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영혼은 불멸하다는 말이군요."
"그렇지.천주님은 사람에게 생혼과 각혼을 영혼과 함께 주셨고
거기에다가 영혼 불멸의 축복까지 주셨네."
"영혼이 불멸하다면 오늘 저녁 형수님께서는 제상을 받으셨군요."
"그래서 나도 누님을 뵈오러 이렇게 오지 않았는가." <소설 목민심서에서>
1784년 음력 4월 15일.
다산은 친어머니처럼 따르던 큰형수(정약현의 처) 이씨의 제사를
마치고 서울로 가는 배에서 천주교를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
형 약전과 다산 형제와 큰형수의 동생 이벽을 태운 배가
두미(斗尾),지금의 하남시 배알미동을 지날 무렵.
"천주님께서 만물이 자라도록 힘을 주신 것이네."
다산형제는 사돈 이벽에게서 천주교에 대한 설명을 듣고 토론을 벌인다.
다산은 이벽으로부터 받은 천주교에 관한 책을 탐독하였다.
수표교 근처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전한다.
세례명은 요한이다.
이벽은 다산보다 8살 더 많은 삼촌이나 큰형님뻘되는 사돈이었다.
이벽은 다산에게는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바로 출세의 중요한 시점마다 반대파로부터 집요한 공격을 받게 하고
결국은 남도의 외진 곳에서 18년 동안이나
유배객으로 지내게 했던 천주교와의 첫 만남이었다.
다산 형제의 비극은 남인 집안에서 태어난 것에서 비롯됐다.
막내였지만 형들보다 앞서 두각을 나타낸 정약용의 천재성도 오히려 화를 불렀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노론과 맞섰던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는 이유로
노론 벽파는 수십년 동안 정약용, 그리고 그의 형 정약전까지 싸잡아 공격했다.
두 형제는 비록 천주교를 나중에 버렸어도
정적들은 이들에게 평생 천주교 신자라는 음해를 뒤집어씌웠다.
다산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1801년 2월 8일 체포된다.
형인 정약종은 처형됐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됐다.
다산은 19일간 문초를 받고 2월 27일 경북 포항 장기로 귀양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는 그해 11월 전남 강진으로 이배된다.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주막집 등 이곳저곳을 한동안 떠돌다
1808년 봄, 새로 지은 초당에 입주한다.
1801년 이후 스스로 자신의 가문을 폐족이라 부르며 유배생활을 한다.
신유사옥(辛酉邪獄), 신유박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1794년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정조가 죽고 이른바 세도정권기에 들어서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 ·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
이 박해로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이때 이가환·이승훈·권철신(權哲身)·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
그리고 형인 약전(若銓)·약종(若鍾)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해 11월 전라남도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그는 이곳에서의 유배기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그에게 천주교를 전파한 이벽은 다산형제를 비롯한 가족들에게는
영향력이 아주 대단했던 것으로 다산은 평가하고 있다.
그는 묘비명에서 자신은 이벽을 추종했고(從李檗) ,
자기 형 정약전(1758~1816) 은 아주 일찍부터 이벽을 추종했으며(嘗從李檗) ,
뿐 아니라 권일신(1742~1792) 은 열성적으로 이벽을 추종했으며(熱心從李檗) ,
이가환(1742~1801) 역시 이벽을 추종했다(從李檗)' 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천주교의 창설자며 최초 영세자인 이승훈(1756∼1801·세례명 베드로)은
다산의 매형이다. 다산의 누이는 이승훈에게 시집갔고,
다산 자신은 이승훈의 누이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한국천주교 초기사에서 백서(帛書)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1775-1801)은
다산의 조카사위이다. 16세 때 진사시에 장원급제한 수재인 황사영이
정약용의 맏형인 약현의 딸(丁命蓮)에게 장가들었다.
매형 이승훈과 정약종, 정약종의 장남 철상은 천주교 신앙을 지키며
같은 날 목숨을 잃었고, 정약종의 부인과 둘째아들 하상,
딸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형당했다.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에 귀의했던 정약종은 유일하게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땅을 내려다보며 죽는 것보다 하늘을 우러러 죽는 것이 더 낫다”며
하늘을 보고 형틀에 누워 칼을 받았다.
망나니가 오히려 혼이 빠져 목이 반쯤밖에
잘리지 않았을 정도였던 한국 천주교사에 길이 남을 순교였다.
그가 목이 잘린 이틀 뒤에 정약전과 정약용은 유배길에 올랐다.
유배 7년째 되던 해, 정약전은 아들 학초의 죽음을 전해들어야 했다.
귀양 16년째 마침내 정약전도 세상을 떠났고,
18년 만에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렸을 때에는
그의 형제동기는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