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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여태껏 기억에 남아 있는 추억이 무엇이 있었나?
좋았었던 일, 기뻐했던 일, 슬퍼했던 일, 괴로워했던 일 등 너무나 많은 일들이 흘러갔지만, 정작 살아오면서 내게 남아 있는 추억은 그다지 평탄치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저는 서울 종암동 산동네에 위치한 조그만 집에서 태어났으며, 당시 가난의 어려움이 지속됨에 따라 어릴 적 아버지의 존재는 없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거슬러 올라가보면, 아마 내 나이 4살에서 5살로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족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해, 고모, 삼촌 등 10명의 대식구가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었으며, 항상 식구들의 먹을 것을 해결하기 위해 누군가 돈을 벌어야만 했었습니다. 당시 할아버지는 중풍으로 몸이 불편하셨으며, 고모와 삼촌들은 너무 어려서, 돈을 벌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아버지께서는 돈을 버셔야 했으며,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셔야 했었습니다. 그렇게 벌어온 돈으로 하루하루 가족들 입에 풀칠을 해야만 했었습니다.
어머니는 대식구들의 살림을 도맡아 가며 일을 하셔야만 했으며, 저 또한 어머니를 도와, 매일 매일 쌀가게에 가서, 정부미쌀 반말을 사 가지고 오는 심부름을 하곤 했었다. 식구가 많다보니 내가 사온 쌀은 하루에 다 먹어 치우곤 했었습니다. 항상 저희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보다 많은 돈을 벌겠다고 하시며, 사우디아라비아로 출국을 하셨고, 그렇게 아버지는 1년을 보내시고 또 1년을 그곳에서 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제 나이 그 무렵 8살이 되었고, 가슴에 손수건을 꼽고, 한쪽에 이름표를 달고, 국민학교에 입학을 할 시기였습니다. 저는 학교라는 곳이 낯설음 과 떨리는 마음으로 입학식은 진행되었고, 여기저기 축하의 입학사진들을 찍으며, 격려의 말씀들을 하기 시작했었습니다.
“너 아빠 돈벌러 멀리 가셨으니 너는 공부라도 열심히 해야 된다. 그래서 나중에 큰 사람 되야 해 알았지?“ “이제부터 너는 학생 이닌까 동생한테 의젓한 형이 돼야 해 알았지?”
여기저기 한마디씩 격려의 말씀들은 해주셨지만, 그 어디 아버지의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또한, 그 많은 입학 사진 속 어디에도 아버지의 모습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타국에서 일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의 빈자리는 계속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타국에 계시는 동안 어머니께서 신장에 돌이 생겨 통증이 심하다며 병원에서 수술을 하자고 권유했고, 수술 당시 아버지를 대신해 그 자리엔 내가 있어야만 했었습니다. 저로서는 너무 어리고 무서웠는데, 아버지가 계셨으면 힘이 됐었을 텐데, 그 당시 저는 그리움에 눈물만 흘렸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의 첫 번째 수술은 시작되었고, 며칠 뒤 병원으로부터, 병원비가 밀리고 있으니 납부하라고 독촉을 받았었습니다. 당시 돈 관리를 할아버지께서 관리를 하고 계셨으나, 돈이 없어서 병원비를 제대로 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매달 해외에서 보내온 아버지의 월급이 적은돈은 아니었는데 할아버지께서는 왜 돈이 없다고 말씀하신지는 몰랐었습니다.
병원 측의 납부 독촉은 계속 이어졌고, 끝내 어머니는 더 이상 입원실에 누워있지를 못하고, 병원을 빠져 나와야만 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어머니의 한쪽 배에서는 출혈이 있었고, 그 고통을 참고 움켜쥐며 간신히 집으로 와야만 했었습니다. 어머니를 부축이며, 우리 방으로 들어갔지만, 반가워 맞이해주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고, 오히려, 어머니를 천대하듯 방에는 차가운 냉기만이 흘렀었습니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병원에 있는 동안 연탄을 아끼려고, 방에 불을 넣지 않았었다고 했었습니다. 어머니는 추운 방에 누워 아물지 않은 상처를 부둥켜 잡고 고통을 참으며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저녁 식사시간 차가운 김치국에 밥을 말아 드셔야만 했었던 어머니가 너무나 불쌍해 보였습니다. 저는 어머니한테 잘못하는 할머니를 미워했고, 자주 할머니한테 대들기 시작했습니다. 온몸을 부르르 떨며, 눈물을 글썽거리며, 할머니를 증오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이후부터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저는 어머니편만 들었고, 할머니는 그런 저를 자주 혼을 내고, 매를 드시곤 했었습니다. 추운겨울 꽁꽁 얼은 걸레로 맞은 일이 아직도 아픈 듯 합니다. 정말로 아팠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빈자리 보다, 어머니에게 남편의 자리를 어린 내가 먼저 채우려고 노력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가 벌써 해외에서 일하신 세월이 5년이 흐르고, 드디어 아버지의 귀국 날,
어머니와 동생과 나는 김포공항으로 아버지를 마중하고 나갔습니다. 왠지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는가 하고 확인 하러 가는 길이었는지 모릅니다. 서먹한 감정이 들어서였을까? 아니면, 정말 내 아버지 인가? 라는 의심이 생겨서 이었을까? 내게는 아버지의 빈자리가 너무나 커서 쉽게 반가움을 표시하지 못했던 걸로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의 귀국 후 대식구와의 생활이 다시시작 되었고, 아버지는 또 다시 돈을 벌러 나가셔야만 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싸우시는 모습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타국생활을 하시며, 가족들을 위해 안 먹고, 안 쓰며, 보내온 돈들을 할아버지는 저축은커녕, 그 돈으로 노름을 하시며 탕진하셨고, 술 마시는 등 부질없는 곳에 다 쓰셨다고 했습니다. 또한, 엄마의 수술로 돈을 다 쓰셨다는 변명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할아버지의 궁색한 변명은 아버지의 억장을 무너트렸으며,
5년 동안 벌어온 3만원 짜리 잔고가 있는 통장을 보시며 할아버지에게 울분을 토하며 화를 내셨습니다. 저는 그제야 아버지의 화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이후로도 아버지 모습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얼마나 힘이 들고 괴로워서 술을 드시고 저런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고 계신 걸까?
아버지는 왜 땅을 치고 죽겠다며 동네방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을까?
아버지는 왜 추운겨울날 죽으시겠다며 한강의 살얼음 위를 걸어가셨을까?
아버지는 왜 더 이상 살 희망이 없다며 죽으시겠다고, 달리는 차도위에 뛰어 드셨을까?
아버지는 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자해를 하시며, 주먹엔 피가 질질 흘리고 계실까?
아버지의 모습을 난 지켜보기만 해야 했었고, 그때는 너무 무서움에 떨기만 하던 어리아이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행동을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은 어느덧 제가 중학교 다닐 무렵이었습니다.
집안에 저주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이 드는 사건들이 생기기 시작 했습니다.
할머니는 항상 보름달 뜰 무렵 떡을 손수 만들고, 막걸리, 북어 등을 사서 집안에 있는 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곤 했었습니다. 장독대, 화장실, 부엌, 각방마다 차려진 음식을 올리고, 절하며, 두 손 모아 정성껏 빌곤 하셨으며, 식구들은 가끔 절을 다니며, 공양을 하곤 했었습니다. 식구들은 불교라기보다 미신을 섬기는 편이었고, 나 또한 학교 학적부 종교란 에 불교라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중풍이 생긴 것도 조상을 제대로 섬기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고 말씀하셨고, 가족들 또한 할머니 말씀을 믿는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조금 달랐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어떠한 아저씨를 소개해 주시며, “도영아 인사해라. 장로님이셔” 저는 인사를 꾸벅하며 “안녕하세요! 장로님” 이라고 한 기억이 납니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하나님을 조금이나마 아셨던 것으로 기억이 나며,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보곤 합니다.
정말로 어머니는 어딘가 모르게 달랐던 것 같았으며, 영적으로 강하신 분이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꿈을 통해 앞날을 예언하는 일이 자주 있곤 했었으며, 할머니 돌아가실 무렵 어머니는 꿈속에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었다고 말했으며, 연이어, 할머니는 친척집 문상을 다녀온 뒤부터 시름시름 앓다가 10여일 만에 의문사로 돌아가셨습니다. 또한, 30대 초반 이었던 작은아버지는 아버지 등 뒤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으며, 할아버지는 중풍으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신곤 했습니다. 몇 년 사이 우리집은 줄초상을 치러야만 했었습니다. 집안이 좋지 못한 일이 연이어 생기면서,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와 아버지는 흔히 말하는 무당집에 자주 들락거렸으며, 심지어는 신 내림을 받아야 연명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곤 했었습니다. 이후로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곳에 자주 들락 거리며, 의지를 하곤 했었습니다. 우상숭배를 섬기는 일이 얼마나 크나큰 사탄의 짓인 줄도 모르고.....
몇 년 사이 식구들의 의문의 죽음이후 대식구였던 가족들이 제각각 분가하고 우리가족 4식구만이 따로 나와 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고생하고 가슴 아픈 기억만 있었던 대식구와의 생활은 그렇게 막이 내렸으며, 어머니와 아버지는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며 또 다시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공사장으로 이곳저곳 다니며 일을 하셨고, 어머니는 주유소 식당일을 하시며, 두 분 다 열심히 돈을 벌며 정말 열심히 사셨습니다. 저는 진학을 뒷전으로 한 채, 아르바이트로 커피숍, 주유소, 배추장사, 백화점, 책장사 등을 하며 돈을 벌다가 군대를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군대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으며, 일병, 상병을 달았을 무렵이었습니다. 부대로 걸려온 한통의 전화, 어머니의 교통사고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부대의 배려로 외출을 통해 병원의 누워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며, 그다지 큰 사고는 아니라는 말에 안도의 한심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의사의 말에 의하면, 사고에 따른 외상은 적으나, 검사 중 뇌에 종양이 있으니 정밀검사를 권유한다고 했으며, 이후 검사 결과 종양에 위치가 좋지 않아 완전제거는 어렵지만 수술은 해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또다시 찾은 경희대병원 수술대에 올라야만 했었고, 수술당일, 수술실 앞에 계신 아버지 모습을 보았습니다. 겉으로는 내색을 안했지만, 어머니가 걱정이 되서 인지 조용히 숨죽이며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아버지를 통해서 들은 얘기 이지만, 어머니 수술 전 삭발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울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짧은 휴가를 병원에서 보내야만 했었습니다.
어머니는 수술 이후, 약물 치료, 방사선 치료 등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으며,
병원비도 만만치 않아 집도팔고, 모아둔 돈을 다 털어야만 했었습니다.
저는 군대 전역 후, 곧바로 취직을 하기로 했었습니다. 아버지 역시 돈을 벌기위해 어머니의 간병보다 일을 먼저 하셔야만 했었으며, 병원비 충당을 위해 하루라도 더 일을 해야 하는 생활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 또한 아버지의 길을 가야만 했었습니다.
저는 운이 좋게 현 직장인 K신문사에 취직을 했으며, 남들보다 못 배우고 가진 것이 없었지만, 하늘이 주신 큰 기회라 생각해서 부족한 지식을 채워가며, 선배들한테 물어보며 배우고, 혼나기도 하며, 열심히 일을 했었습니다. 물론, 직장일을 하면서 어머니의 병원일은 제가 도맡아 했어야 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나? 어머니의 몸 상태는 점점 호전되고 있었으며, 우리 4식구의 평안한 삶이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뒤 늦게 저는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모르게, 자식들 모르게 진통제를 먹어 가시며 고통을 잊곤 하셨으며, 머리에 물이 차서 물을 마르게 하는 약을 드셨습니다. 병원 측은 수술당시 종양을 완전히 제거를 하지 못하고 남겨둔 것이 다시 자라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그리 오래 사시지는 못할 것이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제 나이 27살이 되었고, 더 이상 어머니의 몸 상태가 악화되기 전 한 가정을 꾸려 어머니의 작은 소망을 이루고자 결혼을 서둘러야만 했었고, 손자든 손녀든 생전 어머니 품에 안겨드리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갖고 있는 재산은 마이너스 400만원 통장과, 대출받을 수 있는 전세자금 1,000만원이 고작이었습니다. 군대 가기 전 모아둔 돈과 직장생활을 통해 벌어둔 돈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쥐뿔도 없는 놈이 결혼 할려니 걸리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문제, 종교문제, 돈 문제 등등 그래서 나는 달리 방법 없이 지금의 아내와 일부터 저질러 버렸습니다. 이후, 아내는 임신을 했고, 주변의 어려운 환경모두 극복하고, “내가 착하고 성실해 보인다“는 이유 하나만을 만족하고 1999년 1월 10일 결혼을 했습니다. 정말 말로만 꼬득 인 아내였습니다.
저는 지금의 아내와 사랑이기 보다, 생전 어머니께 결혼한 모습을 보이고자는 마음이 강해서 인지
결혼생활은 그다지 평탄하지는 않았었습니다. 우리는 신혼집 마련의 문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직장이 광화문이다 보니 회사와 가까운 쪽으로 신혼집을 만들고자 찾아봤지만, 내가 갖고 있는 돈으로는터무니 없었고, 여기저기 손을 벌려야만 했었습니다. 제 모습에 안타까웠는지 장모님께서는 선뜻 1100만원을 빌려 주셨고, 저는 간신히 김포에 신혼집을 차려야만 했었습니다. 그러한 내 모습이 처가쪽 식구들은 그다지 따사로운 시선을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저놈이 뭐가 좋다고... 쥐뿔도 없는 놈한테 시집가서 고생이나 하겠네....”하는 눈초리 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김포에서 출, 퇴근을 하며 직장을 다녀야 했으며, 가장으로서 곧 태어날 아가를 위해 열심히 벌기로 다짐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향후 전망을 위해 관리직에서 영업직으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열심히 했으며, 그 대가로, 인센티브라는 것을 받으며 생활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영업직이다 보니, 허구한 날, 업체 술 접대다. 야근이다 하며, 귀가가 항상 늦어졌으며, 외박도 잦아지면서 아내와의 싸움도 많아 졌습니다. 자주 싸우다 보니, 감정은 더욱 생기고, 싸움의 강도가 날이 가면 갈수록 심해져 심지어 손찌검까지 한 적이 있습니다.
IMF 이후, 월급은 삭감이 되었으며, 상여금도 폐지가 되, 기본도 안 되는 월급 갖고 생활하기가 어려웠었으며, 아내 모르게 어머니 병원비도 필요했었기에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가정을 등한시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회사영업일 이외 일들을 하기도 하며 생기는 수고비를 챙기고, 일명 뒷돈(뽀찌)도 챙겨가며 항상 새벽녁 까지 일을 해야만 했었습니다.
쥐꼬리만한 돈이라도 생겼지만, 가정은 소홀이 되었으며, 어머니 또한 건강은 점점 안 좋아 지면서 시각장애가 생기고, 이후 뇌병변 장애까지 판단을 받으셨습니다.
어머니는 몸이 점점 불편해짐에 따라 전혀 살림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병수발을 해야 하는 입장이 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저는 분가한 상태로, 어머니의 병 수발과 살림은 남아있는 남동생이 맡아 하고 있었으며, 아버지 또한, 그렇게 하자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지만, 나 혼자만 편안하게 산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죄책감이 들었었고, 그것이 날이 가면 갈수록 아내와 감정의 대립으로 갔으며, 그럴 때 마다 술에 의지하고, 노는 것에 의지하는 등 집 밖으로만 돌며 살아 갔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는 나의 뜻을 헤아려, 우리집으로 어머니를 모시기로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아내도 맞벌이를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다지 어머니 수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곤 했었습니다. 어머니의 몸 상태는 뇌수종이 생겨 흔히 말하는 치매까지 생겼으며,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해 자주 넘어지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머니를 홀로 두고 출근을 하곤 했었습니다.
저희는 맞벌이로 인해 서로의 담당구역을 정했으며, 저는 아침에 어머니 팬티 갈아입히는 것과, 목욕을 하기로 했었습니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이불에 소변보시고 하는 일들이 힘이 들었었고, 아내도 힘이 들었지만, 내색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내 아내가 고맙고 사랑스러웠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불쑥 찾아 오셨습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오신 것 같았습니다.
다음날 우리는 여느 때와 똑같은 일상이 시작 되었지만, 아버지는 “아픈 사람을 낮에 홀로 두고, 나가면 어떻게 하냐?“ 하고 역정을 내시며,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당시, 저는 아버지를 말릴 수가 없었으며, 또다시 죄책감속에 나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2001년 5월 25일 동종업계 회사직원들과 워크숍을 위해 당진에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이른 아침 내 휴대폰을 통해 들려오는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 순간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길로 경희대 장례식장으로 향해야만 했고, 얼마나 정신없이 달렸으면, 1시간도 않되서 장례식장에 도착을 했습니다. 황급히 장례식장으로 들어가 어머니 시신을 확인하기 시작했고, 속으로는 설마 하면서도, 철컥 냉동문이 열리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아버렸습니다. 차디차게 식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울부짓고 말았습니다.
“엄마, 나왔어 도영이” “제발 일어나봐 어서~ ”
“엄마! 이게 뭐야! 겨우 48년 밖에 못사실 것 그렇게 고생했어? 벌써 가면 안돼....”
제가 아무리 소리치고, 흔들어도 어머니는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저는 옆에 서있는 동생에게 애꿎은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너는 왜 미리 연락 안했어 임마....” 동생이 말하길
“형 나도 몰랐어. 엄마가 밤에 피곤하다며 일찍 주무셨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숨을 안 쉬고 있더라고. 나도 미치겠어 형~” “미안하고 죄송해요 어머니”
그렇게 저희 어머니는 가족들이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채 홀로 깊은 잠에 드셨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 까지도 자식들이 슬퍼할까봐, 괴로워할까봐 그래서 였는지 그렇게 홀로 가셨는지도 모릅니다. 4일장을 치르고, 몇 개월 후 어머니 돌아가신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채, 부채독촉에 따른 독촉장이 날아오곤 했었습니다. 어머니가 생전 카드사기를 당했었으며, 그 부채액이 거의 1억원 정도로 추정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카드, 아버지카드, 내 카드 등 독촉은 계속되었고, 나는 사기를 친 사람을 찾아 가서, 협박도 하고, 경찰서에 사기로 고소도 해보았지만, 끝내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으며, 아버지와 나는 신용불량자로 등록이 될 상황이었습니다. 저로서는 어쩔 수 없이 내 앞으로 되 있는 부채액을 갚아야 했으며, 어머니 부채는 법원에 상속포기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때부터 신용불량자로 살아야만 했었습니다. 한동안 아버지는 카드 독촉으로 주소지 불명으로 살아야 했으며, 여기 저기 피하며 살아 가셔야 했었습니다. 아버지 또한 죄책감속에 살아가셔야만 했었습니다.
몇년 뒤, 아버지는 또 돈을 벌며 열심히 살아가셨고, 3년 만에 아버지 앞의 빚을 갚고서야 두 다리 피고 잠을 주무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동생은 결혼과 동시 분가를 했으며, 저 또한, 어머니 돌아가신 뒤 더욱 열심히 일을 하기위해,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처가 큰 형님의 공장에 가서 일당직 으로 배관일을 도우곤 했었습니다. 아내 역시 맞벌이를 하며, 직장 내에서 인정을 받으며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러던 2004년 8월경, 아내의 교통사고를 듣고, 급히 달려 가보니 외상은 없어 보였지만, 아내와 애들이 많이 놀랐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두통과 오열로 인해 동네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각종 검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튼 날 검사결과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고 정작 그 즈음 부터 병원생활이 시작 되었습니다.
아내의 병은 심장판막폐쇄부전증 이란 판막질환 병과 과 난소기형종양 및 물혹이 발견되었다고 했습니다. 우선 난소종양 제거가 시급하여 한양대병원에서 수술을 해야 했으며, 심장 검사 및 기타 검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건강했던 아내라고 생각해서 였을까? 추가로 나온 검사결과 역시 또 다시 저를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아내는 빈혈이 심하여 그 원인을 밝혀낸 결과, 위암이란 병을 알게 되었습니다.
산넘고 산이라 더니....
결과소식을 듣고 나는 수척해진 아내의 얼굴을 보고, 차마 암이라는 얘기를 하지 못했으며, 그 날
술만 퍼마시며, 통곡하며 한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내 아내가 암이라니?
왜 그런 병이 내 아내에게 왔을까? 병도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의 병을 앓고 있으니 어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날 저녁 녹초가 된 모습으로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얘기를 해야 했고, 이후 국립암센터에 재입원을 통해 위암수술을 해야만 했습니다. 수술당일 악몽을 꾸며, 무섭다고 나를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이 미쳐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수술 4시간경과 후 수술실에서 보호자를 찾는 연락이와, 가보니 다행히 수술은 잘되었다고 하며 떼어낸 위를 보여주며, 추가 조직검사를 해보자고 했습니다.
병실로 옮겨지는 동안 집사람은 마취에 들깬 상태에서 내가 슬퍼할까봐 웃으며 "난 괜찮아"라며 오히려 저를 위로 해주곤 했었습니다. 차마 아내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 없어 나 또한 웃음으로 보답해주었습니다.
그날 저는 밤새 뜬눈으로 지새우며 간호를 해주었으며, 다음날 아내는 느닷없이 운동을 하자고 했습니다. 힘들어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몸도 가누지도 못하면서, 몇 번이고, 자기는 괜찮다며 운동을 해서 빨리 암하고 싸워 이기자고 말을 하곤 했었습니다. 저는 제 아내가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러 웠습니다. 며칠 후 수술 날 떼어낸 위의 조직검사 결과, 위암3기이며로 임파선에 전이가 되어 있어 앞으로 항암치료 및 방사선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아내는 퇴원이후,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시작했었습니다. 날짜에 맞춰 가서 항암주사를 맞고 방사선 치료 받고, 돌아와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나날을 보내야만 했었습니다. 하루하루 지내며 아내의 고통은 심해져 갔으며, 항상 변기뚜껑을 잡고 구토를 하고, 제몸 가누지 못하며 점점 몸은 약골이 되가고 있었습니다. 머리카락 역시 한웅큼씩 빠져가는 모습을 보며, 고통과 괴로움은 더욱더 커져 갔고, 심한 우울증이 생겨 하루는 이렇게 폭언을 하더군요
“넌 내가 아프다는데 쳐다보기나 해? 내가 죽을병 걸리닌까 좋지? 내가 빨리 죽으면 너 새 장가 갈꺼지? 나 죽여줘 그냥.....” 이라고 말입니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는 둥, 마는 둥 눈치를 보며 아내의 병원일을 우선으로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회사의 눈치를 보면서 아내의 항암치료하고, 응급상황도 여러 번 생겨 응급실을 들락날락거리며, 항상 긴장 속에 세월을 보내야만 했었습니다.
이후로도 저는 암 치료에는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며 어느 순간 귀는 얇아져 갔고, 여기 저기 다니며 암에 좋은 약이다 약초다 하며 구하러 다녔야 했었습니다. 또한, 비타민 치료가 암에 탁월하다 하여 일주일에 두 번씩 병원을 찾아 가곤 했었습니다. 또, 심지어는 호스피스치료 기관, 요양원 등도 알아보기도 했었습니다. 돈도 많이 들었지만 아깝다는 생각보다 이것이 아내를 살리는 방법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3개월 휴직 동안, 정작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미약했고, 무엇을 어떻게 해왔는지 모릅니다.
어느 새벽녘, 아직 싸늘한 기운이 드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새벽기도를 다니기 시작했었습니다. 아내는 어렸을 무렵부터 절실한 기독교인으로 살려고 열심히 기도했었다고 합니다. 장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다녔으며, 아내는 그 열성으로 하루에 몇 시간씩 차를 번갈아 타고 여의도에 있는 순복음 교회까지 다니곤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의 열성과 달리 지금의 당신의 몸은 힘이 들텐데 어떻게 새벽기도를 가는지.... 아내가 놀랍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저는 아내가 교회에 가지 말라고 몇번을 말렸어도, 아내는 오로지 주님만 의지하며 새벽기도를 다녔습니다.
아내의 항암치료 6개월, 방사선 치료 25회를 하는 고통 속에서도 주님만을 의지하는 아내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했었습니다. 툭하면 입원을 통해 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치료를 받으면서, 변변한 간병인을 쓸 형편이 없어, 내가 병간호를 하며, 직장일을 해야만 했고, 아내는 그럴때 마다 힘든 몸을 뒷전으로 한채, 오히려 내가 더 힘들어 할까봐 저를 위로 하며 주님께 열심히 기도를 하곤 했었습니다. 그렇게 병원 생활도 언 1여년이란 생활이 훌쩍 흘렀고, 아내는 집에서 통원치료를 다녔으며, 민간요법으로 관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2005년 12월경 어느 날, 아내는 상당히 힘들어하며, 통증을 호소해 응급실로 향해야만 했고, 검사 결과 저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임신"이었습니다.
아내는 제 몸도 가누지 못하면서 임신을 한 사실을 알고 매우 놀라워 했으며, 저 또한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각병원 주치의들을 만나보고, 인터넷 검색, 사례, 등등 정보수집 이후 결론을 내린 결과, 새생명을 차마 져버릴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여러 가지 병을 알고 있으며, 암이란 놈과 싸움 속에 임신과 출산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아내는 매번 “하나님이 주신 귀한 새 생명이야. 오직 주께 맡기면 아무 이상 없을 거야. 또한, 나도 이 아기를 낳고 싶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아내의 몸 상태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나에게 한동안 대책 없는 놈이라는 손가락질과 핏박이 있었지만, 그럴 때 마다 아내의 강인한 모습을 볼 때 오히려 기쁨으로 반전이 되곤 했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은 또 흐러, 2006년 8월21일 새벽녘, 느닷없이 아내가 진통을 하기 시작했었습니다. 약 2주여일을 앞당겨 수술을하는 것인데 진통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았었습니다. 시간이 새벽 4시경 무렵부터 3분에 한번씩 진통이 오고 있었고, 주치의는 응급수술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9시40분경 수술실로 향하였고, 저는 보호자 대기실 앞에 서서 초조한 마음으로 전광판을 통해 수술현황을 보아야만 했었습니다.
아내는 벌써 5번째 수술인데 수술할 때 마다 초조한 마음은 감출 수 가 없었습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횟수가 늘어 가면, 늘어갈 수 록 그 초조함은 더욱더 커지는 듯 했습니다.
10시경 수술중이란 표시가 내 시야에 들어왔고, 아내를 생각하며 나는 대기실 앞에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론 눈물을 훔치며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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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아가가 수술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달려가 산모와 아가의 상태가 물어 보았습니다.
산모는 수술중이며 아가는 숨이 조금 약하고, 울지 않은 상태라 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 상태를 지켜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또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저는 연세대학병원내에 있는 교회에 들어가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간절히 주님께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이 흐르고, 내 마음 편안함을 느낄 무렵 아내의 수술은 끝이 났었습니다.
아내는 회복이 덜 된 채 병실로 옮겨지며 저에게 하는 첫마디가
" 새롬이는 어때?" 라는 말에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을 해야만 했었습니다.
" 응 너무 예쁘고, 건강하데..."
" 아무이상 없대? 눈코입 다있지? ....
장시간 수술로 힘들었을 당신이지만 아가걱정에 힘내어 나에게 물어본 아내에게 새롬이가 집중치료실에 들어가 있는 사실을 차마 말하지 못했었습니다. 괜히 슬퍼하고, 눈물을 흘릴까봐. ...
하루 2번 면회가 되는 신생아 집중치료실 새롬이가 아무이상 없겠지? 이것저것 검사한다는데...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초조함속에 드디어 면회가 시작되었고, 새롬이 모습이 더욱더 그립고 보고 싶었습니다.
두리번거리며 여기저기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있는 아가의 모습들과 뚜뚜 하는 심박동소리 등 괜스레
섬뜩한 기운이 돌며 눈물이 아른거렸습니다. 한쪽 귀퉁이에 누워 한쪽 팔에는 링거 주사, 심박동측정, 산소호흡부착 등 이것저것 부착 되있는 새롬이의 모습을 보자 눈물이 절로 흘러 나왔습니다. 이 어린 것이 얼마나 아플까? 아내가 알면 얼마나 슬플까?
저는 목멘 목소리로 담당 간호사께 새롬이의 몸 상태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 보자, 애기의 기본검사와 심장, 갑상선검사, 복부 등 여러 가지 검사를 해보자고 했습니다.
짧은 면회는 끝이나고, 새롬이의 걱정도 잠시 잊은 채 저는 병실로 돌아와 아내의 몸 상태를 걱정해야만 했었습니다. 수술 중 복부유착이 심해 방광이 찢어지는 일이 생겨 응급수술을 해야만 했고, 이후 혈액검사 결과, 빈혈이 심해 철분공급을 해야만 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다른 산모와 달리 여러 가지 병으로 인한 후유증 발생이 염려하여 입원일수를 늘여야만 한다고 했으며, 방광수술로 인해 소변 줄을 꼽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날 저녁 아내를 위해 하지도 못하는 기도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놀랍게도 아내의 회복이 날로 달라지고 있었으며,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었던 사람이 힘든 몸을 이끌고 한걸음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이튿날부터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를 가자고 했었습니다. 아직 수술로 인한 출혈과, 통증이 동반되었지만 교회 가는 시간만은 행복한 미소가 저에게 감동을 주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예배가 끝나고 병실로 가는 길에는 통증이 있곤 했습니다. 3일째 되던 날 아내는 새롬이를 보고자 신생아 집중치료실로 향해야만 했었고, 저는 사실을 말해야만 했었습니다.
"새롬이 엄마! 사실은 새롬이가......." 아내의 의외의 대답이 저를 더 놀라게 했었습니다.
" 괜찮아 새롬이는 하나님이 주신 크나큰 선물이잖아.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아무 이상 없을 거야! 그러니 괜한 걱정하지 말고 기도나 열심히 해"
아내가 걱정될까봐 노심초사 불안해했던 나보다 더 담담한 말로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니....
며칠 뒤, 아내의 몸 상태는 주치의가 놀랄 정도로 다른 산모에 비해 상당히 회복이 빠르다고 했었습니다. 제가 봐도 놀랄 정도 이었습니다. 역시 우리 새롬이 검사결과 숨도 고르고, 맥박도 좋고, 혈액검사 좋고. 등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하다고 했었습니다. 또한 분유도 다른 아이에 비해 너무 잘 먹고 잘 소화 한다고 했었습니다... 저는 너무 너무 감사했고, 정말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저는 지난날들을 돌이켜 보면 아직도 젊은 나이지만, 하나님을 모르고, 힘들고, 괴로운 세월 속에 지내야만 했던 일들이 후회스럽고 가슴이 아픕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 자리에 계셨는데, 항상 마음을 열고 계셨는데....
생전 어머니 또한, 장로님을 섬기셨던 것도,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넓으신 마음을 몰랐던 것이 후회 되곤 합니다.
또한, 아내의 절실한 하나님의 믿음 속에서도 저는 외면만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를 아내의 암을 통해 존재를 가르쳐 주셨고, 이어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하나씩 하나씩 보여주셨습니다.
저에게 성령을 부으시어, 매번 예배시간 놀라운 은혜의 눈물을 흘리게 하셨고,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게 하며 어느 순간부터 사랑이란 말씀을 주셨으며, 심지어 15년 넘게 피워왔던 담배를 뚝 끊도록 하는 놀라운 역사가 끈이질 않으셨습니다. 또한, 많지 않았던 월급의 일부를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낼 때마다 몇 배 몇 천배 몇 만배 등으로 채우시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일상생활로 복귀할 때는 제 모습은 예전의 모습과 전혀 다름이 없었습니다.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항상 피곤에 지쳐 있어 잠만 자곤 했었습니다. 저는 아마도 지난 2년간 아내의 암이란 놈 때문에 긴장 속에 살아왔지만, 이제 아내의 건강해지는 모습을 볼 때 마다, 이제는 괜찮겠지 하며, 처음의 마음이 식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곤 했었습니다.
정작 내가 힘들고, 지쳐있을 때 아무도 곁에 없었던 것들을 생각해보면 이제는 그냥 편히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옛말에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하루는 자주 가는 음식점의 집사님을 통해 아버지학교를 알게 되었고, 사실 돈을 대신해서 내주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했었습니다. 토요일 강의를 하니, 술도 먹지도 못하고, 친구들도 만나지 못한다는 것에 흔케이히 가지를 못했지만, 아내와의 말다툼 속에 아내를 피할 수 있는 자리가 생겼구나 하고 생각이 들어서 참석을 하게 됐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버지 학교의 프로그램을 통해 나또한, 지나온 아버지와 다를 것이 없구나 하고 반성하는 계기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 제 마음속에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반항적인 태도와 자녀에게 그저 바라기만 하는 사람으로 되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벌써 그러한 모습들이 몸에 배어 있는 것은 아닌가. 돌이켜 보는 자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루고 계신 줄 믿고 있으며, 부족한 저를 교회로 인도하셨으며, 부족했던 저에게 기도할 때 마다 마음의 복을 주시며, 아버지학교까지 인도하여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지금 아내와 자녀에 대하는 저 자신의 모습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이것이 진정한 행복의 생활인가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제게 있어 주님의 인도로 아버지 학교는 제인생의 또 다른 변화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임이 틀림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지난 5주간에 아버지학교를 통해 아버지의 영향력과, 아버지의 남성, 아버지의 사명 과 영성 등을 알게 되었으며, 진정 제가 아버지의 자리로 한걸음 도약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제가 아버지가 될 수 있음을 알려주심에 대해 감사하고 반성합니다. 또한 아버지학교를 위해 수고하신 모든 김포10기 5조 안태영조장님과 스텝, 각조 형제님들 모두 모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주님의 자녀로서 아버지로서 새로운 인생을 펼치고자 다짐합니다.
주여 제가 아버지입니다. 감사합니다. 2006년 12월 2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