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창 / 보리타작 / 1956
▶ 소윤공(小尹公)의 후 돈재공(遯齋公) 여해(汝諧) 소년시절
[1465年] 소년 정여해는 사장(詞章; 시문)보다는 절의를 중시하는 김종직의 문하에 입문한 것은 족형(族兄)인 정여창의 권면이 컸다. 일찍이 15살의 정여창이, 동갑이지만 생일이 늦은 정여해에게 김종직의 제자가 될 것을 서신으로 권유하자, 그때 정여해는 대학자인 김종직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던 것이다.
- 서신 -
갑신년(1524년) 3월 13일 하남(河南; 능주)에 사는 동자(童子) 정여해는 삼가 재계를 하여 하룻밤을 지낸 후 두 번 절하면서 점필재 노선생의 자리 아래에 글월을 올립니다. 가만히 삼가 듣자옵건대 옛 사람의 말에 '학문은 인(仁)에 가까이 하는 것보다 더 편리한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소자는 이 구절을 외울 때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학문을 권장하는 뜻을 나타냄이 지극히 친절하고, 간단명료해서 천만대의 도에 뜻을 두고 도를 구하는 사람의 철칙이요 목표가 된다는 데 탄복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인을 가까이 하면 이전의 어둡고 흐리던 사람은 밝고 환해질 것이요, 이전에 갈팡질팡하게 걷던 사람은 넓고 편편한 곳의 걸음이 될 것이요, 성질이 비꼬인 사람은 온화 편안해질 것이요, 자만한 사람은 순직하고 진실해질 것이요, 위태로운 사람은 순조롭게 될 것이요, 옹졸한 사람은 도량이 넓어져서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운 후에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게 될 것이요, 평범한 사람도 요순 같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니 그 편리함이 어떻겠습니까. 한 점 태양의 기운을 가까이 하면 그 볕을 쬘 수 있고, 가까이 하지 않고 멀리 하면 찬 기운이 발생하여 따뜻한 기운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찬 기운이 발생하여 따뜻한 기운이 사라지면 비록 열 겹의 옷을 입고 백 겹의 이불을 덮더라도 마침내는 추워서 그 몸을 떨고 그 살갗이 얼어터짐을 면치 못할 것이니 가까이하고 멀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또한 어떻겠습니까.
소자는 지금 나이가 15세입니다. 7세부터 <소학>을 가정에서 배워서 쇄소(灑掃; 청소)와 진퇴의 예절을 대략 익혔고, 12세에 <논어>를 가끔 읽어서 '학문을 널리 배워 사리를 구명하고 행동은 예의로써 하여 지조를 지키며, 사욕을 극복하고 예절을 회복하는 과정을 대강 연구하여, 비로소 과거(科擧)를 위한 학문 이외에도 절실히 자기 몸을 수양하는 공부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궁벽한 고을에 자라나서 선각자의 본보기를 만나지 못하고 혼자 힘으로는 어근버근하여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면서 세월만 끌어온 바 근거를 두고 일을 시작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아직 깨달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년 겨울에 족형(族兄)인 여창이 멀리 편지를 보내와서 스승을 구하는 이득과 도덕을 지닌 분에게 나아가서 시비를 질정하는 방법을 간절히 권장하고는 이내 선생님의 유덕하심을 소개하였습니다.
'학문은 바른 계통을 계승하셨고, 도덕은 종장(宗匠)이 되었으며, 문호를 널리 열어 영민한 인재를 교육하여, 큰 재간을 지낸 사람은 크게 만들고, 작은 재간을 가진 사람은 작은 대로 만들어, 마치 봄바람이 한번 불어오면 소태나무와 가래나무와 같은 좋은 재목이거나, 가죽나무와 상수리나무와 같은 쓸모없는 재목이거나를 불문하고 모두 꽃을 피우고 무성해지는 덕택을 입는다.'
비록 소자와 같이 자질이 우둔하고 학문이 천박한 사람이라도 오히려 굳게 지킨 상도(常道)가 없어지지 않는 마음은 있어, 족형의 편지를 받고는 문득 뭉게구름처럼 일어나는 느낌과 분발하여 일어나는 뜻을 금할 수 없었사오니 이것이 바로 인(仁)을 가까이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옵니다.
(인을) 가까이하면 학문하는 데 이보다 편리한 것이 없을 터인데 무엇이 괴로워서 가까이하는 방법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후로는 인품을 사모하고 선한 분을 바라보는 정성이 날로 더욱 심하여 문하에 용감하게 나아가서 큰 화로나 풀무와 같은 교화를 받고자 하였사오나, 돌이켜 보아서 궐당동자(闕黨童子)의 속성(速成) 병폐를 경계한 일을 생각하고, 이지(夷之)가 서벽(徐辟)을 통하여 맹자를 찾아 뵌 옛 일을 본받아 감히 짤막한 글월을 엮어서 여창이 가는 걸음에 먼저 변변치 못한 저의 사정을 아뢰옵고, 삼가 진퇴, 가부의 명령을 기다리옵니다. 만약 선생님께서 물리치지 않으시어 폐백을 가지고 절하고 뵙는 날에 한 구석 자리를 허락해 주신다면, 선생님의 덕을 우러러 뵙고 선생님의 인에 가까이 하여 친히 가르침을 받는다면, 하늘의 신령과 같은 힘을 입어 우둔한 불초의 자질을 변화시키기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오니 선생님의 은혜가 어찌 깊고도 크지 않겠습니까. 삼가 선생님의 살펴 주심을 바라옵니다.
문하에 입문을 허락해 달라는 소년 정여해의 서신은 김종직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비록 대학자가 없는 능주에서 독학한 15세의 정여해라고는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학문의 태도나 목적은 김종직을 매우 흡족하게 했던 것이다. 김종직은 여러 제자들에게 강의할 때마다 곧잘 '여창과 여해는 도학으로써 정문(鄭門)을 빛낼 것이다'라고 격려하곤 했던 바, 그것은 학문하는 목적이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仁)에 가까워지기 위한 것이라는 소년 정여해의 생각이 김종직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원에는 점재필과 김종직 두스승을 두고 있었다.]
소년 정여해의 할아버지 유주(由周)는 창덕궁 참봉이었고, 아버지 지영(之英)은 흥양(현 고흥) 현감이었다. 특히 아버지의 오형제가 모두 같은 해에 과거 급제해 능주 이곡에 훗날 오고정(五鼓亭)이란 정자가 세워지게 된 명문 자손으로 12세 때 벌써 도학의 싹을 엿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할아버지 정유주와 친분이 있던 고을 원이 수재라고 칭찬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배우고 때대로 익혀서 기뻐하니
이에 성인의 공부를 엿볼 것이네
글들을 잘 음미하나니
도의 근원이 우리 나라에 있다네.
學而時習悅
見此聖人功
字字能詳味
淵源道在東
이후 소년 정여해는 <논어>의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불만을 품지 않는다(人不知不慍)'를 세 번정도 되풀이 해 읽으며 학문의 대의를 깨달았다. 소년 정여해는 친지를 만날 때마다 '학문하는 근본 강령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남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는 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였고, 과거를 권하는 어른들에게 '몸을 다스린 후에라야 남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서 남을 능히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물며 벼슬을 바라는 마음은 더욱 어린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릴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소년 정여해는 사종형(四從兄)인 정여창의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서신을 받고나서 김종직의 문하로 입문했던 것이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어릴 때부터 정도(正道)로 교육하는 것이 성인이 되는 공부이다'라 했고,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옥돌도 갈지 않으면 쓸모 있는 그릇이 되지 않는다' 하였으니 어찌 궁벽한 시골에 파묻혀 스승과 친구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가.
마침내 정여해는 김종직에게 나아가 <중용(中庸)>을 배우면서 김굉필, 정여창, 남효온 등과 강의를 듣고 토론하며 경서의 뜻을 깨달아 밝힌 바가 많았다. 이전의 학문에 근거가 생기고 새로운 지식에 도움이 되어, 얼음이 녹듯이 의심이 풀렸고, 칼로 끊듯이 이치를 분별하여 더 발전하고 개척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여해는 어머니 상을 당하여 능주로 돌아와 공부를 잠시 접고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3년을 살았으며, 2년 후 다시 아버지 상을 당하여 3년을 시묘했다. 그러니까 정여해는 연달아 6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상식(上食)을 마련했고, 찬 이슬과 눈보라를 맞으며 묘를 맑게 청소하는 성소(省掃)를 게으르게 하지 않았다. 풍찬노숙과 다름없는 데다 먹는 것도 어버이를 여읜 불효자라 하여 염채(鹽菜; 소금과 채소)를 6년 동안 금하니 살색이 누렇게 변하고 맥이 풀려 이미 몸 안에 중풍의 기운이 돌 정도였다.
부모의 상(喪)을 모두 마치고 스승인 김종직에게 문안 인사차 갔을 때, 가천정사(伽川精舍)에는 여전히 김굉필, 정여창 등이 있었고, 새로운 동지 원개(元槩), 곽승화(郭承華), 이승언(李承彦) 등이 있었다.
그때 김종직은 정여해가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어긋남 없이 상례를 마친 것을 확인하고는 여러 제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격려를 했다.
"정생(鄭生)은 부모상을 당하고 있을 때의 예절을 내가 일찍이 들었는데, 예절을 다하면서도 그 형식에만 빠지지 않고 애통을 다하면서도 그 몸을 손상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우리들 가운데 주자가례의 제일인(第一人)이다."
정여해는 1480년(성종 1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4년 뒤인 1484년에는 삭주교수(朔州敎授)에 임용되었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청렴하다'는 이조(吏曹)의 추천을 받아 성종 15년에 삭주교수(朔州敎授)로 임명될 정도로 효성또한 지극하셨다. 3년 후에는 품계를 뛰어넘어 사헌부 지평을 제수 받았으나 정여해는 가까운 지인에게 거절의 이유를 밝혔다.
"나는 일찍이 벼슬을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과거(진사시)를 거쳐서 헛되이 명예를 날린 것을 매우 부끄러워한다.
다만 요순 때와 같은 문명의 시대를 만나서 스승님과 벗들인 여러 현인들이 경연에 나아가는 일을, 변변치 못한 내가 감사하게 여기고 또한 달려가서 편달을 받고 싶은 소망이 없지는 않으나, 거기에는 재주가 미치지 못하고 힘이 미치지 못하는 데에야 어찌 하겠는가."
정여해는 거절의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단 한 가지였다. 김굉필은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재주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도학자로서의 겸사일 뿐이고, 부모상 때 받은 시묘살이의 후유증인 중풍의 기운이 직접적인 이유였다. 서울로 가 벼슬을 하는 것보다는 병이 깊어진 몸을 추스르는 것이 급했던 것이다, 무오사화가 일어나기 직전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향리로 내려와 은거생활을 하시던중 향년 81세로 별세하셨다. 편집/ 松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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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돈재공 할아버지의 면면을 알고나니 깊고 깊은 선조의 사상을 알고 뿌리의 근원이 정리됩니다.
효심이 지극하여 무오사화를 비켜갈 수 있도록 보살핌 또한 받으셨음이 분명합니다.
당시에 팔순을 맞으셨으니 이 또한 장수의 복도 누리셨구요.
네 이저서야 어린시절 할머니한테 들은 돈재공할아버지 이곳에서 자세히 읽어보았는데 대단한 분이셨네요 감사합니다. 서울 정덕기올림
선조님들께서 품었던 꿈과 소망을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미력 하나마 더 큰 도전이 되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저 또한 크게 남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후손으로서 종친님을 이렇게 뵈니 참 반갑습니다.
늘 자유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