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1~7 하나도 없도다! 2020. 8. 26
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5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6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7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본문 1절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이 내용은 시편 10:4절에서 보았습니다. 시편 53:1절은 오늘 본문과 똑 같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모든 사상과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에 당연히 교만할 수밖에 없으며 부패하며 행실이 가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본문 2~3절입니다. “봉독”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펴보십니다. 그 이유는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고 살펴보십니다. 그런데 다 치우쳐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자입니다. 여기서 어리석다는 말은 세상에서 말하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는 이해타산에 밝지 못하여 손해를 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어리석은 자는 세상에서 똑똑하고 잘나서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자들이기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이 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6: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모든 인간이 이러합니다.
창세기 6:11~12절입니다. “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어떻게 의인이며 당대에 완전한 자며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있습니까?
창세기 6:8~10절입니다.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노아가 의인이며 당대에 완전한 자며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과 창세기 6장을 함께 살펴보면 타락한 모든 인간은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팔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만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방주를 만들라는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그런데 홍수이후에도 인간의 마음과 생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창세기 8:20~22절입니다.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1)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노아가 은혜를 입어 방주를 만들고 방주에 타서 구원을 받는 것도 대신 희생임을 홍수 이후에 정결한 짐승이 번제로 제단에 드려짐을 통하여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사람의 행위대로 땅을 저주하시면 날마다 홍수로 심판을 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입니다. 홍수이후에도 인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은 땅이 있을 동안 계속 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이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아 물에 태워질 때까지 인간의 악함은 계속 나오기 마련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무지합니다. 여기서 무지란 앞에서 말한 대로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세상에서 똑똑하고 잘나서 다른 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집어 삼키는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약함과 가난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없다는 악한 자들이 떡을 먹듯이 잡아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않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부르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이기에 스스로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사야 64:6~7절입니다. “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우리의 의가 더러운 옷입니다. 잎사귀같이 시들며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갑니다. 이러함에도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입은 의의 옷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주님은 얼굴을 숨기시기에 죄악가운데 다 소멸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8~9절입니다. “8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9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자신이 땅의 먼지이며 티끌임을 인정하는 것이 은혜를 입은 모습입니다. 진흙임을 아는 자는 주님이 토기장이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너무 분노하지 마시고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간구도 주의 영이 임하여야만 되기에 스스로 주를 찾는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호세아 11:1~7절입니다. “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5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7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습이 이렇습니다. 주께로 돌아올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어지는 8~11절입니다.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10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11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스스로 돌아올 수 없기에 하나님의 긍휼로만 구원하여 내심을 너무나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5 절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악인이 악을 행하여도,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하여도, 불법으로 사익을 취하여도 즉각 심판이 임하지 않으니 간이 커진 겁니다.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노아홍수 때에는 전 지구적으로 일어났지만 그 후로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부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신다는 말씀은 노아처럼 은혜를 입은 자들이 방주를 타고 구원을 받는 모습입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오는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잠시 두려워하겠지만 그러나 조금 지나면 다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악인의 모습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 시편에서 가난한 자들 곧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난한 자들의 계획을 좌절시키며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들이 악한 자들입니다. 이런 악한 자들의 사상과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횡포로 인하여 가난한 자들은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힘을 추구하며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세우려고 하는 자들은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세상에 의지할 것이 없어서 여호와를 그들의 피난처로 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합니다(눅6:20).
본문 7절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 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 하여 나와서, 하나님의 장자의 나라, 제사장의 나라로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에서 돌이켜 주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합니다. 출애굽만이 아니라 바벨론 포로에서도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할 소식은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인데 그 구원이 시온에서 나옵니다. 예루살렘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조금 전 호세아에서 본 대로 출애굽한 자들이 계속하여 애굽을 의지하기에 애굽을 망하게 해서라도 주님의 품에 안으심이 긍휼입니다.
호세아 11:1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이 말씀을 신약 어디에서 인용하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2:13~15절입니다.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ㄴ)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피신하신 것은 호세아서 말씀의 성취입니다. 그러므로 시온에 오신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여 내십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여 내십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나설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찾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 먼저 인식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찾아간 신은 우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단 한 사람도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자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죄의 포로에서 돌이켜 주십니다.
로마서 3:9~12절입니다.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1)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ㄴ)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 여기에서 인용이 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는 결과가 어떤 모습입니까?
13~18절입니다. “13 ㄷ)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ㄹ)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ㅁ)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ㅂ)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ㅅ)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에 나오는 모든 내용이 다 구약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다는 유대인들이 이런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이방인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19~20절입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을 주신 목적입니다. 율법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시판 아래에 있게 하는 겁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율법을 죄를 깨닫게 하는 용도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이 뜻을 모르고 율법의 행위로 자기들의 의를 삼았기에 실패합니다.
21~28절입니다.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3)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시편 14편을 시작으로 창세기와 이사야와 호세아를 거쳐서 로마서까지 보았습니다. 이제 시편 14편 전체를 다시 봅니다. “봉독” 처음 읽을 때와 지금 읽은 때의 차이가 있을 겁니다.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는 말씀에 아멘이 됩니다.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피로 죄의 포로에서 돌이켜 주십니다. 이렇게 구원받아 나오는 자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았음을 알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