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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단락 부활 후의 십자가의 부르심 (5:2-6:14)
Ⅰ. 부활 후의 십자가와 여자의 실패(5:2-6:3)
A. 부르심(5:2)
내가 잘찌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내 몸은 잘지라도 내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그분이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하는 자,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나에게 열어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가득하고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있다 하는구나"(5:2 다른 번역).
여기에 이르러서 그녀 자신의 일과 생활은 완전히 정지되었다. 그녀는 마치 잠자는 사람처럼 활동도 없고, 행위도 없고, 계산도 없고, 발버둥치는 것도 없고, 힘을 내는 것도 없으며, 근심도 없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안식한다. 십자가가 모든 죄악을 처리했을 뿐 아니라 모든 혈기도 처리했다. 이제 죄가 역사하지 않고 자아도 움직이지 않으며, 겉사람 전체가 이미 고요한 상태에 이르렀다. 행동이 있더라도 그녀 자신은 오히려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고 느끼며, 그녀는 마치 방관자와 같을 뿐이다. 사실 그녀는 이미 잠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그녀에게 움직임이 없고, 생각이 없고, 믿음이 없고, 취하는 것이 없고, 생활이 없으며, 일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주님의 부활 생명이 그녀 안에 있으며, 부활한 주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녀 안에 거하시며, 또한 그녀 안에 살고 계신다. 겉사람은 비록 조용하지만 속사람은 오히려 약동한다. 우리는 여기서 속사람과 겉사람이 절대적으로 다른 것임을 본다. 겉은 잠잘 수 있으나 속은 깨어 있으며 조금도 잠자려는 뜻이 없다. 이것은 참으로 바울이 말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와 일치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교통의 표현이다. 주님과의 완전한 연합 안에 있는 이런 사람은 매우 민감하며, 깨어 있고 느낌이 가득한데, 다시 말해서 그녀는 주님의 매우 작은 음성과 움직임까지도 모두 느끼는 것이다. 이 속사람은 영원히 잠자지 않으며, 언제든지 주님의 음성이 있으며, 그녀는 즉시 듣고 이것이 그녀의 사랑하는 자의 음성임을 안다.
주님은 이제 오셔서 무엇을 하시는가? 주님은,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 나에게 열어다오"라고 말한다. 이 노래에서 주님은 가장 먼저 자신을 왕으로 나타내셨는데, 이는 그분이 마음 가운데서 보좌를 얻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후에 그분은 그녀가 그녀 안의 벽을 벗어나 부활 생명 안으로 들어가도록 이끌기 위해 부르는 자가 되셨다. 후에 또다시 그분은 얼마나 그녀와 완전한 사랑의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자신을 신랑으로 나타내셨다. 이제 그분은 여기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계시하신다. "내 머리에는 이슬이 가득하고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묘사한 그림인가? 이것은 그분 자신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체험을 말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곳에서 그분의 머리에는 참으로 이슬이 가득했다! 동시에 우리는 그 밤에 그분의 머리에 밤이슬이 있었음을 본다(눅 22:44). 그러므로 그분은 여기서 자신을 늘 간고를 겪은 사람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이전에 우리가 본 십자가는 속죄를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우리는 십자가의 연합도 보았다. 우리는 십자가에서의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을 보았고,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자아에서 벗어나게 하는지도 보았다. 우리는 십자가의 승리도 보았고 십자가의 본받음도 보았다. 한 믿는 이가 이러한 것들을 거친 후에는 아마도 이것이 최고의 체험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오늘 이후로 그녀는 걸음마다 부활과 영광 안에서 길을 간다. 이 믿는 이가 아직 배우지 못한 십자가의 또 다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이 방면에 관하여, 그녀에게는 약간의 체험이 있으나 아주 초보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녀는 비록 십자가의 고난을 알지만 십자가의 고난이 포함한 것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깊은지는 결코 알지 못한다. 비록 그녀가 이미 십자가의 모형을 알지만, 그녀는 결코 이 모형이 그녀를 어떤 모양으로 인치는지는 모른다. 주님이 이제 그분의 믿는 이를 부르시는 것은, 그녀가 이전에 거쳐보지 못한 십자가의 체험이나 혹은 그녀가 이전에 매우 얕게 거친 십자가의 체험을 거치라는 것이다.
겟세마네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하나님께 싫어 버린 바 되는 것과 이 싫어 버린 바 됨에서 산출된 모든 것이다(사 53:4).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의 속죄의 방면은 분명히 알지만, 그분의 십자가에는 여전히 외면적으로는 하나님에 의해 싫어 버린 바 된 방면이 있다. 이것으로 인해 그분은 극도의 수치를 당하셨다. 그분이 이전에 받은 많은 고난 가운데에는 하나님이 그 안에 계셨기 때문에 여전히 영광스런 면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그분은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싫어 버린 바 되신 것처럼 보이며 그분이 당하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치심과 학대인 것 같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손을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의 치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이것은 그분에게 가장 큰 수치가 되었다.
십자가의 속죄의 방면에서 주님은 우리와 연합되신 적이 없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십자가의 다른 방면 안에서 우리가 그분과 교통을 갖기를 원하신다. 과거에 우리가 만난 문제는 죄악과 세상과 사탄과 천연적인 것에 불과했다. 우리가 비록 십자가의 고난과 십자가의 모형을 만나긴 했지만, 하나님에 의해 싫어 버린 바 됨과 사람에게서 수치를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체험이 깊지 않기 때문에 전혀 낯설을 것이다. 주님은 여기서 문을 두드리며, "나에게 열어다오"라고 말씀하신다. 그 뜻은, 다시 한번 그분께 마음의 문을 열어 주고, 다시 한번 밤이슬로 가득한 주님을 영접해 달라고 믿는 이를 부르는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하나님에 의해 싫어 버린 바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하며, 여전히 십자가의 더 깊은 오해와 수욕을 배워야만 한다. 그분이 그녀를 누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그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근거한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녀의 인식을 말한다. '나의 비둘기'는 성령의 성품을 말한다. '나의 완전한 자'. 이것은 그녀의 성결과 정결과 헌신을 말한다. 그러나 그분이 결코 '신부'를 언급하지 않으신 것은 그녀가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그녀가 신부가 되어 완전히 연합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그녀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분을 향해 이렇게 열어 달라는 것이다. 그녀는 이전에 이미 자신을 열어 주님을 왕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는데, 이제 주님은 그녀 자신을 열어 그분을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로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이제 주님은 그녀를 이끌어 그분과 함께 고난 받고 그분의 죽음을 가장 깊은 방법으로 배우도록 하신다. 그렇지 않을 때 주님은 억지로 그녀가 가기를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그분은 문을 두드리고 간청하시면서 믿는 이가 자원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다.
B. 책임을 전가함(5: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2절의 이러한 부르심은 많은 믿는 이에게 예기치 못한 일이다. 그들은 결코 십자가에 수욕의 방면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결코 십자가에 대한 체험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십자가에 대한 그들의 체험은 심지어 아주 깊다고도 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이 십자가를 위하여 약간 고난도 받고 핍박도 당하고 사람에게서 수욕도 받아 보았겠지만, 그들은 줄곧 십자가는 그들의 영광이요, 그들의 생명이요, 그들의 능력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가 참으로 그들에게 수욕이 된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십자가는 그들로 세상의 명성을 잃게 할 뿐 아니라 영적인 명예도 잃게 하며, 그들은 뜻밖에도 사람에게서와 하나님에게서 조차도 싫어 버린바 된 자로 보여 진다. 하나님은 그들로 시련을 거치게 하시고, 친근한 사람의 위로와 동정을 얻지 못하게 하시며,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치심을 당하고 학대받는다고 생각하게 하신다. 세상에 속한 수욕은 아마도 그들이 이전에 받아보았겠지만, 영에 속한 수욕은 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체험이다. 이러한 오해로 생긴 수욕은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연관된 것이기 때문에, 그들로 깊은 느낌을 갖게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골 1:24)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이 부르심은 얼마나 새롭고 놀라운가? 또 얼마나 잔혹한가? 그러므로 이 부르심을 듣는 사람은 위축된다. 그녀는 아마도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 아닌가? 나는 지난날에 나의 생활과 일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인가를 항상 생각했다. 이제 만일 하나님이 참으로 나로 하여금 오해를 받게 하시며, 사람 사이에 있는 나의 아름다운 이름을 빼앗아 가시고, 사람에게서 수치를 당하게 하시어 나와 하나님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게 한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영광을 얻으실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며 말하고 싶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을 위하여 그리 많이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 많이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 그녀가 생각한 것은 그녀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영화롭게 하는 가 였음을 보지 못한다. 그녀는 반드시 하나님의 박탈하심에 이르러야 하는데, 즉 자신의 선한 마음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의도가 모두 제해질 정도로 하나님의 박탈하심을 받아야 한다. 십자가가 반드시 깊은 단계까지 역사해야 하는데, 즉 당신이 단 마음으로 기꺼이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분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으로 자신의 영광을 돌보시게 하는 단계에까지 십자가로 더 깊이 역사하게 해야 한다.
부르심을 들은 사람에게 여전히 한 가지 어려움이 있는데, 그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일을 돌아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전에 그녀는 자신이 인식한 십자가로 인해 사람들을 이끌어 그녀에게 와서 주님의 길을 배우게 할 수 있었다. 그녀의 과거의 십자가의 체험은 그녀로 하여금 생명의 운하가 되게 하여 주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그녀를 따르게 했다. 만일 그녀가 이 새로운 부르심을 받아들여 십자가에 의해 수욕받는 위치에 이끌려진다면, 그녀의 일의 위치와 일의 기회를 더 잃어버리지 않겠는가? 과거의 십자가의 체험은 사람을 그녀에게로 이끌어 올 수 있었다. 오늘 이후의 십자가의 체험은 사람을 그녀 앞에서 더 쫓아 버리지 않겠는가? 오늘 이후로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가까이 오겠는가? 또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서 주님의 길을 배우겠는가? 이러한 생각들이 그녀로 하여금 주저하게 하며 앞으로 못 나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라고 반응한다. 나의 모든 외면적인 행위 가운데, 이미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의 옛사람과 옛사람의 모든 행위를 벗어 버렸는데 어찌 내가 이전에 벗어버린 옷을 다시 입는 것처럼 이제 일어나서 십자가의 외롭고 부끄러운 방면을 받아들이고 사람의 오해를 받아야 하는가? 십자가의 체험이 이미 옛사람에게서 나온 모든 것을 벗어 버릴 정도에 이르렀는데, 아직도 부족하다는 말인가? 대부분의 믿는 이들이 이 단계에 이르렀을 때 십자가의 양면-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을 보지 못한다. 부활을 알고 십자가도 알지만 다 소극적인 방면에 불과하다. 십자가가 어떻게 옛 창조를 처리하는가만 주의할 뿐 결코 십자가가 어떻게 새 창조를 처리하는가는 보지 못했다. 그녀는 십자가가 사람으로 하여금 벗어나게 하는 역사만 보았을 뿐 십자가가 사람으로 어떻게 들어가도록 역사하는 가는 결코 보지 못했다. 아마 그녀는 이러한 적극적인 역사는 부활 방면의 일이라고 여기면서 오해를 할지도 모르나, 이것이 십자가의 일이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십자가는 적극적인 방면에서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받음과 오해의 모형을 새 창조 위에 인친다. 주 예수님의 생명은 원래 새 창조의 생명인데, 아직도 우리가 그분의 몸에서 십자가가 그분에게 준 고난 받는 모형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나는 목욕하여 온 몸이 주님 안에서 이미 깨끗해졌을 뿐 아니라, 내가 이 세상을 걸어갈 때 세상과의 접촉에서 묻은 먼지와 더러움도 늘 씻어내므로 이미 정결하게 되었다. 나는 반드시 나의 정결함을 지켜야 하며, 진보가 없이 퇴보하는 것 같으므로 다시는 자신을 더럽힐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이 반드시 그녀의 정결함을 지켜야 한다는 것만 보았을 뿐, 오히려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문을 열므로 더럽혀지는 것은 참된 더럽혀짐이 아님을 보지 못했다(다시 옷 입고 다시 더러워져야 비로소 문을 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옛사람을 입고 다시 세상의 영향을 받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틀림없이 사람의 오해의 옷을 입고 오해의 더러움을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의 책임 전가는 좋은 것이지만, 이것은 그녀로 하여금 가장 좋은 것을 얻게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기의 상황은 그녀가 자신의 체험에 이미 만족하고 빌립보서 3장 10절의 완전한 체험을 얻는 것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여기서 또 '자아'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과거의 체험 때문에 하나님의 일과 영광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 지위가 있는 것처럼 여긴다. 그녀의 또 한 가지 문제는 그녀의 현재의 영적 상태를 바꾸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현재의 상태를 흩트러뜨리기 위한 것이다. 모든 영적인 진보는 다 현재의 질서가 바뀌는 데에서 온다. 이것이 바로 대가를 지불함이다. 영적인 안일을 탐하면 항상 더 높은 부르심의 동기를 거절하게 된다. 우리가 영적으로 편안히 거할 때, 양심도 우리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지에 대해 송사하지 않는다. 많은 영적인 체험 또한 참으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우리는 시간을 들여 그리스도의 우리에 대한 목적에 이르려고 추구하지 않는다. 낡은 것에 따른 모든 생활은 항상 새로운 것을 그다지 힘써 추구하게 하지 않으며, 항상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평안함을 잃기를 원치 않게 한다.
C. 문을 열어 드림(5:4-5)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4절의 '마음이 동하여서'는 마땅히 '심장이 동하여서'로 번역해야 한다. 그 뜻은 가장 깊은 곳의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문제는 결코 거절하는 데 있지 않고 육체의 약함을 표시하는 데 있다. 그녀의 의지는 이미 완전히 주님께로 돌아섰다. 이러한 지연의 표시는 그녀의 천연적인 인품을 나타낸다. 안에는 문제가 조금도 없는데 밖에 힘이 조금 부족할 뿐이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은 다시 새롭게 간청하심으로 그녀를 격려하시는 것이다. 만일 그녀가 참으로 마음이 강퍅하다면, 주님은 이렇게 하려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라고 한다. 이것은 부르심을 위한 것이지 타격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손은 이전에 그녀의 손을 잡았거나 그녀의 머리 밑에 있었던 손이다. 이 손은 못 박힌 자국이 있는 손이다. 주님은 이러한 손으로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요청하시는 것이다. 문틈으로 손을 들이민다는 것은 주님이 그분의 힘을 다해 부분적으로나마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뜻이다. 손으로 그녀에게 그분 자신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분의 손은 그분의 마음을 나타내며, 그분의 손은 그분 자신을 계시한다.
모든 영적인 체험은 다 그리스도에 의해 매혹된 결과이다. 어떤 사람이든 주님의 계시를 보아야만 비로소 그의 현재의 안일한 상황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발 더 전진할 수 있다. 참으로 주님을 본 사람은 심장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감동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 참으로 어떤 사람이 교리에 감동된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주님께 감동된 사람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그녀는 곧 일어나 문을 열었다. 주님이 그녀를 매혹시켰기 때문에 이전에 능력의 십자가를 받아들인 것처럼 수욕의 십자가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문을 여는 손-믿음과 순복-에서는 자연히 몰약의 방울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이 안에는 주님의 죽음의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주님의 죽음의 향기도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그 죽음을 통과한 생명이 그녀의 손에서 마치 호수 물이 넘치듯이 그녀로 하여금 문을 열게 할 뿐 아니라 그녀의 의지의 빗장이 주님의 죽음의 향기에 적셔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D. 숨음(5:6)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주님의 처리를 받아 본 체험이 있는 사람이 순복하지 않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없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은 순복한 후에야 비로소 있는 것이다. 당신이 순복할 때에야 비로소 주님은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의 불순종이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느끼게 하신다(사람의 초보적인 체험에 있어서는 가르침이 순복 전에 있고, 주님은 순복하기까지 그를 가르치신다. 체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가르침이 항상 순복 후에 있으며, 그로 불순종의 고통을 맛보게 한다). 느낌에 있어서 그녀는 이제 그녀의 사랑하는 자가 다시 가 버렸다고 느낀다. 이전에 그녀는 우매했기 때문에 그분의 임재를 잃었다. 그녀의 현재의 이 고통은 영 안에서의 고통이다. 그녀의 영은 이제 흑암에 둘러싸인 것같이 빛이 없다. 그녀는 그분이 부르시며 말씀하실 때 주님을 향해 나아갔던 과거를 회상한다. 그분이 말을 할 때에 그녀의 혼은 이미 그분을 향해갔다. 그녀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므로 자신을 증오하는데, 이는 그녀의 내면과 달리 그녀의 외면이 무력해져 있기 때문이다. 왜 그녀는 밖의 거짓된 거절로 그녀 안의 그분의 영광의 얼굴빛을 감추게 하였는가? 그녀는 이제 할 수 없이 찾고 부르지만 오히려 그분은 보이지 않고 대답지도 않으신다. 여기의 찾음과 과거의 찾음은 다르다. 이것은 큰 길과 거리에서의 찾음이 결코 아니요 하나님 앞에서의 찾음이다. 그러나 여기서 기도는 뜻밖에도 쓸모없는 것 같다.
E. 상처받음(5:7)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이번에는 결코 그녀가 그들을 찾거나 그들에게 묻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그녀를 만나는데, 그들은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큰 변화를 거친 사람이 왜 오늘 그녀의 사랑하는 자를 잃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마도 그녀를 도우려 했겠지만, 오히려 그들의 말은 그녀에게 더 큰 타격이 되었고 더 아픈 상처를 주었다. 그녀는 위로받기를 원했지만, 그녀가 얻은 것은 상처뿐이다. 펜 루이스 여사가 인용한 좋은 성경 구절이 있는데,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시 69:26)라는 말씀이다. 그들은 그녀의 어려움을 처리할 줄 몰랐다. 그들은 주님이 만일 자신을 감추셨다면 틀림없이 그녀의 잘못이라고 여기며 말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녀가 내적으로 받은 타격이 심한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책망하는 것이 그녀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말로 그녀를 더욱 친 것이다. 이때에 그녀는 참으로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시 69:20)라고 말할 것이다.
'웃옷'은 '수건'으로 번역해야 한다. 그녀의 고통은 아직 그치지 않았다. 사람은 그녀를 도울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녀를 위로할 수도 없으며, 더욱이 그녀의 일을 우스운 일로 여긴다. 주님 안에서 지키는 책임을 맡은 사람이 뜻밖에도 그녀를 덮어 주려 하지 않고 도리어 그녀의 일을 사람에게 공개하여 그녀로 수건을 잃게 하고 가릴 것이 없게 하여 사람 앞에서 그녀의 수치를 드러낸다. 그녀의 실패는 믿는 이 가운데 공개적인 소문이 되었다. 그녀는 실로 욥처럼 그녀를 도우려는 친구들을 만나지만, 다 그녀를 정죄하는 친구들일 뿐이다.
이 한 무리의 파수꾼은 바로 하나님의 집에서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다. 영성으로 말한다면, 틀림없이 그녀를 인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많은 때에 영적인 사람일지라도 다른 사람에 대한 그의 단안(斷案)이 잘못될 수 있다. 형제들의 우리에 대한 태도는 비록 많은 때에 잘못된 것이지만, 이것은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실패를 느끼게 하려고 허락하신 것이다. 만일 우리와 주님 사이가 주님의 뜻에 따라 전진한다면, 주님에게는 자연히 우리의 형제들을 처리할 방법이 있으시다. 우리가 만일 실패하면, 그것이 비록 아주 미세한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것보다 더욱 심하게 형제들로 우리를 다루게 하신다.
F.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도움을 구함(5:8)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8절의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는 마땅히 '내게 사랑병이 있구나'로 번역해야 한다. 그녀가 영적인 사람 가운데서 도움을 얻지 못할 때 그녀는 이제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게서 도움을 구한다. 그녀가 이같이 주님께 득죄하고, 주님의 얼굴빛을 잃었다고 느끼며, 의지할 곳이 없을 때, 그녀는 예루살렘의 여자들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녀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나는 이제 실패했으니 만일 할 수 있다면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것 같다. 실패에 대한 그녀의 느낌이 이렇게 깊기 때문에, 그녀로 하여금 주님 안의 어린아이조차도 그녀를 도울 수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녀는 결코 그들이 어리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며, 그들과 주님과의 교통이 반드시 완전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므로 그녀는 '너희가 만일 만나거든'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그녀들이 만날 수도 있고 만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안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깊이 후회하는 가운데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그녀들 중에 한두 사람이라도 혹시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것이다. 자기의 기도는 통하지 않고 이제 다른 사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녀가 전달하려는 한 마디는 '내게 사랑병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이미 앞에서 한 번 했으나, 거기의 상황과 여기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거기서는 그녀가 교통 안에서 아주 사랑스럽게 흐를 때였으나 지금은 고갈되어 있는 때이다. 느낌이 충만할 때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별로 희귀하지 않지만, 사면이 어둡고 느낌이 없을 때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다. 이것은 그녀가 믿음의 생활에 있어서 실로 큰 진보를 가졌음을 증명한다. 그녀는 이미 어떻게 환경을 다스리는지를 배웠고, 자기의 느낌을 어떻게 다스리는지도 배워서 안다. 지금의 사랑병은 결코 사랑에 취해 배불러서 난 것이 아니고 사랑에 굶주려서 난 것이다.
G. 예루살렘 여자들의 대답(5:9)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이 예루살렘 여자들은 자신들에게 비록 주님 안에서의 깊은 체험이 없고 새 창조의 생명으로 충만하지도 않지만, 이 여자가 '여자 중에 지극히 아름다운 자'인 것을 알아볼 수는 있다. 자신은 비록 얻지 못했지만, 새 창조의 겸손과 성결과 영광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비록 그녀의 사랑하는 자의 얼굴빛을 잃었지만, 여전히 여자 중에 아름다운 자이다. 그녀는 결코 그녀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비교하는 방식으로는 원래 그리스도를 온전히 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분은 비교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 가운데서 비교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들의 눈은 아직 그분이 절대적인 분임을 보지 못했으므로, 그분을 상대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이 여인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그것뿐이겠는가?
이 말은 또한 이 여자들이 비록 예루살렘 사람이긴 하지만, 그녀들은 아직도 주님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계시를 얻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단지 그녀로부터 반사된 빛만 얻을 뿐이다.
H. 사랑하는 자에 대한 여자의 인상(5:10-16)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 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씻은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듯하구나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
다비(J. N. Darby)는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기의 뜻이 추호도 소홀히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신부가 여태까지 신랑의 완전함을 이야기할 때, 그분은 기꺼이 그녀를 받아들여줄 것 같았다. 그녀가 그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그녀 자신의 느낌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지 절대로 그분에게 직접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분이 그녀에 대해 말할 때에는 오히려 아주 자유롭고 아주 완전하게 그녀가 어떠한지를 말하는데, 이것은 그분이 그녀에게 자신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을 나타내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생각할 때에 여기의 그림이 얼마나 합당하고 아름다운지!"
하나님은 그녀들의 질문을 통해 그녀로 하여금 주님에 대한 그녀의 인상을 표현케 하는데, 즉 그녀가 이전에 얻었던 계시가 다시 한번 그녀 안에서 빛을 발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당초의 위치로 회복시키려 했다. 한 가지 매우 기묘한 일은,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부터 얻은 계시가 어떤 때에는 비록 혼미해질 수 있지만, 완전히 잃어버린 바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여자는 여전히 예루살렘 여자들의 교사요, 그녀의 실패는 그녀들의 승리보다 낫다.
10절에서 그녀는 먼저 그녀의 사랑하는 자의 어떠함을 일반적으로 말했다. '희다'는 원문에서 '빛이 밝게 비취는 그런 종류의 흰색'이다. 이것은 그분의 청결함과 그분이 얼마나 죄에서 멀리 떠난 분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흰색은 창백한 흰색이 결코 아니라 희고도 붉다. 이것은 그분이 생명이 충만하고 능력이 충만한 분임을 말하는 것이다 (다윗도 얼굴빛이 붉은 사람이었다 -삼상 16:12). 우리는 그분의 일생에서 그분이 얼마나 능력과 생명이 충만한 사람으로 나타났는지를 본다. 열두 살 때 성전에 나타나신 이래로 오늘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때까지 그분은 남을 돕는 일에서 역량이 부족하게 나타나신 적이 한 번도 없다.
'뛰어나다'는 원문에서 '기(旗)를 받치는 자' 혹은 '들어올려진 기(旗)'를 뜻한다. 여기의 뜻은 그리스도는 천만인 가운데 높이 올려진 기, 즉 모든 사람이 기대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이시며, 우리의 기대는 곧 그분이시다. 그리고 그분 자신이 또한 기를 받치는 자이신데, 그 뜻은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主)라는 것이다. "대적이 홍수같이 몰려올 때 여호와의 영이 한 기(旗)를 일으켜 그를 대항하리라"(사 59:19, 다비 역). 그곳의 기는 십자가를 가리켜 한 말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기를 받치는 분으로서 죽임당한 어린양이심을 가리킨다. 그분이 어디를 가시든 천만 인이 모두 그를 따르려 하며, 그분과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일반적으로 말한 후에, 그녀는 이제 세세하게 주님이 그녀에게 주신 계시와 인상을 말하려 한다.
11절의 '정금 같고'는 그분의 신성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그분에게는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하나님은 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세우셨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이 그분 안에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그분 안에 있지 않다. 이렇기 때문에 "머리를 붙들지 …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게" 된다(골 2:19).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 까마귀같이 검다는 것은 그분의 영원한 능력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그분이 자신을 태고 적부터 항상 있는 자로 나타내실 때, 그분은 그분의 머리털이 희다고 말씀하신다(계 1:14). 그러나 여기서는 그분의 영원히 쇠(衰)하지 않고 패(敗)하지 않는 능력을 말하므로, 그분의 머리카락이 검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 성경은 사람이 쇠패하고 변한 것을 말할 때, 그의 머리카락이 반백(斑白)이라고 말한다(호 7:9). 그러나 우리 주님께는 반백(斑白)의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히 13:8)'.
12절의 눈은 사람의 표정 특히 친밀한 표정이 나타나는 부분이다. 사람의 말과 서신도 비록 의사를 전달할 수 있으나, 그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 사이의 의사 소통 수단이다. 눈의 표정은 가까이 있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비둘기의 몸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바로 눈이다. '시냇가'에 있다는 것은 그것의 적셔짐을 말하며, '젖으로 씻은 듯하다'는 그것이 희다는 것을 말하며, '아름답게 박혔구나'는 그것의 단정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눈은 그분이 우리를 향해 나타내시는 표정인 것이다. 믿는 이가 볼 때 주님의 두 눈은 비둘기의 눈과 같이 아름답다. 즉 활력으로 충만하며, 조금도 고갈되지 않음이 마치 시냇가에 있는 것 같으며, 흑백이 분명한 것이 젖으로 씻은 듯하며 아름답게 박힌 것은 정당한 시선을 가진 것으로, 그분은 안목이 분명치 못하여 사물을 잘못 보실 수 없다는 것이다.
13절에서, 그분의 두 뺨은 일찍이 사람의 수욕을 받아 보았고(사50:6) 사람의 희롱도 받아 보았다(마 27:30). 그러므로 믿는 이가 그분의 두 뺨을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 언덕과도 같이 아름답고 향기롭게 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입술'은 곧 그분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다. 이러한 말들은 얼마나 청결하며 동시에 몰약즙과 같이 향기로운지!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시 45:2). 사람이 그분을 칭찬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의 말씀(눅 4:22)을 진귀하게 여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한 몰약즙은 은혜를 나타낼 뿐 아니라 그분의 죽음과 관계된 것으로 그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은혜를 나타낸다. 그분의 입술에서 떨어진 것은 모두 몰약즙이므로, 그분의 말씀하심에는 그분의 죽음에 근거한 은혜의 말씀이 아닌 구절이 하나도 없다. 그분이 하신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 평안히 가라"(눅 7:48, 50) 혹은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 "일어나 … 걸어가라"(막 2:9) 등의 말씀은 모두 그분의 죽음에 근거한 것이다.
14절의 '노리개'는 열왕기상 6장 34절의 '접다'와 같은 뜻이다. '접는' 목적은 그것이 벗겨지거나 잃어버린 바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금 노리개'의 의미는, 주 예수님의 행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결코 도중에 빗나가거나 잃어버린 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행사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이 관(管)은 금으로 되어 있다. '황옥'은 구약에서 몇 차례 사용되었다. 에스겔 1장 16절과 다니엘 10장 6절이 바로 그중 두 가지 예(例)이다. 이 구절들은 모두 견고함을 보여 준다. 에스겔 1장에서 우리는 이방인이 결국 정권을 잡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다스림의 수레바퀴(황옥으로 만들어짐)는 여전히 도는 것을 본다. 다니엘 10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몸이 마치 황옥 같음)가 여전히 세상의 미래를 지배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황금 노리개와 황옥은 다 주님이 하신 일의 견고함을 말하는 것이다.
'몸'은 반드시 '심장'으로 번역해야 하는데, 이 구절의 몸은 5장 4절의 '심장'(원문 참조)과 같은 단어이다. 그 뜻은 주님은 또한 매우 깊은 느낌을 가진 분이시라는 것이며, 이 느낌은 전적으로 그분의 백성을 위한 것이다. '상아'는 결코 보석과 같이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니다. 상아를 얻으려면 적어도 고난을 받거나 죽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님의 그분의 백성에 대한 이러한 느낌, 즉 그분이 일찍이 고난받고 죽으심으로 큰 대가를 치르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새기는' 것은 정교한 일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분의 모든 느낌은 천박하거나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청옥'에 대해 성경은 '하늘같이 청명하더라'고 말한다(출 24:10). 이러한 청옥들이 주위에 박혀 있다는 것은, 그분의 느낌이 우리를 만질 때 어떻게 하늘의 지배를 받는가를 말해 준다.
15절의 '발'은 성경에서 행동을 가리키고, '다리'는 그보다 서는 것을 가리킨다. '화반석'은 성경에서 여러 번 '세마포'로 번역되었으므로 여기서 그것은 그분의 의를 나타낸다. '기둥'(원문 참조)은 안정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서의 뜻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신 우리 주님은 그분이 세우신 의이기 때문에 요동하실 수 없음을 말한다. 무릇 그분을 따랐던 사람들은 다 그분에게서 끊임없이 이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여자가 그녀의 사랑하는 자에 대해 강론할 때, 그녀는 세 번 금을 언급했는데, 이것은 그분의 머릿속의 생각, 손의 행위, 발아래의 안정됨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것을 다스리셨다. 그분은 완전히 순복한 사람이셨고 또한 완전히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킨 사람이셨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그분이다.
"그분의 형상은 레바논 같고". 그분은 땅을 초월한 분이요, 높은 곳에 사는 분이다. 그분의 모든 것은 하늘에 속한 사람과 같다. "그분의 탁월함은 백향목 같고"(다른 번역). 그분은 사람이지만 영광을 얻으신 사람이다. 백향목이 얼마나 높이 모든 나무를 초월하는가를 보라. 이와 같이 그분은 유일하게 영광 받은 사람이시다.
16절에서 마지막으로 그분의 '입'을 말한다. 원문에서 입은 일반적인 입이 아니라 입맛이다. 여기의 '입'과 2장 3절의 '맛'(원문 참조)은 같은 단어이다. 이것은 입술과 크게 다르다. 이 맛은 주 예수님의 중보의 역사를 말한 것이다. 그 뜻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을 먼저 맛보고 나서 다시 우리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먼저 그분 안에 저장하신 후에 다시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중보의 역사이며 매우 달콤한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안다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를 거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까지 말할 때, 듣는 사람의 마음은 뜨겁지 않을 지 모르지만, 말하는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 뜨겁게 감동된다. 우리가 이전에 걸어왔던 길과 우리가 인식한 주님을 재음미할 때, 우리는 "그분은 전체가 사랑스런 분입니다."라고 외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의 어떤 것을 언급해도 전체가 다 사랑스럽다. 전심으로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여! 이분이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이니, 내가 그분을 찾는다고 너희가 이상히 여기겠느냐?
주님에 대한 그녀의 인상을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그녀가 인식한 주님을 말하는 것이요, 그녀가 주님 안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며, 그녀와 주님과의 연합이 도대체 어떠한 교통인지를 말하는 것이다. 참으로 그녀가 열린 얼굴로 거울을 보듯이 주님의 영광을 보매 주의 형상으로 변화되니 영광 위에 영광이러라.
그녀가 마지막으로 말하려 할 때에 빛이 이미 그녀의 혼을 비췄으므로, 그녀의 어조는 그녀가 얼마나 느낌으로 충만했는지를 나타낸다. 그녀는 마치 거기서 외쳐 노래하면서, "그분은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I. 예루살렘 여자들의 문제(6:1)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이러한 간증을 듣고 나서 함께 가서 찾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이다. 여기서 그녀들은 새 창조 안에서 새 창조의 새로움으로 충만한 한 사람을 본다. 여기서 그녀가 자랑하고 그녀가 인식한 그리스도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지식적으로 전하고 말하는 그리스도와 많이 다르다. 그러므로 이상하게도 여기에는 능력이 있고 매혹하는 힘이 있다. 그녀들은 여전히 그녀를 칭찬해 '여자 중에 지극히 아름다운 자'라고 부른다. 동시에 그녀와 함께 가서 찾겠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녀들의 문제는, 네가 그분이 그렇게 사랑스럽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분이 어디로 갔느냐는 것이다. 다음에 거듭된 그녀들의 질문은 '어디로 돌이켜 갔느냐'는 것이다. 그 말은 여자와 그녀의 사랑하는 자 사이에 간격이 있으므로 그분이 돌이켰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가리킨다. 그녀들의 뜻은, 네가 이전에 그분이 이렇게 사랑스러운 분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우리도 이제 그분을 찾고자 하는데, 그분이 어디 있는지를 네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녀들은 참으로 이 여자가 언급한 사랑하는 자와 다른 사람의 사랑하는 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느낀다.
J. 여자의 대답(6:2-3)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2절에서 원래 이 여자는 이러한 어린 여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녀들의 간구로 인하여 그녀의 사랑하는 자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분의 인격을 묘사한 후 다른 사람을 도우려 할 때, 그녀는 갑자기 빛을 얻고 분명해져서 그녀의 사랑하는 자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뜻밖에도 그녀들에게,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 '자기 동산'은 그녀 자신이다(4:16, 5:1). 그녀는 갑자기 분명해졌으며, 그분이 결코 다른 곳에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고 음부로 내려갈 필요도 없다. 주님은 그녀를 멀리 떠나지 않으셨고, 그녀의 입에 계시며 그녀의 마음에도 계신다. 그분이 비록 그녀가 순복을 더디할 때 돌이켜 가 버리신 것 같지만, 이것은 그녀의 느낌에서 그분이 사라지심으로 그녀로 하여금 느낌에서 그분이 숨었을 때의 고통을 조금 느끼게 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분은 그녀의 마음에 계신다. 사실 그녀는 그렇게 당황할 필요 없이 다만 한 면으로는 그녀의 사랑하는 자에게 열고, 또 한 면으로는 자기의 실패를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분의 임재가 그녀에게서 멀어진 것같이 느껴졌을 때, 그녀는 조용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분은 여전히 그분 자신의 동산에 계시며 합당한 때가 되면 다시 새롭게 나타나신다는 것을 믿어야 했다. 그녀가 비록 소외를 느끼고 그분이 멀리 떠난 것처럼 느껴도,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그곳에 잠기듯이 안식해야 한다. 그녀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녀 자신의 신실함을 능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혈기의 열심으로부터 나온 추구는 결코 그녀를 회복시킬 수 없으며, 또한 많은 때에 갈수록 혼돈하게 된다. 믿는 이의 추구하지 않음은 항상 믿는 이의 생명에 큰 상처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믿는 이가 혈기로 추구하는 것은 믿는 이에게 더 깊은 상처를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회복의 방법은 결코 여기에 있지 않다.
우리는 여기 여자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첫 번째가 그녀의 간증임을 본다. 그녀는 결코 자신이 충성되지 않은 사람이므로 충성된 주님을 위하여 간증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 매혹되어 자기 자신에서 벗어났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와 같이 자기의 주님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上)이다. 그분의 어떠하심, 그분의 은혜, 그분의 역사, 그분의 성실, 그분의 사랑을 생각할 때, 자기도 모르게 잃었던 빛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거의 절망적인 가운데에서도 의외로 힘을 다해 다른 사람을 도왔다. 비록 그녀 자신은 이미 교통을 잃은 것 같으나, 그녀는 오히려 다른 사람이 그분의 귀함을 알고 그분과 교통을 갖기를 원했다. 그녀의 말함이 비록 이전의 계시이지만, 믿는 이가 서로 주님을 이야기할 때 주님이 어찌 옆에서 조용히 듣지 않으시겠는가? 그녀가 비록 굶주렸지만 다른 사람은 그녀보다 더 굶주렸다. 그녀가 다른 사람을 배부르게 하여 만족시켰을 때, 자기도 모르게 그녀 자신도 만족케 되었다. 여기서 당신은 다시 한번 그녀가 얼마나 자신에서 벗어났는지를 본다.
그녀의 병의 증상은 곧 영 안의 어두움과 가라앉음이었다. 그녀가 주님께 매혹되어 자신에서 벗어날 때, 그녀의 병의 증상이 모두 사라졌다. 그녀가 분명해질 때 그녀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말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비록 느낌에서 그분이 멀리 떠난 것처럼 여겼으나, 오히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그분이 여전히 그분의 동산에 계심을 발견했다. 이 동산은 단수이므로 그녀 자신을 가리키며, 아래의 동산은 복수이므로 모든 성도를 가리킨다. 그녀의 말의 뜻은 그분이 내 마음 안에와 모든 성도들 안에 계시다는 것이다. '밭'도 복수이므로 같은 뜻을 갖고 있다. '향기로운 꽃밭'은 앞에서 한 번 사용되었는데, 두 뺨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뜻은, 주님이 그분의 동산 안에서 그분의 아름다운 실과를 먹는 동안 또한 그곳에서 그분의 믿는 이를 감상하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믿는 이들의 마음 가운데서 그들을 목양하시며, 또한 그곳에서 그분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백합화 곧 일체 순수하게 그분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을 모으신다.
3절에서 그녀가 이것을 보았을 때, 그녀는 비록 모든 것이 변했지만 그녀와 주님 사이의 약속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녀는,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의 체험이 지금보다 더 얕았을 때, 그녀는 교통의 느낌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분께 속하였다"(2:16)라고 말했다. 그녀의 마음이 달콤한 느낌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주님이 그녀의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앞에서 말한 것과 완전히 다르다. 느낌이 이전만큼 그렇게 많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매우 깊게 주님이 여전히 그분 자신의 동산에 계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녀는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다'라고 말하며, 그로 인해 또한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전의 근거는 느낌이었으나 현재의 근거는 바로 믿음이다. 그녀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자기에게서 주님께로 옮겨졌다.
그분은 여전히 예전과 같이 "백합화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신다"(2:16). 그분이 이전에 어떠했다면, 지금도 여전히 그처럼 그분의 양무리를 먹이신다. 그분이 이전에 그곳에서 그분의 양 떼를 먹이셨다면, 그분은 현재도 그곳에서 그분의 양 떼를 먹이신다. 그녀는 이제 어떻게 이 영원하고 견고한 주님을 앙망하며 기복이 심한 자신의 느낌을 따르지 않는가를 배웠다. 평소에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실패했을 때에도 따르지 않는 것이다.
Ⅱ. 장막 안의 생활(6:4-14)
A. 사랑하는 자의 칭찬(6:4-9)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염소떼 같고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 너울 속의 너의 뺨은 석류 한쪽 같구나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 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그녀가 이러한 단계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주님이 그녀에게 그녀에 대해 만족하신다는 표시를 하고자 하심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다시금 이 아가서가 말하고 있는 것을 상기해야 하는데, 그것은 곧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면서 더욱 긴밀한 연합을 갖는다는 것이다. 연합의 목적은 교통이며, 교통은 동일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자가 왕에게서 본 모든 것은 여자가 왕 안에서 체험한 것이다. 왕이 여자에게서 보는 것은 왕의 생명이 여자에게서 어떻게 나타나는 가이다. 그러므로 왕의 칭찬은 믿는 이가 주님과의 연합으로 인하여 이렇게 많이 얻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4절에서 주님은 이제 하늘의 성소의 관점에서 그분의 믿는 이를 보신다. 그러므로 이것은 장막 안의 일이다. 주님이 일찍이 그녀의 어여쁨과 고움을 말씀한 적이 있으나 여기서는 그녀의 어여쁨과 고움이 이전보다 더 제한적이므로 그분은,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라고 말씀하신다.
'디르사'는 왕궁이 있는 곳이다(왕상 14:17). '예루살렘'은 큰 임금의 도시이다. 디르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인 하늘의 성소를 대표하고, 예루살렘은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이제 여기서 우리의 하늘에 속한 본질과 우리의 성소 안의 생활을 살펴보고 계심을 본다. 그 예루살렘 안에는 곱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고 그 디르사 안에는 어여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데, 이는 이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의 새 창조이기 때문이다. 이 믿는 이는 오늘날 이미 장래의 성소의 어여쁨과 고움을 나타낸다.
'엄위함'은 '무서움'으로 번역될 수 있다. 군대가 전쟁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이며, 승리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깃발이다. 만일 전쟁에 진다면 풀이 죽고 기가 꺾여 깃발을 내릴 것이다. 그러므로 기치를 벌이는 것의 의미는 승리의 영광이다. 여기의 뜻은, 그녀가 주님 앞에서는 어여쁘고 고운 것이 마치 하늘의 성과 같이 견고하고 성소같이 고요하며, 또한 대적과 세상 사람 앞에서는 그녀의 승리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장막 안의 생활은 주님 앞에서의 생활일 뿐 아니라 대적 앞에서의 생활이다. 왜냐하면 성도가 거하는 하늘은 여전히 대적이 와서 공격하는 하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믿는 이에게 단지 하늘에 속한 아름다움만 있고 전쟁의 성질은 없기를 결코 바라지 않으셨다. 하늘에 속한 전쟁은 주님 앞에서 한 번도 잊혀진 적이 없다.
믿는 이는 마땅히 사랑스러워야 하지만, 엄위하기도 해야 한다. 오늘날 믿는 이들은 주님 앞에서는 그의 사랑스러움을 잃었으며 대적과 세상 사람 앞에서는 그의 엄위함을 잃었다. 사람이 참으로 우리를 두려워하는가? 성경은 자주 주님을 엄위하신 분으로 말하는데, 이것은 주님의 거룩함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 승리한다면, 많은 때에 당신은 대적이 물러나고 세상 사람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믿는 이들은 오히려 그들의 엄위함을 희생시켜 사람과 귀신에게 그다지 무서운 존재로 보지 않게 되었다.
5절의 전반부는 일종의 시적인 표현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굳셈, 곧 눈에 나타난 애정을 본다. '나를 놀래니'는 '나를 이기었으니'로 번역해야 한다. 여기서 주님은 결코 믿는 이의 사랑을 거절하지 않고 도리어 속으로 격려하고 칭찬하신다. 그분이 어떻게 수로보니게 여인을 거절하셨으며(막 7:25-29), 어떻게 이틀을 더 늦추어 유대로 올라가셨으며(요 11:5-7), 어떻게 모세에게 "나대로 하게 하라"(출 32:10)고 말씀하셨으며, 어떻게 야곱으로 자신을 가게 하라고 하셨는가(창 32:26). 그분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거절의 말로써 사랑을 격려하고 계신다. 여기의 '보다'라는 단어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주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랑의 표시일 뿐 아니라 사랑의 견고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분은 여기서 마치 그분의 약함을 나타내시는 것 같은데, 이 약함은 그분이 여러 차례 사랑하는 자 앞에서 나타내신 것이다. 그분은 여기에서 암시적으로, 그분이 사랑하는 자 앞에서는 얼마나 의지할 것이 없고, 정복당하고, 저항할 수 없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무릇 주님이 거절하는 것 같고, 늦추는 것 같고, 사양하는 것 같으며, 여기서 대항하여 이길 힘이 없으신 것 같음을 인식하는 것이 주님의 길을 아는 사람이다.
5절부터 7절에서 '머리카락'은 여전히 헌신의 능력을 말한다. '이'도 여전히 받아들이는 능력을 말한다. '장막 안의 두 뺨'(원문 참조)도 이전에 말한 대로 감추인 아름다움을 말한다. 여기의 칭찬은 4장 1절에서 3절까지의 칭찬과 같으나, 오히려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준다.
(1) 주님의 사랑은 변치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여자가 지연시키는 실패를 할 수 있고 그녀의 죄가 흑암의 죄일지라도, 주님은 여전히 예전같이 그녀를 대하신다. 주님은 그녀의 의심, 즉 주님이 그녀를 대하시는 것이 아마도 변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제해 버리려고 그녀에게 똑같은 말을 다시 한 번 하시는 것이다. 매번의 실패 후에 믿는 이가 가장 잃기 쉬운 것은 확신하는 믿음으로서, 자신과 주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오해를 하게 된다. 많은 때에 우리는 자기가 얼마나 의심이 많은 자인지를 알지 못한다. 주님의 똑같은 말의 반복은 이러한 것을 처리하기 위한 것이다.
(2) 영적인 체험이 한 단계 더 높아졌을 때, 그러한 많은 체험들을 여전히 간직해야 한다. 분별된 헌신, 받아들이는 능력, 감추인 생활이 어렸을 때 필요하다면, 자랐을 때에도 똑같이 필요하다. 어떤 영적인 체험은 진보할 때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것과 어떤 영전인 체험은 자란다고 해서 변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러한 체험들이 한 단계 더 높아질 때, 한 단계 더 깊은 체험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자신의 영적인 노정에서 많은 중복된 공과를 배워 본 적이 있지 않는가? 그러나 후에 배운 것은 처음에 배운 동일한 공과에 비해 더욱 완전하다. 체험은 비록 같지만 한 단계 한 단계 배우는 것이 있다.
8절의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솔로몬과 관계있다. 세상적으로는 이러한 일이 사악한 것이겠지만, 영적인 의미와 영적인 예표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여기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볼 것이다. 우리의 주님이 얻으신 것은 전체 교회의 믿는 이이다. 단체적으로 말한다면, 어린양의 아내는 하나뿐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말한다면, 그분에 대한 애정의 정도는, 또는 그분의 관계의 정도는 믿는 이마다 다른데, 어떤 것은 그분의 왕후 같고, 어떤 것은 그분의 비빈 같고, 어떤 것은 그분의 시녀 같다. 아담, 이삭, 모세는 모두 그리스도가 어떻게 단체적인 아내를 얻으시는가를 예표하며, 솔로몬은 그리스도가 개인적인 믿는 이에 대해 어떠하신가를 예표한다. 여기서는 성결과 영적인 행동이 주님을 대표하기 어려운 것 같으며, 오히려 불의한 것이 하나님을 대표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예표하는 바는 오히려 그분의 불의가 아니다. 도적이 주님을 예표할 수 있으나, 그것이 예표하는 바는 물건을 훔치는 것일 뿐이다. 무릇 지혜 있는 사람은 여기에 대해 모두 분명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믿는 이와 주님과의 관계가 체험적인 면에 있어서 반드시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은 왕후 같고, 어떤 것은 비빈 같고, 어떤 것은 시녀 같다. 어쨌든 그녀들은 다 왕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주님을 추구하는 사람인 이 여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나의 비둘기, 나의 깨끗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녀의 어미의 독생자요 그 낳은 자의 가장 뛰어난 자로구나"(9절, 다른 번역). 여기서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 누가 참으로 그분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녀가 유일한 사람이다. 이것은 결코 그녀와 같은 사람이 단 한 사람뿐이라는 말이 아니고 주님의 안목에서 그러한 사람은 단 '하나뿐'인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녀는 완전히 성령 안에서 살므로 참으로 비둘기이다. 그녀는 또한 세상과 완전히 분별되었으므로, 그분의 참된 '깨끗한 자'이다. 그녀는 은혜로 산출된, 유일하게 완전한 사람인 것 같다. 그녀는 은혜의 독생자인 것 같다. 은혜의 역사의 결과 가운데 그녀가 가장 뛰어난 자 같다. 은혜의 자녀란 결코 하나님의 넓고 큰 사함을 입은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마음에서 역사하시는 모든 것이 다 은혜의 역사이다. 은혜의 의미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위해 역사하신 것이 많은 사람이며, 은혜를 조금 입은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위해 역사하신 것이 많지 않은 사람이다. 하나님에게는 은혜가 있지만,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완전히 역사하시도록 허락해 드리는 것은 아니다. 자기로부터 나온 모든 것은 율법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은 은혜이다. 은혜의 자녀는 교회 안에 가득하지만, 은혜가 완전한 단계에 이르도록 역사한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희귀하다는 것이다. 은혜의 독생자는 그녀 한 사람뿐이라는 말이 결코 아니며 다만 그녀가 가장 뛰어나다는 것뿐이다(주님과 완전히 연합한 사람은 다 주님의 것인데 이것이 독생자의 의미이다. 왜냐하면 완전히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딸들이 그녀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여자들'은 마땅히 '딸들'로 번역해야 한다). 많은 믿는 이들이 자신은 비록 완전히 주를 위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누가 완전히 주님을 위한 사람인지는 안다. 비록 그들 자신은 완전히 주님께 돌아갈 정도로 충분히 많은 생명을 얻지 못했지만, 그들 안에 완전히 주님께 속한 사람을 사모할 정도의 생명은 충분히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자신은 비록 아직 완전히 순복하지 못하지만, 완전히 순복하는 사람을 칭찬할 정도의 순복의 체험은 충분히 갖고 있을 것이다. 딸들과 왕후와 비빈은 이 여자의 육체의 방면에 있어서는 아마도 탄복할 만하지 못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이 여자가 은혜를 받은 방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녀가 얼마나 복된지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장막 안의 생활에 있어서, 사람 안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모든 것은 다 귀하게 여겨져야 한다.
B. 여자의 영광(6:10)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여기서 성령은 제삼자의 입을 빌려 가장 놀랍고 기이한 질문으로 이 여자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이 네 가지 질문은 다 이 여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성령은 질문으로 믿는 이의 생각을 격려하기를 기뻐하시며, 또한 그들의 주의를 일깨워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를 더듬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케 한다. 우리는 매번 성령이 질문을 할 때는 여자가 새롭게 온전케 함을 얻은 이후임을 본다. 3장에서 그러하고, 후에 8장에서도 그러하며, 여기서도 그러하다. 성령은 믿는 이의 체험이 한 단계 더 높아 졌을 때 질문을 사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의 과정과 원인을 알게 하시는 것 같다.
"아침빛같이 뚜렷하고". 이제 그녀는 이미 아침에 이르렀다. 여기의 '아침빛'이라는 단어는 앞에서 두 번 사용한 '날이 밝음'이란 단어와 그 뜻이 같다(2:17, 4:6, 원문 참조). 이제 그녀의 어두운 그림자는 사라졌고, 그녀와 주님과의 사이에 더 이상 간격이 없다. 그녀는 이제 간격이 없는 그러한 생활을 시작한다. 비록 아직은 낮이 아니지만, 이미 아침인 것이다. 그녀의 앞길은 아침빛과 같으며, 그녀의 소망도 아침빛과 같다. 그녀의 장래의 모든 것은 아침빛의 장래와 같은 것이다. 아침빛의 소망과 장래는 정오이다. 정오는 약속에 있어서 이미 그녀의 것이다(잠 4:18). 주님의 손안에 있는 의인의 길은 정오에 이르러 멈추며 결코 오후의 생활은 없다.
"달같이 아름답고". 여기서 주의하는 것은 달의 차고 기우는 것이 아닌 달의 아름다움이다. 이것은 그녀의 그 온화한 밝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녀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지만, 오히려 땅을 비추어 흑암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의 간증을 보게 한다(시 89:37).
'해같이 맑고'란 안에 조금도 가린 것이 없으며 빛이 충만하다는 말이다. 달과 해는 모두 그녀가 얼마나 하늘에 속한 사람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달은 그녀가 자신 안에서 얼마나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를 가리키는 것이며, 해는 우리에게 그녀가 주님 안에서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녀 자신으로 말한다면, 그녀는 생명이 없고 기식(호흡)도 없는 죽은 사람에 불과하지만, 마치 태양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얻는 달과 같다는 것이다. 달이 태양을 향할 때에는 빛이 있으나 태양을 등질 때에는 흑암이다. 그러나 그녀가 주님 안에 있는 것으로 말한다면, 그녀는 맑은 해이며, 완전한 새 창조이며, 빛이 있을 뿐 흑암은 없다. 주님이 해이시듯이 그녀도 해이다.
"기치를 벌인 엄위한 군대같이". 그녀에게는 소망이 가득한 미래가 있을 뿐 아니라 완전히 하늘에 속한 생활이 있으며, 그녀는 또한 항상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자이다. 그녀는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하며,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그녀가 누구인지 아는가? 당신은 그녀를 보았는가?
C. 이 단락은 현안(懸案)이라 할 수 있으며, 결론을 내리기 어려움(6:11-12)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
11절의 '호도 동산'은 '육두구 동산'으로 번역해야 한다. 이 구절은 "골짜기의 열매를 보려고 포도나무가 무성한가 석류나무에 순이 났는가를 보려고 내가 육두구 동산으로 내려가니"라고 번역할 수 있다.
12절을 혹자는,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기꺼이 원하는 백성(시 110:3, 참조)의 수레 가운데 두었도다"라고 번역한다. '귀한'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왕권의 백성'이고, 또 하나는 '기꺼이 원하는 백성'이다.
만일 이 두 구절이 여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원하는 백성'이란 이 어구의 어려움을 제외하고는 한 가지 대답 같은데,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이 있는가 없는가, 진보가 있는가 없는가를 가서볼 때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왕의 수레 가운데 두었다는 것이다(그러나 '기꺼이 원하는 백성의 수레'에는 왕만이 앉을 수 있다).
D. 여자의 진보와 승리 (6: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술람미 여자'는 '평안의 여자'로서 '솔로몬'의 여성형이다. '여자'라는 단어는 번역하지 않을 수 있다.
성령은 이제 제삼자인 방관자들의 부름을 통하여 가장 열렬하게 그녀가 돌아와 그녀들로 그녀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 같다. 그녀는 이제 전차에 앉아서 계속 전진하고 승리하며, 거침이 없고 장애가 없다. 이제 그녀들은 그녀를 한 번 봄으로 그녀가 이같이 전진하고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 이 부탁은 한 면으로 같이 추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뜻을 예표하는데, 왜냐하면 그녀들이 기꺼이 그녀가 계속 전진하는 이유를 알고자 하기 때문이며, 또 한 면으로는 성령이 제삼자의 부탁과 제삼자의 대답을 통해 그녀의 뒤를 따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역사를 위한 예비가 도대체 어떠한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은 제삼자의 두 가지 어조를 통해 자신의 뜻을 표현해 내신다. 그분은 한 무리의 사람을 통해 부탁하게 하시고, 또 다른 한 무리의 사람을 통해 그녀들에게 대답하게 하심으로써 사람들로 술람미 여자가 역사를 위해 예비한 것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인식할 기회를 갖게 하신다.
그녀는 이제 참으로 술람미인데, 이는 그녀와 솔로몬의 연합은 더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이제 그녀는 솔로몬의 역사를 이미 그녀의 역사로 삼았기 때문이다.
'마하나임'은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를 본 곳으로 '두 영(營)의 군대'라는 뜻이다(창 32:2). 그러므로 마하나임의 춤은 매우 열렬하며 충분히 사람을 매혹시킬 것이다. 춤은 승리의 표시이다(출 15:20, 삼상 18:6). 그러므로 마하나임의 춤 안에는 승리의 뜻이 들어 있다. 이 질문의 뜻은, 너희들이 왜 술람미 여인을 하늘에 있는 두 영(營)의 군대가 승리를 기념하는 춤을 추는 것으로 보았느냐이다. 술람미 여인에게 어떤 장점이 있기에 너희들이 그녀를 두 영(營)의 군대로 보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