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최초 여선교사 로제타는 1865. 9.19. 뉴옥에서 태어났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학교 교사로 일하던 그는 인도를 방문하고 돌아온 닥터 토번이 인도에 의료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한 말을 듣고 감명을 받아, 인도에 대한 의료 선교의 꿈을 갖고 펜실베니아 여자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의사가 된다. 뉴욕 빈민가에 가서 의료 봉사 활동을 하던 중, 그곳에서 인도 보다 더 열악한 당시 세계에 알려지지 않는 조선이란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인도 대신에 조선에 대한 의료 선교의 뜻을 품게 된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조선인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품게 하셨다.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차 남편이 될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을 만난다. 의사 홀은 로제타에게 첫눈에 반해서 청혼을 한다. 홀은 이미 중국에 대한 선교의 뜻을 품고 선교사 훈련을 받고 있는 중 이었다. 그래서 로제타는 자신은 이미 조선으로 선교지를 정했기 때문에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닥터 홀은 로제타 이외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다며 아무리 시간이 많이 걸려도 기다리겠다고 한다. 결국 둘은 약혼을 하였다.
1890.8.22 26세에 닥터 로제타는 의료 선교를 위해서 조선 땅에 들어 온다 로제타는 조선을 무척 사랑 했다. 그녀의 일기에 ‘조선의 해롭지 않는 풍속은 고쳐야 할 이유가 없다’ 1)조선의 온돌방은 하나의 넓은 침대다 그래서 환자가 침대 밖으로 나올 염려 없다. 2)온돌은 청결하여 소독하기가 쉽다. 3)온돌방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환자를 진료하는 것이나 밥 먹는 것은 불편한 자세였지만 그래도 난 조선사람이 좋았고 그들의 풍속도 좋았다고 썼다. 한번은 16세의 소녀가 손에 화상을 입고 찾아 왔다. 로제타는 이 환자를 입원시키고 손가락 펴는 수술을 마쳤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그러나 피부에 흉터가 너무 심해서 피부 이식 수술을 해야 했다. 그러나 피부 이식 수술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없어서 결국은 자신의 피부를 떼어서 이식 수술을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피부까지 떼어서 이식 시켜 준 로제타 선교사를 점점 신뢰하기 시작 했다. 자신의 살과 피를 떼어 준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도 같은 것이다.
얼마후 약혼자 닥터 홀이 선교사 훈련을 마치고 중국이 아닌 조선으로 임명 받았다는 사실에 둘은 매우 놀랐다고 한다. 왜냐하면 둘의 약혼은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둘만이 알고 있었는데 약혼자가 중국이 아닌 조선으로 임명 받았다는 사실은 기적이었다. 두 부부는 하나님께서 조선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힘써 일하기로 한다. 닥터 홀은 평양을 개척하기로 하고 평양에서 성경교리를 가르치면서 진료를 했다. 밀려드는 환자를 돌보는데 정신없이 바빴지만, 그러나 큰 보람과 기쁨을 누렸다. 환자를 돌볼 때는 친절과 사랑과 동정심으로 했다. 친절과 사랑은 환자를 치료하는데 가장 큰 의술이며 무기이다. 그래서 치료 현장에서 많은 기적을 체험했다. 당시 평양에는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이 많아서 돌에 맞아 죽을 수 도 있다고 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희생시켜 이 도시에 복음의 문을 여신다면 나는 그 길을 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닥터 홀 부부는 평양에 선교기지 센타 건물을 구입하려고 서울에서 모금운동을 했다. 이 일에 맨 처음 참여한 자는 선교사 자녀들이었다. 홀의 설명을 들은 어린이 중 버티 올링거가 1달러, 9살 꼬마 소녀 윌라가 10센트 오거스터가 50센트, 어린이들이 모금한 돈이 모두 고작 1달러 60센트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의 이야기가 퍼져나가서 8개월 후에는 1,479달러 99센트가 모금 되었다. 닥터 홀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어린이의 신앙을 통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다고 했다. 한번은 평양에서는 피부색, 얼굴 모양이 다른 외국인 여자와 어린이를 구경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래서 10명씩 한조가 되어서 5분씩 방안에 들어와 구경하고 나가게 했다. 하루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로제타는 어린아이와 함께 마당으로 나가서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에 서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다. 조선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이 사랑 인하여 오늘 한국교회가 있는 것이다.
평양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많은 핍박이 있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히고 매도 수없이 맞았다. 한번은 김창식이란 사람을 석방 시켜 주면서 예수 이름 전하지 말라고 했을 때 그는 담대히 말하기를 나는 기독교가 옳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이 사실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돌에 맞으면서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을 목격한 선교사 홀 부부는 김창식의 발 앞에 엎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했다. 그 후 청일 전쟁으로 평양은 많은 사람이 죽었고 여기저기에 부상자가 속출했고 그로 인하여 전염병이 돌았다. 닥터 홀은 부상당한 환자를 돌보기 위해서 식음을 전폐하고 환자를 돌보는데 힘을 다하던 중 그도 고열로 죽고 말았다. 그의 아내 로제타 배 속에는 두 번째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남편 닥터 홀이 죽은 후 로제타는 미국으로 들어가 딸을 낳았다. 미국으로 들어갈 때 조선 소녀 박에스더를 데리고 갔다. 박에스더는 성경공부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믿음이 좋았다. 로제타는 박에스더를 의사 만들기 위해서 지금의 존슨홉킨스 의대에 입학시켰다. 그리하여 박에스더는 한국 최초의 여자의사가 되었다.
로제타는 사람들이 남편을 추앙하고 추모비를 세우겠다고 모금운동을 하자 로제타는 말하기를 진정한 추모는 차갑고 값비싼 대리석이나 화강석으로 만든 비석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고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병원을 세우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닥터 홀 기념 병원을 세우기 위해서 모금운동을 해서 1897. 2. 1 평양에 기념병원을 세웠다. 로제타 홀은 조선을 잊을 수가 없어서 1897년에 다시 서울로 왔다. 딸이 조선의 풍토병에 걸려서 죽어 시신을 양화진 남편의 묘 옆에 묻었다. 그러나 그녀는 조선을 떠나지 않고 계속 의료 선교활동을 했다. 아들 셔우도 홀은 미국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어머니 의료선교사역을 도우며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조선을 끝까지 사랑했다.
로제타 여 선교사는 광성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 교육에도 힘썼고 특히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여자의사를 배출한 학교가 되었다. 이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후에 우석대 의과대학이 되었고, 현재 고려대 의과대학이 된 것이다. 로제타 선교사는 한국 땅에서 생을 마쳤고 양화진의 남편의 묘소 옆에 안장 되었다. 한국 땅에서 사랑하는 남편과 딸을 잃었지만 이 나라를 떠나지 아니하고 아들까지 대를 이어서 조선 땅에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것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때문이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이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진실되게 실천할 때에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세상으로 부터는 칭찬 듣는 교회가 될 것이다.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하나님의 제일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가짜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교회에 대해서 책망하시기를 예수님은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하셨다. 반대로 사랑의 역사가 있는 교회에는 성령님의 임재를 느끼며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한다. 사랑은 만병 통치약이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 사랑은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스스로 증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