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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5일 하늘언어교회 메시지
본문: 요한복음 1장 1절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제목: 언어에 대한 바른 이해가 신앙을 자라게 한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말씀’입니다. 말씀은 언어라는 말로 바꾸어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님은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존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사람에게는 ‘말’ 즉 언어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언어는 무한하시고 인간의 언어는 유한합니다. 그런데 무한한 언어를 직접 말하거나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오직 유한한 인간의 언어로서만 하느님의 언어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우리교회의 특성중 가장 주된 요소가 ‘언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는 어떠한 감각 정보도 없으며 오직 언어를 통해서만 그분에 대해 배우고 알아갈 수 있고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신앙인에게 언어는 첫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성서에 나오는 모든 언어와 신학적으로 꼭 필요한 언어들을 배워가면서 신자로서 성장해가게 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언어에 대한 인식이 극히 왜곡되어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 용어 중에 가르치지 않아서 알려지지 않은 것도 많고 잘못 사용되는 말들도 많습니다. 의미를 모르고 사용되는 것들도 부지기수이고 성경에는 있지만 한국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무한하신 하느님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담아내기 위해 필요할때는 잘 알려지지 않는 언어를 재발견하고 새로운 개념과 용어들도 고안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도입된지 200년이 넘었는데도 언어적인 낙후성은 좀처럼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가장 시급히 알아야 할 용어와 개념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의미를 모르고 사용하는 말들
기독교의 핵심 주제어들을 꼽는다면 하느님, 믿음, 구원 등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 용어들이 무슨 의미인지를 물어보면 대부분이 대답을 못하거나 횡설수설합니다.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고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하느님을 믿는다는 고백도 사실은 무엇을 고백하는지 모르고 말만 하는 것이 됩니다.
우선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생각해봅시다. 이 이름은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언어인데도 가장 심각하게 왜곡되어있는 이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의 신으로만 생각하기도 하고 심판의 신으로만 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선한 모습으로만 생각하기도 하고 전제군주처럼 무서운 이미지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떤 특정한 속성만 가진 편파적인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필수적인 요소가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도 완전하고 무한하시며 공의도 완전하십니다. 능력, 지식, 선하심, 아름다우심, 진실하심 등 모든 좋은 요소가 완전하게 갖추어진 분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각자가 좋아하는 속성을 한가지씩 골라서 그것만 강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파편적으로 묘사된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상에 가깝습니다. 사랑만 강조하면 공의를 무시하고 사랑밖에 모르는 바보 신이 되어버립니다. 공의만 강조하면 사랑은 안중에도 없고 피눈물도 없는 무서운 심판의 신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사람의 유한성 때문에 하느님의 속성 전체를 균형 있게 인식하고 전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사랑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어떤 짓을 저질러도 용납하신다는 망발을 범하기 쉽습니다. 물론 하느님의 능력으로는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슨 짓이나 용납된다고 말해버리면 양심을 흐리게 하고 도덕성을 퇴보시키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죄를 일일이 기억하시고 심판하신다고 해버리면 하느님은 눈곱만큼도 관용이 없는 끔찍한 분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지려면 성경과 신학을 비롯해 모든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해서 배워가야 합니다.
구원이라는 개념도 많은 오해와 왜곡으로 오염된 말입니다. 흔히 구원을 사후에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을 연상하기 쉽습니다. 이를 내세천국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나 이슬람교나 무속신앙 등 모든 종교에 두루 퍼져 있는 믿음입니다. 기독교는 그러한 종교들보다 탁월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구원관이 타종교와 같다면 기독교의 존재 의미는 없어지게 됩니다.
물론 기독교에도 내세 천국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론이 타종교의 구원론과 다른 것은 천국은 이미 이땅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상입니다.
구원이란 도움을 준다, 구제한다, 살려준다 등의 의미가 다 포함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살려주는 것도 구원이고 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해주는 것도 구원입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을 해방시켜 주는 것도 구원이고 빚을 진 사람의 부채를 탕감해주는 것도 구원입니다. 구원의 성서적인 의미가 이토록 풍성하기 때문에 오직 내세천국만 강조하는 것은 크나큰 실책입니다.
믿음이라는 말도 극심하게 왜곡되어 있는 개념입니다. 어떤 사람은 뜨거운 감정을 믿음과 혼동합니다. 어떤 사람은 머리로만 동의하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믿기만 하면 구원이 보장되고 어떤 실천도 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믿기만 하고 실천이 없다면 죽은 믿음, 귀신 믿음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말씀을 실천하고 죄를 회개하고 순종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총체적인 삶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본래적인 믿음에는 하느님에 대한 순종과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과 긍휼, 의롭고 성결된 삶의 자세 등 모든 삶의 영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 사용해서는 안 되는 단어들
축복이라는 말은 빌 축자에 복 복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축복해 달라고 하면 하느님보다 더 높은 신에게 복을 빌어달라는 말이 되므로 이는 다신론과 영지주의로 후퇴하는 표현이 됩니다. 하느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 위에 신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축복해 달라고 기도하면 안 되고 복을 내려달라고 하거나 강복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에 세워졌던 솔로몬의 건축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여러 차례에 걸쳐 파괴되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성전 제사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는 회당 중심의 예배와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전은 이미 파괴된 것이기 때문에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눈에 보이는 성전이나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만 중심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을 모신 성도 각자가 바로 성전입니다. 때문에 교회 건물은 단지 교회당일 뿐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이라는 말도 조심해야 합니다. 구원은 하느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지 인간의 확신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뜨거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최면과 암시 등 인위적이고 심리학적인 방법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조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믿음이 약하면 약한대로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고 말했을 뿐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구원받는다는 말이 없습니다. 물론 믿음을 자라게 하려고 그렇게 하기도 하지만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생긴 확신은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는 민낯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3. 성서적으로 중요하지만 개신교에서 쓰이지 않는 용어들
하느님을 나타내는 말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라는 이름만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명칭을 통해 그분의 높고 거룩하심을 나타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어에서 하느님을 지칭하는 용어가 무려 70여개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어에서는 하나님과 하느님만이 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농사나 비, 바람 등에 관한 말들은 수십가지가 넘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농사를 중시 여기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에게는 농사보다 하느님이 훨씬 중요한 분이기 때문에 그분에 대한 다양한 호칭이 발달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하느님과 천주님만 주로 사용하고 개신교에서는 하나님만 사용하므로 호칭의 빈핍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성서적으로 칭하기 위해서는 말씀님, 언어님, 스스로 계신 분, 지극히 높으신 분 등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설교라는 용어보다는 강론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좋습니다. 성서에는 설교라는 표현은 거의 없고 강론이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론이라는 말 대신 설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강론이라는 말은 가톨릭에서 쓰고 있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엄연히 성경에 사용되는 말인데 특정 종교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것은 언어의 빈약함을 초래하는 일입니다. 또한 설교라는 말은 기독교 밖에서는 주로 조롱과 비하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듣기 싫은 잔소리를 하면 또 설교한다고 말하지 강론한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가급적이면 강론이라고 쓰는 것이 이미지 갱신에도 좋고 여러모로 유익이 많다고 봅니다.
헌금이라는 말도 과히 아름다운 말은 아닙니다. 헌금은 돈을 바친다는 뜻인데 하느님께는 돈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바쳐야 합니다. 그래서 헌신, 헌납, 헌상, 연보 등 다양한 표현을 쓰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렇지 않고 헌금이라는 말만 고집한다면 하느님께는 오직 돈만 바치면 되는 것으로 인식이 왜곡되고 하느님을 돈만 밝히는 세속적인 신으로 비하하는 모양새가 되고 맙니다.
세상에 하느님 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만일 시를 봉헌한다면 헌시라고 할 수 있고 물질을 봉헌한다면 헌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봉헌해야 마땅함에도 오직 돈만 드리는 것으로 왜곡된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하느님께 헌금을 드리는 이유는 하느님이 돈을 좋아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드린 그 돈으로 당시 소유지가 없었던 레위인과 제사장과 고아와 과부 등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헌금은 교회의 재정으로 사용되고 고아와 과부를 위한 나눔으로는 잘 나가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헌금 즉 연보를 어느정도 사회에 환원하고 교회 재정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성도들도 교회에 연보함과 더불어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도 자선을 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이렇게 언어에 대한 바른 인식을 키워가는 것이 신앙을 성숙하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특히 하느님의 언어는 본질상 무한하기에 유한한 언어로는 아무리 많은 공부와 연구를 해도 완전한 이해에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한계 안에서 알 수 있는 만큼만 배워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유한한 지식조차 가르치거나 배우지 못한 채로 수십년을 교회에 습관적으로 출석하는 것이 한국교인들의 실정입니다. 이제는 신앙 언어에 대한 보다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하나하나 다시 배우고 알아가려는 노력이 절실한 때입니다.
새소식
1. 그동안 사회봉사로 수고해준 구완모, 이상혁 두 학생이 봉사기간을 마쳤습니다. 원래는 작년 한학기만 봉사하면 되었는데 자진 연장해서 이번학기까지 참석해주었습니다. 실습 때문에 예전처럼 자주 오지는 못하지만 시간이 허락되는 한에서 교제를 계속 나누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흔히 봉사자로 내방하는 학생들은 이분법적으로 봉사기간을 채우면 발길을 끊게 되는데 이 두학생은 삼분법적인 자세로 관계를 유지하고자하는 기특한 마인드를 표명하여 우리 교회에 큰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악보를 삽입하면 곡을 끝까지 연주하는 특수한 오르골을 손수 제작하여 저에게 선물해 준 일입니다. 그들이 오르골을 제작하게 된 계기는 제가 악보를 이용할 수 있는 오르골을 구매하고 싶다며 검색을 요청한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학생들은 이런 제품이 판매되고 있으니 주문하면 된다고 알려주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손수 제작해보겠다고 도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학생들이 생각날 때마다 오르골을 만지며 함께 했던 시간들을 추억할 수 있게 되었고 언젠가 다시 오리라는 기대로 작은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귀한 정성과 재능을 기부해준 두 학생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갈채를 보냅니다.
2. 저희 부부는 주말 외의 공휴일에 장모님을 뵈러 대전에 다녀오고 있습니다. 6월 1일이 선거일이어서 대전에 가게 되었는데 송집사님과 조집사님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던 식당에서 모처럼의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식당 이름은 ‘쌍촌본가’라고 합니다. 주메뉴는 갈비탕과 냉면입니다. 그리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이 무한리필입니다. 저는 비냉에 아내가 덜어주는 갈비탕까지 훌훌 마시고 아이스크림까지 시원하게 탐식하여 꿀같은 힐링을 맛보았습니다. 여러분 중에 대전에서 맛집을 찾고싶은 분은 한번 들러보시기를 추천합니다.
3. 이달의 책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서명: 껍데기 예배는 가라
지은이: 마크 래버튼
옮긴이: 채대광
펴낸이: 신은철
펴낸 곳: 도서출판 좋은 씨앗
출판년도: 201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