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 연등
이강옥(영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온다. 사찰 주위와 거리에 어여쁜 연등들이 화사하다. 곧 연등 행렬의 장관을 구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등을 만들어 달거나 연등을 들고 행진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오랜 전통문화가 되었다. 그만큼 불교 문화가 우리 문화 형성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하겠다. 모든 종교의 연례의식이 그러하듯 연등행사도 그 형식을 아랑곳 할 수는 없다. 형상의 차원에서 지켜야 할 것은 겸허하게 따르는 것이 맞다. 그러나 형상을 따르는 데 집착하여 거기 깃들었던 정신을 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우리가 연등에 깃든 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이야기는 대략 세 가지 정도가 된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현우경>의 ‘빈녀난타품’ 이야기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시면서 수행하고 계셨다. 가난한 여인 난타는 다른 사람들이 석가모니 부처님께 성대하게 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자기는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기에 부처님께 아무 것도 공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공양을 올리겠다고 결심하여 종일 구걸한 돈을 가지고 기름집으로 가서 기름을 사 볼품없는 등불을 만들어 밝혔다. 그런데 세상의 호사스런 등불은 시간이 흐를수록 다들 꺼져 가는데 유독 난타가 밝힌 등불만은 오히려 더 밝아져 갔다. 갈수록 밝아져가는 그 등불이 부처님 수면을 방해한다고 여긴 아난존자가 끄려 했지만 그 등불은 꺼지지 않고 더 힘차게 타올랐다. 이것을 보신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만 두어라, 아난아, 그 등불은 가난한 여인이 간절한 정성으로 켠 것이어서 너의 힘으로 끌 수가 없도다. 그 여인은 비록 지금은 가난한 모습이지만 세월이 지나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가 될 것이다.
난타는 가난하여 남들처럼 그럴듯하고 화려한 공양을 부처님께 바칠 수 없었다. 그러나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이는 물건을 바칠 수는 없었지만 부처님에 대한 공경과 믿음이 극진한 초라한 연등만은 바칠 수 있었다. 부처님은 난타가 밝히는 초라한 연등이야말로 사람이 타인에 대해서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바치는 정성의 극치요 지선이란 것을 인정하셨다. 그리고 그런 지극한 정성이 가난한 사람에게 더 또렷하게 간직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셨다.
또 다른 연등 관련 이야기가 있다. 연등 부처님과 관련된 이야기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전생에 선혜(善慧)라는 청년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선혜는 연등 부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길가로 나가 진흙탕에 자신의 몸을 엎드리고는 연등 부처님이 자기 몸을 밟고 건너가길 간청하였다. 연등 부처님이 자신의 몸을 밝고 지나는 순간 선혜는 자기가 장차 부처가 되겠노라고 서원한다. 그 때 연등 부처님은 선혜의 마음을 간파하고 선혜가 반드시 부처가 되리라고 수기를 주신 것이다. 연등 부처님은 선혜가 진흙탕에 자기 몸을 던져 남이 밝고 가도록 결단을 한 데에서 자기를 내려놓고 버리는 무아의 완전한 내면화를 발견하신 것이다.
이처럼 연등 행사에는 처지와 형상에 구애되지 않는 간절한 믿음과 정신, 자기를 내려놓고 버리는 무아의 거룩한 가르침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연등에 깃든 이런 정신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실천하는가? 절간의 연등은 경쟁이나 하듯 커지고 화려해진다. 그 재질 등에 대한 고려가 없는고로 환경을 오염시킬 것 같기도 하다. 더욱이 이런 연등에서 엄청난 차별을 발견하게 된다. 크기에 따라 가격이 다르게 책정된 것이다. 돈이 많아 돈을 많이 낸 사람과 돈이 없어 돈을 적게 낸 사람을 차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난타의 연등을 최고로 드높여주신 부처님의 정신을 완전히 망각한 소치다. 또 연등마다 이기적 소원을 바라는 사람들의 이름을 꼬리표로 달고 있다. 이럴진대 그것은 무주상(無住相) 보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과 관련하여 우리가 준비하는 어떤 행사도 부처님의 정신을 간절하게 되새길 수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형형색색 아름다운 자태로 펼쳐져 있는 연등을 바라보며 지금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잘 살고 있는지 곰곰이 반성하여 보자.
(<<관세음>>,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