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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복우리의 모략
슥 내밀어진 해율의 손에 주리가 말없이 포개어 잡는다. 두 사람의 두 눈에선 꿀이 뚝뚝 떨어지고, 해율은 주리를 놀려준다는 심산으로 그 이상의 어떤 스킨십도 시도하지 않는다. 본인 입으로 굶주린 여자처럼 보이기 싫어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아끼는 듯한 주리. 그런 주리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입 꼬리가 씰룩이며 미소를 머금는 해율.
“힘들죠?”
“.......”
“그러니까, 그런 생각과 마음이 드는 건 절대로 잘못된 게 아니에요. 자연스러운 거라고요. 알았어요? 앞으로 또 그럴 거예요? 안 그럴 거예요?”
“아니, 난... 내가 너무 밝히는 여자처럼 보일까봐... 힝...”
조금은 억울하다는 듯 투정스런 모습을 보이는 주리를 빤히 보던 해율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두 몸을 가까이 해 주리를 품안에 넣고 한참을 꽉 안는다. 그리고 조금 거리를 두고, 이마에서부터 차근차근 입을 맞춰 내려간다. 맞닿은 서로의 입술로 사랑을 확인해 나간다.
* * * * *
[1년 후.]
해율과 주리는 1년 전보다 훨씬 편해진 모습이다. 적당한 긴장감과 어색함을 함께하던 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한껏 차려입은 주리가 핸드백에 들어있던 휴대폰을 꺼내 해율에게 전화를 건다. 경영수업이 어느 정도 막바지인 해율은 본격적으로 부서가 배정이 되고, 실무숙지에 들어가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 와중에도 주리의 전화는 꼬박꼬박 받고, 연락해오는 해율이다.
“쟈기~”
“웅, 쟈기잉~ 이 시간에 전화를 다하고? 안 바빠?”
“나, 연차 내고 혜주랑 여행 갔다 온다고 했잖아. 그게 오늘이야.”
“그럼, 우리 얼마동안 못 보는 거야?”
“음... 이틀정도?”
“나 쟈기 있는데 업무 끝나면 따라가도 돼? 기태형이랑 같이. 어때?”
“이번엔 혜주랑 오랜만에 가는 여행이라, 둘이 추억 만들고 갈게. 보고싶어도 쪼끔만 참고, 열심히 업무숙지하면서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서울 가자마자 쟈기 만나로 갈게.”
“히잉... 알았어. 보고 싶겠지만 참아볼게.”
“사랑해, 쟈기.”
“내가 더더 많이많이많이 사랑해 쟈기.”
통화를 본의 아니게 듣고 있던 혜주가, 주리가 통화를 끊자마자 손가락을 접어보이며 오글거린다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어느덧 4년차의 연애를 이어가고 있는 혜주는 자신의 휴대폰을 보여주며 연락한통 없는 민대리의 태도를 지적하듯 부러움을 비추고 있다. 그런 혜주에게 조금 미안해진 주리가 혜주의 팔짱을 끼고, 기차시간을 확인하며 걸음을 재촉한다.
* * * * *
실무 숙지를 마치고, 오피스텔로 돌아온 해율은 휴식을 갖고자, 냉장고에서 간단히 씹을 거리와 음료를 챙겨 거실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아서 TV를 켠다. 질겅질겅 마른오징어를 씹으며 리모컨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던 그때였다.
[띵. 동.]
인터폰 모니터를 확인하는 것을 잠시 잊고, 다짜고짜 현관문을 열어젖히다가 마주하고 서 있는 상대를 보고 멈칫 하는 해율. 해율을 마주하고 선 상대는 다름 아닌 한동안 연락 없던 복우리. 해율의 얼굴은 입안에서 씹던 오징어 보다 못하게 우글우글, 구겨진 인상을 짓고 있었다. 안으로 냉큼 들어오려는 우리를 1차적으로 방어했지만, 너무도 익숙하게 다른 곳의 틈을 노려 안으로 들어와 신고 있던 힐을 벗어두고, 집안 이곳저곳을 활보하는 우리.
“복우리! 당장 안 나가?!”
“잠깐, 이 근처에 들렀다가 오빠 생각이 나서 와봤어. 나 없이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네.”
“나가. 안 나가면 경찰 부르는 수밖에 없어. 그래도 그간 만났던 걸 생각해서 좋게 말하는 거니까. 가랄 때 가라.”
“갈 거야. 근데, 싫든 좋든 그래도 집에 온 손님인데 마실 거 한잔 정도는 줄 수 있는 거 아냐? 아니다, 내가 꺼내올게.”
말릴 새도 없이 우리는 주방으로 총총거리며 다가가 냉장실 문을 열고, 마실만한 것을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 이내 오렌지주스를 찾아내어 잔을 찾는 척하며 싱크대 쪽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메고 있던 백안에서 자그마한 가루가 든 종이를 꺼내어 음료가 담긴 잔 하나에 부어넣고, 저을만한 것을 찾다가 젓가락 한 짝을 집어 들어 휘휘 저어 잘 녹도록 한다. 그리고 표정관리를 하며 아무렇지 않게 해율 앞으로 두 잔을 쟁반을 받쳐서 들고 다가와 마주하고 소파에 앉는다.
“마셔.”
“.......”
“사과하고 싶어서 왔어. 내가 그동안 오빠한테 너무 몹쓸 짓 많이 한 것 같아서. 그러니까 너무 벌레 보듯 대하지 좀 마. 나도 이제 더 이상 오빠한테 질척거리지 않을 거야.”
“...사과?”
“그래, 사과. 그동안 내가 했던 일 미안했어. 앞으론 그런일 없을거야. 그러니 나 그만 경계해도 돼.”
좀 전에 가루를 녹여뒀던 음료 잔을 해율에게 권하고, 해율은 우리의 말에 의심 없이 건네든 잔에 담긴 오렌지주스를 들이킨다. 시간이 많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해율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보내고, 침실에서 눈 좀 붙이려고 보내려는데 굳이, 굳이 해율이 침실에 잠드는 거 보고 가겠다며 침대에 해율을 누이는 우리.
잠드는 척을 해서 우리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제대로 잠을 자려던 해율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우리가 언제 가는지 확인도 하지 못한 채로 깊은 잠에 들어버렸다.
우리는 해율이 잠든 것을 눈앞에 손을 휘휘 저어보고 나서야 확신한 표정이다. 그러더니 착한 척, 쿨 한척 코스프레하던 모습은 간데없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내어 속옷차림으로 자연스럽게 해율의 옆에 자리를 잡고 몸을 누인다. 그리고 들고 있던 휴대폰으로 침대 옆 간이탁자 위에 카메라를 켜 타이머를 맞춰두고, 자연스럽게 해율과 몸을 가까이해 은밀한 모습을 담아낸다. 셔터 소리와 함께 여러 차례 시도한 사진들의 결과물을 확인하고, 벗어뒀던 옷들을 챙겨 해율의 집을 빠져나온다.
* * * * *
여행지에 도착해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휴가일정을 알차게 보내고 있을 무렵. 낯선 번호로 익숙한 사람의 얼굴이 담긴 사진이 주리의 휴대폰으로 전송이 된다. 무심결에 알림소리를 듣고, 메시지를 열어보던 주리는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휴대폰 화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주리의 행동이 이상함을 느끼고, 휴대폰을 뺏어든 혜주가 메시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좀 전의 주리의 행동과 동일한 모습을 해 보인다.
“미안, 이런 건 줄 모르고... 괜찮아 봉주리? 이 번호 복우리야?”
“...몰라.”
“정신 차려, 봉주리. 딱 보면 모르겠어? 복우리 짓인 거?”
“.......”
“봉주리... 가자, 안되겠다.”
혜주는 주리의 상태를 보자, 더 이상 여행지에서 휴식을 즐기기엔 글러먹었단 생각이 들어 서울행으로 발길을 돌린다.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주리는 넋을 놓고, 멘탈이 가출한 상태를 유지했다. 혜주도 더는 주리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나란히 함께 걸을 뿐이었다.
정신을 차린 해율이 주리에게 몇 차례 전화를 걸어오고, 톡을 보내왔지만 주리는 그것을 확인할 여유가 없는 듯 했다. 그렇다고 혜주가 그것을 대신 받아주기에도 상황이 아닌 것 같아 그대로 둔다. 모든 기운이 싹 빨려나간 것처럼 주리는 침대에 옷을 널 듯 자신의 몸을 얹었고, 혜주는 주리의 감정 상태를 살피며 씻고 나와 잘 준비를 했다.
‘1년 만에 내 연애는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