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태평양에 흘린 눈물
하와이 상공을 선회하며 날아오르는 비행기 안에서 스미스사범이 전해준 편지를 보려다 문득 검푸른 동해안의 찾아오는 남대천의 연어들이 생각났다.
“ 강원도 양양 남대천에서 떠난 연어는 하루 평균 14km, 1년에 5,000km 이상 항진하며 북태평양에 들어가기도 전 거친 환경과 천적들에게 많은 연어들이 희생을 당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위협도 그들의 진로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북극해와 베링해의 극심한 추위 견디고 아시아와 북미에서 올라온 연어들이 교차하는 순간 바다는 끓어오릅니다. 혹독한 사투에 생존 연어는 20% 뿐. 또 다시 생명을 걸고 회유의 항로에 도전합니다.
별빛으로 항로를 잡고 멈추지 않는 질주로 달궈지는 해류.
5년 동안 치열하게 살아온 연어들이 동해에서 아련한 고향의 냄새를 찾아냅니다. 이제 산란절식(産卵節食)하며 산란처이자 험난했던 항해를 마칠 양양 남대천으로 거슬러 오릅니다.
굶주림과 삼투압의 고통을 이기고 거침없이 폭포 위로 치솟아 오르는 장엄함. 극렬한 혼인색은 치열했던 삶의 상징 같습니다.
인간과 닮은 연어의 일생은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양양군의 연어이야기에서-
왜? 갑자기 남대천으로 회귀하는 연어가 생각났는지 잘은 모르겠다.
그것은 아마도 세계의 수많은 인종이 어우러져 삶을 영위하는 하와이에서 태권도가 삶의 패러다임 중 하나로 형성되어 그들의 행복을 위한 수련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내가 지금까지 깨달은 깊지 않은 태권도를 전하고 귀국하는 모습이 연어를 닮았다고 스스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7세기 이래 몇 백 년 동안 세계는 뉴튼의 기계적 패러다임으로 형성된 새로운 세계관으로 끊임없는 변화 속에 발전을 거듭해 왔으며 그 영향력 아래 삶을 영위하고 있었지만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세계는 급변하는 사회구조의 변화 속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것을 아인쉬타인 박사는 “광학의 근본 법칙”이라 했고, 에딩톤은 “우주의 형이상학적 법칙”이라고 말했는데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형성될 이 법칙은 엔트로피(Entropy:열역학의 제2법칙)이다.
열역학 제1법칙은 “ 우주의 물질과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므로 생성되거나 소멸될 수 없고 오직 형태만 바뀌는 것”이며, 제2법칙은 “ 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바뀐다. ”는 법칙으로 바꾸어 말하면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에서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로 바뀌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법칙을 제레미 리프킨은 ‘엔트로피’라고 하는데 현대 사회는 이 법칙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노벨상 수상자인 화학자 소디(Frederick Soddy)는 “모든 정치체제의 흥망성쇠, 국가의 자유나 속박, 산업의 움직임, 가난이나 부의 근본 그리고 모든 종족의 행복까지도 관장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엔트로피법칙은 어디까지나 물질적인 세계에만 절대적인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공존하고 있으며 과거와 미래 사이에 지금(현실)이 있는 것이다.
지금의 이 현실에서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정신적 갈등은 증폭되고 도덕윤리는 가치관의 혼돈 속에 빠질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갈등과 도덕윤리관의 혼돈을 바르게 세우고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 또는 태권도와 같은 무도수련이다.
태권도는 수련을 통하여 자기를 발견하고 모든 존재를 인정하고 모든 존재와 조화를 이룰 때, 존재에 대한 존엄성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또한 모든 존재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고 믿기에 나는 태권도의 수련을 멈추지 않는 것이며 또한 수련을 통한 깨달음을 전하러 미국으로 향하기로 했다.
미국은 평소에 내가 가보고 싶은 나라였다.
세계를 주도하는 초강대국에 사는 사람들의 思考(사고)와 생활을 직접 접해 보고 싶었고 또 선수시절 새벽마다 일어나기 힘들었던 나의 잠을 깨우고 운동화 끈을 굳게 묶을 수 있게 용기를 준 음악이 빌 콘티가 작곡한 영화 록키의 주제곡 이였는데 영화 속의 주인공 록키는 밑바닥 인생에서 사회적 성공과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글러브를 끼고 어렵고 힘든 현실과 목숨걸고 투쟁했던 아름다운 모습에서 나는 무한한 용기를 낼 수 있었고 한번쯤 미국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애제자인 김병희 선수가 2000년 미국 US 오픈 국제 태권도 대회에서 우승하는 인연으로 자매결연과 관광차 다녀오려고 했으나 하와이태권도협회에서 세미나를 개최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깊이 생각한 후에 강의를 수락하고 미국을 다녀오는데 필요한 일체를 제천관광 민장기사장과 상의 한 후 민사장의 세심한 배려 속에 나는 하와이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어둠을 뚫고 태평양을 날아 하와이에 도착하니 아침이었다.
입국 수속을 밟으며 나는 태권도의 세계화에 대한 자부심을 한껏 느끼는 일을 겪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다른 관광객의 입국수속이 몇 분씩 오래 걸리는데 비해 방문지를 스미스 태권도장이라고 적힌 것을 본 공항직원이 “태권도 트레이닝(training)”하며 바로 통과 시켜주는 것이었다. 비록 작은 일 이였지만 나는 태권도의 세계화에 대한 긍지를 느낄 수가 있었다.
공항 밖으로 나가니 아이비의 부모가 처음 보는 나를 한눈에 알아보고 하와이 특유의 꽃다발을 걸어 주며 “알로하” 하며 맞이한다.
호노룰루를 지나 가네오히로 가서 간단하게 중식을 마친 후 나는 너무나 궁금하여 ( 태권도로 세계킥복싱챔피언을 지냈고 레이건 미국대통령 특별경호원의 경력이 있고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으로서 현지 사범을 역임하고 있는) 바비 스미스가 운영하는 하와이 최대의 태권도장인 스미스 태권도 센타로 향했다.
태권도 종주국에서 Master가 온다고 미리 소개가 되어서인지 질서 정연한 태권도 수련생들의 진지한 수련 모습을 한참 바라보며 지난 1969년부터 수십년간 수련한 태권도를 전하기에는 열흘간의 시간이 너무 짧다고 생각되어 쉬지 않고 바로 도복으로 갈아입고 이들과 호흡을 같이 하기로 했다.
하지만 시차 적응이 안 된 상태에서 두 시간의 강의를 마치고서 세면을 하는데 갑자기 머리가 무겁게 느껴지며 코피가 쏟아졌다.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문득 초창기 나의 선배들은 세계 각국을 돌며 수많은 피 땀를 흘리며 태권도를 전하였을 것을 생각을 하니 가슴속 저 밑에서 솟아 나오는 형용할 수 없는 용기와 투지 생겼다.
“ 그래! 이건 가치가 있는 일이다. 이 한 몸 으스러지더라도 종주국의 태권도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몸으로서 보여 주자. ” 하고 생각하며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를 여럿 배출할 만큼 기본기나 기술적으로 가르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지난 32년 동안 태권도 수련을 통하여 깨달은 바름(正)과 어울림(和)을 통한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말이 통하지 않음으로 해서 나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어 지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것 외에 나는 시차라는 적과도 싸워야 했으며 심지어는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닭(나중에 알았지만 새소리였다), 한 밤에 스쳐가는 소나기와 바람소리와도 싸워야 했으며 음식문화의 차이로 인한 배고픔과도 싸워야 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가니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몸이 말을 안 들어 힘이 드는 가운데 삼 일째 되는 날 아침의 일이었다.
수련을 하러 오는 60대의 여성이 “Grandmaster Park! Aloha! ”하는 인사에 귀를 의심했는데 이어 들어오는 수련생들의 이어지는 “Grandmaster Park! Good morning?”하는 인사에 나약했던 나의 의지를 탓하고 후회하며 반성했다.
Grandmaster!!
그랜드마스터!! 이것은 그들이 존경심을 나타낼 때 하는 최고의 찬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로서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다시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리고 그들과 호흡을 같이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흘의 시간이 흐르고 마지막 세미나에서 강의를 마치고 나오니
많은 태권도의 수련생들이 언제 다시 오느냐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가운데
하와이에 주재하는 한국일보 기자에게서 인터뷰 요청이 왔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 태권도의 전망을 질문 받고 답하다 앞으로 외국에서의 태권도사범은 한국인보다 외국 현지에서 외국인사범들이 주도하는 시대가 올 것 같다고 말한 뒤 국내 태권도의 현실을 이야기하다 기어이 나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모두들 잘해야 하는데... 잘해야 하는데....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나를 보고 누님같은 기자의 눈도 어느새 붉어 지고 있는데 스미스사범이 의아해 하며 묻는다. 왜 우느냐고....그래서 나는 한국일보 기자에게 “ 스미스사범님의 태권도에 대한 열정과 사랑에 감동 받아 그렇다고 전해달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진주만의 푸른 바다 앞에서 나는 갈등했다.
1955년 최홍희씨에 의해 태권도라는 명칭이 創案(창안)되어 탄생 된 오늘날의 태권도가 있기까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1944년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도장을 설립된 청도관의 이원국씨( 쇼토칸 카라테(松道館 空手道) 수련)
(2) 송무관의 노병직( 일본대학교 카라테부에서 쇼토칸 카라테를 배움. 후나고시기찐에게 배웠으며 송도관에서 '송'을 따서 '송'무관이라고 관명을 정함)
(3) 연무관의 전상섭( 청소년 시절에 유도를 배우고 동양척식대학교(일본) 카라테부에서 카라테를 배움. 한국전쟁 때 지도관으로 개칭함)
(4) 창무관의 윤병인( 만주에서 주안(만주어:권법)을 배우고 일본대학교 카라테부에서 슈토칸 카라테(手道館 空手道)를 배움. 슈토칸 카라테의 창시자 '도야마 간켄'과 무술 교류하며 카라테 5단이 되었고 카라테부 지도사범 역임)
(5) 무덕관의 황기( 만주에서 담퇴1, 2로, 태극권(지금의 중국 태극권인지 분명치 않다)등을 배우고 46년 철도국 도장시절 카라테를 서적으로 연구 후에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여 수박도로 개칭)
(6) 오도관의 최홍희( 중앙대학교(일본) 카라테부에서 카라테를 배움)에 의해 시작된 귀국당시 빨간띠였다는 증언이 있다.
태권도라는 명칭이전의 초기에는 공수 또는 당수로 불리며 만주권법(이것은 현재의 중국무술과는 다른 고구려나 발해의 무예로 보아야 한다.)과 일본 가라테를 수련한 분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당시로 기술체계가 좋은 가라테의 기술체계를 도입하여 수련하였다.
이러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이후 우리는 최홍희씨에 의해 태권도라는 공식명칭을 확정하고 정치적인 문제로 캐나다로 망명한 최홍희씨에 의해 ITF태권도는 무술적 가치를 지닌 사인웨이브를 발견하고 틀에 접목시켜 독특한 태권도를 완성시켜 왔으며, WTF태권도는 우리의 몸짓과 발질이 가미되고, 창의적인 격투기술을 발전시킨 후, 태권도 경기화를 통하여 독특하고 실전적인 기술체계를 완성시켜왔다. 이러한 사실적 역사를 인터뷰에서 나는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를 혼란에 빠트린 것은 자청해서 통역을 맡아준 찰리 모친의 질문 이었다.
찰리는 미국 본토에서 ITF태권도를 4년간 수련하였다.
그리고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와서 WTF태권도장에 입관하니 이전에 배운 ITF태권도를 인정하지 않는데 도대체 뭐가 다르기에 같은 한국에서 보급된 태권도를 수련하는데 왜 인정하지 않는 것이냐는 것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지금 내가 여기(하와이)에 와서 말하고 싶은 것은 태권도를 통한 깨달음과 그것을 통한 실천으로 보다 나은 삶을 위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가치 있는 것을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태평양의 검푸른 물결을 바라보며 조국의 상황과 태권도의 현실을 직시하니 연어의 신비처럼 태권도는 나에게 형용할 수 없는 서글픔과 희망이 교차되어 밀려오고 있었다.
연어는 신비를 지닌 생명체다
연어가 그 먼 베링해에서 어떠한 추적 장치로
모천인 남대천으로 오는지,
남대천이 모천인지 무엇으로 기억하는 지,
왜 모천에서 산란해야 하는지,
산란 후 왜 그토록 빨리 죽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다.
연어가 떠나는 봄, 연어가 돌아오는 가을,
남대천은 연어에게 묻지 않는다.
왜 그 먼 길을 찾아 내게 오는 지를.
단 그 생명의 안스러움을 가슴에 묻어둔 채 생명수로 흐르고 있다.
-연어의 신비 중에서 -
그렇다. 태권도는 묻지 않는다.
영원히 내게 묻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를 지켜보며 수련을 멈추지 않는 나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내게 스미스 사범은 말했다.
내가 가는 길을 그도 가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