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철물점
이경주
PARAN IS 16∣2025년 12월 15일 발간∣정가 12,000원∣B6(128×208㎜)∣132쪽
ISBN 979-11-94799-21-4 03810∣(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골목 끝에 떨어지는 고욤나무 이파리가 지구보다 깊다
[발해철물점]은 이경주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으로, 「스키드마크」 「발해철물점」 「워커」 등 60편이 실려 있다.
이경주 시인은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으며, 2022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발해철물점]을 썼다.
이경주 시인의 첫 시집 [발해철물점]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것들에서 삶의 이면과 원리를 찾아낸다. 이경주 시인의 눈에 띄는 대상들은 한결같이 우리 모두 한때 소중하다고 여겼던 것들이다. 이들 대상과 ‘나’ 사이의 동질감을 찾아내고 드러낸다. 시 속에 드러난 내면 풍경이 그것인데 이는 조화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과 맞닿아 있다. 그 세계는 대부분 익명 아닌 실명으로, 감춰짐이 아닌 은근한 드러냄으로, 격렬한 거부보다는 견딤과 순응의 몸짓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이런 세계가 과거 그리고 볼품없는 모습 속에 감춰져 있었다면, 맞섬의 몸짓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래서 시인의 눈길은 촉촉하고 따뜻하고 정겹다. 그렇다고 냉정한 관찰자의 입장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이런 절제와 온기는 이경주 시인이 지닌 특징이자 덕목이다. 이것은 그의 시에 개성을 이루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리고 생에 대한 더 깊은 통찰을 통해 시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넣는 작업으로 이어질 것이라 믿는다. (이상 신덕룡 시인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이경주 시인은 풍경화가이다. 그리고 그는 풍경의 완성이 인간이라는 것을 안다. 겸제의 산수화 속에 희미하게 들어앉은 뱃사공이나 노인처럼 자연 속의 인간은 일견 왜소해 보이지만 그 인간의 존재 때문에 풍경화는 인생화가 되어 버린다. 그는 고흐가 그린 농부의 비틀어진 신발 한 켤레처럼 공사장 옆에 버려진 워커를 포착하고(「워커」), 횡단보도에 떨어진 장갑 한 짝을 발견한다(「장갑」). 메기를 보며 “붓꼬리 수염 휘날리는 학승들”의 모습을 떠올리고(「남한강메기매운탕」), 고물상에 세워진 리어카의 꽁무니에 매달린 폐타이어의 긁힌 자국에서 삶의 기록을 읽는다(「질주」). 비둘기들에게 쪼아 먹히는 쓰레기봉투에서 야생의 성찬을 보는가 하면(「비닐 성자」) 시든 푸성귀를 팔지 못하고 수습하는 할머니의 난전에서 어린 자식들의 시선을 발견한다(「슬하」). 암 병동 앞 로또 한 장을 든 환자나(「복권을 든 남자」) 리어카를 끄는 노인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붕 위에 비닐을 눌러놓은 벽돌들 같은 사물에서도 안간힘을 읽어 내는 것은 이경주 시인의 인간적인 깊이를 엿보게 한다. 그리고 그 한 경지에서 시인은 사실의 오브제만으로 한 편의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필 상호가 ‘엄마손칼국수’인 국숫집을 지나다가 국수를 주린 속으로 밀어 넣는 사내들의 늦은 점심을 따뜻한 엄마의 품으로 데려다 놓는다(「엄마손칼국수」). 가히 인생의 한 장면이라고 하겠다. 따뜻하면서도 절제된 붓놀림이다. 거리의 성화이다.
―이현승 시인
•― 시인의 말
눈앞에 떠다니는 풍경들을 가슴에 옮겨 놓는다.
이 조그만 것들에도
무게가 있다.
골목 끝에 떨어지는 고욤나무 이파리가
지구보다 깊다.
•― 저자 소개
이경주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2022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발해철물점]을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스키드마크 ‒ 11
가족에 대하여 ‒ 12
로드킬 ‒ 13
구두 닦는 시간 ‒ 14
경건한 아침 ‒ 16
발해철물점 ‒ 18
장갑 ‒ 21
벌초 ‒ 22
슬하 ‒ 24
비닐 성자 ‒ 26
등을 내밀다 ‒ 28
역전(逆轉) ‒ 30
판공성사 ‒ 31
엽록체에 대한 기억 ‒ 32
평토장 ‒ 34
제2부
워커 ‒ 37
둥지 ‒ 38
강원도식당 ‒ 40
질주 ‒ 42
숟가락 ‒ 44
착한 개 ‒ 45
복권을 든 남자 ‒ 46
껌을 씹다 ‒ 48
감자를 삶으며 ‒ 50
재를 넘다 ‒ 52
보일러 ‒ 54
터지는 찐빵집 ‒ 55
회식 ‒ 56
안양장례식장 10호 영안실 ‒ 58
속없는 돼지 ‒ 60
가래침 ‒ 62
제3부
사과나무에 대한 경배 ‒ 65
시다, 라는 말 ‒ 66
벽돌들 ‒ 68
동행 ‒ 70
명화식당 ‒ 72
퀵서비스 ‒ 74
오래된 사진 ‒ 76
하늘 ‒ 77
중고차 파는 날 ‒ 78
껌딱지 ‒ 80
시골 정류장 ‒ 82
천국은 시끄럽다 ‒ 84
장항선 ‒ 86
바다가 있는 달력 ‒ 88
엄마손칼국수 ‒ 90
제4부
남한강메기매운탕 ‒ 93
불타는 오금공원 ‒ 94
붉은 단추 ‒ 95
벨 소리 ‒ 96
손가락탕 ‒ 98
금연 구역 ‒ 100
냉장고 ‒ 102
고라니의 마을 ‒ 104
버스 기다리는 사람들 ‒ 106
폐업 정리 ‒ 108
거미줄 ‒ 110
비둘기 민원 봉사실 ‒ 112
개심사 해우소 ‒ 114
젖어 들다 ‒ 116
해설 신덕룡 생의 이력 들춰내기 ‒ 118
•― 시집 속의 시 세 편
스키드마크
경사진 골목길을 내려가는
리어카
꽁무니에 붙은 폐타이어가
온몸으로 급하게
바닥을 쓸고 있다
바람 빠진 몸에서도
저렇게 쓱쓱, 살 벗겨지는
소리가 울려 나온다
타이어가 새까맣게
길을 내는 언덕
허리 굽은 노파가 닳아 버린
가슴을 끌며 지나간다 ■
발해철물점
버스 정류장 바로 앞
시장 입구에 있는 철물점
반쯤 열린 유리문 사이로
뭔가를 다듬고 있는 늙은 주인이 보인다
굵게 패인 주름
깊은 비밀이 담겨 있는 듯한 눈빛
분주히 오가는 발길과 자동차 소음 속에서
바위처럼 앉아 있는 그는
좁은 반도의 반쪽 땅
이 도시 귀퉁이로 흘러온 고독한 유민일까
지금 그가 닦고 있는
기다란 쇠붙이 같은 것은
머나먼 왕국에서 들고 온 유물일까
어쩌면 그 옛적 초원을 달리던 용사들에게
칼과 창, 철촉과 등자를 만들어 주던
강인한 팔뚝의 대장장이는
그의 오래된 선조
불타는 이백 년 수도를 뒤로한 채
식솔들과 먼 남쪽으로 발을 옮기면서도
품 안에 깊이 숨긴, 가문의 명검
한 자루쯤 있었으리라
풀무와 망치질 대신
전깃줄과 고무호스, 빗자루를 팔며 연명하지만
대륙 회복의 꿈은 천년을 이어 온
누대의 유언이리라
북쪽 하늘 보이는 발해철물점
낡은 의자 위에서
긴 세월 날 벼리며
무변광야로 달려갈 영웅 기다렸을 이
오오, 저 손에 들어 올려질
눈부신 서슬
상경용천부를 뒤흔들 천리준마들이여
노인의 무릎을 향해 뻗는 내 손끝에
와 닿는 쇠붙이의 향기
가슴속에는 뭉클한 불꽃이 돋는다
서서히 버스가 출발하고
철물점은 멀어지고
오래도록 잊혔던 왕조의 후손이
아스팔트 먼지 속에 다시 묻혀 간다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숙명의 무게와
기나긴 기다림을 말없이 버텨 왔을 간판도
울컥 솟아오른 망국의 슬픔이 펼쳐 놓은
붉은 하늘 아래
아득하게 사라져 간다 ■
워커
아파트 신축 공사장 옆
길가에 버려진 워커
꽁꽁 조인 끈들 다 풀어 주고서
누가 여기에 놓고 갔나
한때의 탄력과 단단함
다 소진해 버리고
푹 고꾸라져서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 같다
가끔은 빠져나간 발이 생각나는지
헐렁한 제 거죽을
오므려 보기도 하는 워커
그 깊은 주름 사이로
살며시 파고드는 햇살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