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 둘러싼 삼국의 대결을 보여주는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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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일원에는 한강 건너 백제의 한성을 견제했던 보루가 상당수 배치되어 있다. 아차산의 보루들은 두 줄로 배치되어 있다. 용마산의 보루들은 중랑천변을, 아차산의 보루들은 왕숙천변을 관할하던 것이다. 발굴조사를 통해 구의동보루에는 10여명, 아차산 4보루에는 100여명의 고구려 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 한반도의 중심부인 한강유역은 넓은 평야, 남북의 통로, 서해로 진출성 등 장점이 많아 선사시대부터 조상들의 주요 생활 터전이었다. 삼국시대에는 이 지역을 차지하는 것이 국가의 흥망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삼국 중 백제가 이 지역을 가장 먼저 차지하고 국가의 기틀을 다졌으나,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에 의해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551년 일시적으로 백제의 영토가 되었다가 553년 이후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덕분에 한강유역에는 한성시대 백제의 주요 유적을 비롯한 많은 삼국시대 유적이 분포하고 있으며, 최근 고구려의 유적들이 확인·발굴되고 있다.
고구려 유적은 주로 한강 북안의 아차산 일원에서 확인되는데, 초기에는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남하한 고구려 군대의 전초기지로 축조됐으며, 후에는 백제와 신라의 북상을 막기 위한 방어기지로 사용됐다. 이들 고구려 유적은 남한에서는 처음으로 조사된 고구려 유적으로 당시 고구려 군대의 전모를 생생히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한강을 둘러싼 삼국간의 각축양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강유역의 고구려 유적 몽촌토성에서 첫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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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제4보루의 성벽은 총 둘레가 210미터에 불과한 작은 규모이지만 고구려 성돌의 전형적인 특징인 쐐기모양 성돌의 용도를 잘 보여준다. | 한강유역에서 고구려유적이 처음 확인된 것은 1988년 백제의 주요 거성(居城)으로 밝혀진 몽촌토성의 발굴조사를 통해서다. 전형적인 고구려토기 나팔입항아리와 함께 다량의 고구려유물이 확인됐고, 이를 바탕으로 1991년에는 1977년 발굴조사된 구의동유적을 고구려의 군사요새로 재해석하게 됐다.
1994년 구리시와 구리문화원에서 실시한 지표조사를 통해 한강 북안의 아차산 일원에서 많은 고구려 보루가 확인됐고, 1997년부터 이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2000년까지 계속됐다.
한강유역의 고구려유적은 한강 이남의 몽촌토성 내 고구려유적과 한강 북안 아차산일원의 고구려유적으로 나뉜다. 몽촌토성 내에서는 온돌건물지를 포함한 건물지와 함께 300여점이 넘는 고구려 유물이 출토됐다. 출토된 유물의 성격을 볼 때, 아차산 고구려 보루보다는 신분이 높은 인물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몽촌토성에는 475년 장수왕이 한성을 함락한 직후 고구려 군이 주둔했다가 대략 500년 이전에 한강 북안의 아차산 보루군으로 철수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아차산 일대에는 모두 15개소의 고구려의 군사유적이 있는데, 산성보다는 규모가 작고 기능이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보루(堡壘)라고 불린다. 이들 보루들은 아차산과 용마봉 줄기를 따라 2줄로 배치되어 있다. 보루들 사이의 거리는 400~500m 가량으로 비교적 일정한 편인데, 각 보루는 목책(木柵)이나 석축 등의 시설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아차산 제4보루와 시루봉보루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아차산 제4보루의 구조가 잘 남아있었다.
아차산 - 군사 강국 고구려의 전방 군사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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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보루에는 7기의 건물이 축조되어 있으며, 100여명의 군사가 주둔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 내부에는 1기 이상의 온돌과 저수시설 및 배수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는데, 다른 보루들도 이와 비슷한 구조로 추정된다. '후부도□형(後部都□兄)'이 새겨진 토기접시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고구려의 한강유역 경영에 대해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 아차산 4보루는 남북으로 뻗은 아차산 능선의 가장 북단에 위치해 있다. 이 봉우리는 남북으로 긴 말안장 모양을 하고 있으며, 가운데가 약간 들어가고 양쪽 끝은 두 개의 작은 봉우리 형태를 하고 있다. 둘레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경사면을 따라 3~20단의 석축 성벽을 쌓아서 보호하였으며, 안쪽에는 온돌시설을 한 건물지가 배치되어 있다. 성벽의 길이는 210미터에 불과하지만 잘 다듬은 석재를 사용하였으며, 성벽 남서모서리와 동벽 중앙부에 고구려 성의 특징인 치(雉)를 설치하였다.
성벽 안쪽에는 7기의 건물이 축조됐다. 모두 장방형의 평면을 하고 있으며, 일부를 제외하고는 돌과 점토를 섞어 쌓은 담장식 벽채이고, 그 위에 맛배식 지붕을 덮었다. 건물 안쪽에는 온돌시설과 저수시설 등을 설치하였다. 가장 큰 3호건물지는 폭 10미터, 길이는 45미터에 달하며, 내부에는 강당과 2기의 저수시설, 3기의 온돌방을 만들었다. 이 건물 밖에는 간이대장간도 설치되어 있었다.
발굴조사와 출토된 유물에 대한 분석을 통해 아차산 일원의 이들 유적은 475년 장수왕의 한성 공함을 전후한 시기에 축조되어 551년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이 한강유역을 회복할 때까지의 80여 년 간 존속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각각의 보루에는 대소 규모의 차이에 따라 10여명에서 100여명의 고구려 군이 주둔했던 사실도 밝혀졌다.
특히, 아차산 4보루와 시루봉보루의 발굴을 통해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당시 고구려 군의 편제 등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수확의 하나다. 발굴된 유물들의 분석을 통해 고구려 토기와 철기류에 대한 새로운 분석도 가능해졌다. 무엇보다도 큰 수확은 이 두 유적의 발굴조사를 통해 남한에서 고구려고고학 연구가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가 발굴되면서 임진강유역과 경기도 양주, 충남 대전, 충북 청원 지방에서 유사한 성격의 고구려 유적이 하나둘 발굴되고 있다.
장수왕, 개로왕 말 달리던 치열한 역사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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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4보루에서는 철제 무기류와 함께 트럭 2대 분량에 달하는 많은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6개월간 2천여명이 동원되어 복원한 결과 26개 기종, 538개체분의 토기가 확인됐다. 출토된 모든 토기가 고구려 토기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 지금까지 조사들을 통해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한성을 공함할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인 서기 475년 가을, 3만이나 되는 고구려 군은 개성을 거쳐 장단을 지나 파주 적성부근에서 임진강을 건넜을 것이다.
임진강을 건넌 고구려 군은 파죽의 기세로 양주 벌판을 지나 상계동을 거쳐 중랑천을 따라 내려와 아차산 기슭에 진을 쳤다. 물론 본대가 도착하기에 앞서 전초부대가 먼저 요새를 쌓아 교통로를 확보하였을 것이고, 그것들이 아차산에 남아있는 보루들일 것이다. 그 다음의 상황은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 개로왕(蓋鹵王) 21년 조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9월에 고구려왕 거련(巨璉:장수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의 왕도 한성(漢城)을 포위했다.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두려워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는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양쪽에서 공격하였고,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고구려의 대로(對盧:벼슬이름)인 제우, 재증걸루, 고이만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해 7일만에 함락시키고, 연이어 남성(南城)을 공격했다. 성안은 위태롭고 두려움에 떨었다.
개로왕은 곤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 수십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다. 과거 개로왕의 신하였다가 고구려에 망명한 장수 재증걸루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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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지만 고구려 유적에 대한 관심 높아져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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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4보루의 병사 10여명이 기거하던 온돌방의 절반 가량을 복원한 모습으로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방안에는 ‘ㄱ’자로 꺾인 온돌고래가 있고, 한쪽에는 낮은 시렁 위에 저장용 큰항아리들이 놓여있다. 두 개의 아궁이 위에는 철 솥이 걸려 있고, 그 위에는 뚜껑 덮은 시루가 올려져 있다. 아궁이 주변에는 여러 가지 생활용기가 정리되어 있고, 아궁이 왼쪽에는 불씨 저장소와 철제 낫이 있다. | 최근의 발굴조사를 토대로 보면 위 기사의 북성은 풍납토성(風納土城), 남성은 몽촌토성(夢村土城)으로 추정된다. 아차성은 아차산성(阿且山城)을 가리키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들은 고구려 군이 진을 치고 있던 중랑천 변 외곽을 감싸고 있던 요새들임도 분명하다.
지금까지 우리 민족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의 하나인 고구려에 대한 연구, 특히 고구려 고고학에 대한 연구는 북한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차산 고구려 보루의 발굴은 남한에서의 고구려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제공했다.
최근 중국에서 제기하고 있는 이른바 ‘동북공정’과 관련해서도 아차산의 고구려유적은 매우 중요하다. 최근 서울시에서는 아차산 고구려유적을 국가사적으로 지정해 줄 것을 건의하였으며, 올해부터 일부 유적에 대한 추가 발굴조사를 실시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발굴된 유적에 대해서는 복원을 실시하여 시민을 위한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며, 장기적으로는 세계문화유산 지정도 신청할 계획이라고 한다. 다소 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서울시의 이러한 결정에 박수를 보내며, 국민이 애정 어린 관심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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