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3장에는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하면서 분열하는 고린도교회에 바울이 보내는 권면이 있습니다. 5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개역개정]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NIV] What, after all, is Apollos? And what is Paul? Only servants, through whom you came to believe--as the Lord has assigned to each his task.
[vulgate] ministri eius cui credidistis et unicuique sicut Dominus dedit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를 모두 사역자라고 칭하는데,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위에서 보시는 것처럼 종, 혹은 일꾼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제의 권위를 중요시 했던 카톨릭의 불가타 역에서도 사역자를 ministri라고 번역했는데, 이 단어는 아래에서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ministr.i N 2 3 GEN S M
ministr.i N 2 3 LOC S M
ministr.i N 2 3 NOM P M
ministr.i N 2 3 VOC P M
minister, ministri N (2nd) M [XXXAX]
attendant, servant, waiter; agent, aide; accomplice;
minister 라는 단어가 요즘에는 상당히 긍정적인 이미지로 쓰이는 듯하지만,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의 쓰임에서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합니다. 이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노동(단순한 노동의 의미가 아니라 생활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활동)하는 사람은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minister들에게는 당시 최고의 가치였던 정치적 발언권은 주어지지도 못할 뿐더러, 정치활동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 또한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배경에서 바울은 자신을(사도를)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요즘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주의 종"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다른 사람들보다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바울의 이러한 표현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기원을 두는데, 바로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고,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자신을 내어주시기 위함입니다(막 10:43-45). 때문에 사도들 또한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생활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대단한 사람으로서의 대접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였으며, 예수님에 의해서 세움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사용하기를 포기하고, 낮은 자가 되기를 자청했습니다. 자신을 종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며, 이것은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쓰는 사람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낮은 자로서 섬기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요즘 소위 말하는 성령 사역자들은 어떻습니까?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말하고, 대단해 보이는 능력으로 사람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사람들을 다스립니다. 마치 왕이라도 된 양 그렇게 행동합니다. 일 년에도 수 백만 달러를 벌어들이고, 그 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합니다. 그들의 행태를 보면 섬기기 보다는 섬김을 받으러 왔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또 다른 차이점은 이것입니다. 바울은 천막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 죽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불신자들에게 믿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자신을 사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주된 사역은 누구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까? 만약 그들을 통해서 오늘날 기독교에 큰 부흥(?)이라는 것이 찾아온다면, 마땅히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일해야 함이 맞습니다. 실제로 2000년 전 사도들의 주된 임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왜 자신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고 했고, 이방인들에게 자신이 빚진 자라고 표현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의 사도는 왜인지 모르게 사도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복음을 전하는 일)는 등한시 하고, 대형집회를 열고, 이상한 기적을 보여주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행위라면, 그들은 이미 믿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다른 복음입니까?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미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을 합니까?
열두 명의 사도는 분명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여주는 삶의 자세(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섬기려 했던 그들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사도와 옛날 사도들이 왜 이런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