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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고려증상서좌복야상주국소성현개국후이공허겸신도비명병서
나는 일찍이 말하기를 「한 씨족의 始祖가 되어 이어갈 수 있는 偉業을 創造하고 확고한 터전을 수립하여 불억(不億:많은 수효를 말함)의 後孫으로 悠久한 歲月에 걸쳐 하늘과 신의 保護를 받은 것과 같기에는 그 누가 시켜서 그러한 것인가」라고 했다. 급기야는 많은 世故를 겪으면서 古今의 사람들을 가늠해 보니 거의가 家庭이나 國家를 위하여 자기의 할 수 있는 힘을 다하는 자가 없음으로서 덧없는 興亡盛衰가 瞬息間의 循環反覆을 보게 되었다. 나는 두려운 듯이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나?」 아! 天地는 유구하다 빗방울처럼 많은 사람들은 意義없이 왔다가 根據없이 가게되니 風烟과 같이 모였다 흩어지고 草樹와 같이 썪어 없어질 뿐이다. 그러한 와중에서 풍성하고도 偉大한 勳業으로서 國家의 틀이 되어 임금이 土地와 성씨를 내려주며 爵을 封하고 宗을 세울 정도인 사람은 아마도 千,百명 가운데서 하나 둘도 채 못될 것이다. 천 백분의 一, 二 밖에 안되는 소수만의 사람으로서 훌륭한 門閥을 保有하여 누백대에 전해지고 몇萬戶로 헤아려서 餘他사람들의 欽慕대상이 되기에는 반드시 豊富한 修養과 累積된 德望의 土臺에서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된 것이다. 乙亥年 가을에 仁川李氏大宗會長南浩氏가 僉宗의 決議에 따라 譜牒과 邵域世德등 모든 文獻을 가지고 公州의 靑儒堂으로 나를 찾아와 始祖의 신도비문을 要請했다. 一年이 지나 도록 글이 이뤄지지 못했으니 겨를을 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不敢했기 때문이었는데 끊임없는 要請에 삼가 붓을 들게 되었다. 舊譜를 살피건대 公의 諱는 許謙이니 실로 인천이씨의 一世祖가 된다. 인천이씨는 駕洛國 首露王에서 비롯되었는데 王이 許氏 諱 黃玉으로 王后를 삼아 十兄弟의 아들을 두었더니 돌아감에 미처 王은 심히 哀悼하고 또한 后의 말씀에 感動하여 두 아들에게 모성을 따르게 하니 金氏로서 許氏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家錄을 살피건대 諱 奇는 首露王의 後孫으로서 新羅 景德王 때 벼슬은 兵馬使大匡에 이르렀고 唐나라 玄宗 天寶十四年乙未年 겨울에 安祿山의 난리가 일어나자 이듬해 二月에 使臣의 명을 받들고 巴蜀에 이르니 唐帝는 勞苦를 가상히 여겨 五言古詩一篇을 기증하여 引重과 眷戀의 뜻을 전하고 다음해 丁酉年에 唐帝를 따라 還都하자 皇帝의 姓 李氏를 내려주고 邵城伯을 封하니 許氏에서 다시 李氏가 되었으며 혹은 李 許 複姓으로 일컬어 지기도 했으나 그후 失系하였다. 文正公 諱 之氐께서 撰述한 아버지 文忠公 公壽의 誌文을 참고로 한다면 邵城伯 諱 奇를 十三代祖라 稱하였으니 文忠公은 公에게 玄孫이 되며 邵城伯은 공에게 九代祖가 된다. 家錄에는 奇, 儉, 波, 貴, 浚으로서 公以上의 계대를 대고 五代 모두가 獨子로 되었으며 그대로라면 邵城伯은 公에게 五代祖가 된다. 壬戌譜 및 邵城世德에는 모두 邵城伯과의 九代로 記錄되었으니 위 誌文의 所載와 代數는 一致가 되나 諱字나 事實에 대하여는 기송(杞宋 : 문헌의 증거가 없는 것을 말함)을 證據할 수 없으니 차라리 舊譜에선 다른 記錄과 달리 공을 一世로 斷定한 것이며 역시 의문되는 것을 제쳐놓고 愼重을 기하는 道理인가 보다. 아! 무성(武成 : 書經의 篇名)은 聖經임에도 孟子께선 그 중에서 「몇몇 부분만을 取擇한다 라고」말씀하셨으니 이러한 의미에서 공의 신도비명을 가늠한다면 거의 두찬(杜撰 : 典據가 확실치 못한 저술)이라는 結果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은 新羅末에 誕生하여 高麗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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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을 하여 大官을 지내고 邵城伯에 襲封되고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의 벼슬에 贈職되고 食邑 一千五百戶를 下賜받았다. 生年月日과 官階履歷은 記錄이 없고 墓는 仁川 文鶴山 아래 看雉島 辛坐의 자리에 있으니 風水家에선 거북의 形이라고 말한다. 配는 慶州金氏니 아버지는 工部侍郞 樂浪君 殷說이요 할아버지는 敬順王이며 墓는 公과 合窆이다. 그후 後孫들이 크게 繁昌하여 본 고을이 縣에서 郡. 郡에서 府로 昇格되기까지에는 모두가 仁川李氏와의 關係가 없지 않으며 비록 보통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이 墓가 名墓임을 알 게 되어 지점(指點 : 손가락으로 가리킴)과 긍식(矜式 : 공경하여 표본으로 삼음)을 가하고 祭祀가 지금까지 이어지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長子 翰은 中樞副使로 여러번 門下侍中에 증직되고 諡文景이요. 二子 訥은 大將軍이요. 三子 瑱은 右僕射요. 女는 安山 金殷傅에게 出嫁하니 知中樞 戶部尙書 中樞使로 문하시중 상주국 安山郡 開國侯에 증직되었다. 長房孫 子淵은 推誠佐世保社功臣 門下侍中 상주국 慶源府 開國公이며 食邑 三千戶를 下賜하고 文宗廟庭에 配享되었다. 다음 子祥은 尙書右僕射로 歷事三朝하여 忠義가 堂堂하고 아들 손자 모두가 宰相의 자리에 오르니 어느 사람은 詩를 지어 祝賀하기를 「뜰아래 芝蘭은 세 宰相이요. 문앞에 桃李는 열 公卿이라」하였다. (芝蘭과 桃李는 子孫 또는 兄弟를 가리킴) 二房孫 成幹은 上將軍 檢校太子小保요. 三房孫 聰顯은 禮部尙書이다. 曾孫이하부터는 가장 顯達한 분만을 列擧하고 內外 遠近孫에서 王妃의 至親 및 女壻 몇몇 분을 별도로 採入하니 古例에 없다. 그러나 非常한 사람은 史蹟이 非常함으로 文字가 簡略할 뿐 만은 없다. 子淵의 八男에 頲은 守太傅進太師侍中慶源伯諡貞憲이며 頔은 殿中少監이요. 碩은 兵部侍郞東北面兵馬使工部尙書요 顗는 문하시랑평장사요 韶顯은 집을 떠나 佛門에 들어가니 法名은 眞應이요 諡는 惠德王師이다. 顥는 문하시랑평장사 수태부 경원백이며 諡는 景德이다. 顓은 贈門下侍郞平章事 守太傅요 顔은 문하시랑평장사이며 諡는 襄愼이다. 預는 歷事六朝하여 翰林學士 政堂文學 進中書侍郞平章事이며 諡는 文顯이다. 오는 號 金剛居士이며 文德殿太學士 判尙書吏部事 監修國史 문하시랑평장사요 諡는 文良이니 곧 子祥의 二男이다. 資仁은 兵部侍郞 右諫議大夫 尙書左丞 中樞院副使요 資義는 중추원사이며 宣宗朝때 宋나라에 使臣으로 가서 남다른 名聲과 칭찬이 있었다. 資玄은 號 息菴 또는 希夷諡眞樂이니 科擧에 及第하여 大樂署丞이 되었다가 벼슬을 버리고 淸平山에 들어가서 菜食과 布衣로 道를 즐거워 하면서 平生을 마치니 退溪先生은 詩에다 序文을 곁드려 그의 淸修苦節을 特別히 稱述했다. 資德은 중서시랑평장사이며 諡는 莊懿이다. 資謙은 門下侍中 中書令 朝鮮國公이요 資諒은 守司空 중서시랑평장사요 公壽의 字는 元老요 諡는 文忠이며 天稟이 宏厚하니 아이 때 外祖 崔文和公 惟善은 그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마땅히 큰 그릇이 될 것이라」하더니 成長하자 學問에 힘쓰고 大科에 及第하여 推忠衛社 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문하시중 상주국이요 彦林은 공부상서 우복야요 軾은 金紫光祿大夫 상서좌복야 叅知政事 判尙書戶部事요 之氐는 즉 文正公이니 정당문학수사공 좌복야 判西京留守事이며 直節이 있고 文章에 能하여 일찍이 임금을 모시고 서도(西都 : 平壤)에 갔다가 詩를 지어 한 세상에 알려졌더니 조선 世祖朝에 이르러 樂府에 採入되었다. 之茂는 문하시랑평장사요 光縉은 중서시랑평장사요 諡는 貞懿이다. 仁老는 號 雙明齋이니 文章으로 세상에 울렸고 明宗朝에 壯元及第하여 書狀官의 職責으로서 宋나라에 갔다가 朱子를 뵙고 學問의 要領을 배우니 著述에는 銀臺, 雙明, 破閒등 세 文集이 刊行되어 퍼졌다. 藏用은 정당문학 중서시랑평장사 태자태부 문하시중이요 諡는 文眞이니 文章이 普通에 뛰어나서 한 時代의 큰 著作 그 수중에서 많이 나왔다. 元宗 甲子年에 王을 따라 元나라에 가니 이때 元나라에선 高麗에게 救援兵을 要請했다. 끊임없는 긴박한 상황에도 公는 전대(專對 : 외국에 사신으로 가서 황제와 독단적으로 응답함)에 敏捷하므로 事態는 마침내 풀렸고 元帝는 친히 두차례의 宴會를 베풀었다. 作臣은 문하시중이니 妖僧을 痛斥하다가 貶黜을 당했다. 榲은 號 永慕齋요 벼슬은 중현대부 典醫監이니 鄭圃隱 李石灘 李遁村 諸賢과 더불어 서로 親善하고 性稟이 純孝하여 쌀궤의 感應이 있으니 사실이 알려지자 國王은 按廉使를 보내어 두 碑石을 세워 표창했다. 元紘은 科擧에 及第하고 詩를 잘 지었으며 정당문학을 歷任했다. 고려가 滅亡하자 忠節로서 仁川에 流配되어 유명한 喜晴 및 新亭이라는 題目의 詩를 지으니 權陽村의 文集에 실려 있다. 그의 두 아들에 爚은 監正이니 李太祖가 革命을 하자 臣僕이 아니되겠다는 義理를 지켰으며 灌은 문과에 급제하여 太宗朝에 京畿, 咸鏡 兩道 監司를 역임하고 資憲 吏曹判書에 승진되었다. 賢佐는 대광보국 숭록대부 慶城府院君이요 曰萬英은 仁川君이고 文和는 號 烏川이니 斥佛崇儒하고 左參贊 議政府事兼藝文館大提學을 歷任했으며 領議政에 贈職되고 諡는 恭度이며 六男을 낳으니 모두가 卿宰相의 자리에 올랐다. 歷代의 王妃를 열거한다면 元成太后, 元惠太后, 元平王妃는 곧 金殷傅의 세 따님이며 公에게 外孫이 된다. 仁睿太后 및 仁敬, 仁節 두 왕비는 子淵의 따님이며 공에게 四世가 된다. 元信王后는 頲의 따님이요 思肅太后는 碩의 따님이요 長慶王妃는 顥의 따님이요 貞信王妃는 預의 따님이며 그의 따님이 敬和王妃가 되었으니 공에게 五六世가 된다. 文敬太后, 延德王妃, 福昌王妃는 資謙의 세 따님이며 공에게 六世가 되고 恭讓世子嬪은 元紘의 따님이며 공에게 十三世가 된다. 朝鮮朝에 이르러 坡平 尹璠의 따님이 貞熹王后가 되었으니 恭度公의 外孫이며 공에게 十六世가 된다. 동상(東床 : 사위의 별칭)으로서 顯達하여 始祖 또는 中顯祖가 된 분을 열거한다면 坡平 尹瓘은 문하시중 판상서 鈴平縣 開國伯이요 諡는 文肅이니 成幹의 사위요 光山 金義元은 檢校太子太師 戶部尙書兼三司使 特進 金紫光祿大夫이며 諡는 忠貞이니 碩의 사위요 南平 文公元은 평장사요 諡는 貞敬이니 顗의 사위요 江凌 金仁存은 검교태사 문하시중이요 諡는 文成이니 顥의 사위이다. 그밖에 세대가 멀어지고 分派子孫이 더욱 번창함에 따라 科擧, 仕宦, 忠孝, 德學으로서 훌륭한 名望이 있는 분들도 다 기록지 못한다. 아! 詩經에 이르지 않았던가. 「山嶽이 神을 내려 甫와 申을(甫 : 甫侯. 申 : 申伯. 周宣王의 賢臣.) 낳았다」라고 하였다. 고려가 興旺하던 초기에 공이 運에 맞게 빼어나서 偉大한 勳業과 훌륭한 計劃을 자신에 여유있게 간직하고 후손에게 전수하여 숲의 나무처럼 늘어선 세신(世臣 : 대대로 한 王을 섬긴 공로가 있는 신하)은 경제상의 國祿을 받게 되고 연달아 나온 賢淑한 女人은 萬民의 國母가 되어 어엿이 宗廟의 神主가 되고 社稷의 本府가 되었으니 실로 東方의 역사에서 없었던 일이라 하겠다. 아! 거룩하도다. 일찍기 倭政때에 山所의 附近이 農土로 造成되었고 光復後 政府計劃으로 都市가 됨에 능곡지변(陵谷之變 : 산소 보존의 위태로움)이 朝夕에 박두하게 되었으니 아! 덧없는 滄桑의 變遷 이와 같구려 이제 그의 후손들이 同心協謀하여 當局의 認許를 받아 墓域을 淨化하고 또다시 巨金을 醵出하는데 먼 始祖라서 소홀함이 없고 많은 자손들 누락된 사람이 없게 하며 재실의 몸채와 행랑채 모든 부속건물을 增築移建하고 落成式을 하자 큰 碑石으로 墓를 華麗하게 장식하니 아! 이제와 같은 混亂한 세상 물흐르듯 걷잡을 수 없음에 어버이를 버리고 先祖를 忘却하게 되었구나! 이처럼 거룩하고도 훌륭한 일 어찌 쉽사리 圖謀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仁川氏 장래의 運興을 볼 수 있으며 위에서 열거한 수없이 많은 후손으로 屢百代에 전해 진다는 나의 말이 착오가 아니었음을 새삼스레 다행으로 여겨진다. 이로서 銘에 가름하니 銘에 이르되 인천이씨는 首露王에서 나왔어라. 그 누가 임금의 배우자였나? 휘 黃玉이신 허씨 왕후로세. 왕후께선 王의 마음 감동시키니, 두 아들 母姓따라 허씨 되었군. 阿飱벼슬을 한 諱 奇는 당나라 天寶년에 사신으로 갔었네 命令에 따라 巴蜀 安祿山을 토벌키 위해서였지. 皇姓의 李氏을 사성하니 황제의 마음 역시 勸誘되었나봐. 杞守의 문헌증거 없으나 선보(宣甫: 당나라 때 孔子를 추존한 칭호)께서 마냥 죄하 셨네. 공이 탄생하자 고려가 흥왕하였으니 이 모두 하늘이 도와주신거야. 邵城縣에 봉하고 食邑의 民戶를 하사하였지. 공이 一世祖가 된 사실 舊譜에 환하게 나타났도다. 內外 후손들 환로에 높이 뛰니 堂에 꽉찬 초선(貂蟬 : 담비의 꼬리와 매미의 날개. 高官의 冠의 장식) 그 누가 공보(公輔 : 三公四輔. 즉 임금을 보필하는 大官)의 적임 아니런가. 빼어난 賢媛 十數名의 국모로다. 아! 공의 음덕이 감쌋기 때문이겠지. 樹木 우거진 가성(佳城 : 분묘의 이칭) 저 해변가에 위치하였네. 기왕의 百世와 미래의 萬代에 무궁한 發祥으로 하늘이 주신 복 받으리로다. 내가 쓴 碑文 그내용 거짓 아니로세. 歲丙子 流火節 月城 李鍾洛 撰 ※流火節= 陰七月 참고: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시조인 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의 후예로 전하며, 수로왕의 장자(長子) 계통은 김해김씨(金海金氏)이고, 차자(次子)는 어머니 허태후(許太后)의 성을 이어받아 허씨가 되었는데, 인천이씨(仁川李氏)는 허씨에서 갈리었다. 시조공묘비 시조공신도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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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본 글은 인천이씨 종친회에서 받아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