 평가받는 작가 9인이 30년간 3인씩 짝을 지어 이어온 ‘3인전’을 한 자리에모은
전시이다.
하반영·박민평·유휴열씨는 75년 첫 ‘3인전’을 출범했다. 구상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 실험다운 실험을 시도하며 전북 화단에 생기를 돌게
했다. 원광대 미대 1기 동기인 이동근·오무균·이종만씨는 80년대 조형미와 탐미성·율동성·간결성 등을 추구하는 자유분방한 작품들로 지역 화단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김두해-이흥재-선기현씨는 90년대 이후 서양화에 사진·설치까지 다양한 장르를 가미해 왕성히 활동하면서 지역 미술의 지평을
넓혀왔다.
작가 9인이 내놓은 작품 70여점은 저마다 형식과 내용이 다르지만, 관람객들에게 낯이 익고 친숙하다. 기획자인 소리문화의 전당 유대수
큐레이터는 “작가마다의 성향과 섬세한 작풍보다 전북 미술문화의 성장사를 살피고, 줄기를 더듬는 일에 초점을 맞추시면 좋겠다”고 관람객들에게
당부한다.
암 백혈병 등 어렵지만 고칠 수 있어도 치료비가 모자라
수술 등 진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많다. 전북대병원이 이들 불우환자 일부나마 후원하기 위한 전시회를 마련했다. 병원은 1일부터 내년
1월10일까지 본관 2층 대회의실에서 중견·원로작가 23인의 작품으로 ‘행복+’전을 펼치고 있다.
“찬 바람 도는 세밑, 아픔과 슬픔이 가득한 삭막한 병원 공간 한편에 화롯불을 지피려 합니다. 환자들의 기운을 돋우고, 시민들에게 이웃을
생각하게 하는 기회가 되면 좋겠어요.”(양두현 원장)
전시회엔 전북대 송계일·박인현·이상조·정재영·이상찬·이철량, 전주대 김문철·하수경·송영숙, 우석대 조돈구·서제섭·우상기, 원광대
김수자·서일석, 군산대 이건용교수와 작가 하반영·송정현·조래장·이성재·이형수·하수정·정찬희·김준호씨가 모두 38점을 출품했다. 대부분 쉽고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구상작들로 색조부터 밝고 포근하다.
초대 작가 가운데 유당 송정현(69)씨는 스스로 암과 투병해오며 “더 어려운 환자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었다”며 혼신을 쏟은 한국화 및
서예작품 4점을 출품했다.
전북대병원 홍보실장인 이용철(44·내과)교수는 “작가 모두 행사의 소박한 뜻에 흔쾌히 응해주셨다”며 “수익금은 모두 직원과 시민
1200여명이 매월 수천~수만원씩 기탁하는 병원사회복지후원회 기금으로 적립, 어려운 환자들을 위해 소중히 쓰겠다”고 말했다.
“나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꼭 하고 싶었던 이 길(화가)을 한눈 팔지 않고 걸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물주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9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화가로서 한 길을 걸어온 하반영 화백. 졸수(90세)를 앞둔 지금도 그의 그림인생은 멈추지
않는다. 아니, 아직 미완성이라고 노 화백은 겸손하게 말한다. 7살때 서당에서 서예를 배우면서 쌓아 온 화력이지만 최종 지향점인 이른바 ‘마하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 불교에서 말하는 영겁의 세계이자 현실속의 기나긴 여정을 뜻하는 마하의 세계를 이뤄내기
전까지 그의 작업은 마침표가 없다.
“어린 나이에 단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김씨 집안을 뛰쳐 나와 ‘고아 아닌 고아’로 살아
왔다. 성을 바꾸고 조상을 버리면서까지 이 길(화가)을 고집했다. 후회는 없다. 고생도 숱하게 했지만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이 있어 더욱
보람있었다”
스승·선배는 후학이나 후배들에게 무한한 발전을 가져다 줘야 한다는게 나의 생각이다. 이는 나의 애제자인
탁무송(전업작가)이나 강정진(예원예술대 회화과 교수), 장효순(전업작가) 등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다. 탁무송은 지난 70년대 중반부터 나와 함께
했다. 당시 그는 그림보다는 술을 더 좋아했고 불량한 친구들과도 자주 어울렸었다. 이런 그에게 어느날 내가 만든 일요화가회에 회원으로 가입할
것을 조언했다. 나의 제안을 혼쾌히 받아 들인 그는 그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치열한 노력끝에 그는 국전과 도전에서 수상하게 됐다. 이후 그는
예전에 어울리던 뒷골목 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건실한 화가로서 탈바꿈했다.
“‘그림으로써 인간 하나를 만들었구나’라는 생각에
감격스러웠다. 예술이라는게 이처럼 위대하다는 것을 이때 깨달았다. 예술이나 사상은 어떻게 가르치냐에 따라 상대방을 얼마든지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지난 30여년전 중학생 시절부터 나와 인연이 닿은 강정진도 마찬가지. 당시 그는 그림에 상당한
소질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한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그래서 내가 직접 그의 형과 만나 싸우면서까지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게 했다. 심지어는 집안의 반대때문에 그림을 포기하려 한 그를 때리면서까지 독려했다. 따라서 그는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고 아끼는 제자이다.
여류화가인 장효순도 서양화뿐 아니라 서예·사군자·수묵화 등 여러 분야에 참 열심인 제자다. 실력은 출중하지만 대학교를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부 미술단체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노
화백의 그림인생은 아직 현재 진행형’
하반영 화백은 “인생에서 겪는 고생은 하나의 즐거운 교육이자 가르침이고
낙(樂)이다. 고생이 있어야 인생의 즐거움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며 “특히 그림 그리는 사람은 더러운 빛깔을 칠할 줄 알아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을 칠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예술(그림)은 남의 것이 아니다. 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남보다 더 잘
그리려고 욕심내거나 무리하면 빗나갈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작가들보다 그림을 못 그리더라도 차분히 자신의 혼과 사상, 철학을 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신의 것을 담으며 꾸준히 그리는 사람이 바로 훌륭한 화가이다.”
지난 80여년 동안 이처럼 올곧은 예술관을 지켜온 그는
현재 관객과의 또다른 만남을 준비중이다. 다음달 1일부터 내년 2월까지 석달간 군산 철새전망대 전시실에서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며 따르는 일본
마찌다 도오루 작가와 함께 2인전을 연다. 이 전시에서 그는 ‘생성’ 연작 등 ‘마하의 세계’가 담긴 작품 20여점을 선보인다. 작품 판매비
일부는 군산시를 통해 어려운 형편에 있는 이웃들에게 전달될 예정이다.
이처럼 오래 전부터 결식아동이나 유공자 자녀 등을 묵묵히
도와온 그는 내년에도 그림을 통한 사랑의 마음을 계속 전달할 계획이다. 내년 2월초 충남 서천을 시작으로 추석과 연말에 남원의 한 교회·원불교
단체와 함께 어려운 이웃들을 돕기 위한 사랑의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지난 80여년 동안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눈감는 그
날까지 계속 그림을 그릴 것이다. 기약이나 예상할 수도 없는 그 세계(마하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고 갈 길이
멀다.”
하반영 화백은 지난 3월말 오랜만에 전주에서 개인전을 열었었다. 당시 전시는 미수를 맞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이른바 ‘미수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변에서 미수전이라는데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하는 것을 달갑지 않아 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지난 세월 동안 늘 그렇게 해오던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을 단지 선보이는 자리이기 때문이다”며 “굳이 변한게 있다면 한
인간이자 예술가로서 살고 있는 나 자신의 사상성과 철학이 약간 전진했을 뿐이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이처럼 관념을 탈피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그는 그림 입문 당시 사실적인 구상계열로 시작해 중년에 이르러 자신의 사상·철학이 담긴 초현실주의적인 화풍으로 변했다.
70대였던 지난 10년 전부터는 지난 날에 창조한 화력을 바탕으로 미래의 기원이 담긴 추상계열로 정착했다.
“구상계열과
초현실주의를 착실히 거쳐야만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과 혼이 담긴 진정한 추상화를 그릴 수 있다”는 작가는 10년 주기로 화풍이 변했다. 이는
자신이 그림에 남기는 사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게 그의 설명. 20∼40대에는 영어로 ‘반영’을 썼지만 50대에 이르러 “내 것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한글로 ‘반영’을 쓰기 시작했다. 60대에 다시 ‘영’으로 바뀌었다가 현재는 흘림체로 ‘영’이라는 사인을 남기고 있다. 이
사인을 통해 자신의 지난 그림인생의 족적을 쉽게 되짚어볼 수 있게 하자는 노 작가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그가 20여년전 유럽 각국을 돌며
화가로서의 감성과 견문을 넓혔던 그때로 돌아가 보자.
△“유럽에서 화가로서 내가 진정 가야 할
길을 깨달았다”
지난 1979년부터 이탈리아 나폴리를 비롯해 프랑스, 스페인, 베네치아, 네덜란드, 스위스, 덴마크 등
유럽으로 스케치 여행을 떠났다. 이탈리아 폼페이 유적에서는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고 발달한 로마문화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외설적인 그들의 문화에서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 맞구나’라고 실감했다. 베네치아에서는 너무나 아름다운 주변 풍경을 스케치하다 유람선을
놓치기 일쑤였다. 유럽 각국을 돌다가 여비가 떨어지면 동양화를 그린 뒤 팔아서 생활하기도 했다. 견문을 넓히기 위해 떠났던 당시 스케치여행은
나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줬다.
바로 “동양에서 태어난 내가 수 천년 역사를 지닌 서양화가들의 기술을 따라갈 수 없다. 따라서
서양 문명의 이기는 따르되 정신이나 사상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나의 생각은 정확히 적중했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프랑스 르싸롱 공모전에서 극사실주의에다 동양적 분위기가 풍기는 ‘바르비종의 가을’로 영예의 금상(79년)을 차지했다. 자신들과는 다른
낯선 동양 화가의 이색적인 그림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상을 준 것이다.
△“내가 아는 박정희는
친일파는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 박정희는 애증이 교차하는 인물이다. 그와의 인연은 해방전 만주에 갔을 때로 거슬러 올라
간다. 당시 박정희는 나의 친구 전상록과 함께 만주군관학교에 재학중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우리 세 사람은 봉천 등지에서 자주 어울렸다.
어느날 내가 “너는 조선 사람인데 왜 일본 군인이 되려고 하느냐”고 따져 묻자 그는 “일본을 알아야 그들을 이길 수 있다. 일본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 길(군인)이 상책이다”고 말했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 “뜻은 컸지만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친일파는
아니었다”는게 내가 기억하는 박정희다. 하지만 그가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직후부터 나는 그를 미워했다. 4.19혁명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오려는 순간 쿠데타로 역사를 거꾸로 되돌려 놨고 안정이 되면 다시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조차 어기고 장기 집권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그와의 만남을 피했다. 이후 당시 신석정·오지호 선생 등이 주축이 됐던 일종의 교사노조인 ‘교육연합회’결성에 내가 관여해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3개월 동안 투옥되면서 다시 그와 만나게 됐다. 10.26사건이 나던 그해(79년) 어느날 밤 나를 찾아온 그를 김제 한
양조장에서 만났다. 그는 나에게 “원하는게 무엇이냐”고 물었고 나는 “다 싫고 프랑스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 나는 유럽으로 스케치여행을
떠나게 됐다.
“유럽으로 여행을 떠난 후 얼마 안 있어 박정희가 암살됐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토록 미워했던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 이게 인간의 정이로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후배작가들을 위해 반영미술상을 제정했다”
지난 94년 그림을 그리는 후배 작가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힘을 복돋워주기 위해 반영미술상을 만들었다. 지난 해까지 8명이 이 상을 수상했다. 앞으로 이 상은 10회가 넘으면 역대 수상자들이
직접 운영하게 된다. 이미 60대를 훌쩍 넘긴 수상자들이 같은 길을 걷는 후배화가들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일종의 ‘내림사랑’을 실천하게 하자는
취지이다. <다음에 계속>
예술의 세계는 고단하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한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이자 고독한 창작의 연속이기 때문. 예술가들의 삶도
화려하지만 그만큼 험난하다. 배우는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하고 작가들은 세상의 이야기를 대변한다. 화가들은 세상을 담는다. 하지만 이 안에
자신만의 혼과 철학을 담지 못한다면 그 예술은 생명력이 없다. 이 때문에 예술의 길은 멀고 험하다. 어린 시절 단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집을 뛰쳐 나왔던 하반영 화백의 예술인생도 만만치 않은 역경의 나날이었다. 이런 그가 인생의 황혼기인 50대에 작가로서의 중요한 전환기를
맞는다.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텐트 안에서 그림을 그리며
생활했다”
지난 1950년 9월 한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되찾자 마자 곧바로 서울로 올라 갔다. 아내와
아이들은 전주에 남았다. 일단 왜정(일제 강점기)때 극장 간판일 등을 하며 푼푼히 모은 돈으로 생활했다. 당시 명동·충무로에는 국립극장이나
한국은행 등을 제외하고는 온전한 건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따라서 명동 한 켠에다 텐트를 친 뒤 이 안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1년 후께
영화배우 김승호씨(작고) 등을 통해 알게 된 친구 유탁(탤런트 유인촌씨의 아버지·작고)의 도움으로 충무로 해군사령부 PX(구 삼중정) 근처
다방(새마을)건물 3층에다 작은 화실을 마련했다. 이 화실은 오랜 친구인 배형식·윤환기·허원·박철교·이의주 등과 함께 사용했다.
이들은 왜정때 전주의 유명한 미술학원이었던 ‘동광미술학원(박병수씨(월북) 운영, 교사 이응로·김영창 등)’에서 같이 그림을
공부했던 친구들이었다. 미대가 없던 당시 학생들이 함흥·평양에서까지 그림을 배우기 위해 몰릴 정도로 최고 권위였던 동광미술학원은 이후
사회주의자들이 많이 다닌다는 이유로 강제 폐쇄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화실은 마련했지만 그림만 그려서는 생활이 안됐다.
장농에다 붙이는 일종의 공업미술인 유리그림을 그리며 틈틈히 돈을 벌었다. 혼례장농에다 학이나 십장생 2쌍을 그려주고는 300원 가량을 받았다.
이마저도 생활하는데 부족해 미군부대 PX 근처에서 미군들을 대상으로 초상화를 그려주며 돈을 받거나 물감같은 그림도구를 구했다.
△“50대에 전업작가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지난
60년대 전주로 돌아와 구 도청 옆 열매다방에서 전람회를 열었다. 더이상 그림의 순수성을 훼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나 자신만의 다짐이 담긴
의미있는 자리였다. 대규모로 열린 당시 전시회에는 신석정 선생이나 미당 서정주 선생, 백양촌 선생 등이 참석해 나의 의지에 힘을 보태 줬다.
이후 목우회에서 활동하던 친구 천칠봉·이의주의 권유로 72년에 목우회(회장 이마동) 회원으로 가입했다.
이때부터 나는 그동안
해오던 그림 이외의 모든 일을 접고 완전한 전업작가로 변신했다. 의지를 다지기 위해 이 해부터 74년까지 충북 화양계곡과 강원도 정선 산속에
들어가 그림만 그렸다. 당시 머물던 민박집에 전기가 들어 오지 않아 밤에는 촛불을 켜놓고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림을 그리다 지치면 근처
환장사라는 절로 스케치를 나가기도 했다. 배가 고파 라면을 끓여 먹다가 절 사람들로부터 “고기 냄새가 나니 나가라”는 타박을 받기 일쑤였다.
4년간 모든 것을 잊고 그림만 그리다 보니 75년 5월 전주로 돌아왔을때 가지고 온 그림이 트럭 1대 분량(500여점)이나 됐다. 또한 사실적인
것에서부터 나의 혼과 사상이 담긴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그림을 그렸던 당시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다. 지난 79년 이때의 노력이 바탕이 돼
프랑스 파리 르싸롱 공모전에서 금상을 수상하는 소중한 성과도 거뒀다.
△“세대간
미술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 3인전을 시작했다”
강원도에서 돌아온 75년 어느날 전주 객사 근처에 있던 단골술집
‘정읍집’에 들렀다. 이 술집은 당시 많은 대학 교수들이 단골로 애용해 일명 ‘정읍대학원’으로 불리던 곳이었는데 나도 스케치 여행을 하고 돌아올
때면 언제나 들르던 곳이었다. 그날 술집에는 예전부터 자주 만나온 후배 유휴열(당시 전주대생)과 성심여중 교사였던 박민평이 있었다.
이날 함께 술을 마시던 중 우리는 “매일 이렇게 술만 마시다가 끝나지 말고 조직을 가지고 그림 발전을 위해 의미있는 일을
해보자”며 3인전을 열기로 의기투합했다. 추상계열의 작업을 주로 해오던 유휴열과 반추상계열인 박민평, 극사실주의(초현실주의)를 표방하던 나,
이렇게 세 사람이 뜻을 모은 것. 각각 20대와 30대·50대였던 우리들이 함께 작업함으로써 세대간 미술의 차이와 벽, 낯설음을 허물어 보자는
취지였다.
이후 우리 세 사람은 지금까지 20여차례에 걸쳐 꾸준하게 3인전을 열어왔다. 도내 화단에서 3인전의 출발이자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이 3인전은 내 그림인생중 가장 보람된 일중 하나로 기억된다.<다음에 계속>
올해 미수를 맞은 하반영 화백. 한쪽 눈의 시력이 약해지고 거동이 약간 불편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그림작업도
여전히 왕성하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오전 시간에 2∼3시간 동안 그림을 그릴 정도로 예술에 대한 치열한 열정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계단에서 낙상을 해 통원치료를 받는 바람에 건강 관리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하지만 그림 인생의 마지막 지향점인 ‘마하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겨울 칼바람 만큼이나 여전히 매섭다.
제자 탁무송(65) 화백은 스승에 대해 “평생 앞에 나서서 명예를 쫓기
보다는 그저 묵묵하게 그림만 그리신 선생님의 기억력이나 정신력은 아직도 저희들(제자들)이 따라 가지를 못해요. 지금도 아침 일찍부터 주무실
때까지 절대 붓을 놓지 않으시는 선생님의 열정은 진정한 예술장인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지요”라고 말했다.
화려했지만 고달펐던
그림인생의 출발점이자 고단한 역경의 나날이었던 그의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 보자.
△“평생지기 이강천·신상옥은 나보다 그림을 더 잘 그렸다”
우리 나라 대표
영화감독인 이강천과 신상옥. 둘은 어린 나이에 집을 나와 어렵게 생활하던 나와 함께 배고픈 시절을 보낸 단짝 친구다. 당시 우리 셋은
선창가·간판집 허드렛일을 하며 하루 하루를 버텨 나갔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처럼 둘은 어린 나이였지만 영화에 미쳐
있었다. 결국 둘은 군산에서 2∼3년을 산 뒤 19살때 영화를 배우기 위해 당시 많은 영화인들이 몰려 있던 함흥으로 떠났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영화 못지않게 그림에도 상당한 소질이 있었다. 당시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아세아전람회에서 둘은 특선을, 나는 입선에 그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 이론이나 실기 등 모든 면에서 나보다 나았었다. 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절대 누구한테 그림을
배우지 않는 내 성격 때문에 그들에게 도움을 받지는 않았다.”
이 때의 인연으로 두 사람은 훗날 자신이 만들거나 출연한 영화에 나를
단역으로 참여할 수 있게 배려해 줬다. 이강천이 메가폰을 잡았던 그 유명한 ‘피아골’이나 ‘모정’, ‘밤은 통곡한다’, ‘성벽을 뚫고’등 수많은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영화에 출연하고 받는 돈은 생계에도 적잖은 도움이 됐다. 35mm영화중 국내 최초의 컬러영화였던 ‘선화공주(최성관
감독·1957년)’에서는 신라시대의 건축물 세트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수입은 식비를 제외하고 모두 그림에 쏟아 부었다”
20대 초반이던 당시 나의 전부였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뭐든지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대전을 비롯해 대구(만경관), 여수, 부산(부산극장) 등 각 지역을 돌며 극장 간판을 그렸다.
당시 장정 하루 품삯이 70전이었지만 나는 이보다 많은 2원을 받았다. 마네킹 하나를 그려 주고 3∼5원(쌀1가마 3원)을 받았는데 대략 한달
수입이 45원 정도는 됐다. 당시로서는 꽤 많은 돈이었다. 극장 간판은 왠만한 숙련자가 아니면 그리기 힘들기 때문에 친구들을 만나러 만주에 갔을
당시 가게 간판글자를 써 달라는 현지 상인들의 요청이 쇄도하기도 했다. 이 당시 본가에서 나를 찾는다는 소문이 있어 “신분 때문에 그림을
반대하는 집안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성을 ‘하’가로, 이름을 ‘반영’으로 바꿨다.
이렇게 해서 번 돈은 식비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제 물감이나 붓같은 그림도구를 사는데 사용했다. 광목 천에다 아교를 칠해서 캔버스를 직접 만들어 쓰기도 했다. 당시에는
하루라도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못 견디던 시절이라 끼니도 거른 채 2∼3일 동안 그림만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림에만 전념하지 못하고 일과
병행하다 보니 힘든 점도 많았다. 그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 바로 김영창 선생님이다. 학교 졸업후 전주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선생님은
“너는 재주는 있지만 이처럼 그림에 전념하지 못하니 다른 사람보다는 그림이 늦게 될 것이다. 하지만 끈기를 갖고 너의 사상과 혼이 담긴 그림을
그려라”는 말로 나를 격려해 주셨고 그림지도도 해 주셨다.
△“‘비운의 화가’
이중섭과 만났다”
23살 되던 해 당시 21살이던 아내(작고)를 의주에서 만나 이듬해 10월 결혼했다. 하지만 식구가
늘면서 나의 삶은 더욱 고달퍼졌다. 당시 전주시 중앙동 2가에 있던 고암 이응로 선생의 간판집에서 일하기도 했다.
이후
6.25전쟁이 터졌고 피난민들이 몰렸던 부산에서 화가 이중섭을 만났다. 우리는 1년 남짓 국제시장 근처 목마술집과 국수집 등에서 송해수,
이수억, 이득찬 화백과 함께 자주 어울렸다.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아내와 자식들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돈이 생기면
자갈치 시장에서 재료를 사다가 직접 찌개를 끓여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는 ‘이 화백’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할 정도로
겸손했고 말이 없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돈이 없었기 때문에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종이나 담뱃갑에다 그림을 그렸었다. 그림마다 그의
한과 설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다음에 계속>
어떤 이에게는 나이가 굴레이고
어떤 이에게는 나이가 자유다. 여든 여덟, 미수(米壽)의 나이. 일곱 살 때 붓을 잡기 시작했으니 화력(畵歷) 80년!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 속을 들여다보는 아이처럼, 나는 여든 해의 생애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섰다. 대체 이 거대한 깊이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사람들이 “하도 들끓어 싸서” 익산에 있던 화실을 군산으로 옮겼다는 노화백은 여전히 손에 붓을 들고 있다. 나이가 주는 억압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한 나는, 여든 여덟의 화백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자못 걱정스러운 채다. 허나, 나이가 들면 아이가 된다고 했던가.
그는 소년처럼 경쾌하고 청년처럼 활달하다. 뇌종양으로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고 지금도 뇌혈관이 9개나 막혀 있어서 날마다 약을 먹어야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관자놀이 옆쪽으로 수술 당시 꿰맨 상처가 깊게 패여 있다. 오른쪽 눈이 거의 감겼다가 이제 겨우 뜰 수 있게 됐지만
“아픈 것엔 관심 없어! 내 나이가 여든 여덟인데… 죽어도 원이 없지.” 하며 보는 이의 걱정을 날려버린다. 다만, 이라고 노화백은 단서를
단다. 다만… 작품을 더 못해서 한(恨)이지. 여든 해 동안 그려온 것으로는 부족하단 말인가. 더 이상 그릴 무엇이 있을까 싶지만,
그림에 대한 노화백의 집념은 세월을 거꾸로 세는 것인지 청년의 그것보다 더 파릇하다. 그 동안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만을 주로 그려와 놔서
앞으로는 추상계열의 작품을 많이 그려보고 싶다는 하반영 화백. 화가의 그림에 무슨 단계야 있겠는가마는, 지금까지의 것을 뛰어넘는 “쉬르 레알리즘”을 꼭
추구해보고 싶다는 노화백의 열정은 아직도 봄날 아지랑이처럼 살아 꿈틀거린다. “쌍놈 소리 들어가면서, 부모 속 있는 대로 썩혀가면서 선택한
길인데, 화가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세계를 다 섭렵해보고 가야 하지 않겠어? 하나의 사실을 정밀하게 묘사도 해보고 현실세계를 기록도 해보고…
그것도 아니면 ‘쉬르’도 해보다가, 그것도 아니면 미지의 세계, 뭐 우주의 생성과 근원에 이르기까지, 누가 본 것도 아니고 사진으로 찍어둔 것도
아니지만 그런 미지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내 관심은 끝이 없어.” 그의 관심을 반영하는 양, 올해만 해도 전시 계획이 빽빽하게 잡혀 있다.
3월 25일부터 전북예술회관에서 미수기념전이 계획돼 있고, 5월에는 일본 작가 20여명과 함께 하는 한일전을 연다. 곧이어 캐나다 초청 전시회도
이어진다. 5월 21일에는 군산 시청 전시실에서 한일전 일본측 위원장과 2인전도 가질 계획이다. 그런 작품전이 아니더라도 해마다 상이용사,
결식아동을 돕기 위한 작품기증을 하기 때문에 그의 붓질은 하루도 쉴 날이 없다. 그림을 기증하여 그 판매 수익금으로 불우이웃을 도와온 지는 벌써
수십 년이 넘었다. 그렇다고 화백의 삶이 특별나게 풍족하고 여유로운 것도 아니다. 예술은 학교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7살 때부터
서예를 시작한 그는 서당에서 사군자며 수묵화를 익혔고 보통학교 4학년을 중퇴했다. 온통 그림에 혼이 팔린 그에게 학교교육은
불필요했다. “선생 한 사람한테 기계처럼 배우는 것이 싫었어. 내 혼, 내 사상, 내 철학은 오직 하나뿐인데, 어떻게 기계처럼 다른
사람에게 배우겠냐고. 그건 내 것이 아니지.” 예술가에게 그런 자기고집이야 있음직한 것이고 누가 뭐랄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고달픈 길을
자초한 꼴이 됐다. 글이야 쓰고 싶을 때 쓰면 그만이지만, 죽도록 그리고 싶어도 재료가 없으면 못 그리는 것이 그림이다. 얼마나 고달팠던지 그는
지금도 어린애들한테 그림을 그리라고 권하지 않는다. “그림 하는 데 돈이 엄청 들어가. 돈이 들어간 만큼 성과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거든.
대학에서 배출하는 화가 지망생들이 한 해에 수 천 명인데, 그 중 한 두 명을 제외하고는 다 도태해. 취미가 아닌 이상 직업으로 갖지는 말라고
하고 싶어. 더러 선생이나 교수하면서 미술을 겸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화가가 아니야. 그냥 선생이지.” 그런 고집이 있었기에 그는
절대로 직업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돈이 필요했기에 요즘말로 ‘알바’를 뛰었다. 주로 영화, 연극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제법 연기력이
돋보였던지 신상옥이며 김진규며 김희갑이며… 유명짜한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었고 주연으로 캐스팅하겠다는 이도 여럿 있었지만 그는 손과 발의 출연으로
만족했다. 손이 세 번 나오면 세 몫의 출연료를 받았고, 그 돈으로 그림을 그렸다. “가난을 면하려면 영화를 해야 한다”는 유혹의 손길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는 영화 일에 시간을 뺏기는 것이 아까웠다. 하기사, 지금도 밥을 먹는 시간이 아깝다는 그다. “나는 먹기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살기 위해서 먹는 것도 아니야. 그저 그림을 위해 조금 먹어둔다, 이거지. 생명을 유지해야 그림을 그리니까.” 일상의 모든 행위는
철저히 그림으로 귀속되고 그림으로 귀결되지 않는 일은 그에게 무의미하다. 돈을 따랐다면, 명예를 따랐다면, 사람을 따랐다면, 지금의 하반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노동자는 노동으로, 화공은 그림으로 80년 동안 그림을 그려왔고 머리 속에는 늘 그림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림 속에 갇혀 살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매우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해온 축에 속한다. 올해로 9회째를 맞이한
‘반영미술상’이며 장애인들의 사회체육 활성화를 위해 마련한 ‘하반영배 전국 론볼링 대회’가 그것을 말해준다. 반영미술상 운영위원회가 있고
하반영 화백 기념사업회가 있지만,
사실 그는 실무적인 일에까지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 “내 입김이 들어가면 수상자들이 어용이 돼버려서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의
그림은 그렇듯 사회적인 공익을 위해 아낌없이 쓰여진다. 지금까지 그림을 통해 기부한 액수를 따져보면 수십 억은 족히 넘을 것이다. 그러한 행동의
기저에는 “그림을 그리는 것 역시 하나의 사회생활”이라는 것의 그의 철학이 깔려 있다. “나는 화공이야. 화공은 그림으로, 노동자는
노동으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나는 종교는 없지만 나에게 그림을 그리면서 밥을 먹게 해준 조물주에게 감사해. 그래서 그
보답으로 그림을 그려서 사회에 이바지를 하는 것 뿐이야.” 쉽고 단순한 말처럼 들리지만 자신의 혼이 들어간 작품을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선뜻 내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집착 없이 비울 줄 아는 도인적 자세가 있지 않고서야 평범한 필부들은 흉내내기도 어려운 일.
“인간이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있기 마련이야. 그런 걸 빨리 알고 속을 비워야해. 나는 무(無)를 좋아해. 무는 유의 싹이거든. 속을
비웠다고 못 사는 것이 아니야. 오히려 과욕이 병이지. 남보다 앞서려고 하는 것도 병이고… 자라는 천천히 천리를 가지만 토끼는 빨리 가려다가
지쳐서 죽어.”
그림의 생명은 작가의 개성과 영혼 그것은 세월이 얹어준 현명함일지도 모른다. 여든 여덟. 생에 대해 어떤
기대와 설렘이 있을까 싶지만 그는 젊음 못지 않게 나이듦도 좋다고 말한다. 나이를 먹어서야 그것을 알게 된다고. 그러니 그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한 채로, 어찌 나이듦의 자유를, 그 끝자락이라도 만져볼 수 있으랴. 그 자유는 그림에 대한 잣대에서도 보여진다. “그림만 그리는 것은
기교요 기계일 뿐이며, 자신만의 사상과 철학이 깃들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노화백은, 어린아이의 그림이 서툴다고 하여 기교만 왕성한 어른의
작품보다 못하다고 평할 수는 없다고 못 박는다. 남의 작품을 평가하는 것 자체를 “죄”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더러 심사위원도 해봤지만 몇 분만에
많은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작가 개인의 개성과 영혼을 강조하는 그는, 그래서 일부러 작심하고 제자를 기른 적이
없다. “지금도 학교 선생들이 찾아와서 가르쳐 달라고 하지만, 느그들 허고 싶은 대로 해라, 하고 말아.” 하지만 그가 꼭 하는 한
마디가 있다. 서양에서 공부하고 왔다고 서양화 그리지 말라는 것이다. 서양에 없는 것을 지니고 있어야 진정으로 인정받을 수가 있다는 것.
동양화에서 출발했지만 서양화 역시 많이 그렸던 화백인지라 “선생님 서양화가 아니신가요?” 했더니 단박에 답변이 돌아온다. “나는 화공일 뿐이지
서양화가 아니야.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내 신조야.” 비록 ‘서양물감’을 사용하지만 동양적인 뿌리를 찾아서
작업을 한다는 노화백은 “서양화가는 다 서울에 있고 이런 촌구석에는 서양화가 없다”고 뼈 있는 한 마디를 남긴다. “대학교수며 이름난
화가들이 정작 붓으로 자기 이름하나 못 쓰는 게 현실이야. 소위 대가라고 하는 놈들도 마찬가지야. 붓에는 정신이 들어있어. 붓 글자 하나 못
쓰면서 서양화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히지.”
미수의 청년화백 그가 요즘 자주 되뇌이는 말은 “진인사대천명”이다. ‘천명’을
기다리는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진인사’ 밖에 없다고. 허나 천명을 기다리는 자리가 이토록 허술한 화실이라는 게 마음에 걸린다.
노화백의 화실은 커피숍이었던 자리에 화구들만 덩그러니 옮겨놓은 채다. 벽면마다 박혀있는 거울도 안 떼어낸 데다 기역자 주방도 그대로다. 가족들은
모두 어디에 계시나요? 했더니 뭐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 귀찮은 눈치다. “가족들은 다 분산(分散)해서 살아. 여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다 내
가족이야. 한 방에 있으면 가족이지.” 깨달음이란 자유에서 오는 것일까. 노대가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이미 선승(禪僧)의 경지에 들어선
것 같다. 거창한 전시실도 필요 없고 명토 박은 멋진 화실도 필요 없다. 찢어진 도화지에 서양물감으로 흘려 쓴 ‘하반영 화실’이라는 글자가
전부인 작업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세상사의 어떤 그물에서도 자유로운 영혼 하나가 지금 우리 곁에 있다. 베레모에 희끗한 수염,
약간 구부러진 등… 여든 해 넘도록 화공으로 살아온 자유인, 미수의 청년화백 하반영의 모습이다. |
JTV 구성작가
하반영(河畔影·사진) 화백은 전북 서양화 한 세기의 산 역사. 80대 들어서도 밥 한 공기를 거뜬히 비우는 왕성한 식욕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화실을 뜨지 않고 부지런히 그림을 그린다.
지난해 큰 수술 뒤, 걸음이 불편해지고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지만, 쉴 때도 붓을 놓지 않고 글씨를 쓴다. 그는 병상에서도 그림을
그렸다.
하 화백이 88세를 맞아 31일까지 전북예술회관에서 미수(米壽)전을 열고 있다. 전북 화단의 큰 경사로,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일이다. 일곱
살 때 서당에서 서예와 수묵으로 붓을 잡아, 소학교에서 크레파스를 시작한 뒤, 평생 그림과 동반했다.
청년시절 금릉 김영창으로부터 서양화를 익힌 그는 1937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선전(鮮展)’에서 ‘나팔꽃’으로 최고상을 받으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79~84년엔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르 싸롱’ 및 ‘꽁빠르종’ 공모전에서 금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서예에서 한국화,
도예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국내외에서 개인전만 100여차례 열어왔다.
“젊은 시절 간판도 그렸고, 극장 그림도 그렸어. 화가의 삶은 언제나 고단하지만, 옛날에는 ‘쟁이’라 불리며 천대받았지. 그럴수록 완성도
더 높은 그림을 추구하기 위해 스스로 채찍질했어. 소리 등 다른 예술세계를 섭렵한 것도 그 때문이야.”
그는 “미지의 세계, 무한의 변경을 개척하면서 완성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게 예술 종사자 업”이라며 “지금도 배우고 있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인생과 자연, 그리고 보편적인 것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을 담아 ‘생성’ ‘빛’ ‘착각’ 시리즈 등 30여점을 내걸었다. 그는
2000년 이후 매년 겨울 그가 사는 익산에서 결식아동을 돕기 위한 전시도 열어오고 있다.
동서양
넘나든 米壽의 화업
2005년 03월 28일 00시 00분 입력
전북 출신 하반영 개인전
전북 화단의
대표적 원로작가인 하반영 화백(河畔影·88)이 올해로 88세를 맞아 이를 기념하기 위한 미술전을 열고 있다. 오는 31일까지
전북예술회관에서 선보이는 미수전은 `나의 인생 나의 예술´이라는 주제로 이번 전시회에는 인간과 자연, 사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생성(生成)’과 `빛’, `착각’ 시리즈 등 30여점을 감상할 수 있다. 도내 예술가가 미수 전을 연 것은 1985년 서울
롯데미술관에서 가진 서예가 석전 황욱 선생에 이어 두 번째며 한국을 대표하는 회화 대가들을 따져보더라도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문화계의 큰
경사로 꼽히고 있다. 하 화백은 서양화가이면서 서예와 한문, 한국화, 구상화, 풍경, 인물화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면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해왔다. 일제 때인 1937년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선전(鮮展)에서 `나팔꽃’이란 작품으로 최고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프랑스 파리 공모전에서
금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외의 화려한 수상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임종근기자
세개의 작가군 전북 화단
조명
2005년 03월 14일 00시 00분 입력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기획 원로·중진 9명 3개
동인전 작품으로 서양 미술사 반추
원로 중진 미술 작가 9인의 독특한 미학 세계를 통해 전북 현대 미술사를 재조명해
본다. 오는 17일부터 4월 10일까지 전주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기획으로 전당내 전시장에서 선보이는 ‘돌아보다’전이 그것. 지난
2004년 ‘차이-형형색색’전에 이어 ‘전북현대미술 다시읽기’라는 의도를 갖고 연속 기획하는 이 전시는 풍성한 미술창작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미약한 미술사-비평의 기초를 세우기 위한 단계적 점검 일환이다. 이번 전시는‘세 개의 삼인전을 통한 전북미술의 회고와 전망’이란 부제가
붙은 것 처럼 ‘3인전’이라는 동인 형식으로 짜여진다. 또 전북 현대미술사에서 한 획을 그은 작가들을 통해 전북의 서양미술의 걸어온 길과
오늘의 시점을 반추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참여 작가는 최고령 작가군인 하반영·박민평·유휴열씨를 비롯 이동근·오무균·이종만,
김두해·선기현·이흥재씨 등. 이들 모두 전북 화단에서 자기 색채가 뚜렷한 조형감각으로 전업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화가로
통한다. 지역미술계의 ‘산 증인’으로 불러도 무리 없다고 할 만큼, 끊임없이 작업에 매진해 온 이들 9명 작가들은 실험적이고 현대적인
어법을 구사하며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방식에서부터 향토성을 가득 담아내는 등 풍부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특히 도내에 처음으로 3인전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75년에 첫 동인전을 연 하반영·박민평·유휴열씨는 초기의 구상계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입체와 추상을 넘나들며 전북 화단의
발전을 드높인 작가들로 눈길을 끈다. 여기에 이동근·오무균·이종만씨는 고등학교와 대학이라는 동일의 학연은 물론 동문수학한 작가들답게 비슷한
화풍으로 전북 구상 미술의 과거와 오늘, 미래를 바라보게 한다. 이와 함께 사진은 물론 구상과 비구상계열로 각기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1988년부터 지난해까지 매년 3인전을 열어온 이흥재·김두해·선기현씨의 작품 세계 역시 독창적인 시각으로 전북미술의 외형을 튼실하게 다지고
있다. 출품작은 최근 제작된 작품들 뿐 아니라 청년시절의 모색기 작품, 각종 공모전 입상작 등 과거의 작품들로, 작가들의 각 시기별 작업
경향의 흐름을 읽어볼 수 있도록 했다.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유대수 전시기획자는 “각기 다른 공간에서 다른 형식과 내용을 십년 넘게 지속시킨
세 개의 삼인전을 통합, 한 자리에서 만나고자 하는 이 전시는 전북 미술의 성장 역사를 살펴보고 줄기를 더듬어보는 기회”라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한편 이번 기획전에는 김선태, 손청문, 구혜경씨가 각기 3명씩의 작품에 대한 평을 상론해 감상의 폭을 넓힐 예정이다.
입력 : 2005.03.17 22:47 23' / 수정 :
2005.03.18 04:20 27'
전북 현대미술은 1970년대 들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69년 월담미술관에 이어 71년 첫 상설전시장인 ‘백제화랑’과 ‘전북화랑’이 생기면서 작가와 시민의 만남이 잦아졌다. 전시메뉴가
다양해지고, 작품활동 기반이 넓어지면서 지역의 화풍도 생겨날 수 있었다.
70년대 이후 10년 단위로 전북 대표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지역 서양화의 흐름을 조망케 할 ‘돌아보다’ 전이 17일부터 4월10일까지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다. 지역 화단의 구심으로 평가받는 작가 9인이 30년간 3인씩 짝을 지어 이어온 ‘3인전’을 한 자리에모은
전시이다.
하반영·박민평·유휴열씨는 75년 첫 ‘3인전’을 출범했다. 구상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 실험다운 실험을 시도하며 전북 화단에 생기를 돌게
했다. 원광대 미대 1기 동기인 이동근·오무균·이종만씨는 80년대 조형미와 탐미성·율동성·간결성 등을 추구하는 자유분방한 작품들로 지역 화단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김두해-이흥재-선기현씨는 90년대 이후 서양화에 사진·설치까지 다양한 장르를 가미해 왕성히 활동하면서 지역 미술의 지평을
넓혀왔다.
작가 9인이 내놓은 작품 70여점은 저마다 형식과 내용이 다르지만, 관람객들에게 낯이 익고 친숙하다. 기획자인 소리문화의 전당 유대수
큐레이터는 “작가마다의 성향과 섬세한 작풍보다 전북 미술문화의 성장사를 살피고, 줄기를 더듬는 일에 초점을 맞추시면 좋겠다”고 관람객들에게
당부한다.
암 백혈병 등 어렵지만 고칠 수 있어도 치료비가 모자라
수술 등 진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많다. 전북대병원이 이들 불우환자 일부나마 후원하기 위한 전시회를 마련했다. 병원은 1일부터 내년
1월10일까지 본관 2층 대회의실에서 중견·원로작가 23인의 작품으로 ‘행복+’전을 펼치고 있다.
“찬 바람 도는 세밑, 아픔과 슬픔이 가득한 삭막한 병원 공간 한편에 화롯불을 지피려 합니다. 환자들의 기운을 돋우고, 시민들에게 이웃을
생각하게 하는 기회가 되면 좋겠어요.”(양두현 원장)
전시회엔 전북대 송계일·박인현·이상조·정재영·이상찬·이철량, 전주대 김문철·하수경·송영숙, 우석대 조돈구·서제섭·우상기, 원광대
김수자·서일석, 군산대 이건용교수와 작가 하반영·송정현·조래장·이성재·이형수·하수정·정찬희·김준호씨가 모두 38점을 출품했다. 대부분 쉽고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구상작들로 색조부터 밝고 포근하다.
초대 작가 가운데 유당 송정현(69)씨는 스스로 암과 투병해오며 “더 어려운 환자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었다”며 혼신을 쏟은 한국화 및
서예작품 4점을 출품했다.
전북대병원 홍보실장인 이용철(44·내과)교수는 “작가 모두 행사의 소박한 뜻에 흔쾌히 응해주셨다”며 “수익금은 모두 직원과 시민
1200여명이 매월 수천~수만원씩 기탁하는 병원사회복지후원회 기금으로 적립, 어려운 환자들을 위해 소중히 쓰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