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 성주(星州)의 경계까지 13리, 서쪽은 전라도 무주현의 경계까지 38리, 남쪽은 거창군(居昌郡)의 경계까지 46리, 북쪽은 김산군(金山郡)의 경계까지 15리고, 서울과의 거리는 6백 24리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지품천현(知品川縣)이었는데, 경덕왕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개령군에 소속되었다. 고려 현종 때에 경산부(京山府)에 소속되고, 공양왕 때에 감무를 두었으며, 본조 태종 때에 현감으로 고쳤다.
【속현】 두의곡부곡(頭衣谷部曲)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지품천(知品川)ㆍ귀성(龜城)
【성씨】 본현 박(朴)ㆍ전(錢)ㆍ장(張)ㆍ강(康), 이(李)ㆍ문(文) 모두 내성(來姓)이다.
월이곡(月伊谷) 박(朴) 속성(續姓)이다.
두의곡(頭衣谷) 주(朱) 속성(續姓)이다.
【형승】 천년반곡(千年盤谷) 장지도(張志道)의 시에, “천년 반곡은 모든 구역이 평평하고 앞봉우리의 끊어진 벼랑을 점령하여 돌성[石城]을 세웠다.” 하였다.
【산천】 귀산(龜山) 현의 남쪽 2리에 있는 진산이다.
대덕산(大德山) 현의 남쪽 40리며, 전라도 무주현의 임내(任內)ㆍ무풍(茂豐) 현의 경계에 있다.
우마현(牛馬峴) 현의 남쪽 46리, 거창현 경계에 있다.
부항현(釜項峴) 현의 서쪽 37리에 있다.
병현(餠峴) 현의 동쪽 12리, 성주의 경계에 있다.
감천(甘川) 현의 동쪽 1리에 있다. 그 근원이 셋이 있는데, 하나는 부항산, 하나는 우마현에서, 또 하나는 대덕산에서 나와 귀산 밑에서 합치어 동북쪽으로 흘러서 김산군의 경계로 들어간다.
남산(南山)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문암산(文巖山)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사건점산(沙件帖山) 현의 남쪽 9리에 있다.
【토산】 은어[銀口魚]ㆍ꿀[蜂蜜]ㆍ송이[松蕈]ㆍ석이버섯[石蕈]ㆍ잣[海松子]ㆍ석류.
【봉수】 귀산 봉수 남쪽은 거창군의 거말흘산(巨末訖山)에, 북쪽은 김산군의 고성산(高城山)에 응한다.
『신증』
【궁실】
객관 이첨(李詹,雙梅堂 1345~1405)의 시에, “마을 입구가 처음에는 좁다가 점점 넓고 평평해지는데 난을 피한 산꼭대기에는 옛 성이 남아 있다. 도장의 전자 글씨는 새로 정한 호(號)를 새겼지만, 현관(縣官)은 아직도 옛 이름을 지녔네. 어량(魚梁 물을 막고 통발을 놓은 곳)에 물이 가득 푸짐한 가을도 흥겨운데, 객지의 길에 날씨가 맑으니 들 정취가 흐믓하구나. 다행히도 사군(使君 원님)과 약간의 안면이 있어, 동헌에 술상을 차리고 나를 위로하네.” 하였다.
○ 장지도(張志道)의 시에, “천년 반곡은 전 구역이 평평한데, 앞봉우리를 끊어서 차지하여 돌성을 세웠다. 옛부터 내려온 토성(土姓) 몇 집인가. 지금까지 열 집이 관명(官名)을 얻었다. 처마 끝에 늘어진 감과 밤은 산중의 맛이요, 추녀 끝에 서린 구름과 연기는 세상 밖의 정취로다. 좋은 시대에 일찍 버림받았음을 한탄하지 말라. 한가한 나그네 되어 한가롭게 가는 것도 좋지 않으냐.” 하였다.
○ 조박(趙璞)의 시에, “금정(金井)에서 오는 길 평탄한 곳 없더니, 어찌 산중에 성이 있었던고. 지나는 나그네가 시를 지어 그런대로 기사(記事)하는데, 사는 백성은 세상을 피하여 이름을 구하지 않네. 밭가는 늙은이와 뽕따는 여인네 풍류스러운 맛을 풍기고 수풀의 새와 시내의 고기는 타고난 성정(性情) 그대로구나. 땅이 궁벽하여 소송하는 날에 오는 이 적으니, 말고 한가로움이 사신의 행차를 위로할 만하구나.” 하였다.
○ 조위(曺偉)의 시와 서문에, “귀성(龜城) 담 밑에 낡은 매화 두 나무가 있는데, 매년 꽃이 만발한다. 을미년 봄에 내가 그 현을 지나면서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고, 그 겨울에 또 두 수를 지었다. 그 뒤 을묘년에 다시 지났더니 관우(館宇)를 고쳐 짓고 그 동쪽 담을 넓혔는데, 매화는 잎이 우거지고 안을 만큼 아름으로 뜰 가운데 그대로 있었다. 흐뭇이 바라보기 20년에, 그 물색(物色 풍경과 모습)이 의연하여서 머뭇거리며 오래도록 감개무량해 하였다.” ○ “밤비에 차가운 날씨 옥 같은 살갗을 여위게 하는데, 아침에 나무를 안고 돌며 긴 가지를 휘어당겨 본다. 지금은 파발 사자의 소식도 없으니, 비록 한향(寒香)을 잡은들 누구에 붙여 줄 것이랴.” ○ “눈 같은 꽃잎, 얼음 같은 꽃술, 아직도 피지 않았는데, 삭쟁이 진 곧은 가지, 낡은 담모퉁이에 서 있다네. 한 가지 휘어잡고 봄 소식 묻고자 하다가, 유랑(劉郞)이 이제 혼자서 온 것 크게 웃었네.” ○ “옥 같은 꽃송이 가지에 엉겨붙어 붉은 비단 묻은 듯한 것은, 봄바람이 세월의 빛난 것을 관령(管領)함인 것일세. 정녕 올해에는 강남 소식 있을 것이므로, 반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이미 집에 이르렀도다.” 하였다.
○ 조신(曺伸)의 시에, “본래 먼 고야(姑邪) 선녀의 곱다란 살갗이니, 평범한 풀이나 속된 꽃가지와 같을 리 없다. 이 열매가 음식의 맛을 고르는 것은 전부터 알았으나, 비바람에 시들어 떨어진다고 어느 누구를 원망할까.” ○ “천겹 깊이 감춘 재주, 반도 피지 못하고 거칠고 더러운 곳에 몸을 던져 정자 모퉁이에 피해 있구나. 꽃다운 넋은 봄빛 가득하기를 기다릴 수 있으나, 옥 같은 자질은 불러일으킬 방법 없구나.” ○ “늙은 눈이 몽롱하여 엷은 깁을 격해 보는 것 같으니, 어찌 서울의 화려한 곳을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밟을 수 있으리. 공의 시구를 매계(梅溪) 위에서 외니, 고산 처사(孤山處士)의 집에 있는 것 같도다.” 하였다.
【학교】 향교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두의곡역(頭衣谷驛) 두의곡 부곡에 있다.
작내역(作乃驛) 현의 북쪽 10리에 있다.
선원(禪院)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소연원(所淵院) 현의 남쪽 6리에 있다.
석곡원(石谷院)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두의곡원 두의곡 역의 남쪽 1리에 있다.
소지원(所旨院) 우마현에 있다.
상좌원(上佐院) 현의 북쪽 14리에 있다.
【불우】 봉곡사(鳳谷寺) 문암산에 있다.
남산사(南山寺) 남산에 있다.
궁곡사(弓谷寺) 사건점산(沙件岾山)에 있다.
【고적】 월이곡 부곡(月伊谷部曲)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사등량 부곡(沙等良部曲) 월이곡과 같은 마을에 있다.
두의곡 부곡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귀산성(龜山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3백 43척, 높이가 9자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귀산성 안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인물】 본조 장지도(張志道) 과거하여 벼슬이 기거주지의주사(起居注知宜州事)에 이르렀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자제들을 가르치며 깨우쳐 주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효자】 본조 윤은보(尹殷保) 같은 현의 서즐(徐騭)과 함께 장지도에게서 배웠다. 서로 말하기를, “사람은 군(君)ㆍ사(師)ㆍ부(父) 셋을 한결같이 섬기면서 살아야 하는 법인데, 우리 스승은 봉양할 아들이 없으니 어찌하랴.” 하고, 좋은 날이면 반드시 술과 음식을 갖추어 대접했고, 특별히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언제나 대접하여 아버지처럼 섬기었다. 스승이 죽자 두 사람 모두 아버지에게 시묘하겠다고 청하였는데, 아버지는 측은하게 여기고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검은 관[玄冠]을 쓰고 삼띠를 두르고 무덤 곁에서 시묘하면서 몸소 메를 지어 바치었다. 은보의 아버지가 병이 들었을 때에도 돌아가서 약을 받들면서 삼띠를 풀지 아니하였다. 아버지의 병이 낫자 곧 여막으로 돌아왔는데, 한 달 남짓하여 은보가 이상한 꿈을 꾸어 급히 돌아가 보니, 과연 아버지가 병이 나서 열흘도 못되어 죽었다. 아침 저녁으로 곡하며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장례가 끝나자 아버지의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시묘하였다. 하루는 바람이 세차게 일어나 상 위에 있던 향합을 잃어버리고 수개월이 되도록 찾지 못하였는데, 새가 어떤 물건을 물어다가 무덤 앞에 놓아서 사람이 가보니 곧 잃었던 향합이었다. 초하루 보름이 되면 장지도의 무덤에도 메를 올렸다. 즐(騭)이 3년을 마친 후에 세종이 모두 정문을 세워주고 벼슬을 주어 표창하였다.
서즐(徐騭) 선산부 조에 자세히 보인다.
【제영】 태수응겸이은명(太守應兼吏隱名) 윤향(尹向)의 시에, “물이 가운데로 흘러 양쪽 언덕이 평평하고, 뽕나무와 삼을 심은 열집[十室]은 봄성을 의지하고 있다. 백성들은 스스로 신선경(神仙境)을 자랑하는데, 원은 응당 ‘이은(吏隱 은거하는 수단으로, 별로 바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벼슬을 하는 것)’이라는 이름을 겸하였으리라.” 하였다. 전옹상녀자한한(田翁桑女自閑閑) 배규(裵規)의 시에, “봄비가 처음으로 열 이랑[十畝] 사이에 개이니, 밭가는 늙은이와 뽕 따는 여인네 한가롭기도 하다. 송사하는 뜰은 쓸쓸하여 푸른 이끼만 널렸고, 멧부리에서 나와 흐르는 구름에 취하여 누워서 보노라.” 하였다. 푸른 시내 끼고 가는 솔길은 운문(雲門)에 닿았도다 안맹운(安孟雲)의 시에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사묘】 하현내(下縣內) 처음이 1리, 끝이 10리다.
상현내(上縣內) 처음이 5리, 끝이 10리다.
상남(上南) 처음이 26리, 끝이 25리다.
하남 처음이 10리, 끝이 25리다.
상면(上面) 처음은 25리, 끝이 35리다.
하면 처음이 10리, 끝이 25리다.
상북(上北) 처음이 8리, 끝이 30리다. 하북 처음이 8리, 끝이 15리다. ○ 월이(月伊)부곡, 사등량(沙等良)부곡은 모두 서쪽으로 25리, 두의곡(頭衣曲)부곡은 30리다.
【토산】 감.
【창고】 읍창ㆍ남창(南倉) 남쪽으로 4리다. 서창 서쪽으로 30리다.
- [주-D001] 고야(姑邪) :
-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편에 “아득하게 먼 고야산에 신인이 사는데[藐姑邪之山有神人焉] 살갗이 눈 같고[肌膚若氷雪] 곱기가 처녀 같으[綽約若處子]며”라는 구절이 나온다. 고야(姑邪)는 고야(姑射)가 맞으며 신선이나 미인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 [주-D002] 이 열매가……원망할까 :
- 예전에는 신[酸] 맛을 매실에서 얻어냈다. 그러므로 예전 조미료는 먼저 염(鹽)ㆍ매(梅)를 들었다. 그러나 여기에 한 말은 매실이 음식의 맛을 조화시키듯이, 먼저 시의 작자 조위가 그 인물이 국가의 정치를 조화시킬 수 있는데 연산군 때에 귀양가서 죽은 것을 풍우가 심하여서 매화가 열매도 열지 못하고 떨어진 것에 비유하여 슬퍼한 것이니, 이 시의 작자 조신은 바로 조위의 아우다.
- [주-D003] 고산 처사(孤山處士) :
- 송(宋) 나라 인종(仁宗) 때의 임포(林逋)라는 사람이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외딴 섬에 살았으므로 고산처사(孤山處士)라 하였다. 그는 독신 생활로 일생을 보내면서 매화가 자기의 아내라고 하였다. 그의 매화시는 유명하다.
- [주-D004] 태수응겸이은명[太守應兼吏隱名] :
- 세상에 이름을 내지 아니하고 지내는 것을 은(隱)이라 한다. 그러나 그 은(隱)의 방법이 많은 중에 하급 관리로서 가만히 살아가는 이는 이은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