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페미니스트로 만들어주신 아버지
나는 아내의 유학을 적극 권장했고 아내가 유학을 떠나자 젖먹이 아이를 길렀다. 남들에게 나는 ‘아내를 유학 보내주고 혼자 갖난 아이를 키운 특별한 대학교수’였다. 그 사연을 담은 수필집을 읽은 우리 시대의 여성들은 부러운 듯 조용히 아내에게 다가와 물었다. “댁의 남편 정말 책에 씌어져 있는 대로 해 주어요?”
나는 내가 여성에 대한 의식을 관념적으로 혁신한 완벽한 페미니스트라 생각했다. 아내의 처지를 그만큼 이해해주고 자식을 그렇게 자상하게 배려해 준 것은 페미니스트 지식인이 갖춘 관념의 실천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열이 올라 “아빠 아파 아빠 아파” 하여 발버둥치는 아이 옆에서 잠못 들어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 아이에게 경기가 들어 내 심신이 뒤죽박죽이 되었을 때, 그리고 새근새근 잠자는 아이의 솜사탕같은 손을 만질 때면 으레 돌아가신 아버지가 꿈결인양 다가 오셨다. 그때의 아버지는 언제나 내 유년기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신새벽에 일어나 먼 통학길을 떠날 아들을 위해 세숫물을 데우고 밥을 안치셨다. 만원 버스에 오르지 못할까봐 어두운 길을 따라와서는 아들의 엉덩이를 꾹꾹 밀어넣었다. 가난한 살림에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마련하지는 못했지만, 잔칫집에 갔을 때는 술에 취해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어도 아이들을 위한 음식 봉지만은 꼭 안고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아들이 장성한 뒤에도 정성을 다해 아들을 보살피지 않으면 무슨 사고라도 당할 듯 노심초사 하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행동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어느덧 아버지의 그런 모습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베풀어야 할 정성의 수위를 터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아버지께서 나에게 해주신대로 나도 내 아이에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 폭군으로 변신했다. 쌀뒤주가 비면 마치 어머니가 그 속의 쌀을 모두 탕진한 듯 폭언을 하셨다. 나에게는 아침을 굶는 것보다 아버지의 그 거친 말씀이 더 쓰라린 것이었다. 외출하셨다 술자리에서 자존심이 무척 상하여 돌아오는 날이면 또 한바탕 소동을 일어났다. 나는 그럴 때면 그냥 오돌오돌 떨면서, 저런 아버지의 모습을 결단코 닮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리고 대학시절 자취생활을 하던 서울의 어느 철거민촌에서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관악산 중턱에 황급하게 조성된 그 마을 남자들의 대부분 실업자여서 여자들이 청소부, 요리사, 잡역부의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을에는 거의 매일 거르지 않는 의식과 같은 것이 있었다. 밤마다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한 집에 싸움이 시작되면 이웃 사람들이 몰려가 구경을 했다. 부부싸움은 너무나 과격한 것이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슴을 졸이게 하고 섬뜩한 예상을 하게 하기도 했다. 주먹으로 뺨을 후려치는 것은 보통이었고 팔꿈치로 아내의 명치를 가격하거나 발로 허벅지를 짓밟다가는 몸통을 들어 마당으로 내팽개치기까지 하였다. 멀리서 구경하던 남자들은 느긋한 자세로 짜릿한 대리만족을 충분하게 한 뒤에서야 조금씩 다가가 그 싸움을 말렸다.
나는 밤마다 치루어지던 그 마을의 의식을 보며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던 유년기의 광경들을 다시 떠올렸다. 선친과 그 마을의 가난한 남자들은 바깥의 세계에서 당당하게 자기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그 자존을 지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것 같았다. 그들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세계로부터 자신이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다는 망상을 갖고 있었고, 그 망상을 잊기 위해서는 분풀이의 절차가 필요했다. 그들의 아내들은 가장 쉽게 확보할 수 있는 분풀이 상대였던 것이다. 그것은 식민지로 전락한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자기 동포에게 극도로 잔인한 공격성을 드러내었다는 프란츠 파농의 지적을 떠올렸다. 식민자의 탄압에 의해 지극히 예민해진 원주민들은 스스로 식민자의 자리에 대신 들어서는 꿈을 꾸어 동족에게 잔인해졌는데, 그것은 자기들을 탄압한 식민자에게 향해져야 할 저항적 행동의 방향이 잘못 잡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철거민촌에서 잔혹스런 부부싸움을 구경하며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 했던 나의 유년기를 떠올렸다. 텅빈 쌀뒤주 옆에 우두커니 앉아 계시던 어머니와 전날 밤 얻어맞아 눈자위가 멍든 그 마을 아주머니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남자인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나는 여성에 대해서는 엄격하기 이를 데 없는 나 자신만의 원칙을 세워야 했다. 그것은 아버지를 닮지 않기 위한 간절한 몸부림이었다. 가정과 사회에서 약자이게 마련인 여성들에게 남자가 하는 말과 행동은 아주 쉽게 폭력성을 띄게 되니, 나는 나 자신의 말과 행동에서 폭력성을 근절하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렇게 아버지는 자식 앞에 섰을 때와 어머니 앞에 섰을 때가 달랐다. 나는 꿈결인양 찾아오신 아버지에게서 그런 조화되지 않는 옛 기억을 다시 되살리며 아련한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 세대의 남자들이 여성들에 대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 세대의 한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정성에 대한 감동과 아버지의 폭력에 대한 당혹감, 그 양쪽의 모순에 대한 연민의 정이, 아내 없이 아이를 키우던 나의 가슴 속에 뒤섞였다.
그러면서 결국 사람의 생각과 행동의 출발이 가정에서의 경험에 있음을 깨달았다. ‘아내를 유학 보내고 혼자 갖난 아이를 키운 특별한 대학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각성한 지식인으로서 획득한 관념을 실천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 유년 내내 그리고 장성한 뒤에서조차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 안타깝고 서러운 삶 속에서 터득해야만 했던 삶의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니 나를 페미니스트로 만든 분은 아버지였다.(2003)
첫댓글 교수님 좋은이야기듣고갑니다 내가 살고있는 지금삶이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말이 공감가요.. 교수님 글읽고 갑자기 감정이 묘하게 복잡해졌지만 이정도로만 감상하고 가겠습니다~ 다른 좋은 글도 또 올려주세요~
내 없을 때 다녀가서 차 한잔 대접도 못했구나. 얼마 안 남은 학기 잘 마무리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