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는 연극 인생으로 이끌어준 터닝포인트
긍정적인 마인드로 탄탄한 기본기를 닦았다
대학로에 불어 닥친 칼바람이 매섭다. ‘대학로=연극’이라는 등식이 오랫동안 성립되어 왔건만 연극의 메카와 같은 이곳에 이젠 뮤지컬과 콘서트, 개그공연만이 넘쳐난다. 내적 성찰을 찾아 떠나는 연출과 배우, 스태프들의 고민에 찬 작품들은 변방으로 스멀스멀 밀려나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연극이 자리를 차지할 공간은 남아 있다. ‘연극열전’, ‘무대가 좋다’와 같은 연극 페스티벌이 한 축이 되어주고 있으며 자본과 스타배우가 연극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의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양적으로 팽창한 이때, 연극의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단단히 잡아주는 연출의 역할은 그래서 더욱 중요해진다.
연극연출가 고선웅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많은 연극인들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야 했을 때도 그는 중심을 잃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터널을 걸어서, 아니 기어서 통과해야 했을지라도 동고동락했던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먼저 챙겼다.
“사단장 주최 연극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예상치 못하게 1등을 했답니다. 시작 전에는 경례를 받아주시지 않던 사단장님이 연극이 끝난 뒤 친히 일어나셔서 받으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후로 53번 정도 순회공연을 했을 겁니다. (웃음) 분장은 파스텔로 하고 방위들 옷도 빌리고 성극도 하고 보육원에서도 하고…. 70~150명 정도 모인 군인들 앞에서 제대로 된 리허설도 없이 임기응변으로 공연을 했던 거죠. 지금 생각하면 참 형편없는 공연이죠. 하지만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없었다면 그 많은 횟수를 떠나서 공연 자체를 올릴 수 없었을 겁니다. 멤버들을 아끼는 마음가짐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
홍천의 야전수송교육대에서 훈련병 생활을 했고 화천 7사단의 지원중대 운전병으로 자대생활을 시작한 그는 연극영화과 출신이 아니다. 신문방송학과 출신이다. 하지만 우연은 필연이 되고 인연이 되는 것일까? 누군가가 그를 연영과 출신으로 착각하고서 자대 내 행사 MC를 맡겼던 것이다. 그는 정말 타고난 ‘글빨’의 달인이지만 타고난 ‘말빨’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행사를 성공적으로 끝내고서 당시 연대마다 있던 문선대에 합류했다고 한다. 그러니 그의 연극 인생은 군대가 밑거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민국 연극계는 고선웅에게 감사하기 이전에 군대에 먼저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걸출한 연극연출가를 배출하는 데 큰 힘이 되어주었으니….
“단막극 순회공연을 하면서 재미있는 소재들을 많이 건져 올렸습니다. 한 예로 유격훈련을 지원하는 대대에 공연을 간 적이 있습니다. 잘 공간이 마땅치 않아 취사병 소대에서 자기로 했었는데 자기 전에 점호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점호가 너무 낯설었습니다. ‘깍두기가 소태다’라는 둥, ‘오늘 단무지 누가 무쳤냐’라는 둥, ‘국에 간이 그게 뭐냐’라는 둥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가는 거죠. 그들은 진지했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저로서는 너무 웃겼습니다. 이렇게 디테일한 상황, 코믹한 대사들을 놓칠 수 없었죠. 사회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삶의 단면이 아닐까요? 이러한 것들이 제 연극에 밑거름이 되어온 거죠. 작은 이야깃거리도 놓치지 않는 습관은 군에서 다듬어졌나봅니다.”
소위 ‘예술’하는 사람들은 일부러 군대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면제자가 많다. 다녀온 사람보다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더 많고, 다녀왔어도 부정적인 시각에 사로잡혀 작품에 꽤나 어두운 이미지만을 남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선웅 연출은 육군병장으로 만기 제대했다. 그가 진두지휘하는 플레이팩토리 ‘마방진’의 홈페이지에도 육군 입대를 당당하게 적어두었다. 긍정적인 삶을 형성하는 데 군 생활이 큰 역할을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그는 사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며 웃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통해 인내심을 키우고 부조리를 이해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들이 깊게 침잠하는 내면을 다루면서도 밝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소위 군대 갔다 오면 머리 회전이 느려지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는 한번도 그런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인데 내가 알차게 쓰고 성실하게 보내야 하지 않겠냐고 매번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군 생활을 즐겼다’라는 표현에 당당했다. 기상, 점호, 불침번, 유격, 훈련 등이 귀찮거나 피하고 싶은 것들이 아니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잖아요. 그런데 ‘내 인생’이라는 생생한 라이브 공연을 보는 관객들이 짜증내고 불편해하고 심술만 부리는 공연을 과연 볼까요? 나라도 보기 싫을 겁니다.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고 힘차고 밝아야 기분 좋게 계속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군대 생활요? 모두가 어렵다고 하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참 쉽습니다. 제가 그렇게 했거든요. 그리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군대는 비겁함과 용기라는 양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추억으로 남기고 싶다면 용기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걸 선택했을 때 당신은 군 생활 정말 잘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겁니다. 군대는 인생의 한 부분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한 부분이 놀랍도록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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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웅 연출은…
고선웅 연출은 1968년 여주 태생으로 중앙대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극작가로서 초기 2년 동안 <락희맨쇼> <서브웨이> <살색안개> 등 총 18편의 희곡을 썼으며 그중 <우울한 풍경 속의 여자>가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이후 연극뿐 아니라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카르멘> <지킬앤하이드> <남한산성> 등의 극본에도 참여함으로써 전방위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작인 <들소의 달>은 2010년 서울연극제에서 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현재 2005년 창단한 극공작소 마방진의 대표이자 경기도립극단 예술단장을 맡고 있다. 그는 인간, 사회, 폭력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살아 있는 대사와 가벼운 터치로 그려낼 줄 아는 특별한 입담을 지닌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