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로 정치나 종교처럼 권력과 돈이 모이는 곳에는 관 장사가 성하기 마련입니다. 정말 어떻게든 자기들 이로운 방향으로 모든 죽음을 교조화하고 교리화합니다.
어떤 때는 초자연적 현상인 부활이 뭐 그렇게 중요할까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망자의 살아생전 뜻이 후대에 살아남아 있으면 그게 곧 부활일 텐데 싶어서요. 물론 억지로 짜맞출 수는 있습니다. 메시아가 이틀 밤낮 육체를 떠난 사람들의 세계에 가서 당신 백성들에게 구원을 알리고 그 사이에 상한 육체는 아물며 부활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식으로요. 과학의 시대라 해서 종교심이 소멸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부활절은 기쁨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지난 2000년 가까운 세월 누군가에게는 살아 있는 구원자셨고 누군가에겐 여전히 고통당하며 죽어가는 사형수였습니다. 그분은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는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늑대도 목자의 음성을 알아챕니다. 어쩌면 양들보다 더 잘 알아챌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기독교 2000년은 양떼와 목자만의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늑대들도 많았습니다. 늑대 중 어떤 놈은 양의 탈을 썼고 어떤 놈은 노골적으로 약탈했지요.
지난 40일간 신실한 신자들은 예수의 삶을 수난 중심으로 묵상하신 줄을 압니다. 어깨가 탈골되며 자신이 매달릴 나무 기둥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예수, 생사여탈권자인 총독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예수, 조롱받고 채찍을 맞으면서도 연민의 눈빛을 잃지 않는 예수, 나무기둥에 묶이고 손목 어디쯤에는 대못이 박혀 피가 말라가는 예수, 단말마의 순간 절대고독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예수. 이런 초라하다못해 비참한 모습의 당사자가 인간 구원자라니 우주가 놀랄 일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바다를 헤치며 살아가는 양들은 압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목자임을. 그리고 부활절을 맞아 생각하고 다짐해야 합니다. 쓰러져 죽지 말고 부활하자. 때로는 용기를 내어 울타리 안팎의 늑대와 맞서 싸우자.
부활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