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이씨 족보는 1643년 발간된 계미보가 최초의 족보이다.
이는 강원도 관찰사 이유당공(휘 덕수)이 간행할 것을 발의하였고, 죽천공(휘 덕형), 석루공(휘 경전), 독우공(휘 흥록)의 협조로 상 ·하 2권 1질로 간행 되었다.
네분과 술선록 지은이 와의 관계도
*이덕수 :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사로(師魯), 소자(小字)는 여숙(汝淑), 호는 이유당(怡愉堂). 충훈부경력(忠勳府經歷) 이 언홍(李彦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무주현감 이소(李沼)이다. 아버지는 이도(李濤)이며, 어머니는 성주 이씨로 이석명(李碩明)의 딸이다. 현감 이준(李浚)에게 입양되었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06년(선조 39) 진사가 되고, 1608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가 정자가 되었다가 저작·박사를 역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 때 장인 조수륜(趙守倫)과 함께 연루되어 이산으로 유배되었으며, 1618년에 창평으로 이배되었다가 1621년에 풀려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등용되어 전적에 임명된 뒤 예조좌랑 겸 춘추관의 기주관과 지평(持平)을 지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공조정랑으로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어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1632년 부수찬으로서 왕세자 가례(嘉禮)를 잘 수행한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1634년 우부승지로 있을 때 강석기(姜碩期) 등과 인조의 사친(私親)인 원종(元宗)의 입묘(入廟) 논의에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연산에 귀양갔다가 1636년에 풀려나 승지가 되었다.
이듬 해 좌부승지로 관서 지방에 무재(武才) 시험관으로 갔다가 병자호란을 당해 부득이 돌아오지 못하고, 영북(嶺北)으로 가 여러 도에 격문을 보내고 격려하다가 이듬 해 돌아와 승지가 되었다. 그 뒤 이조·형조의 참의와 여러 차례의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호란 후 청나라의 갖은 횡포가 심해지자, 표면상으로 그들을 위문한다는 명목으로 적진에 들어가 정황을 살피고 돌아왔다. 1641년 한 때 강원감사로 나갔으며 이조참의로 있다가 죽었다. 좌찬성으로 추증되고 청주의 국계사(菊溪祠)에 제향되었다.
*이덕형 :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원백(遠伯), 호는 죽천(竹泉). 관찰사 이언식(李彦湜)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호군 이오 (李澳)이며, 어머니는 민원종(閔元宗)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1597년에서 1608년까지 봉교(奉敎)·정언·지평·수찬·부교리·헌납·전적·문학·집의·교리·부응교·사간·사예·사섬시부정·응교·시강원보덕·사도시정(司䆃寺正) 등을 거쳤다. 광해군 때에도 응교·동부승지·승지·대사간·좌부승지·부제학·이조참의·우승지·병조참판·도승지 등의 경관직(京官 職) 과 나주목사·전라감사·황해감사 등의 외관직을 지냈다.
특히,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해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킬 때에 직접 반대의 입장에 서지 않고, 왕의 뜻에 따르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광해군 말년에 도승지로 있을 때 세태가 어지럽자, 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인조반정 때 광해군을 죽이지 말 것을 주장했으며, 이를 본 능양군(綾陽君)이 충신이라고 판단해, 반정 후 인목대비를 맞이하는 의식에서 이덕형을 앞세워 반정을 보고했고, 능양군에게 어보(御寶)를 내리게 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인조 때는 한성부판윤이 되어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품계가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오르고, 주문사(奏聞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에 호종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 호종하였다. 환도 후 숭록대부(崇祿大夫)로 품계가 올라 예조판서·판의금 부사·지돈녕부사·우찬성 등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죽창한화(竹窓閑話)』·『송도기이(松都記異)』 등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이경전 :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집(仲集), 호는 석루(石樓). 이치(李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지번(李之蕃)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이며, 어머니는 조언수(趙彦秀)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96년 예조좌랑·병조좌랑을 지내고, 1608년 정인홍(鄭仁弘) 등과 함께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옹립을 꾀하는 소북 유영경(柳永慶)을 탄핵하다가 강계에 귀양갔다.
이 해 광해군이 즉위하자 풀려나와 충홍도(忠洪道)·전라도의 관찰사를 지내고, 1618년(광해군 10) 한평군(韓平君)을 습봉(襲封)하고 좌참찬에 올랐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서인들에게 아첨하여 생명을 보전하고,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의 책봉을 요청하였다.
이어 한평부원군(韓平府院君)에 진봉되고, 1637년에 장유(張維)·이경석(李景奭) 등과 함께 삼전도(三田渡)의 비문 작성의 명을 받았으나 병을 빙자하고 거절하였으며, 1640년 형조판서를 지냈다. 문필이 뛰어나 이름이 높았으며 저서로는 『석루유고』가 있다.
*이흥록 : 1600년(선조 33)∼미상. 조선 중기 문신‧공신이다. 자는 성중(成仲), 호는 추옹(楸翁).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출신지는 전라북도 전주(全州)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이며, 증조부는 이래(李䅘) 조부는 이사철(李師哲) 부친은 증좌승지(贈左承旨) 이극겸(李克謙)이다. 외조부는 유광하(柳光河)이며, 처부는 채굉(蔡宏)이다.
천성이 비범하고 영리하였으며 김동준(金東準)의 문하에서 학업하였다.
1633년(인조 11) 계유식년문과 병과(丙科) 18위로 급제하였다. 1637년(인조 15) 학유(學諭), 1642년(인조 20) 성균관학록(成均館學錄), 다음해 보안찰방(保安察訪), 1646년(인조 24) 전적(典籍), 1649년(효종 1) 양산군수(梁山郡守), 1664년(종 5) 인동부사(仁同府使) 1671년(현종 12)에 예빈시정(禮賓寺正) 등을 거쳤다.
성품이 강직하여 광해군 때 폐모론에 반대하는 글을 써 많은 사람들의 숭모를 받았다. 1623년(광해군 15) 폐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 글이 광해군에 도달하기 전에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형 이경록(李景祿)과 함께 공주(公州)로 달려가 왕을 호종하여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1646년(인조 24) 유탁(柳濁)의 반란을 토평하여 녹훈(錄勳)이 가해졌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유당공은 계미보 범례 마지막에 이러한 글을 남겼다.
몇십년이 흐른후 교관공 지행은 술선록에 세계 오서변을 쓰셨다.
1740년 경신보나, 1846년 병오보, 1904년 을사보, 더 나아가 1937년 왜정 정축 인재공파 파보까지의 족보에는 2세 휘 인간과 휘 효진을 형제로 기록한것을 위의 내용에 의해 1979년 한산이씨 대동계도보와 1994년을 전후해 발행된 삼파문중 파보부터는 2세 휘 인간, 3세 휘 효진 으로 수정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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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미보 서, 범례 한산이씨 이야기 | 계미보 서, 범례, 가정사적, 목은사적 등 1쪽~30쪽 (상권) - Daum 카페
계미보 상권 1 한산이씨 이야기 | 계미보 31쪽~66쪽(상권)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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