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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金首露王) (인천이씨는 김수로왕의 후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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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王)의 성(姓)은 김씨요 이름은 수로(首露)이니 김해(金海)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국호(國號)를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伽倻)라고 하였다. |
동한(東漢) 광무(光武) 十八年(西紀四二年) 임인(壬寅) 二月 日(一本에는 壬寅三月三日이라고 하였음)에 비로소 탄강(誕降)했으니 이상한 기운이 구지봉(龜旨峰)에 생겨 하늘로부터 땅에 드리웠거늘 가락(駕洛)의 구간(九干) 아도(我刀)等(新羅의 方言에 君長을 干이라고 이름했으니 九干은 곧 我刀干汝刀干 留天干의 類임)이 나아가 살펴본즉 붉은 끈으로 금합을 매어 내려져 있었다. 이에 금합을 열어 본즉 금빛이 찬란한 알이 여섯 개가 있어 해와 같이 둥글거늘 아도(我刀)의 집에 받들어 간직하였다. 다음날 알이 깨어 여섯 동자(童子)가 나왔는데 나이 십오세 가량 되고 용모가 준수하거늘 여러 사람들이 모두 절하고 하례(賀禮)하였다.
그 동자(童子)가 날로 숙성하여 십여일이 지나매 신장이 구척이나 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드디어 그 한사람을 받들어 임금을 삼았으니, 그가 곧 수로왕(首露王)이었다.
금합에서 알이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이라 하였고 제일 먼저 낳았으므로 인하여 수로(首露)라고 이름했으니, 이는 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 十九年때의 일이었으며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기 지방을 나누어 오가야(五伽倻)의 군장(君長)이 되었다.
수로왕(首露王)은 재위(在位)한지 一百五十八年에 세상을 떠났으니 곧 한헌제(漢獻帝) 건안(建安) 四年(西紀一九九年)의 일이요, 향년(享年)이 百五十八歲였다. 납능(納陵)에 장사했으니, 능(陵)은 왕(王)의 옛 도읍 토성(土城)안에 있어 임좌병향(壬坐丙向)에 건득병파(乾得丙破)요 읍성(邑城)의 서쪽 백보의 거리가 되었다.
양(梁)나라 대통(大通) 四年(西紀五三○年)에 나라가 멸망했으니 구세(九世)를 전(傳)하고 역년(歷年)이 四百九十一年이었다. 수로왕(首露王)이 왕자(王子) 열을 두었는데 왕비(王妃)의 말에 감동되어 두 왕자에게는 왕비의 성(姓)을 사성(賜姓)하였다.
수로왕(首露王)의 세대에 정치가 순후했으므로 나라사람들이 지금까지 사모하여 동지일(冬至日)에는 제사에 대로(나라 제사에 소를 통으로 쓰는 것을 대로라고 함)를 쓰고 왕비로서 배향했으니, 이 사실은 동사(東史)와 왕능 비석에 실려 있다. (五伽倻는 모두 영남(嶺南)에 있다. 大伽倻는 一名 任那이니 지금의 高靈이요 小伽倻는 지금의 固城이며 碧珍伽倻는 지금의 星州요 阿羅伽倻는 지금의 咸安이며 古靈伽倻는 지금의 咸昌이다. ○譜牒에서 나왔음 以下同)
첫댓글 본 글은 인천이씨 종친회에서 받아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