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령(顧母嶺) 지명은 두사충 선생과 관련이 있다. 시인 두보의 21대손으로 섬서성 두릉(杜陵)[2]에서 기주 자사(冀州刺史)를 지낸 두교림(杜喬林)의 아들로 태어났다. 두사충 장군은 명군에서는 지형을 살펴 진을 칠 곳을 정하는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로 일하면서 임진왜란 때 이여송 총사령관의 책사로 조선에 와서 많은 공을 세우고 돌아간 뒤, 다시 정유재란 때 대구지역 방어 책임자로 왜군을 물리친 명나라 원군의 장수로 활약 했다.
이순신장군은 두 번이나 출병한 두사충 장군에게 「奉呈杜僕爺(봉정두복야)」라는 시를 지어 자신의 마음 표했다. 두사충은 이순신 장군이 죽은 뒤에 묘 자리를 처음 봐주기도 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 1598년 두사충 장군은 정유재란이 끝나자 진린에게 "도독은 황제의 명을 받은 사람이니 되돌아가야겠지만 나는 이곳에 남겠다."고 한 다음, 압록강까지 배웅을 하고 대구로 다시 돌아와 지금의 감영공원 위치에 정착하며 조선인으로 살았다. 현재의 감영공원은 '하루에 1원을 투자하면 1000원 수입이 되는 자리이다'라고 선생의 필사본에 적혀 있다.
그러다가 1604년 대구로 감영이 오게되어 두사충 선생은 선조의 대구에서 가장 중심역할을 하는 이곳에 감영이 있어야 된다면서 계산동 일대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뽕나무 밭을 가꾸면서 담장 너머 옆집에 사는 과부와 눈이 마주쳐 결혼하게 되어 ‘임도 보고 뽕도 따고’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두사충 선생은 노후에 자신의 묘 터를 잡으려고 고산전투 때 봐두었던 명당을 자식들에게 알려 주기위해 길을 나셨다. 그 명당은 지금의 고산서당 터였는데 북향으로 되어있다. 선생의 필사본에 팔공산이 보이는 곳이면 어느 지역이든지 남향의 못지않은 기를 받을 수 있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선생은 고산을 넘기 전에 가다가 고령의 탓으로 담이 끓어 재를 넘지 못한 곳이 오늘날의 담티재로 불리고 있다. 그곳에서 되돌아오면서 현재의 모명재가 있는 무덤 위치에 와서 새로운 묘 터로 자리 잡게 되었는데 ‘이곳은 자손대대로 지켜주는 명당이다’라고 했다. 지금 보면 과연 그렇다. 묘소 뒤에는 2군 사령부가 있고 좌측에는 태백공사(기무사), 우측에는 만촌2동 주민자치센터가 위치해 있다.
당시 선생의 필사본에 ‘모봉, 형봉, 제봉 등 세봉우리의 형봉 언저리에 있는데 운주산(영천과 경주사이 낙동정맥)을 거쳐 사룡산-상원산-대덕산을 지나 형제봉 아래서 회룡고조형국을 이루어 어린 사슴이 어미 사슴을 돌아다보는 고모(顧母/돌아볼 顧, 어미 母) 형국을 가졌다’하여 산 정상 건너편 마을이 고모(顧母)지명으로 유래되었다.
고모마을에는 1925년 11월 1일 간이역으로 시작해 2006년 11월 폐쇄된 역사 깊은 고모역이 있다. 한때는 이곳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유통하려는 상인들, 대구시내로 통학하는 학생들, 직장인의 통근용은 물론 주변 군부대의 군수품 및 군인들의 출입역할을 하여 입대한 아들을 먼발치서라도 보려는 부모들이 서성이기도 했던 곳이다. 193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도관사로 단층연립 2호 주택(2세대1동)의 형태를 지닌 8등관사로 철도사적, 건축적 가치가 있다.
‘고모역에 가면, 옛날 어머니의 눈물이 모여 산다.’ 고모역은 고 朴海水(박해수) 시인이 사라져가는 간이역들의 애틋한 사연을 보존하려는 뜻으로 세운 시비가 있다. 그리고 필자가 지은 시집 '고모역 너머 바다가 있다'는 어머니와 아들의 이별 내용이 담긴 소재로 고모역에 있을 때 그런 사연을 담은 시작품이 10여 편이 실려 있는데 고모역 뮤지엄에 가면 시집을 볼 수 있다. 그 중 「고모역 너머 바다가 있다」 시를 소개 하고자 한다.
고모역 너머 바다가 있다
어머니의 이별 눈물 모인
고모령의 고모역
세상 가슴안고 가버린 아들은
기차 타고 바다를 가르며 멀리 아주 멀리
새봄이 돌아 오건데 떠난 자리 백일홍 피어나니
눈물이 바다 되도록 아들은 돌아오지 않네
고모 언덕에서 아들 이름 부르며
약속 없는 기다림에 쏟아지는 그리운 눈물
올해도 피는 백일홍에 적셔주기만 하네
저만치서 보고 있을까 그 자리 피어난 백일홍
우두커니 앞가린 채 서있으니
흘린 내 눈물이 바다 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가
고모역 너머 바다가 있다
<시집 2015년 발행 15p>
2012년 코레일에서 주최한 [간이역을 주제로 한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고 고모역을 지역문화 공간으로 활용되는 동안 시창작, 시낭송, 연극, 합창, 섹소폰 교실 등 소외된 지역 사회에 문화라는 따뜻한 훈기를 주면서 색다른 문화공간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다가 5년 만에 결실을 보게 되어. 2017년 12월에 대구시에서 국비6억, 시비3억으로 대구경북디자인 센타에서 고모역 뮤지엄으로 건립하여 지역주민참여 문화 공간 갈증을 해소하는 단비를 내려주게 되었다.
(교육학박사, 시평론가, 전 고모역문화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