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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에서
서술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곧바로»), 우리를 예수와 동료 네 명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인도한다. 회당에서의 공적 사건과 온 갈릴래아에 퍼진 소문에 대한 약술 이후, 세평과 주목을 피한 내밀한 장면이 여기 나온다. 회당에 들어간 후부터 본문에서 사라졌던 예수의 동료들이 예수와 함께 다시 등장한다. 집 안에서, 이야기는 시몬의 장모만을 언급하며, 그녀가 처한 상태가 사건을 일으킨다. 행동은 신속하게 이어진다. «곧바로» 예수는 그 소식을 전해 듣고, 환자의 상태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할 행동으로 개입한다.
특별한 이야기
이 이야기는 복음서에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관련된 가장 짤막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충분히 정확한(집주인들과 그 집에 온 다른 두 사람의 이름, 여주인공의 가족 상황) 동시에 연상적(예수의 행동)이며 모호하다. «그들이 곧바로 그분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라는 말의 중개만이 현재형 동사로 강조되어 있다.
그런데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방금 언급된 네 명을 가리키는가? 집 주인인 두 형제인가? 또 그들은 시몬의 장모에 대해 무어라 말하는가?
사용된 동사는 병행구절인 루카 4,38(«사람들이 그녀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과는 달리 아무런 간청도 요구도 없다. 그것은 단순한 정보전달일까? 그들이 병을 치유할 수 있을 예수의 능력에 대해 생각했을까? 그리고 무대는 저녁까지(32절)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지속되는 식사(«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로 막을 내린다. 이야기는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가(그녀의 봉사에 혜택을 입기 위해 그룹으로 있는 다섯 명의 남자를 위해) 예수로 인해, 식탁 봉사를 완수하는 상태로 변화된 방식에만 관심을 갖는다.
핵심되는 사실만을 전달하는 이 이야기는 독자의 알려는 욕구를 좌절시킨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이 이야기를 우리가 상상한 세부사항들로 가득 메우는 것이 이 이야기의 은밀함을 존중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또한 이 이야기는 이야기꾼이 청중의 기대에 맞춰 풀어나갈 수 있을 이야기의 대략의 줄거리인 고정된 도식으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편집자가 «기본» 이야기에 ‘치유 사화’라는 전형적인 모델에 맞춘 인물과 장소들을 덧붙였으리라 상상하면서, 그리고 환자의 상태와 기적을 행하는 자와의 교섭, 그의 개입, 치유 확인과 그 해석에 관해 꼭 필요한 자료들을 포함시키면서 도식화하려 한다.
그런데 치유(기적)의 문제라면, 어째서 병의 위중함이나 목격자들의 놀람 또는 감탄이 이 이야기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가?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는 마무리는 단순히 침대에서 옴짝달싹 못하던 주부가 마침내 일상적인 일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음을 확인하기 위해 거기 적혀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본문에서 그녀가 예수의 시중을 들었다고 명시했다면(마태 8,15에서처럼), 감사의 표현으로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형성된 그룹의 시중을 든다. 그리고 그들끼리 먹은 이 식사 곧 복음서에서 이 부인에게 부여된 특별한 역할과 함께 측근들끼리 먹는 첫 식사에 대한 이 상기는 치유의 확인이라는 기능으로 한정될 수 없다. 이 이야기에서, 이 식사를 신자들의 일치의 표현으로 알아듣는다거나 또는 부활 이후 초대교회에서 전례의 틀을 형성했던 공동식사라고 생각하는 것은, 본문의 모든 요소들의 상관성을 고려하면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본문 바깥에서 설명을 찾는 방식이다. 만일 이 이야기에서 무엇인가 감동을 준다면, 그것이 교훈적이든 호교론적이든 간에, 이 이야기가 어떤 일반적인 사상에 남용되거나 어떤 거푸집 속에 부어지는 것에 저항하기 때문일 것이다.
등장인물들에게 주는 세부사항들과 매우 자연스럽고 친숙한 무대의 간결함은 이 이야기가 어떤 추억(예를 들어 시몬-베드로의 추억)을 기록하는 것 외에 다른 목표가 없다고 믿게 할 수 있다. 전기적 유익이 이 이야기에 나타나는 것은 배제할 수 없겠으나, 이 이야기의 많은 은밀함은 이 유익이 지배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사건에서 일화가 될 수 있을 모든 것을 간추린 개요만을 갖는다. 이 이야기는 최소한의 형상들로 한정되며, 서술자도 행위자들도 해석을 주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이야기에서는, 얘기된 줄거리 묘사가 서술도중 일어난 것을 행위자들이 인식하는 요소들로 인해 중복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야기 내부에서 두 시기가 특별히 해석과 인식차원의 구성에 참여한다.
첫째 시기는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누군가 개입하기를 결정하거나 결심해야 하는 순간(설화분석의 조종시기)이며, 둘째 시기는 일어난 변화에 대해 사람들이 그 결과를 인정하고, 주체 또는 혜택 받은 이들을 축하하는 순간(설화분석의 비준시기)이다.
보통 이 두 시기는 행위자들 사이에 대화를 초래한다. 이 대화는 독자에게 이야기의 쟁점과 이야기가 부각시키는 가치들, 관련된 해석을 이해하게 해준다. 그런데 시몬의 장모 이야기에서는 단 한번 있는 말의 개입이 환자에 대한 상황을 예수에게 알리는 데 쓰이며, 마지막 부분에서 손님들의 시중을 드는 형상은 이에 대한 설명 없이 이야기를 기대하지 않은 방향으로 이끄는 새 전망으로 연다.
이렇게 그 수단들을 절제하고 핵심에 집중시키는 이러한 이야기 방식은 비밀을 온전히 간직하면서도 눈길을 끄는 어떤 것의 활력을 이 이야기에 부여한다. 그것은 사생활(내밀한 공간)의 한 장면이라는 색채다. 그리고 이 이야기 앞/뒤에 있는 두 공적장면과의 대비는 이 현상을 더욱 강하게 한다. 앞뒤문맥을 살피면서 또 이 이야기를 살피면서 모든 형상요소들을 연결하고, 미리 세운 모델의 도움 없이 형상들 자체가 직접 말하게 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시몬의 장모의 변화
회당에서 집으로 그룹(‘그들’)이 이동하자마자, 본문은 시몬의 장모의 변화(단순한 치유가 아니라 변화)로 독자의 관심을 끈다. «열병으로 누워있던» 수동적인 시몬의 장모가 마침내 일어나 열에서 해방되어 활동하게 된다. 또한 그녀는 따로 떨어진 침대에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그분께 ‘그 부인’에 대해 말했다.»는 표현에서 지시하는 것이다. 이 문장은 무슨 의도로 그들이 그 사실을 예수께 말하는가에 대해 말해주지는 않으나, 그 자리에 없는 제삼자처럼 그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예수는 «그녀»와 자신을 떼어놓은 거리를 뛰어넘어야 하며, 이 일에 솔선한다. 마지막에 시몬의 장모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맡으면서 그룹에 합류한다. 예수가 그녀와 맺는 관계는 예수가 시작한 행동의 목표가 아니며, 여인은 예수에게 어떤 방식으로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예수는 그녀를 소외에서 나와 그룹에 동화되게 하며,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는 시몬의 장모의 시중을 받는 자들(‘그들’) 가운데 있다.
시몬의 장모가 변화된 방식은 단순하다.
«그분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면서 일으키셨다. 손을 잡으면서.
그리고 열이 떠났다.»
우리는 이 단락의 마지막 문장(‘열이 떠났다’)에서 치유가 있었다고 추측하지만, 그것이 «열이 그녀에게서 떠났다»를 «그녀가 치유되었다»로 바꿀만한 이유는 아니다. ‘열이 그녀에게서 떠났다’는 표현은 공간 이동을 암시하며, 이 이야기에 나오는 같은 유형의 다른 형상들과 연결된다. 열병은 실제로 공간 속에서 누워있는 포지션과 연결된다. 여인은 «열병에 잡혀 누워 있었다.» 두 동사는 마지막에 부인이 «일어났을» 때 열병이 «떠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조화를 이룬다.
마태 8,15는 «열이 가시고, 부인은 일어난다»로서, 같은 행동을 뒤바뀐 순서로 소개한다. 열병은 외부의 힘처럼 형상화되지만, 예수가 «열을 꾸짖은» 루카 4,39에서처럼, 열병을 떠나게 하고 장모를 정상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예수가 이 외부의 힘을 공격하지는 않는다.
‘마르’에서 예수는 말없이 서 있고, «누워있는» 부인을 자신처럼 서게 하기 위해 부인만을 상대한다. 열병을 떠나게 하기 위해 열병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모든 것이 본문이 세부사항에서 묘사하는, 다가가기, 일으키기, 손을 잡기라는 움직임 속에서 이루어진다. 문장구성은 주작용인 «그분이 그녀를 일으키셨다»를 강조하며, 이 ‘일으키다’ 동사는 이 두 인물을 더 가까이 접근시키는 두 개의 분사인 «다가가면서»와 «손을 잡으면서» 사이에 놓인다. 게다가 이 손동작은 다른 곳에서도 나오는데, 우리는 이 손동작이 굉장한 에너지를 담고 있다고 기꺼이 상상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상은 이 손동작이 두 사람의 접근의 끝에서 두 몸의 직접 접촉처럼 이 이야기에서 소개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상쇄되고, 두 사람 모두 같은 기립자세에 있을 때, 인간을 쓰러뜨리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격리시키는 열병은 떠날 수밖에 없다. 열병을 위한 자리가 더 이상 거기에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적에 대해 말하는 것은 본문 속에 기적과 잘 어울리는 힘의 형상을 도입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기적»이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이라는 라틴어 의미로 이해한다면, 이 이야기에서 가장 뜻밖의 것은 그 누구도 놀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숨겨진 의미, 더 은밀한 의미의 층(層)을 찾아야 하는가? 우리는 Mc(‘마르’) 이전의 구전전승이나 신자들의 모임에서 했던 마르코 복음 독서에서 이 이야기로 할 수 있었을 관행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이 이야기가 사용되고 반복되었을 여러 공동체들에서, 본문의 형상들은 반향을 찾고 여러 암시적 의미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동사 «일으키다»는 복음서의 다른 장면에서 죽은 이들의 부활에 적용시킨다는 것을 주목했다. 그러므로 환자(시몬의 장모)에 대한 예수의 손동작은 공동체 안에서 활동하는 부활한 그리스도의 일으켜 세우는 힘을 상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독서는 이 이야기의 한 형상만을 끄집어내어 해석한 것이지, 이 이야기에 나오는 형상요소들 전체를 연결하여 해석한 것이 아니다. 성경본문은 지엽적인 해석에 저항하고, 복음서의 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과는 다른 영역에서 행하려 하는 짜 맞추기 식의 해석에 저항한다.
앞뒤문맥에서 읽기
먼저 우리는, 이 이야기가 몇 안 되는 낱말들로 매우 분명하게 설치하는 줄거리에 대해 해석하기를 삼가면서, 본문 자체가 지키는 침묵을 존중하는 것이 좋다. 이 이야기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 아무것도 밖으로 누설되지 않는 이 실내장면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예수가 제자들을 이끌어 갈 «사람들을 낚기»라는 분명한 목적이나 행업 없이, 처음으로 그들끼리만 모여 있다. 가정생활, 식사가 내포하는 봉사의 교환이 함께 아우라진 식사장면이다.
그들의 인간적인 이 차원이 군중들과의 장면들 중간에서 표명되어야 한다. 이것은 갈릴래아 전체로 확산된 소문의 공간(28절)과 가장 친밀한 지인들의 공간 사이에 필요한 간격을 마련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공생활과 사생활의 교차는, 이 두 형태의 행위·화제·해석들 사이에 일치·대조·불일치를 유발시키고, 의미 생산 작업을 증진시키는 일종의 대응처럼, 복음서 도중에 자주 나타날 것이다. 예수의 활동에 대해 얘기된 첫날부터, 이 교차가 뚜렷이 나타나고, 대위법(화음)은 얘기된 행위와 상황 안에만 포함되는 만큼 더 효과적이다.
이 작은 그림에는 얘기된 행위들의 외적 반향(cf. 소문)도 없고 등장인물들이 다양하지도 않지만, 공적장면들에서 더 은밀하게 모색하는 어떤 것을 잘 나타낼 수는 있다. 여기서 집 내부는 여섯 명의 등장인물 사이에 매우 긴밀한 일치의 자리가 된다. 집주인인 시몬과 안드레아에게 인도되어 집밖에서 집안으로 함께 들어간 이들은, «열병» 형상인 불청객이 침대에 묶어 소외시켜놓은 이 부인과 직면한다. 예수는 그룹에서 빠져나와 몸의 간격을 없애고, 소외된 부인과 만나고, 부인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겨, 자기 자세처럼 일으켜 세우는 식으로 행동하면서, 통합하는 동인(動因, 또는 중개인)이 된다. 행위자들 상호간의 관계를 수정하면서 생긴 이 새로운 공간 안에는 이방인인 열병을 위한 자리는 더 이상 없다. 이때 인접성과 상호연대는 행위자들이 맡은 역할들의 차이를 없애지 않고 식사라는 형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변화를 실행한 예수는 마지막 장면에서, 먼저 그룹에서 소외되고, 수동적이었다가, 시중을 들면서 활동적이 된 부인의 시중을 받는 회식자들 가운데 있다. 두 사람(예수와 부인) 모두 생명의 봉사에 참여한다.
예수는 부인을 쇠약에서 끌어내면서 생명에 봉사하며, 부인은 모두의 생계를 떠맡으면서 생명에 봉사한다. 조연을 맡은 네 명의 동반자들은 이 두 봉사의 수혜자들이며, 행보의 마지막에 실현될 차이가 인정된 일치의 특징이 되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솔선하고 상황을 변화시키는데 성공하지만 자기 집에 있지 않는 예수를 그룹에서 떼어놓거나, 식탁에서 동료들과는 다른 대접을 받게 하지 않는다.
예수의 최측근을 연상시키는 이 방식은 직업을 버리고 예수의 뒤를 따라 나선 네 명의 어부의 장면을 적절하고 명확히 밝히면서도 미묘한 변화를 준다. 간격의 초월, 소외의 거부, 봉사의 교환 속에서 각자 역할의 차이가 인정되는 것으로 정의된 한 공동체가 은밀히 창설되기 시작한 것이다. 몸, 건강, 음식이라는 생명차원에서의 구체화로 공동체를 정의하는 것은, 한 공동체의 내적인 삶의 다른 양상들에 영감을 주는 능력을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강화시킨다. 여기서 공동체 조직에 관한 어떤 것 예를 들어 부인이 공동체에서 차지할 수 있는 자리나 봉사에 관한 또는 예수를 따르는데 합당한 방식에 관한 어떤 것을 찾지 말 것이다.
또한 회당 밖인 시몬의 집을 구원교회의 원형으로 만드는 «상징적»인 확장들은 오히려 서술된 이야기를 형성하면서 이야기를 언어의 ‘상징’체계로 승격시키는 방식에 관해 이 이야기에 질문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 이야기를 언어의 상징체계로 승격시키면서, 텍스트는 이 이야기가 발생한 상황과 사건에서 떼어내어, 어떤 공동체를 창설하는 방식을 그려낼 능력을 이 이야기에 부여할 뿐더러, 인간 구원에 대해 이 이야기에서 다루는 어떤 것을 알아들을 능력을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