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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장서(巴里長書 ) 사건(事件)
1919년 유림들이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독립청원서인 서한을 보낸 사건이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인 윤충하(尹忠夏)는 서울의 만세시위 상황과 파리 강화외희의 등 국내외의 정세를 설명하고, 3·1운동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유림들이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글을 작성하고 곽종석이 대표로 나서 줄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에 곽종석은 김창숙(金昌淑)과 상의하여 3·1운동 때 유림이 제외되어 일어난 사실을 아쉬워하며 유림이 독자적인 행동을 추진하기로 의논,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요구를 밝히고 독립을 청원하기로 합의했다.
파리 강화회의에 보내는 장서에는 곽종석을 대표로 영남 유림의 명망 있는 인물들이 서명했다. 곽종석은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듬해인 1896년 초 의병운동에 나서기보다는 이승희와 함께 각국 공사관에 일본의 침략행위를 성토하고 토죄(討罪)하도록 호소했을 만큼 국제여론을 중시했다.
장서의 핵심적 내용은 ① 여러 나라 여러 겨례는 제각기 전통과 습속이 있어 남에게 복종이나 동화를 강요받을 수 없으며,
② 사람이나 나라는 그 자체의 운용능력이 있게 마련이므로 남이 대신 관리하거나 통치할 필요가 없으며,
③ 한국은 삼천리 강토와 2,000만 인구와 4,000년 역사를 지닌 문명의 나라이며 우리 자신의 정치원리와 능력이 있으므로 일본의 간섭은 배제되어야 하며,
④ 일본은 지난날 한국의 자주독립을 약속했지만 사기와 포악한 수법으로 독립이 보호로 변하고 보호가 병합으로 변하게 했고, 교활한 술책으로 한국사람이 일본에 붙어살기를 원한다는 허위선전을 하고 있으며,
⑤ 일본의 포악무도한 통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우리는 거족적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만국평화회의와 폴란드 등의 독립소식을 듣고 희망에 부풀어서 만국평화회의가 죽음으로 투쟁하는 우리 2,000만의 처지를 통찰해줄 것으로 믿고 있음을 주장했다.
김창숙이 이 장서를 해외로 가져가는 책임을 맡아 상경했을 때 호남의 전우(田愚)는 참여를 거부했으나, 호남지방의 김복한(金福漢)은 여러 선비들의 연명으로 파리 강화회의에 보낼 장서를 준비하고 있는 사실을 김복한의 제자인 임경호(林敬鎬)를 만나 확인하고 서로 공동행동을 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양쪽에서 작성한 장서를 공동의 문서로 채택하여 137명의 유림 대표가 연명한 유림단의 파리 장서를 김창숙이 휴대하여 국경을 넘게 했다. 장서의 본문은 2,674자에 이르는 한문체로서, 기초의 책임은 곽종석으로 되어 있다.
김창숙은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자 손진형(孫晉衡)·신규식(申圭植)·신채호(申采浩) 등과 상의한 끝에 이 장서를 강화회의에 파견되어 있는 김규식에게 우송하여 제출하게 하며, 영문번역과 국문번역을 수천 부 인쇄하여 각국 대표와 외국의 공관을 비롯한 국내의 각 향교 등 여러 기관에 우송했다.
김창숙이 장서를 가지고 상하이에 와 있을 때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국권회복단의 대표들이 유학자 조긍섭(曺兢燮)에게 파리 강화회의에 보낼 문안을 초안하게 했다가 곽종석의 허락을 받고 김창숙이 가져간 장서와 같은 내용의 글을 김응섭(金應燮)에게 휴대하게 하여 상하이에 보냈다.
이는 일제강점 이후 유림들의 가장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행동화라고 할 수 있다. 장서사건이 드러나자 여기에 서명한 곽종석을 비롯한 유림들은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으며, 곽종석은 74세의 노령에도 옥중에서 일본의 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포로로서 잡혀왔다는 전사(戰士)의 의지로 대응했다. 그는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으나, 도중에 병보석으로 풀려나와 그해 8월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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