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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순민(敬天順民)의 대의(大義)를 실천한 자애로운 임금, 경순대왕(敬順大王)
1. 경순왕은 신라김씨 시조 감알지 28세손이고, 마지막 화랑 김효종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물게 천년을 면면히 이어오며 인류 문명사에 영원히 기록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천년왕국 신라의 마지막 왕은 56대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 897-978)이다.
대왕께서는 서기 897년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지금의 경주)에서 신라 마지막 화랑(花郞)인 이찬(伊湌) 김효종(金孝宗, 추존 신흥왕 新興王 )과 계아태후(桂娥太后,헌강왕의 공주)를 부모로 하여 태어났다. 신라김씨 시조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 추존 세조대왕 世祖大王) 28세손이며, 문성대왕(文星大王)의 6세손으로 휘는 부, 시호는 경순이다. 왕비는 재위 시에는 죽방박씨(竹房朴氏)이고 손국(遜國) 후에는 고려 태조의 큰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후비(後妃)로 맞으셨으며, 별빈(別嬪)으로 안(安)씨가 있다.
927년에 후백제 견훤왕이 서라벌을 기습하여 경애왕(景哀王)을 자진케 한 후 견훤에 의해 옹립(擁立)되어 왕위에 오르시니 이때 보령이 31세이셨다.
등극한 즉시 견훤왕의 무도한 침탈로 여지없이 실추한 천년사직을 추스르고 안정시키 위해 후백제와 내통하여 끌어들여 천년사직에 씻을 수 없는 오명(汚名)을 안긴 역신(逆臣)들을 처단하고, 자진한 경애왕을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내고, 부친 효종을 신흥왕으로 ,모친 계아부인을 계아태후로 추존함과 동시에 장남 일(鎰)을 태자(太子)로 책봉하고, 계자(季子) 황(湟)을 각간(角干)에 임명하고 조정을 쇄신하기 위한 인사를 단행하는 등 일련의 구국 비상 방책을 강구하였다.
신라 말기 당시 신라의 국내정세를 살펴보면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때부터 천년왕국으로서의 그 운을 다하는 말기적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아우르며 통일의 대업(大業)을 달성했던 웅혼한 기상과 위용은 통일 후 200여 년간 평화가 계속되면서 조야(朝野)가 무사안일(無事安逸)하고 사치와 부패, 도덕적 해이, 건국당시부터 내려 온 골품제(骨品制)의 사슬, 계속되는 왕위 쟁탈전으로 국기(國紀)가 문란해지고 국론이 분열되어 왕권의 약화와 국력의 쇠퇴를 불러와 지방호족(地方豪族)과 해상세력(海上勢力)이 등장하여 백성들을 수탈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트리게 되자 전국 도처에서 무수한 군웅과 도적이 나타나 할거하면서 쇠망의 길을 재촉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지금의 전라도 지방에서 신라 장군 출신으로 신라조정에 반기를 들고 세력을 떨친 견훤(甄萱)이 주위를 평정하고 900년 무진주(광주광역시)에서 후백제(後百濟)를 건국하였으며, 강원도 북부, 경기도, 황해도 및 평안도 일부를 차지한 신라왕자 출신 궁예(弓裔)는 901년 철원에서 태봉(泰封,후고구려)국을 세우니, 통일신라는 지금의 경상도 지방에만 통치권이 미치게 되어 한반도는 다시 삼국으로 나뉘어 쟁패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우리나라는 오천년 역사 중에서 가장 혼돈스럽고 격동적 시대인 후삼국(後三國)시대를 맞게 되었다.
대왕께서 등극 한 후 특히 후백제 견훤의 반복되는 침략과 약탈, 그리고 궁예왕의 폭정을 종식하고 새롭게 개국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온건한 융화정책(融和政策)으로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져 강토는 날로 줄어들고 국가기능은 마비되어 통치권이 겨우 서라벌(경주)에만 미치는 지경에 이르러 국가의 명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위기상황 속에서 왕위에 오른 왕께서는 어떻게 해서든 과거의 위용과 영광을 되찾기 위해 국력신장(國力伸張)과 호국안민(護國安民)을 위해 백방으로 불철주야 노심초사했지만, 이미 기울기 시작한 천하대세(天下大勢)를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 가없는 경천순민(敬天順民)의 대의(大義)에 따른 세기적(世紀的) 결단인 손국(遜國)으로 신라천년사직이 문을 닫다
이에 왕께서는 무수한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통탄과 고뇌, 번민을 거듭하고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가없는 경천순민(敬天順民)의 대의(大義)에 따라 무고한 백성과 생령을 전쟁의 참화(慘禍)와 질곡(桎梏), 고통(苦痛)에서 구하고 보전하자』며 935년 10월말에 마지막 화백회의(和白會議, 군신회의)를 열어 마침내 신라 천년사직을 신흥 고려 태조 왕건에게 손양(遜讓)하는 세기적 결단을 내리고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손국(遜國)문서를 써 가지고 고려에 귀부(歸附)하기에 이르렀는데 당시의 상황을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등 사서(史書)의 기록 내용을 종합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의 삼국 통일로 통일 신라의 영토는 한반도의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까지 넓어졌으나 대왕께서 고려에 손국을 할 무렵에는 사방의 국토가 모두 타인의 소유로 되어 영토도 다스릴 백성도 월성(月城)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국세가 약하고 고립되었으므로, 대왕께서는 나라를 스스로 보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군신회의를 열어 고려에 손국할 것을 논의하였으나, 의견이 분분해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옳지 않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때 태자(太子)와 계자(季子)가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충신(忠臣) 의사(義士)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자신을 공고히 하다가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社稷)을 하루 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 라고 말했으나 왕은 ”고립되고 위태로운 상황이 이와 같아서는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강하지도 못하고 약하지도 않으면서 무고한 백성들이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손국을 결정했던 것이다.
『이에 대왕과 원비(元妃) 죽방왕후(竹房王后) 박씨(朴氏) 소생인 태자(太子) 일(鎰)은 통곡하며 모후(母后)인 죽방 왕비 박씨를 모시고 처자를 데리고(솔처자, 率妻子) 상악(霜岳,금강산)으로 들어가 세상과 등지고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베옷에 나물을 뜯어 먹다가 세상을 마치니 이분이 마의태자(麻衣太子)로 불리는 분이다.
계자 황도 통한의 눈물을 머금고 빈(嬪) 옥저하씨(沃沮河氏)와 운발(雲發), 우발(雨發) 공자를 속세에 두고(기처자, 棄妻子) 고려 태조가 제수한 평장사(平章事)를 받지 않으시고(사작불수, 賜爵不受) 부왕의 영정(影幀, 어진)을 그려 모시고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으시고 곧바로 가야산 법수사로 들어가(영사입산, 永辭入山) 범공(梵空) 스님이 되고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를 왕래 주석(駐錫)하다가 해인사에서 종신(終身)하였다.』 신라가 종언을 고할 때 태자와 계자가 부왕의 손국에 동행하지 않고 신라천년사직에 대한 충절(忠節)을 지켜 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 마의태자가 된 일과 계자가 가야산으로 영사입산하여 범공스님이 된 일은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등 사서에서 충절의 표상으로 극찬하고 있다.
이로서 천년왕국 신라는 BC57년 박혁거세(朴赫居世)가 건국한 후 박씨10왕, 석씨8왕, 김씨38왕 등 삼성(三姓)이 왕위를 계승하고 천년을 연면히 이어오면서 56대 왕을 거치며 3국을 통일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만세(萬世) 융성(隆盛)할 배달(倍達)의 터전을 다지던 웅호(雄豪)하고 굳건한 기상(氣像)과 위용(偉容)은 나래를 접고 건국한지 992년 만에 종언을 고하고 영원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해 11월에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의 귀려(歸麗)를 받아들이자 이에 왕께서는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떠나 송악(松嶽,지금 개성)으로 들어오는데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리에 이르니, 구경꾼들이 길을 메울 정도였다. 태조가 교외에 나가 영접하고 위로하였으며, 궁궐 동쪽의 제일 좋은 구역 유화궁(지금의 정승원)을 주고 큰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께서 자기 나라를 사(捨)하고 남의 나라에 와 있으므로 난(鸞)새에 비유하여 공주의 이름을 신란공주(神鸞公主)로 고치어 부르게 했다.
12월, 임금을 정승공(正丞公)으로 삼아 봉하고 태자(太子)보다 높은 지위에 두었으며 녹봉으로 1천석을 주고, 왕을 수행해 온 관원과 장수들 모두를 동급의 관직을 주어 등용하였다. 서라벌을 고쳐서 경주라 하고, 이를 정승공의 식읍(食邑)으로 주고 경주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되어 고려시대 최초의 사심관이 되었다.
3. 대왕의 손국에 대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사서의 기록을 고찰해 본다.
대왕께서 천년사직을 들어 신흥 고려 태조 왕건에게 손국한 일을 무심한 일부 사학자나 호사가들은 항복 또는 귀순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있으나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전쟁을 하다가 패하였거나, 강박(强拍)에 의하여 양위(讓位)한 것이 결코 아니고 대왕께서 군왕의 권위나 체면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먼저 경천순민의 대의에 따라 민생을 배려한 숭고한 세기적 결단이기 때문에 손국(遜國) 또는 양국(讓國)으로 표현하는 것이 마땅하다. 부연하면【무고한 백성들로 하여금 간뇌도지(肝腦塗地)하게 하는 일은 차마 못하겠다】고 하시며, 무모한 항쟁을 포기하고 백성을 전쟁의 참화(慘禍)와 질곡(桎梏)에서 벗어나 제세안민(濟世安民)을 위하여 스스로 지존(至尊)인 왕좌를 내던지기 위해 내린 대왕의 용기 있는 결단은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는 숭고한 마음과 결연한 의지, 철석같은 용기가 없었다면 감히 결행할 수 없는 매우 힘든 결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 후손들은 대왕의 손국을 올바로 평가하고 되새겨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2(경순왕)조의 기록에 따르면【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귀의 (歸依)한 것은 비록 부득이한 일이기는 하지만 또한 찬미(讚美)할 만 한 일이었다. 그 때에 만일 목숨을 걸고 힘껏 싸워서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하여졌다면, 필히 그의 일족은 멸망하고 해독이 무고한 백성에게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스스로 나라의 창고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하여 태조에게 귀의 하였으니, 그가 고려에 세운 공로와 백성들에게 입힌 은덕이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옛날 전씨(錢氏, 오월의 마지막 왕인 전숙)가 송나라에 오월(吳越)의 국토를 바친 데 대하여 소자첨(蘇子瞻,소식)은 그를 충신이라 하였으니 이제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도 훨씬 훌륭한 것이다. 우리 태조는 왕비(王妃)와 빈(嬪)이 많았고 역시 자손들 역시 번창하였는데도,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으로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를 계승한 왕들이 모두 그의 자손이었으니 어찌 음덕(蔭德)의 보답(報答)이 아니겠는가?】라고 기록했으며, 삼국유사 등 사서의 기록 내용도 삼국사기의 내용과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대왕께서 가없는 경천순민의 대의에 따라 935년 면면히 이어온 신라 천년사직을 신흥 고려에 전쟁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손국한 일은 우리나라 역사상 세기적 결단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고려 신라 후백제로 분열되어 격렬하게 쟁패하던 삼한(三韓)은 격동(激動)의 시대를 마감하고 평화적으로 재통일(再統一)됨으로써, 이로 인해 찬란했던 천년신라문화가 온전히 보전되고 2000년도에 유네스코(UNESCO)에서 “세계10대 유적도시” 또는 “지붕 없는 박물관” 등으로 불리는 경주 일대의 유적과 국보. 보물 또는 고적. 사적 등을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으로 지정하여 세계만방(世界萬邦)에 찬연(燦然)한 빛을 발휘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000여년이 지나면서 대왕의 후손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신라김씨는 물론 그 밖의 많은 신라유민들의 후예가 보존되어 오늘날 수 백 개의 성씨로 나뉘고, 후손이 수백만에 이르게 되어 인류 문화와 역사발전에 공헌한 수많은 인걸(人傑)을 배출해 온 자랑스러운 세계적인 명문거족으로 성장하고 번성해 오게 되었다.
처음 신라가 귀려 하여 오자 고려 태조는 매우 기뻐하면서 후한 예로 대우하였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왕께서 과인에게 나라를 주셨으니 그것은 매우 큰 은혜입니다. 원컨대 종실(宗室)과 결혼하여 장인과 사위의 좋은 관계를 영원히 하고자 합니다” 임금이 대답하였다. 큰아버지 억렴(億廉)에게 딸이 있는데 덕이 있고 용모가 아름다우니, 이 사람 이외에는 집안일을 책임질만한 자가 없습니다.‘ 태조가 그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 분이 제8대 현종의 아버지로서, 안종(安宗)으로 추봉(追封)된 분이다.
975년 태조의 손자인 제5대 경종(景宗)은 정승공(경순대왕)의 딸을 왕비로 삼고, 정승공을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 상보(尙父) 도성령(都省令) 상주국(上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식읍(食邑) 일만호(一萬戶)에 봉하였다.
4. 경순대왕의 가족 사항
대왕은 신라김씨 원조이신 대보공 김알지( 추존 세조대왕)의 28세손이시고 신라 46대왕인 문성대왕의 6세손이시며, 부친은 신라 마지막 화랑으로 대아찬 시중을 역임한 효종랑(孝宗郞)이고 모친은 헌강대왕(憲康大王)의 공주이며 진성여왕의 질녀인 계아부인(桂娥夫人)인데 부친 효종랑은 효녀 지은(知恩)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해 종의 신분을 조 100석으로 변상하여 양민이 되게 한 아름다운 일화로 그 사실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돼 현재까지 전해질 정도로 인정이 후덕하고 의협심이 강하고 충성심이 많고 사리분별이 명쾌한 명망이 높은 분으로 경순대왕이 등극하자 신흥대왕으로 추존되었으며 모친은 계아태후로 추존되었다.
대왕의 비빈은 당초에 계림군 박광우의 따님 죽방부인 박씨를 왕비로 맞으셔서 태자(太子, 일(鎰, 마의태자, 부안김씨)과 계자(季子, 황(湟,나주김씨 비조〮, 범공선사) 명종(鳴鐘, 경주김씨) 등 3자와 덕주(德周)공주 1녀를 낳으셨으나 대왕이 신라 천년사직을 고려 태조 왕건에게 손국하자 죽방왕후께서는 손국 행렬에 따르지 않고 태자와 함께 상악(금강산)으로 표표(飄飄)히 떠났으며, 대왕께서는 송악에 이르러 왕건 태조의 따님이신 낙랑공주를 후비로 맞아 은열(殷說, 경주김씨), 석(錫, 의성김씨), 건(鍵, 강릉김씨), 선(鐥, 언양김씨), 추(錘, 삼척김씨)의 5형제와 2녀를 두었으며, 후에 낙랑공주께서 금강산 돈도암으로 입산하자, 다시 별빈(別嬪) 안씨를 맞으셔서 별자(別子, 9자,학성부원군,울산김씨)) 덕지(德摯)를 얻으셨기 때문에 대왕은 슬하에 9남3녀를 두셨다.
대왕께서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는 가없는 경천순민이 대의에 따라 천년사직을 손국한 음덕으로 대왕의 후손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신라김씨는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후손들은 대를 이어 국가의 지배층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오면서, 조선시대에는 5백여 개의 성.본으로 나누어지고 있었으나 1985년 현재 확인된 것은 227개만 확인되어 있고 수백만 명의 자손으로 번성하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한 제세안민과 인류문화, 역사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무수한 인걸을 배출한 세계적인 명문거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5. 마침내 영면에 드시자 시호(諡號)는 경순, 능침(陵寢)은 단릉(湍陵)에 뫼시다.
대왕께서는 978년 음 4월4일에 향년 82세로 개경에서 승하(昇遐)하시니, 시호를 경순(敬順)[효애(孝哀)라고도 한다}이라 하였으니, 이는 응천무운지경(應天撫運之敬)의 [[경(敬]])과 응시솔덕지순應時率德之順)의 [[순(順)]]을 따서 경순(敬順)으로 한 것으로, 대왕께서 천운을 헤아리시고 시류를 마땅히 살피셔서 동족상잔의 참화와 비극으로부터 오로지 억조창생(億兆蒼生) 생명을 구하신 가없이 크나 큰 경천순민(敬天順民)의 덕을 베풀은 고귀한 뜻을 함축한 것이다.
대왕께서 승하하시자 고려 조정에서는 대왕의 능침을 경기도 장단군 남팔리(현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리) 성거산줄기의 화장산에 인산(因山)으로 모시었다, 이곳 화장산은 동쪽에는 월봉산이 이 있고, 서쪽에는 성거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임진강이 흐르고, 북쪽에는 금릉파가 있는 지역으로 성거산의 한줄기가 서남쪽으로 흘러내린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팔백송이의 연꽃이 뭉쳐있는 화장룡이고, 금계포란형국으로 천하의 길지 명당이라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1592-1597) 이후에 한동안 실전된바 있었으나 영조3년(1727)에 후손 김굉(金宏,안동인)이 「경순대왕장지」라는 지석(誌石)을 발견하고 영조23년(1747)에 묘역을 찾아내어 영조대왕께 수치소(修治疏)를 올렸다. 이에 따라 능묘가 봉축하게 되었으며, 장단부사(長湍府使) 심봉징(沈鳳徵)으로 하여금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장단부에서는 매년 3월1일과10월1일에 춘추로 능향(陵香)을 봉행하고 관군으로 하여금 능묘를 수호토록 하였었다.
그 후 대왕 릉은 한일합방(1910), 한국동란(1950-1953)을 거치는 수난을 당하고 휴전 후 남방한계선에 소재하게 됨에 따라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으나 1975년에 사적 제244호로 지정되어 국가에서 경내일원을 보수하고 곡장(曲墻)과 일부석물(石物) 등을 개수하였으며, 【1987년에 문화재 당국에서 능역을 정비 정화하면서, 실전되었다 찾은 인산 때의 비석은 비각을 건립하여 봉수하고】, 영조대왕 때 건립한 비만 능묘 앞에 세웠고 재사(齋舍) 1동을 건축하였다. 이로써 삭막하던 대왕 능역이 최소한의 면모를 갖출 수 있게 된 것은 아주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조선조 때는 대왕 릉 주위10리가 다 능역(陵域)이었으나, 지금은 69,240평 정도만 남아있을 뿐이며‘그 나마도 1200평 정도만 사적지(史蹟地)로 지정되고 그 이외는 국유림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지금 휴전선남방한계선이고 군의 작전지역에 속하는 최전방지대이다.
인산 때 세웠던 비는 오랜 풍상으로 마모가 심해 육안으로 판독이 어려워 문헌의 기록에 의해 원문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
因山當時 敬順王碑文(인산당시 경순왕비문)
新羅敬順王之陵按天成二年戊子卽麗太祖十一年靑泰乙未卽麗太祖十八年也王新羅五六王後唐天成二年戊子代景哀王而靑泰乙未遜國于高麗宋太平興國戊寅麗景宗三年四月四日흉諡敬順以王禮葬于長湍古府南八里癸原至行純德英模懿烈聖上二十三年丁卯月日始立
(신라경순왕지릉안천성2년무자즉려태조11년청태을미즉려태조18년야왕신라56왕후당천성2년무자대경애왕이청태을미손국우고려송태평흥국무인려경종3년4월4일흉시경순이왕예장우장단고부남팔리계원지행순덕영모의열성상23년정묘월일시립)
대왕의 능은 신라 역대 56왕 중에서 유일하게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도 장단(현 연천 고랄포리)에 모셔저 있으며, 단릉(湍陵)이라는 능호(陵號)가 부여되었다.
신라시대에는 제왕에 대한 능호가 없었으며 모대왕릉(某大王陵)으로만 불리워 왔다. 능호는 고려 때부터 제정되어 태조 왕건의 능을 현릉(顯陵), 공민왕(恭愍王) 능을 현릉(玄陵)이라고 하는 등 능호가 제정되어 불리웠으며 조선에서도 그대로 이어받아왔다. 경순대왕은 신라의 임금이지만 고려 때 승하하셨기 때문에 경주가 아닌 장단에 능을 모시고 능호를 단릉이라 했다. 문헌에 조선21대 영조23년 (1747)의 어제 단릉 축문이 있다.
단릉축문(湍陵祝文, 영조어제)
維歲次丁卯五月二十五日朝鮮國王某謹遺臣長湍府使沈鳳徵昭告于新羅敬順王之陵新羅立國金櫃寶籙王丁末運天命將革生靈塗炭封疆日蹙量時度力南面無樂香車寶馬契圖籍廢履千乘爲麗三恪興廢有時人不用力維以安民王心惻隱維海悠時厥報靡특不億其孫慶膺沙麓有廟東川享祀無數大東千載王靈爀赫臨湍一杯王禮是式間經兵선 人莫能識理有顯晦今而乃得可徵可信幽誌顯刻爰命守土載新封築有感矛衷秤官奠爵謹以牲腥庶品陳式尙饗
知制敎 李德重 製進
유세차 5월25일
조선국왕 모(某)는 삼가 신(臣) 장단부시 심봉징(沈鳳徵)을 보내어 신라 경순대왕 능전(陵前)에 고하나이다
신라가 나라를 세운 것은 금독(金櫝)의 보록(寶籙)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왕께서 말운(末運)을 당하여 천명(天命)이 장차 개혁할 시기에 이르렀다,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봉강(封疆)은 날로 축소되니 시기를 살펴보고 역량을 헤아려 보건대 남면(南面)하여 임금하는 것이 즐겁지 아니하였다.
향거(香車)와 보마(寶馬)로 국가의 문서(文書)를 가지고 고려에 귀의(歸依)하여 천승(千乘)의 왕위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려조(麗朝)의 삼각(三恪)이 되셨다. 흥성하고 패망함이 때가 있으니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으며 오직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기 위하여 왕의 마음을 쓰심이 측은하고 애닯도다. 오직 바다같은 넓은 도량으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 보응(報應)이 어긋나지 아니하여 그 후손이 억(億)뿐이 아니로다. 경사로운 일은 사록처럼 많았고 묘우는 동천에 있으니 제사를 모심이 어긋나지 아니하여 대동에 천년을 이어왔도다.
왕의 정령이 혁혁하게 빛나서 단릉의 묘소에 임하였으며 왕의 제례로 공경하게 제사를 모셨으나 중간에 병란을 당하여 사람들이 능히 알지 못하였도다,
이치는 나타나고 막힐 때가 있으니 이제야 왕릉으로 확실하게 밝혀졌으며 가히 증거가 될만한 문적은 묻혀있는 지석과 확연하게 나타난 현각(顯恪0이로다. 이에 이 땅을 지키는 고을 부사에 명하여 곧 새로 봉축을 쌓았도다.
나의 충심에 감동하는 바가 있어 관리를 보내어 술잔을 올리고 삼가 생성(牲腥)과 서품(庶品)으로 공경을 다하여 제향을 올리오니 존령은 상향하옵소서.
지제교 이덕중 제진
정묘 5월25일(단기 4048, 서기1747, 영조23년)
주 ① 보록(寶籙) 임금이 될 전조(前兆)
② 봉강(封疆) 국토를 말함
③ 사록(沙麓) 모래언덕을 말함
④ 현각(顯刻) 돌에 새김
⑤ 삼각(三恪) 주나라 무왕이 虞 夏 殷의 후손에게 封한것
⑥ 남면(南面) 임금이 신하를 대할 때 남쪽을 향함
⑦ 생성(牲腥) 제사 때 쓰는 희생. 즉 소 양 대지를 말함
⑧ 서품(庶品) 여러 가지 제품
*** 경순대왕 전고(殿攷)*****
대왕께서 승하하시자 대왕의 능묘는 경기도 장단군 남팔리(현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리)에 인산으로 모시고 제향은 제왕의 예로 고려에 이어 조선조에서도 조정에서 춘추로 능향(陵享大祭)를 봉행하며 대왕의 인덕을 기리고 숭앙하고 있었다. 지금은 봉건 왕조시대가 종식되었고 민주 국가이기 때문에 능향 대제는 국가 차원이 아닌 문중차원에서 봉행할 수밖에 없게 되어 대왕의 능제(陵祭)는 신라김씨 원조이신 대보공 김알지로부터 파생된 각 성씨의 모임인 신라김씨연합대종원(新羅金氏聯合大宗원)에서 춘향대제(春享大祭)는 봉행하고, 추향대제(秋享大祭)는 경주김씨대종회(慶州金氏大宗會)에서 봉행해오고 있는데 재원 마련이 여의치 안아 제수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이에 대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아직 명확한 방도가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대왕의 능묘는 대왕께서 승하하시자 신라 천년의 열성조가 모셔진 경주에 마련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경주의 민심이 동요할 것을 우려한 고려 조정에서는 제왕의 능묘는 궁궐이 있는 개성의 100리 안에 조성해야 된다는 명분을 내세워 단릉에 모시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신라의 고도 월성(경주)의 이름 없는 백성들이 대왕의 경천순민의 대의에 따라 백성을 전쟁의 참화와 질곡에서 구하고 사랑한 자애롭고 사려 깊은 인덕을 기리고 흠모한 나머지 자발적으로 영당을 건립하고 영정을 모시고 제향을 봉행해온 것은 당시의 민심을 잘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묘전(廟殿)이 동천묘(東天廟)로 바뀌었다가 현재의 숭혜전(崇惠殿)으로 확장 개편되어 신라김씨 최초의 임금이신 미추대왕(味鄒大王)과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대왕(文武大王)까지 모시는 묘전이 되어 있다.
대왕의 인덕을 기리고 존숭하는 묘전과 사우는 역대 어느 제왕의 것보다 많아 조선 말기까지 전국에 산재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경주 숭혜전을 비롯해 전국에 6개의 묘전만이 남아 있어 매년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敬順大王 殿攷(경순대왕 전고) 현황
전호 | 향사일 | 소재지 | 주 관 | 비고 |
숭혜전 | 춘분일 | 경주시황남동 | 숭혜전릉보존회 | 미추대왕,문무대왕,경순대왕 |
숭인전 | 음9월19일 | 강원 평창 | 평창신라김씨종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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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묘 | 음9월9일 | 강원 원주 | 원주신라김씨종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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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모전 | 음4훨4일 | 충남 보령 | 보령신라김씨종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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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은전 | 음3월15일 | 경북 영주 | 영주종친보존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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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묘 | 음2월,8월丁일 | 경남 하동 | 하동 유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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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순대왕의 자손을 위한 역대 조선왕의 전교(傳敎) 내용
만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보우하는 일이 본인의 체면이나 왕위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시고 제왕의 자리를 기꺼이 선양하신 경순대왕의 거룩한 뜻은 동서고금의 역사를 망라해 보아도 유례가 없는 미증유의 사건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으며 그 거룩한 용단에 대하여는 백성들로부터 오랫동안 추앙받아오고 있는바, 이에 조선왕조에서는 정종(定宗(, 태종(太宗), 선조(宣祖), 효종(孝宗), 숙종(肅宗) , 영조(英祖), 정조(正祖), 순조(純祖), 헌종(憲宗), 철종(哲宗) 등 역대 대왕들께서 경순대왕의 거룩한 뜻을 기려서 대왕의 후손에게는 병역(兵役) 부역(賦役) 등 노력 동원에는 면제하라는 특혜의 전교가 내려졌었다. 이러한 전교를 내린 것은 대왕의 백성을 사랑한 성지(聖志)가 역대 어떠한 제왕보다도 크고 도탑고 거룩한 때문인데 이렇게 된 것은 대왕께서 승하하시고 경주를 비롯한 전국 도처에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대왕의 묘전과 영당을 건립하고 지금까지 천년이상 제향을 봉행해온 일과 더불어 대왕께서 가없는 경천순민의 대의에 따라 신라 천년사직을 평화적으로 손국한 세기적 결단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로 우리는 주목하고 그 숭고한 뜻을 받들고 깊이 아로새겨야 할 것이다.
그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定宗大王(정종대왕) 傳敎曰 敬順大王子孫雖殘孫賤裔勿侵賤役申勅事
(전교왈 경순대왕자손수잔손천예물침천역신자사)
●太宗大王(태종대왕) 傳敎曰 敬順大王後裔世恤其後錄用子孫雖是賤庶諸般軍役及沙 汰考講特勿侵責丁寧新勅事(전교왈경순대왕후예세휼기후록용 자손수시천서제반군역급사태고강특물침책정녕신칙사)
●宣祖大王(선조대왕) 傳敎曰 敬順大王子孫錄恤之典載在國典惑犯內私奴者自本官卽 爲放良勿定軍役之意再三傳敎事(전교왈 경순대왕자손록휼지 전재재국전혹범내 사노자자본관즉위방량물정군역지의재삼전 교사)
●孝宗大王(효종대왕) 下敎曰 敬順大王子孫錄恤之典載在國典惑犯內私奴者自本官卽 爲放良勿 定軍役之意再三傳敎事(하교왈 경순대왕자산록휼지 전교재국전혹범내사노자자본관즉위방량물정군역지의재삼전 교사)
●肅宗大王(숙종대왕) 傳敎曰 敬順大王子孫錄恤之典載在國典照然可攷考頃年累度號 牌之蘖勿 情軍役勿入講列事一依先祖受敎奉承傳施行事(하교 왈 경순대왕자손록휼 지전재재국전조연가고고경년누도호패 지천물정군역물입강열사일의선조수교봉승전시행사)
●英祖大王(영조대왕) 傳敎曰 敬順大王後裔勿情軍役有承先祖傳旨以遵金石之典事(전 교왈 경순대왕후예물정군역유승선조전지이준금석지전사)
●正祖大王(정조대왕) 傳敎曰 敬順大王後裔雖賤孼勿侵賤役勿入講列事再三申勅事 (전교왈 경순대왕후예수천얼물침천역물입강열사재삼신칙사)
●純祖大王(순조대왕) 傳敎曰 敬順大王後裔雖賤孼勿侵賤役勿入講列事再三申勅事 (전교왈 경순대왕후예수천얼물침천역물입강열사재삼신칙사)
●憲宗大王(헌종대왕) 傳敎曰 敬順大王後裔雖賤孼勿侵賤役勿入講列事再三申勅事 (전교왈 경순대왕후예수천얼물침천역물입강열사재삼신칙사)
●哲宗大王(철종대왕) 傳敎曰 敬順大王後裔雖賤孼勿侵賤役勿入講列事再三申勅事 (전교왈경순대왕후예수천얼물침천역물입강열사재삼신칙사)
* 조선 조 때 역대 임금님들께서 내린 전교 내용은 표현상으로는 다소 차이가 있는것 같지만, 내용의 본질은 대동소이 하다.
<경순대왕의 후손들에게는 세세토록 등용하고 비록 서얼 출신이라 하여도 병역에 배정하지 말며 제반 천역에 동원하지 말라고 특별히 전교한 것이다.>
7, 경순대왕 영정기(影幀記)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어진은 계자 湟왕자가 해인사 입산시 모봉한 경순왕 어진이다.
임금님의 초상화는 어진(御眞), 어용(御容), 수용(晬容), 진용(眞容), 성용(聖容), 왕영(王影), 영정(影幀)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인물화는 회화의 진수이고, 어진은 인물화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선발된 화가화원이 최상의 지질, 최고의 물감을 사용해서 그리고 제작하는 과정도 조선조의 경우는 '어진도감'이란 기구를 만들어서 예조판서와 최고의 감식안을 갖춘 인물을 감독관으로 선발해서 어진을 그리고 교정하고 마치게 했다. 그리고 어진을 그리면서 군신회의를 열어 얼굴 생김새 뿐만 아니라 옷주름 표현과 얼굴의 육리문(肉理文 살결문양)은 물론 터럭 한 올까지도 틀림없어야 할 정도로 철저한 사실성을 강조했음은 물론 주인공의 내면적 세계, 정신적인품, 즉 기품까지도 담아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임금님의 초상화, 어진이 탄생되고, 이렇게 만들어진 어진은 정전과 주요 궁전, 선원전(璿源殿)등에 모셔졌다. 조선의 선대왕조인 고려와 신라의 현존하는 어진은 거의 멸실되어 전래되어 오고 있지 않지만 어진은 그리고 보존하는 방법은 조선조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어진은 신라천년의 찬란한 문화가 꽃피웠던 점을 감안하고, 솔거와 같은 우리나라 5천년역사를 대표하는 화성(畵聖)의 맥을 이어온 신라에서 역대 임금님들의 어진은 모봉한 일은 회화사적으로 보나 문화사적으로 볼 때 매우 소중한 민족문화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천년왕국 신라도 국운이 다하여 935년 마지막 임금이신 경순대왕이 고려에 손국할 때 태자 鎰(일)과 季子湟(계자황)은 이를 극력 반대하였으나 가납되지 않자 태자는 개골산으로 입산하시고, 季子湟왕자는 가야산으로 입산하면서 부왕의 영정을 그려 모시고 해인사에 봉안하였으나 해인사가 화재를 당하자 부왕의 영정을 구해서 영천 은해사 충효암으로 이봉했다가 1778년에 경주 숭혜전으로 이봉했다는 기록이 경주김씨 문헌록등과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어진이나 영정에 대한 기록은 많이 있으나 우리나주김씨의 비조이신 경순왕 계자 湟왕자께서 가야산에 입산 범공선사가 되실 때 모봉하신 경순왕 어진은 현존하는 최고의 어진으로 밝혀지고 있다. 경주 숭혜전에 모셔져 있는 경순왕 어진(영정)은 5점이 있는데 이중 4점은 湟왕자께서 가야산에 입산시 모봉하였던 영정에 기초하여 모사한 것으로 2008년 11월 7일 경주 문화원 부선 향토 문화 연구소 제3회 학술대회에서 발표된바 있으며, 2010년 6월 12일 한국미술사 연구소 학술세미나에서 湟왕자께서 입산시 모봉하여 해인사에 봉안했던 경순왕 어진이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어진임을 제1부 학술발표 최고의 어진, 신라 경순왕 영정의 회화사적 의의 (발표자 정병모 경주대학교 교수)에서 소개된 바 있다.
참으로 계자 湟왕자께서 망국한을 품으시고 가야산에 입산하실 때 그려 모셨던 영정이 이렇게 회화적으로, 문화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어진으로 평가 받는다는 것은 후손된 입장에서 매우 고무적이고 가슴벅찬 일이라 하겠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 문중에서 2007년에 사료를 발굴하여 2008년 3월에 경주 숭혜전 김병호 참봉과 교감을 갖고 문헌자료를 제공하고 이에 기존하여 회화사를 전공한 대학교수 등 전문가가 참여한 두차례의 학술대회를 통해 이루어 낸 성과이다.
숭혜전에 보존되어 있는 해인사본(황왕자가 해인사 봉안)은 현재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앞으로 국가 보물이나 문화재로 지정을 준비중에 있다.
경순왕 어진에 대한 기록은 경순대왕의 영정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조때 후손 경주김씨 사목공 등이 쓰신 2편의 영정기가 있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경순대왕께서 고려에 손국한 후 원주 고자암 등을 순회하실 때 스님들께서 그린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진실로 경순왕의 어진이라 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어진이라 함은 임금님으로 계실 때 최고의 어진화가가 절차를 밟아 임금님의 존엄과 기품을 담아 그린 초상화가 진짜 어진이지 양위하시고 사찰 등을 순회할 때 스님 등이 그린 초상화는 어진이라고 하기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생각된다.
첨부 : 경순왕 영정의 계보(한국의 미술사연구소 학술 세미나 정병모 경주대 교수 자료)
8 결어; 경순대왕 손국의 역사적 의의
경순대왕께서 가없는 경천순민의 대의에 따라 신라 천년사직을 신흥 고려 태조에게 평화적으로 손국한 세기적 결단은 인류역사상 유례가 거의 없는 일로 이로 인해 후세에 끼친 영향이 심대하고 역사적 의의 또한 엄청나게 크다고 하겠다. 때문에 대왕에 대한 평가는 일부에서는 나약하고 무능한 군주라고 하는 사람들도 더러는 있지만 대다수는 긍정적으로 백성을 전쟁의 참화에서 구하고, 찬란한 신라천년의 문화가 온전히 보전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빛을 발휘하게 한 자애롭고 사려 깊은 대왕으로 길이 기려져 이름 없는 백성들에 의해 세워진 대왕을 존숭하는 묘전과 사우가 역대 어느 제왕 보다 많았으며 현재도 경주 숭혜전을 비롯해 전국 도처에 6개의 묘전이 있어 매년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손국에 따른 평가와 의의를 대략 정리하면,
첫째로, 평화적인 손국으로 신라의 제도와 문물, 인적 자원의 기본 틀이 큰 변화와 충격 없이 그대로 고려에 계승되었으며 이어 조선으로 까지 이어지게 되어 우리나라 원류가 되었다.
둘째로, 신라의 찬란한 천년의 문화와 역사가 온전히 보전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세계 문명사에 찬란하게 빛날 수 있도록 하고 우리 배달민족이 문화 민족임을 세계만방에 알리게 한 것이다
셋째로, 대왕의 후손들이 오늘날 남북한 합쳐 수백 개의 성,본에 1천만을 헤아리는 세계적인 명문거족으로 번성하여 인류문화와 역사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게 한 것이다
넷째로, 경순대왕의 손국은 무고한 생령들을 전쟁의 참화와 침탈에서 구하고 보호한 군왕으로 각인되어 대왕을 기리고 존숭하는 묘전과 사우가 백성들에 의해 전국 도처에 세워졌었고 지금도 역대 어느 제왕보다도 많은 6개가 남아있다.
다섯째, 대왕의 손국으로 고려시대 현종 이후 왕들은 모두 신라김씨 외손이 계승하게 되었으며, 조선조에서는 정종을 비롯한 10대왕들이 대왕의 후손들에게 군역이나 천한 일을 면제하도록 거듭 전교를 내려 특단의 배려를 하였다.
2018년2월
세조대왕(추존)대보공 김알지65세손,나주군36세
사단법인 범공선사 숭선연구회 회장 김근학 근식
✿✿✿✿✿✿✿✿✿이글은 경순대왕의 약사를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동사강목 증보문헌비고 신라김씨계 문헌 및 사료, 보책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 검토 참고하여<<< 경천순민의 대의를 실천한 자애로운 임금, 경순대왕 >>>이라는 제목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다른 참고 자료를 갖고 계신 분이 있으시면 질정과 협조를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면 계속 보완토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