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나가수에서 박완규가 고해를 불렀다. 정말 가슴이 시원하도록 잘 부르더라. 예전 부활때에 비하면 거칠었지만 세월의 연륜이 느껴져 더 깊은 울림이 있었다. 특히 그높은 고해의 절정에서 다시 전조를 감행할 때 왜 박완규가 박완규인지 다시 한번 알았다. 임재범의 뒤를 이은 젊은 호랑이의 출현이었다. 박완규는 임재범보다 힘찬 성량으로 정확한 음정으로 포효했다.
그러나 임재범의 그늘아래 있었다. 중간평가에서 박완규는 임재범에 대한 부담감에 시달리더라. 존경하는 선배의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밤잠을 포기하며 고민했다. 박완규가 부르는 고해가 정말 궁금해졌다. 가수가 노래를 어떻게 대하는지 그토록 당당했던 박완규가 머리를 감싸쥘때 어떤 경외감까지 들었다. 그런 와중에 고해가 사실은 임재범의 신앙고백이었음이 밝혀졌다. 놀라운 비밀이었다. 그토록 애절하게 갈구하던 '그녀'는 바로 구원이었던 것이다. 작년 봄이었던가? 수요예술무대에서 아내의 암투병소식을 전하며 부르던 임재범의 고해가 그렇게 가슴에 사무쳤었는데 고해에 이런 뜻이 있었던것이다.
임재범의 고해는 구원의 갈망을 가슴 저리게 토해낸다. '어디에 있나요? 제 얘기 들리시나요?' 이런 기도는 통곡의 벽앞에서 하기 마련이다. 절망앞에서 절박해져본 사람은 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적 현실앞에서 얼마나 간절히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절대자가 필요한지 말이다. 어디에 있나요라고 묻는 것은 어디든 계셔야 한다는 갈구이다. 절대자가 없다면 이 절망을 도저히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임재범은 평생을 방황하며 이 문제를 알았다. 바로 지독한 죄의 문제를 말이다. 이 죄의 문제를 풀지 못한다면 인생은 끝이다. 그러니 그 당당했던 록커가 이렇게 고백한다. '벌하신다면 저 받을 게요. '
구원의 갈구는 그렇게 영혼을 불태우는 간절함 속에서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 사람에겐 전혀 구원의 가능성이 없고 오직 절대자에게만 가능하다는 진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모든 것을 절대자 앞에 내려놓는다. 임재범은 고해를 무릎을 꿇으며 노래한다.
실로 신령과 진정을 다해 포효한다. 임재범의 고해는 그렇게 사람을 사로잡는다. 사람을 인생앞에 세우고 죄악을 시인케 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한다.
한편 박완규의 노래가 끝난 후 장기호는 정말 얄밉도록 완벽한 절창이라고 말했고 반면 김현철은 좀더 개인적인 고백을 담아 노래했다면 하고 아쉬워했다.
역시 프로는 프로다. 그들의 말을 들으니 명확하게 정리가 되더라.
고해를 개인적인 고백없이 부를 순 없을 것이다. 고해는 죽음의 골짜기에서 드리는 목숨을 건 기도이기 때문이다. 결국 박완규의 고해가 감동이 덜했던 것은 박완규에게는 목숨을 건 신앙의 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박완규도 임재범도 모두 기독교신자이지만 결국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간절함은 차이가 있었다. 임재범이 비우라고 반복하여 강조한 뜻이 내게는 하나님 앞에서 삶의 주권을 모두 내려놓으라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이또한 임재범의 인생이고 박완규의 인생이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개인적으로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선배따라 부모따라 배우자를 따라 만날 수 없다. 1대1로 만나야 한다. 박완규가 더욱 하나님과 깊은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진정코 박완규는 임재범을 극복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