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아차산의 고구려'는 고구려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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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아차산의 고구려'는 고구려가 아닌가

아차산에 남아 있는 고구려인의 숨결

미디어다음 / 신동민 기자

“남한의 고구려 유적과 유물, 다시 보자” 한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관심이 새삼 높아지고 있다. 중국 학자들이 고구려 역사의 내용을 부정하고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쏟아내는 상황 속에서 고구려사를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역사적 유물과 유적의 중요성이 한층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국내 고구려 유적은 사적 지정은 커녕 관리 소홀로 유적의 이름값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게 관련 전공자들의 울분섞인 한탄이다. 국내 학자들은 아차산성도 제대로 관리 보존될 경우 세계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서울시도 뒤늦게 세계유산 등록을 위해 나서고 있다.

남한의 고구려 유적 밀집 지역인 아차산은 당국과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형태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등산객들의 등쌀에 고구려 병사들이 쌓아놓은 돌담이 무너지고 유실되고 있다. 1997년부터 4년 동안 한강유역의 고구려 유적 발굴에 참여한 고려대 최종택 교수와 함께 길을 나섰다.

흔적 찾기 힘들 정도로 훼손된 고구려 유적

최종택 교수가 아차산 보루 유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지난 1월 29일 오전 10시. 이번 답사에서는 고구려군이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아차산에 구축한 보루를 살펴볼 예정이었다. 보루는 돌을 쌓아 터를 잡고, 그 위에 병사들이 주둔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춰 놓은 시설을 말한다. 현대군의 초소 또는 막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광장 사거리 쪽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가장 먼저 만나는 고구려 유적은 아차산 제1보루다. 무심코 보면 전혀 유적같지 않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아직 발굴 작업도 이뤄지지 않았다. 최 교수는 보루 유적을 가리키며 “보기에는 초라하지만 상당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유적”이라고 설명했다.

“금관 등 눈에 확 띠는 게 없으니까 ‘이게 뭐냐’는 반응을 보이시는 분들이 많아요. 하지만 아차산 보루들은 화려한 고분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습니다. 현재 상태로는 힘들겠지만 발굴과 복원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세계문화유산 등록도 가능한 중요한 유적입니다.”

고구려 병사들이 쌓아 놓은 돌담이 무관심 속에 무너지고 있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아차산에서는 고구려뿐 아니라 신라와 백제의 군사유적도 발견되고 있다. 워커힐 호텔 쪽에 있는 아차산성은 신라의 성으로 조사되고 있지만, 학자들은 백제군과 고구려군도 시기를 달리하며 아차산성에서 머물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아차산 곳곳에서 신라인들의 고분(무덤)도 발견되고 있다. 이번 답사에서도 여러 개의 신라 고분을 볼 수 있었다. 아차산 자체가 수많은 유적을 품고 있는 역사의 보고인 셈이다.

제1보루를 지나 20~30미터를 올라가자 넓은 암석지대가 나타났다. 이 곳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아차산에 군사 시설이 많았던 이유를 바로 가늠할 수 있다. 아차산은 316미터의 낮은 산이지만 서울의 동부 한강 주변과 광진구 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서울에서 가장 먼저 해를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정찰 임무를 수행하기에도 좋다. 중랑천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용마봉과 더불어 한강지역의 침입자의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지금도 아차산 지역은 군사 요충지다. 답사를 하는 반나절의 짧은 시간동안 훈련 중인 군인들과 2번이나 마주쳤다.

“고구려군은 한강유역을 점령하기 위해 용마봉 옆 중랑천변과 구리 토평쪽 한강변을 통해 남하했습니다. 50년전 북한의 인민군도 한강 유역을 점령하기 위해 같은 루트로 남하했지요. 아차산 정상 쪽에 있는 헬기 착륙장 등 군사시설이 있는 곳에는 예전에 고구려군의 주둔지였습니다. 아차산은 예나 지금이나 군사적 가치가 높은 셈입니다.”

아차산 중턱에서 광진구 쪽을 바라본 풍경. 한눈에 조망이 가능해 정찰하기에 좋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초라해 보이지만 큰 의미있는 유적”

아차산 제2보루, 제3보루 모두 발굴과 보존이 이뤄지지 않아 초라한 모습이었다. 보루지대가 평평한 탓에 운동시설이 들어선 경우도 있었다. 등산로에서 만난 등산객들은 고구려 유적을 알리는 안내판 덕분에 고구려 유적의 존재 자체는 알고 있는 듯 했지만, 유적의 정확한 위치와 의미는 모르는 듯 했다. 최 교수는 “보루 유적은 초라해 보이지만 여러 보루를 묶어서 보면 큰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보루를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작은 초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보루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었죠. 험산 산악지역에 있었지만 모든 보루는 말이 다닐 수 있는 마도(馬道)로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서로 연결된 수십 개의 보루는 큰 성의 기능을 할 수 있었죠. 보루가 이렇게 잇따라 발견된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475년 장수왕이 고구려군은 중랑천과 한강변을 따라 남하해서 아차산 지역을 손에 넣고, 한강을 건너 백제 한성 공략에 나섰다. 고구려 장수 제증걸루 등은 전투에서 개로왕을 붙잡아 아단성(아차산성)으로 데리고 와 장수왕 앞에서 목을 벤다. 당시 고구려군은 아차산 보루에서 한눈에 보이는 강 건너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공격해 점령했다. 최 교수가 1988년 몽촌토성 발굴 작업에서 고구려 토기를 발견한 바 있는데, 이는 고구려군이 백제군을 쫓아내고 이 지역을 점령했다는 증거가 된다. 고구려의 한강 유역 점령은 551년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이 이 지역을 공격하기 전까지 계속됐다.

“고구려군이 주둔하는 기간동안 이 지역에 남평양 등 고구려의 도시가 건설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보이는 중랑천 근방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죠.”

제3보루에 서서 최 교수가 내놓은 주장은 매우 흥미롭다. 아차산 인근에 고구려의 군사 유적이 밀집한 것 이외에도 도성 유적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큰 도성은 아니더라도 고구려유적 보존 운동을 펼치고 있는 고구려역사문화재단 김민수 대표(향토사학자)가 밝히는 것처럼 보루성를 지휘하는 일정 규모 이상의 성이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고구려 유적, 무관심 속에 무너지는 중

심각하게 훼손된 제4보루 유적. ⓒ미디어다음 김준진

제4보루에 올랐다. 제4보루는 서울시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1997년부터 4년동안 구리시와 구리문화원의 예산지원으로 서울대학교조사단이 발굴 작업을 한 곳이다. 당시 서울대박물관 학예연구사였던 최 교수도 발굴작업에 참여했다.

발굴 작업을 통해 성벽, 저수시설, 각종 토기, 막사, 온돌, 부엌시설 등 수 많은 유적 · 유물이 발굴되면서 남한의 대표적인 고구려 유적지로 알려졌지만, 지금은 다시 흙을 덮어 놓아 흔적을 찾기 힘들다. 오히려 성벽 등이 당국과 등산객의 무관심 속에 무너져 내리는 중이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맞서 유력한 증거로 내세울 수 있는 선조들의 소중한 흔적이 소리없이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최 교수도 시간이 지나면서 유적이 훼손되는 것을 아쉬워 했다.

“아차산의 보루는 성의 축소판으로 각종 시설을 볼 수 있고, 성 축조 기술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상태로 방치하는 것은 정말 아쉽죠. 아차산 외에도 용마봉, 시루봉, 홍령봉 등에 보루가 있습니다. 시간을 두고 발굴 작업을 하면 적지 않은 고구려 관련 유적과 유물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학술적 뒷받침 토대로 차분하게 발굴, 보존해야

"고구려 유적 보존 모색하겠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아차산 답사 후 제4보루 발굴 작업을 지원했던 구리시청을 찾았다. 이무성 구리시장은 95년에서 98년까지 구리시 초대민선시장으로 재직하면서 제4보루 발굴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 시장은 제4보루 등이 발굴 후 제대로 보존되지 않는 것에 대해 “작은 지자체가 고구려 유적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며 “시 의회에서 예산이 통과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아차산 유적지 공원화, 등산로 정비 등 고구려 유적 보존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최근 아차산 고구려 유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적 지정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다”며 “사적으로 지정되기 전까지 유적지에 흙을 덮고, 담당 직원을 배치하는 등 훼손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강변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서울시, 구리시 등 지자체와 학계와 재야 사학계, 시민단체 모두 한 목소리로 고구려 유적 발굴 및 보존을 주장하고 있다. 아예 아차산 지역 전체를 사적으로 지정해 보존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문제는 이런 관심이 일과성으로 그쳐서는 곤란하다는 것. 1977년 발굴되면서 다량의 무기, 솥, 토기, 온돌 등이 발굴된 구의동 보루는 발굴 당시 큰 화재가 됐지만, 지금은 보존은커녕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모두 사라진 상황이다. 최 교수는 아차산에 대한 지나친 관심덕분에 성급하게 파헤쳐 지는 것을 우려했다.

“중국이 역사 왜곡에 대응하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보존한다는 의미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성급하게 개발하거나 공원화할 게 아니라 차분하게 발굴, 보존하는 게 먼저 선행되어야 겠죠. 지자체, 학자, 시민단체 모두 학술적인 뒷받침을 토대로 역사의 진실을 보여주는 공간을 만든다는 자세로 아차산에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제4보루에서 내려다본 한강. 제4보루의 역할을 암시한다. ⓒ미디어다음 김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