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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과 정률성의 인연
투사이고 중국 조선족 문학의 거장인 김학철, 중국 3대 작곡가의 한 사람인 정률성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의 길에서 서로 만난다.
김학철의 본명은 홍성걸, 1916년에 함경북도 원산의 한 누룩 제조업자의 둘째 아들(장남 사망)로 태어나며, 정률성은 본명은 정부은, 1918년에 광주에서 한 농민 가정의 막내아들로 태어난다.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김학철은 1935년 19세의 나이에 중국 상해로 임시정부를 찾아 떠나오고, 정률성은 좀 더 일찍 1933년 15세의 어린 나이에 중국 남경으로 온다.
김학철이 광주학생운동 동맹 휴학에 참가했고 자기 눈으로 직접 창덕궁의 한국군 근위보병대가 일본 순사로 바뀐 모습을 보며 강한 반일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면, 정률성은 독립운동가들이었던 형들의 모습에서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게 가진다. 정률성은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부친이 사망하자 이듬해에 독립운동가인 셋째 형을 따라 중국에 온다. 3·1운동에 참가했던 큰형은 일제의 감옥에서 병사하고, 작은형은 중국국민혁명군에서 혁명하던 중 병사한다. 중국에는 또 독립운동가인 누님과 매부가 있었다.
김학철과 정률성의 애초의 만남은 무척 서먹했던 것 같다. 김학철은 ‘정률성을 추억하여’(<청년생활>, 1987년 1기)라는 글에서 “정률성과 나는 1936년 여름 중국 남경 화로강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고 썼다. 화로강은 조선혁명당의 중앙본부가 있는 곳이었다.
당시 김학철은 의열단과 조선혁명당에 가입해 김원봉의 부하가 되어 일제와 그 첩자들을 처단하는 테러 활동에 종사했고, 정률성은 의열단의 소속인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지하 혁명에 종사하는 한편 상해의 저명한 음악가 크리노와에게서 성악과 작곡을 배웠다. 정률성이 피아노 공부를 한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었던 김학철은 바이올린을 들고 나타난 정률성에 대해 “그 자식 피아노루 왜놈을 칠 작정인가?” 하고 다소 의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이때 김학철은 20세, 정률성은 18세였다.
1937년에 이들은 또다시 화로강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때 정률성은 김학철에게 ‘인터나쇼날(국제가)’과 ‘라마르세이예즈(프랑스 혁명 가곡, 후에 국가로 됨)’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때의 정경에 대해 김학철은 “내 머릿속에는 워낙 총과 탄약이 가득 들어차 있었던 까닭에 무슨 음악 따위는 도저히 들어박힐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하고 썼다. 당시 김학철은 조선민족혁명당의 기관지 <앞길>의 경비 마련을 위해 “돈 있는 일본놈들을 습격해” 일을 저질러 놓고는 다급하면 바로 남경 화로강으로 “피신”을 하곤 했다.
그렇게 만난 인연과 우정은 수십 년에 걸쳐 깊어졌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김학철은 중국 호남의 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에 입학해 군사를 배우게 된다. 정률성은 우연히 중국 최고 음악가 가운데 한 사람인 신성해와 인연을 맺게 되고 <전투부녀가>, <전시부녀가>, <유격전을 발동하자> 같은 반일 혁명가를 창작한다. 그해에 그이는 중국 혁명의 성지인 연안으로 가 노신예술학원에서 공부하는 한편 음악 지도를 담당하게 된다.
1938년에 김학철은 중앙육군학교를 졸업하고 김원봉이 창시한 조선의용대에 가입한다. 일본군의 무한(로북성 동부의 도시인 무창·한구·한양의 세 도시. 곧 무한 삼진이 합병하여 된 시로 로북성의 성도이다) 진공(진격)에 맞서 무한을 지키기 위한 시민들의 투지를 고무하기 위해 김학철은 <서광>이란 제목의 연극을 창작하고 조선의용대가 이를 한구청년회에서 공연한다. 이 작품은 나라 독립의 서광을 맞이하기 위해 열혈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일제 첩자를 처단하는 작품으로써 한구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무한 시민들에게 큰 격려가 된다. 정률성에 대해 “피아노루 왜놈을 칠 작정인가?” 하고 말했던 김학철은 그 뒤 자신은 결국 문학으로 모든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 항쟁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때 20세의 정률성은 연안에서 <연안송>을 창작하였는데,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충만한 <연안송>은 수많은 중국 청년들을 항일구국투쟁의 길로 부른다.
1939년 김학철은 국민당에 배속돼 호남, 호북 같은 중국국민당 제5전구와 서안 일대에서 일제와 교전하며 무장투쟁을 한다. 이때 정률성은 항일 음악 창작의 고봉기를 맞이한다. 그이가 작곡한 <연수요>와 대합창 <팔로군 행진곡>은 연안에서 공연하자마자 전국에 퍼진다. <팔로군 행진곡>은 1951년에 중앙인민정부 혁명군사위원회의 ‘내무조령’으로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명명이 된다. 이때 정률성은 금방 21살이었다.
1941년에 김학철은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팔로군 지역인 태항산으로 들어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2대 분대장으로 일제와 싸운다. 김학철은 항일 근거지에 보급된 <연수요>의 작곡가, 팔로군 정치부 선전부가 각 근거지에 보급용으로 내려 보낸 <팔로군 행진곡>의 작곡가가 정률성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때 김학철은 “우리는 모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로 얼굴만 마주보았다” 하고 표현하고 있다. 그해 12월 12일, 김학철은 태항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10년 수감 판결을 받고 일본 나가사끼 형무소에 투옥된다. 그 이듬해인 1942년에 정률성은 태항산으로 와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의 교무장으로 임명된다.
광복이 나자 김학철은 남으로, 정률성은 북으로 귀국한다. 김학철은 조선독립동맹 서울시위원회 위원에서 활동하며 소설집 출간을 준비하던 중 좌파 탄압으로 부득이 월북한다. 1946년 가을 북녘 해주에서 정률성을 만나게 된다. 김학철은 인민군 신문사 주필을, 정률성은 인민군 협주단 단장을 담당한다. 이 동안 이들은 <동해어부>, <전우의 죽음>, <공군가>, <조선인민유격대전가> 같은 가곡의 작사자와 작곡가로 만난다. 그리고 정률성은 <조선인민군 군가>를 창작하여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두 나라 군가를 작곡한 사람으로 기록된다.
6·25가 터지자 김학철과 정률성은 모두 중국으로 들어온다. 김학철은 중국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나중에는 연변작가협회의 전업 작가로 뿌리를 내리게 되고, 정률성은 북경인민예술극원과 중앙악단의 작곡가로 있게 된다.
1950년대로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운명은 똑같이 비극적이다. 중국의 수십만 지성인들이 당한 수난이 이들을 피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비린 정치 운동이 일어났던 1957년 이른바 ‘반우파’ 투쟁 시기부터 ‘문화대혁명’시기까지 김학철은 ‘반동분자’라는 이름으로 창작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장장 24년간 강제노동과 10년 동안 옥살이를 한다.
정률성 역시 1957년 반우파 투쟁 시기에 ‘엄중한 우경’, ‘반당’이라는 이름으로 비판을 당하고 수년간 노동 개조를 했으며,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간첩’이란 죄명을 들쓰고 ‘검은 무리(黑邦)’라는 글자가 적힌 개패(작은 흑판 크기의 나무판자)를 목에 걸고 매를 맞으며 장시기 노동 개조를 한다. 그 이전의 1940년대 연안 시절에 정률성은 벌써 ‘정치 세례’를 겪었다. ‘간첩’혐의를 들쓰고 한동안 억울한 나날을 보냈지만 팔로군 포병퇀 퇀장(포병대 연대장)이었던 무정 장군 때문에 그이 형제들의 독립운동 가족사가 증명되면서 혐의를 모면했다.
1976년 12월, 김학철은 수감 중 중국 최고 신문인 <인민일보>에서 정률성의 부고를 읽게 된다. 강청 같은 집권자들의 권력이 다하면서 문화대혁명은 2개월 전에 막을 내렸지만 ‘현행반혁명’ 판결을 받은 김학철은 아직 1년 형이 남아 있었다.
정률성은 문화대혁명이 끝나 명예가 회복되자 자유의 기쁨과 창작의 미래에 대한 지나친 흥분 때문에 고혈압이 발작한다. 1976년 12월 17일, 58세의 젊은 나이에 뇌출혈로 타계했다. 그때의 정경을 김학철은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정률성이 세상을 떴다는 슬픈 소식에 접한 것은 1976년 겨울, 추리구 감옥에서 이른 바 ‘반혁명현행범’으로 복역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인민일보>를 보고 겨우 소식을 알았는데 감옥 당국에서는 옛 전우의 영전에 조전 한 통 치는 것도 허가하지 않아서 나는 애도의 뜻도 표하지 못하고 말았다”고 쓰고 있다.
정률성이 사망하고 9일이 지난 1976년 12월 26일, 김학철은 아들에게 보낸 옥중 서한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나 대신 네가 대외우호협회 부회장 丁雪松(정설송. 정률성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 그 남편 정률성이 별세한 데 대하여 애도의 뜻을 표했으면 좋겠다 …`… 정률성은 1937년 남경 시절부터 나와 같이 어려운 일을 해 온 옛 친구다. 항일전쟁의 戰火(전화) 속에서 맺어진 우의는 해방 후 조선에 나가서도, 그리고 또다시 중국에 들어와서도 변함없이 이어졌었다 …`… 오늘 옥중에서 신문을 통해 그의 訃告(부고)에 접하게 되니 감회가 무량하다. 하지만 …`… 그의 불후의 예술과 더불어 엘리브 卽 還活着(즉 환활착. 계속 살아 있을 것이다.)일 것이다. 조선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또 하나 떠나갔다. 충직한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자가 또 하나 떠나갔다. 學鐵(학철)”
출소한 뒤에도 3년이 지난 1980년 12월에야 김학철은 복권이 되며 65세의 나이에 창작 활동을 재개한다. 김학철과 정률성의 부인 정설송 사이에는 정률성의 업적에 대한 발굴과 관련해 수차 통신이 이어진다. 김학철은 왕성한 창작으로 수많은 작품을 출간, 특히 임종 전까지도 조선의용군 역사를 작품화하는 작업을 꾸준히 했다. 그중에는 정률성에 대한 글도 있다.
김학철은 2001년 9월 25일, 지병으로 더는 글을 쓸 수 없게 되자 스스로 21일간 금식을 해 생을 마무리한다. 가족과 친우들은 그이의 생전 유언에 따라 태항산 시절 그이가 작사한 <조선의용군 추도가>의 음악 속에서 조선의용군 모습을 한 그이의 유체를 화장해 두만강에 뿌린다.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 가고 쓰러지는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 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 밑에 길이 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
그렇게 그이는 반세기를 그리워하면서도 갈 수 없었던 고향 원산으로 돌아간다.
김학철과 정률성의 작품 세계
자유를 향하여 - 김학철
김학철의 독립운동과 그이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본질적인 의미에서 말하면 인간의 자유를 위한 항쟁이었다. 김학철의 인생과 문학과 정치 이상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과의 싸움으로 점철된다.
김학철은 임종을 앞두고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를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불의에 도전하라”는 유언을 한다. 모든 ‘사람다운 것’은 곧 인간의 자유이기도 하다. 종래로 문학을 역사에 대한 기록 또는 사회변혁을 위한 실천으로 삼아온 그이에게 있어 이는 그이의 인생관이자 문학관이기도 하다.
그이에게 문학이 가장 강한 행동력으로 다가온 것은 보성고 시절에 만난 리상화의 시다. 그이는 <나의 길>이란 글에서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 부르짖음에 열광한 나머지 나는 그 빼앗긴 땅에서 살아야 하는 게 새삼스레 절통했다” 하고 썼다. 이 시는 그이가 직업 혁명가의 길을 선택하도록 강한 충동을 주었다.
그이는 중국 남경 화로강에서 웽그리아(헝가리) 애국 시인 페데피의 시를 처음 만난다. “사랑이여/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마저 바치리/ 그러나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 바치리.” 김학철은 그이의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에서 “나는 곧 미쳐날 지경으로 격동해 이 시를 읊조리고 또 읊조렸다” 하고 썼다. 그이는 서울에 두고 온 홀어머니와 두 여동생, 그리고 상해에서 정이 들었던 조선민족혁명당 처녀 송일엽을 생각하며 독립운동의 신념을 또 한 번 다진다.
그이 문학은 곧 모든 자유를 구속하는 것에 대한 항쟁의 문학이었다. 조선의용대에 입대한 뒤 그이는 처음으로 <서광>, <승리>, <등대> 들을 창작하여 공연했고 가사 <조선의용군 추도가>, <고향 길>을 창작하여 전우들의 항일 투지를 불러 일으켰다. 광복 전 그이 문학은 독립을 쟁취하고 일제에 저항하는 에너지를 증폭시키기 위하는 데 있었다.
그이는 태항산 전투에서 부상당해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뒤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고 다리를 수술받지 못한다. 3년 6개월간 피고름을 흘리다가 한쪽 다리를 자르게 되는데, 이는 그이가 총을 필로 바꿔 작가로 된 계기다. 그이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사람의 정의는 ‘인력거를 끄는 동물’이 아니다. 다리 한 짝쯤 없어도 문제가 없다…`…” 하고 쓴다. 다리 하나가 없는 것이 즉 ‘사람답게 사는 것’에 별 지장이 안 된다는 뜻이다.
나라 독립을 위해 싸운 조선의용군은 조국인 남과 북에서 모두 불운을 겪게 된다. 광복이 되어 서울로 돌아온 김학철은 조선독립동맹 서울시의원으로 일하면서 조선의용군의 투쟁 생활을 소재로 해 쓴 단편소설 <담배국>, <균열> 들을 발표하고 소설집 출판을 서두르지만, 미군정의 좌익 탄압에 때문에 ‘북송 1호’로 부득이 비밀리에 북행하게 된다. 북에서 김학철은 한때 <민족군대> 주필로 발탁되기도 했고 <정치범 99>, <적구> 같은 소설도 발표하지만, 김학철의 말을 빈다면 장편소설 한 편을 쓰고도 남을 사연으로 하여 모든 조선의용군 출신들은 정계에서 사라지고 그이도 중국으로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른바 연안파인 까닭에 한직으로 밀려난다.(김춘련, ‘김학철의 《격정시대》 연구’) 게다가 당국의 관료주의를 비판한 ‘건설은 누가 파괴하는가’라는 그이의 글이 필화를 불러온다.
6·25가 터지자 그이는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다. 그이의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에는 “조선의용군 출신들의 말년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총살이 아니면 강제 노동, 그 가족들까지도 산간 벽지의 특별 구역에서 학대와 굶주림 속에 짐승 벌레처럼 하나 하나 죽어가야 했다”고 쓰고 있다. 그 개인의 가족사도 비참하다. 그이는 자서전에 의용군 전우였던 매부 왕련이 북에서 ‘정변획책죄’로 총살당하고 그이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과 노모는 행방불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데올로기 갈등과 6·25 참전 때문에 나라 독립을 위해 싸운 조선의용군의 역사는 남에서도 거세당해 깊이 묻혀 버린다.
남과 북에서의 경력 때문일 것이다. 김학철은 조선의용군 문학에 각별히 심취하고, 문학의 진실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이는 북경 중국문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지내면서 의용군 생활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 <군공메달>, <전우> 들을 중국의 최고급 간행물인 <인민문학>, <광명일보> 들에 발표하고, 단행본 《범람》, 《군공메달》을 출판한다. 1990년대에는 조선의용군의 생활을 모두 모은 자서전 소설 《격정시대》를 창작해 낸다. 이 작품은 조선의용군의 1930~1940년대 초의 활동과 분위기를 핍진하게 그린 동시에 스토리 구성, 작중 인물 모두가 실제 이야기거나 진실한 인물을 토대로 한 것이어서 민족사 복원에 문헌으로 큰 기여를 하며, 따라서 한민족 문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하지만 그이의 역사를 증언하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 절박해 문학적으로 충분히 펼쳐지지 못한 점이 아쉽다.
‘사람답게 사는 것’은 그이가 선택한 자유이고 그이의 이데올로기의 본질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김학철은 조선의용군이 중국에서 국민당의 영도로부터 공산당의 영도를 받아들이게 된 원인에 대해 “당시에 우리를 사로잡은 것은 어떤 이념보다도 민족의 독립과 대동단결이었다” 하고 말한다. 이 과정에 김학철은 민족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의 이념을 선택했다. 그이는 “공산주의를 개인 숭배나 개인 독재가 아닌 인도주의로, 민중성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김관웅, <20세기 1950~60년대 국제 공산주의 운동 콘텍스트와 ‘20세기의 신화’의 관련 양상>) 중국으로 망명한 뒤 한 시기 그이는 그 자신이 자서전에서 밝혔듯이 “공산당의 지시라면 뭐나 다 천지신명의 계시”로 알았다. 하여 이 시기에 출판한 작품들도 이런 문학관이 나타나 있다.
1957년부터 진행된 ‘반우파 투쟁’시기에 그 자신이 당을 반대한 ‘우파’(북녘 국적 때문에 내부 우파로 찍힘)로 찍히면서 그이는 냉정한 반성에 들어간다. 당시 중국은 지식인 55만여 명이 ‘반당, 반사회주의’자로 몰려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게 된다. 이때로부터 김학철은 장장 24년간 노동 개조를 한다. 1963년부터 김학철은 비판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낮에는 노동 개조를 하고 밤에는 연필을 들어 모택동의 오류를 비판한 장편 정치소설 《20세기의 신화》를 몰래 집필한다.
《20세기의 신화》는 중국 국내와 세계 공산권 내에서의 정치 운동과 경제 운동의 야만성, 지식인에 대한 박해, 개인 숭배와 독재, 인권 유린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한다. 중국 뿐 아니라 구소련, 북한의 권력 투쟁과 개인숭배까지도 비판함으로써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폐단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여건의 한계와 김학철 자신의 한계 때문에 더 깊은 비판을 하지는 못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된 이후 정치 운동의 백색테러 속에서 중국의 수만 명 작가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감히 정면으로 독재에 저항한 작품을 쓴다는 것은 중국 문학사에서 그 유래가 없는 일이다. 김학철은 치명적인 필화를 자초하게 되며, 그러나 김학철은 중국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답게 사는’ 작가가 되는 것이다.
이 원고는 1966년 문화대혁명 기간에 가택 수색에서 드러나고 김학철은 현행반혁명의 누명으로 10년간 옥살이를 한다. 1977년에 만기출옥하고 ‘반혁명’ 전과자 신분으로 3년을 최고인민법원에 상소하여 겨우 복권이 된다. 《20세기의 신화》는 1987년 8월 ‘발표 불허’란 딱지를 달고 김학철 손에 돌아오고 1996년에 한국 창작과 비평사에서 나옴으로써 31년 9개월 만에 빛을 보게 된다.
복권 후 김학철은 벌써 65세의 노인이 되었지만 타계하기 전까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해 불철주야 작품 활동을 했다. 단편소설 20여편, 단행본 8권을 출판했고 수필 300여 편을 발표했다. 수필은 거의가 사회를 비판하는 수필이다.
태양을 향하여 - 정률성
정률성은 태양과도 같은 열정을 지닌 음악가이다. 그리고 태양을 향한 굳은 신념이 있는 음악가이다. 아마도 민족의식이 투철한 아버지와 독립 운동가들인 형제들의 희생이 그이에게 나라의 독립과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을 강하게 심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이의 음악은 박력이 강하고 웅장하고 서정적이고 삽시에 사람의 영혼을 울리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중국 중앙음악학원 박사생 도사(지도교사 - 편집자 주) 량무춘은 말한다. “정률성은 작곡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다. 그이는 성악과 피아노를 배웠고 만돌린 같은 악기를 다룰 줄 알 뿐이다. 하지만 그이는 노래로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불평과 희망을 절박하게 말하고 싶어 했다. 그이는 만강의 의분과 만강의 격정으로 창작했고 성악 예술에 대한 민감한 감각으로 작곡했다.”(<정률성론>)
그이의 첫 작품은 1936년 5월 1일에 탄생한다. 이날 중국 남경의 애국청년들로 구성된 ‘남경 5월 문예사’ 설립 대회에서 발기인 추취도(鄒趣濤)가 7언시를 읊었다. “5월 석류 붉게 타고/ 중화 벽혈 낭자한데/ 원한 국치 누가 씻나/ 시대 청년 앞장 서라.” (뤄칭 씀, <5월의 노래>) 정률성은 그 시에 격동돼 그 자리에서 작곡했다. 그이가 격앙된 목소리로 <5월의 노래>를 부르자 회장은 삽시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1937년 7월 7일, 일제는 로구교사건을 일으켜 중국에 대한 대규모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 그해 9월 정률성은 상해 항일 선전 사업에 뛰어든다. 정률성은 상해 대공영화 희곡 독자회의 일원으로 거리에 나가 항일 구국 가곡을 가르치며 중국 민중들에게 항일정신을 불러일으켰다. 이 격정의 시대에 그이의 작품이 또 하나 산생한다. 그이가 작곡한 <유격전가>는 거리 골목 민중들의 마음을 울렸다. ‘일제의 포화 두렵지 않다/ 우리의 칼은 예리하다/ 유격 전쟁을 발동하자/ 적의 중심에 들어가자/ 적의 시설을 파괴하자/ 적의 병력을 약화시키자/ 목적을 달성하면/ 살짝 빠져나오자’ 이어 그는 <전투부녀가>, <전시부녀가>를 작곡하여 부녀들을 항일에로 불러일으킨다. 이때 그이 나이 19세이다.
국민당이 소극 항전을 하자 나라를 구하려는 중국의 애국 청년들은 팔로군 근거지인 연안으로 달려갔다. 정률성도 바이올린과 만돌린을 메고 연안으로 떠나 1937년 10월부터 노신예술학원에서 공부한다. 1938년 봄, 20세의 그이는 연안에 있는 토굴집에서 저명한 작품 <연안송>을 창작한다. “석양은 산두의 탑영에 비끼고/ 월색은 강가의 반디불을 비추네./ 봄바람은 넓은 들에 스치고/ 군산은 견고한 병풍을 두르네.” <연안송>에 대해 량무춘은 “선율에 조선 민가의 음조특점, 특히는 <낙화암> 같은 민요의 특점이 흡수돼 있으며 이에 서양 서정곡의 음악 풍격이 결부”돼 있어 “낭만적인 분위기와 청신한 이미지로 충만해 있다” 하고 평론한다.
당시 중국에 망명한 독립 운동가들은 중국을 전초기지로 생각하고 중국혁명의 성공에 독립운동의 꿈을 맡겼다. 따라서 연안에 대한 기대도 컸다. <연안송>을 작곡할 때에 그 음악의 박력 속에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는 정률성의 뜨거운 기대도 함께 있었을 것이다. 정률성은 말한다. “나는 생기로 충만되고 청춘 분위기로 넘치는 연안을 사랑했기에 연안을 노래하는 가곡을 창작하고 싶었다. 이 노래는 아름답고 전투적이고 격앙된 노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작곡가 정률성>) <5월문예사>의 조직자의 일원이었던 라청은, <5월의 노래>라는 글을 통해 <남경5월문예사> 설립일에 정률성이 <아리랑>을 열창했다고 추억했다. 정률성은 아리랑을 부를 때에 나라를 잃은 슬픔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자신이 직접 작사해 불렀다. 라청이 기억한 아리랑 가사는 이러했다. “고향을 멀리 떠나 왔네/ 압록강을 건너 왔네/ 삼천리 강산은 보이질 않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네…`….”
<연안송>은 탄생하자 바로 놀라운 생명력으로 전파되었다. 모택동도 감동하여 359여단장 왕진(나중에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을 담당)을 불러 루쉰예술학원에 재능이 뛰어난 조선 청년 정률성이 있는데 만나 보라고 지시했다.(왕진, <정률성을 그리며>) 이 시기는 정률성의 황금기였다. 그이는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자들인 모택동, 주은래, 주덕, 왕진 같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뒤에 창작된 <연수요>는 서정 가곡으로서 음악 전문가들에게 중국 최초로 섬북민간음조를 흡수한 가곡 가운데 하나이고 선명한 황토 고원의 특색을 가지고 있으며 소박하고 진실한 감정이 깃들어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연수요, 연수요/낭군 오빠 군대 가네/ 군대 가면 항일군 되세/ 항일군 안 되려면 군대 가지 마세/ 호미 들면 농사 잘 짓고/ 총을 들면 잘 싸우세/ 구국 자랑 떨치세/ 연수요 연수요/ 낭군 오빠 군대 가네.” 이 노래도 나래가 돋쳐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1937~1940년 연안으로 떠나기 전후 3, 4년 사이에 정률성은 <육탄용사>, <항전돌격운동가>, <시월혁명행진곡> 같은 50여 수의 악곡을 창작하는데 이 가운데 많은 악곡이 광범한 전파력을 가지고 있어 불후의 명작으로 남는다.
특히 1938년에 창작돼 1939년에 공연된 <팔로군 대합창>은 연안에서 정률성이 직접 지휘했다. 6개곡으로 구성된 대형 군가로서 팔로군의 전투 정신을 표현했다. 웅장한 군가는 공연장을 진동하였고 사람들은 흥분으로 들끓었다. “앞으로 앞으로/ 우리의 대오 태양을 향하네/ 조국의 대지를 딛고/ 민족의 희망을 지녔네/ 우리는 불가전승의 역량/ 우리는 인민의 자제/ 우리는 인민의 무장/ 두렵지 않네 / 영용히 싸우리 …`… 최후의 승리를 위해/ 전국의 해방을 위해/ 앞으로 앞으로…`….” 군가는 삽시간에 전국 각지로 울려 퍼졌고 수많은 전장에서 일제와 싸우면서 불려졌다. 이때 그이 나이 21세였다.
그이 마음속에는 태양이 있었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 그리고 세계 평화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이런 희망이 있었기에 그이는 40년대 연안에서 ‘간첩’으로 의심받았지만 여전히 견정했고 낙천적이었다. 1957년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 같은 정치 운동 시기마다 ‘반당’분자, ‘간첩’으로 찍혀 창작을 금지당했지만 그이는 굴복하지 않았다. 당국으로부터 자신의 이른바 ‘죄’에 서명하라고 했을 때 그이는 결연히 거부했다. 1976년 10월 ‘문화대혁명’이 끝나 명예를 회복하게 되자 그이는 대형 작품 창작을 서둘렀다. 하지만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그이는 너무 흥분했던 까닭에 그만 뇌출혈로 5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한다. 그이는 360여 곡의 작품을 남기고 떠나간다.
김학철과 정률성이 남긴 것
현임 중국 청해성 성장이고 전임 중국작가협회 서기처 서기였던 지디마쟈는 김학철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그이의 혁명 경력과 창작 경력으로부터 그이가 이 시대 인민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있음을 보아 낼 수 있다. 김학철의 모든 작품은 이 시대 20세기 사회와 인생에 대한 진실한 견증이다.” 한국의 평론가 김명인은 김학철의 인생에 대해 “민족 해방 투쟁의 주체로서 그는 ‘조선 사람’이었지만 민족 해방 투쟁을 포함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사회주의적 인간 해방의 길에서는 그는 철저히 ‘세계인’이었다. 그이는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을 위해 몸 바쳤지만 조국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이는 중국에서 살았지만 중국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않았다. 그의 눈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그러나 언젠가 다가올 새로운 인간의 세계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협애한 일국주의적 국경선과 민족적 편견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회화적 낙관의 힘으로 이를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이는 늘 미래의 세계인이었다.”(<어느 혁명적 낙관주의자의 초상>)
김학철은 말한다. “100만대 1이라는 절대적인 열세에 처해 가지고도 감히 자기의 옳음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면 참된 작가”(<곡절 49년>)이다. 김학철은 절대적인 열세에 처해 가지고도 감히 암흑한 시대의 불의를 향해 저항한 작가이다. 그이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 평생을 싸워 왔고 “사람답게 살려거든 불의에 도전하라”는 자신의 신조를 철저히 실현한 작가이다. 김학철의 문학은 중국 조선족 문학을 넘어서 세계 한민족의 문화 유산이며 또한 세계 사회주의권의 반독재, 반개인숭배 문학과 동등한 위치에서 연구되어야 할 문학이다.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이었던 왕진은 정률성에 대해 “그이는 당대 섭이, 신성해에 이어 또 하나의 걸출한 우수한 작곡가이며 중국 프롤레타리아 혁명 음악 사업의 개척자의 한 사람이다” 하고 높이 평가했다. 중국음악가협회 주석 리환지는 “그이의 크나큰 국제주의 정신은 중국인민의 운명과 하나로 어울렸다 …`… 아름다운 선율로 중국 인민의 혁명 투쟁과 노동 건설의 위대한 사업을 위해 마멸할 수 없는 공헌을 하였다”고 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개국대전에 장엄하게 울린 악곡은 정률성의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 곧 그 뒤에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된 악곡이다. 1990년 9월 22일 베이징 아시안 게임 개막식에서 인민해방군 군악대가 힘차게 연주한 악곡도 이 악곡이다. 중국의 국가 행사 때마다 어김없이 연주되는 악곡도 이 악곡으로써 이 악곡은 중국에서 둘째로 많이 연주되는 악곡이다. 중앙민족악단 단장이고 <연안송>을 정률성과 함께 연안에서 처음 불렀던 당영매는 말한다. “정률성은 중국의 슈베르트이다.” “그이의 음악은 중국에 속하지만 또한 세계에 속한다.”
김학철과 정률성은 이제 한국에 점점 알려지고 있다. 아직도 관심이 크지 못하고 낯설음을 면치는 못하지만 기대 이상으로 많이 알려지고 있다. 김학철의 많은 작품들이 실천문학사, 지성문학사 같은 출판사들을 통해 출판이 되었고, 정률성 음악도 그이의 고향 광주에서 음악회 형식으로 알려졌다.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보자면 난감하고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을 것이다. 비록 탈냉전 시대라고는 하나 우리에게는 6·25라는 긴 장벽이 있다. 남북은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의미 깊은 행사로 이를 넘어 서로를 얼싸안고 있지만 그 사이에는 엄연히 3·8선이 가로 놓여 있고, 남북을 모두 넘나드는 조선족이지만 6·25라는 역사의 흔적은 피할 수가 없다. 이 속에 정률성의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와 <조선인민군 군가>가 있다. 하지만 6·25가 어찌 그 누구의 책임이 될 수 있겠는가! 김학철과 정률성은 독립투사이고 우리의 민족과 이 시대를 빛낸 문화예술가임에 손색이 없다.
김학철과 정률성이 북에서 활동했던 역사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이념으로 하여 한국에서는 철저히 금기의 대상이었던 이들이 한국에 알려졌거나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좋은 발단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조국을 떠나 해외에서 혼신을 다해 싸웠지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조국이 되어 단절의 역사 속에 이방인으로 잊혀져 갔던 이들과, 수많은 이들이 하나하나 복원이 될 때만이 대한민국 역사가 바로 세워질 것이다. 이들에 대한 조명은 세계 한민족 화해에 깊은 의미가 될 것이며 세계 평화에도 큰 기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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