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깨나 하는 선비들은 이름 앞에 '호'나 '자'가 붙었고, 당호가 하나씩 붙는다. 남명 조식은 산천재. 회재 이언적은 독락당. 다산 정약용은 다산초당이었다. 아무나 잘난 요즘은 나이가 들면 호를 하나씩 갖게 된다. 이름만 해도 족한데 앞, 뒤로 자꾸만 감투가 붙는다. 명함을 주고 받다보면 모두들 직함들이 빽빽하여 어지럽다. 나도 돈 안되는 문화 가꾸고 지키는 단체라고 합리화 시켜보지만 어느덧 이재호라는 이름자 밑에도 몇 개의 직함이 있는 것으로 봐서 어리석음은 똑 같구나.
내 한옥에 지인들이 들리면 당호 하나 지으라면서 이것 저것 지어준다. 소나무와 대나무로 둘러싸였으니 '송죽당'(松竹堂), 기와와 대나무가 잘 어울리나 '와죽현'(瓦竹軒) 등등을 지어준다.
松竹堂은 뜻은 좋아도 흔해 빠져 촌스럽고, 瓦竹軒은 어딘지 오죽헌 닮았지만 별 뜻은 없다.
하여 나 스스로 몇 년 전부터 '守吾齋'라 정했다.
"이름은 옥이나 비단도 아니고, 밭이나 택지도 아니고, 금이나 구슬, 돈도 아니다. 더구나 음식이나 곡식도 아니고, 그릇도 솥도, 병도, 아무 물건도 아니다. 때가 끼는 것도 먼지가 앉는 것도 아니어서 물로 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자기의 이름이지만 몸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고, 남의 입에 달린 것이다. 남의 입에 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으며, 영광과 상처, 귀할 수도 천할 수도 있어 함부로 기쁨과 미움이 생긴다. 기뻐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이름을 가지고 유혹하기도 하고, 이름을 가지고 기뻐하게도 하고, 이름을 가지고 겁나게도 하고, 이름을 가지고 공포에 떨게도 한다.
자기 몸에 붙어 있는 이와 입술이련만 씹고 뱉는 것은 남에게 달려 있어 어느 때에 자기 몸뚱아리에 돌아올른지는 모른다." 했다.
절이나 궁궐에서 가장 크고 격이 높은 건물을 '전'(殿)이라 하는데 절에서는 부처나 보살을 모셨다면 궁궐은 임금님이 있는 곳이다.
다음 '당'(堂)은 전보다 격이 약간 내려간다. 전이나 당을 보필하는 것을 '각'(閣)이라 하고 조용히 사색하며 공부하는 곳을 '재'(齋)라 한다.
다음에 마루가 넓고 시끌시끌 일하는 공간을 '헌'(軒)이라 하고 '누'(樓)는 반드시 마루가 있는 누각이다. '정'(亭)은 최소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진 담소하고 유유자적 자연을 관조하여 삶을 풍요롭고 향기나게 하는 곳이다.
나는 대 바람 솔솔 스며 드는 청마루에서 그림고 반가운 사람들과 정겹게 대화하고 글 쓰고 책 보고 세상을 감동스럽게 생각하는 곳이라 재(齋)라 했다. 그리고 이 守吾齋라는 이름은 다산 정약용이 장기에 귀양와서 뼈저리게 이 뜻을 기록해 놓은 것을 읽고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게 된데서 비롯된 것이다.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守吾齋라는 이름은 큰 형님이 그 집에다 붙인 이름인데 이를 듣고는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나와 굳게 맺어져 있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물 가운데 나(吾)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다. 그러니 굳이 지키지 않더라도 어디로 가겠는가? 이상한 이름이다."
다신이 장기로 귀양 와서 혼자 지내면서 곰곰 생각하다가 문득 이 의문점을 풀었다면서
"천하 만물 가운데 지킬 것은 하나도 없지만, 오직 나(吾)는 지켜야 한다. 내 밭을 지고 달아날 자가 있는가. 집도 지킬 필요가 없다. 내 정원의 여러 가지 꽃나무나 과일 나무들을 뽑아 갈 자가 있는가. 그 뿌리는 땅 속에 깊이 박혔다. 내 책을 홈쳐 없앨 자가 있는가. 성현의 경전(經傳)이 세상에 퍼져 물이나 불처럼 흔한데 누가 능히 없앨 수가 있겠는가. 내 옷이나 양식을 훔쳐서 나를 궁색하게 하겠는가. 천하에 있는 실이 모두 내가 입을 옷이며, 천하에 있는 곡식이 모두 내가 먹을 양식이다. 도둑이 비록 훔쳐 간대야 한 두 개에 지나지 않을테니, 천하의 모든 곡식과 옷을 없앨 수 있으랴. 그러니 천하 만물은 모두 지킬 필요가 없다. 그런데 오직 나(吾)라는 것만은 잘 달아나서, 드나드는데 일정한 법칙이 없다. 아주 친밀하게 붙어 있어서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다가도, 잠시 살피지 않으면 어디든지 못가는 곳이 없다. 이익으로 꾀면 떠나가고, 위험과 재앙이 겁을 주어도 떠나간다. 한 번 가면 돌아 올 줄을 몰라서 붙잡아 만류할 수가 없다. 그러니 천하에 나(吾)보다 더 잃어버리기 쉬운 것은 없다. 어찌 실과 끈으로 매고 빗장과 자물쇠로 잠가서 나를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뼈저리게 반성하는 글을 이어간다.
"나는 나를 잘못 간직했다가 잃어버렸던 자다. 어렸을 때에 과거가 좋게 보여서 십 년 동안이나 과거 공부에 빠져 들었다. 그러다가 천지가 바뀌어 조정에 나아가 검은 사모관대에 비단 도포를 입고 십 이년 동안이나 미친 듯이 대낮에 커다란 길을 뛰어 다녔다. 또 천지가 바뀌어 한강을 건너고 새재를 넘게 되었다. 친척과 선영을 버리고 곧바로 아득한 바닷가 대나무 숲에 달려와서야 멈추게 되었다. 이 때에는 나(吾)도 땀이 흐르고 두려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나의 발뒤꿈치를 따라 이 곳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고는 자신과 둘째 형님(약전)은 나(吾)를 잃어 귀양왔다는 것이다.
<몸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크다.>는 맹자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자문자답한 반성을 깨달음으로 守吾齋 기(記)를 삼는다고 했다.
경주에 정착한 나는 무엇을 지키겠다는 것인가. 오래전부터 나는 강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강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약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강한 사람은 원칙과 아름다움에 벗어나는 사람이고, 약한 사람은 원칙을 지키고 아름다움을 지키는 사람이다. 이득을 위해서 인간의 본성을 잃는 것과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끝없이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내가 되는 것이 나를 지키는 것이다. '때문에' 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면서 우리집 가훈대로 감동스럽게 살고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 나를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머무를 집을 守吾齋라 했다.
첫댓글 나를 지키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수련이자 깨달음에 이르는 정직한 길이라 믿습니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부드러운, 나를 지키며 사는 사람..최상의 아름다운 사람이 아닌가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