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단 통의부는
'이리동척사건'은 당시 신문 지상에 52회에 걸쳐 보도되었다.
이리동척사건은 대한독립단 통의부원들로 구성된 9명의 애국지사분들이 국내 유일' 비밀무장단체' 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로 부터 군사훈련을 받고,잠입한 조인현을 비롯 상해임시정부로 부터 권총과 탄환,폭탄,군자금을 지원 받아
전남.북 각지역 요소요소에 무기를 배치하고, 일제의 수탈기관인 이리동척 폭파와 은행, 관공서등을 습격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이들은 기술사까지 초빙 폭탄을 제조하였으며, 군자금 마련을 위한 지폐를 위조하기도 하였다.
당시 군자금 마련을 위한 지폐를 위조하다 박영관은 목포형무소에서 복역하였으며, 오석완은 지폐위조하기위한 자금
마련하다가 발각되어 역시 목포형무소에서 8개월 복역하였다.
수년 동안 일을 진행하던 중 자금이 부족하여 군자금 마련하기 위하여 토지를 매도하다가 중개인과 마찰이 생겨 거사
직전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들의 활동은 국내는 물론 해외 까지도 엄청난 파장을 주었으며, 일제 당국에서는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 목적을 숨기기
위하여
'전북폭탄사건', '전북 통의부 사건', '전북 권총사건'등으로 왜곡 보도하였으며, 당시 신문에 '동아일보', '매일신보', '신민보'
,'조선일보','중외일보'등등 대서특필되었다. 예심 기록만도 일만이천매 당시 복사만 한달 이상이 소요된 대사건이였다.
이들의 재판 날이면 전국 각지에서 친척은 물론 지인들까지 몰려, 방청권을 미리 배부하여, 인원을 통제하였으나 법정에
들어가지못한 사람으로 인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건이 사건인지라 전남.북은 물론 전국을 넘어 해외까지 엄청난 파급 효과를 주었다.
이후 광주학생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광주학생운동 제9권기록>
<대한독립단 통의부 국내 유일 비밀단체>
조인현은 평북의주군 조인현은 군사훈련을 받고 상해임시정부의 명을 받아 권총과 탄환,폭탄을 소지하고
국내로 잠임하여 동지를 규합하였다.
박영관은
일제감점기 비밀결사조직 대한독립단 통의부에 가담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
일명 성영(性永) 종인(宗仁) 전라북도 고창출신. 3.1 운동때 무장 동명보통학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포승줄이 목에 걸린 순간 왜경의 눈을 주먹으로 때린 후 도주 송주일,오석완등과 함께 전남 장성으로 잠입
장성 별기열사 24인과 활동하였고 이후 목포 관해여관에서 1923년 3하순경 조인현을 만나 통의부에 가입하며, 군자금
마련하기 위하여 지폐을 위조하다가 목포형무소에서 복역한다.
이후 오석완의 고향 장성군 삼서면으로 같이 잠입 음식점을 운영하면서 걸인으로 위장하며 독립운동을 암약하였다.
조인현은 권총과 실탄28발을 박영관에게 지급 하였다.
김종철은 -준비중
오오득은-준비중
송시용은-준비중
정기환은
-일제강점기 비밀결사조직인 의창단에 가담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
일명 기환(基煥)·대성(大星). 전라남도 담양 출신. 3·1운동 때 담양시장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같은 해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920년 11월 국외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평양에 도착, 정대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해 12월 북경에 도착, 김중의 소개로
박용만(朴容萬)을 만나 독립운동을 위한 활동방안에 대하여 협의하였으며, 박용만을 중심으로 국내에 있는 각도 경찰부와
도청 등을 파괴하고 일인 고관들을 암살할 목적으로 의창단(義昌團)을 조직하였다.
1922년 6월 모젤권총 12정, 탄환 108개, 시한폭탄 등을 휴대하고 국내에 잠입하였으나 거사 전에 광주에서 붙잡혀 1924년
5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전기환은-준비중
오석완은-준비중
조순식은-준비중
군자금 모집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으며, 한국인에 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리지점을 폭파하고 은행,관공서등을
습격파괴 할 목적으로 기술사를 초빙 폭탄제조를 한다.
조선총독부 부장판사 친일 매국노 김준평에게 판결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