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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의 부활로 인류 역사의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 창조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미 죽었던 신자들은 더 이상 병들지도 죽지도 않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여 살아 있던 신자들도 부활한 몸처럼 영광스럽게 변화된다. 신자들의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와 더불어 새 창조에 속하는 것으로 인류에게 가장 큰 소망과 기쁨을 주는 복된 사건이다.
1. 예수님의 부활의 몸의 특징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이 ‘부활’은 죽었다가 일시적으로 살아나는 것과는 다르다. 공생에 기간 예수님은 나인 성 과부의 아들 아이로의 열 두 살 된 딸, 나사로 등 죽었던 사람들을 다시 살리셨다. 예수님을 통해 죽었던 이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 것은 ‘소생’이라 말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기 이전 상태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전혀 다른 차원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이 땅에서는 예수님 말고는 이런 부활을 경험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2.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역사와 공간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럼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증거는 뭘까?
첫째, 증인의 직접적인 증거 둘째, 물적 증거 셋째, 간접적 정황의 증거
1) 직접적 증거 : 증인들
예수님의 부활은 수많은 증인들의 직접적인 증거가 많다. 신약 성경에는 열한 번 정도 기록되어 있다.(시간적 순서로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님은 예루살렘 근처에서 부활 주일 아침 최초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요20:11-18)
둘째, 예수님은 부활 주일 아침 다른 여인들에게도 나타나셨다.(마 28:8-10)
셋째, 예수님은 부활 주일 아침 정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인 글로바와 그의 친구에게 나타나셨다.(눅 24:13-35)
넷째, 예수님은 부활 주일 오후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눅24:24)
다섯째, 예수님은 부활 주일 저녁 도마가 없던 상태의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눅24:36-43, 요20:19-23)
여섯째, 예수님은 부활 주일 그다음 주일에 도마를 포함한 열두 제자에게 두 번째 나타나셨다.(요20:24-29)
일곱째,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 디베랴 호수에서, 열두 제자 중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셨다.(요21:14)
여덟째,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의 한 산에서 오백 명에게 나타나셨다.(마 28:16-20)
아홉째,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예수님의 육신적인 동생, 야고보에게 나타나셨다.(고전15:7)
열째, 예수님은 예루살렘 감람산에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후 승천하셨다.(고전 15:7, 막16:15-20, 눅24:44-53, 행1:6-11)
열한째, 예수님은 다메섹 도상으로 가던 사울에게 나타나셨다.(행9장, 22장, 26장, 고전15:8)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그거 다 환각 상태에서 본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환각성은 잘못된 주장임이 금방 드러난다.
첫째, 환각성은 특정한 타임의 사람들만 사로잡힐 수 있다.
(베드로, 의심 많은 도마, 지적인 바울 같은 사람들이 모두 환각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둘째, 환각은 개별적으로 잇을 때 일어난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여러 사람, 심지어 오백 명이 있을 때 일어났다.
셋째, 환각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만 일어난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본 것은 시간적으로 아침, 정오, 오후, 저녁, 그리고 공간적으로 해변, 길, 들, 다락방이었다.
넷째, 환각은 반복해서 일어나는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을 본 것은 단 6주 동안이었다.(그후 승천하셨다.)
다섯째, 환각 상태에서는 먹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두 번이나 식사를 했다.
여섯째, 환각 상태에서는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런데 열 한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40일 동안 때때로 대화를 나누었다.
일곱째, 환각 상태에서는 물질적인 접촉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지기도 했다.(마28:9, 눅24:39, 요20:27)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런 많은 증인의 증언들처럼 실제로 부활하신 것이다.
2) 물적 증거 : 빈 무덤
예수님의 빈 무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물적 증거이다. 시간이 지나면 시체가 썩어 흙이 되므로 모든 무덤은 다 비게 마련이다. 그럼 왜 빈 무덤이 부활의 증거가 되나?
시신이 썩은 것이 아니라 시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곳에서 예수님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면 부활은 거짓말, 사기극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당시 로마의 당국자나 유대 당국자들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제자들의 주장에 대해 부활을 반박할 증거인 시신을 내놓을 수 없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시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떻게 부활절 아침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었던 것일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쳤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주장을 ‘도둑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도둑설’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첫째,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치는 것을 불가능했다. 무덤은 봉해져 있었고, 큰 돌이 입구를 막고 있었으며, 파수꾼이 지키고 있었다.
둘째, 로마 군인들은 보통 열여섯 명이 한 조가 되어 파수했다. 그런데 로마 군인들이 동시에 잠들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셋째, 만일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쳤다면, 당국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시신 도굴범으로 처벌했을 텐데, 그들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넷째, 제자들이 시신을 훔쳤다면, 그들의 소행은 참으로 서툴렀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무덤 속에는 시신을 싼 세마포와 수건이 그래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훔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부활절 아침 제자들은 다 예루살렘 밖으로 도망쳐 있었고, 베드로와 요한만이 예루살렘에 있었다.
여섯째,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훔칠 만한 동기가 없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도 요한을 빼고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다 순교를 당했다. 어떤 바보가 자신이 훔치고 나서 부활했다고 말하면서 그것 때문에 목숨을 걸까?
일곱째,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 지도자의 무덤을 숭배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무덤을 숭배한 적이 없다.
여덟째, 만일 제자들이 훔치고 나서 부활에 대한 소문을 거짓과 사기로 전했다면, 이것은 인류 최대의 사기 사건인 동시에, 수십억의 사람들이 사기당한 종교를 믿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결정적인 물적 증거가 됩니다.
3) 정확적 증거
비록 어떤 사건에 대한 분명한 증인들도 없고, 물적 증거가 없다 할지라도 정황적인 증거를 통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부활 이전의 예수님의 말과 행동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전에 자신이 부활할 것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성전을 헐라 삼일 만에 다시 세우리라’)
둘째,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체포와 십자가 죽음으로 모두 두려워 떨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하고 숨어 버렸다. 그런데 제자들이 갑자기 사자처럼 용감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다가 투옥되고 순교까지 당했다.
셋째, 회의주의자 야고보(예수님의 친동생)와 바울의 변화이다.
넷째, 예수님의 부활 이후 기독교의 출현으로 유대 사회에 생각 변화이다. 개인이 몇 십 년 동안 고수하던 생각과 습관을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사회가 수백 년, 수천 년 믿어 온 신념이나 제도를 바꾼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있어야만 한다. 유대인들의 사회는 동물로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유대인이 되는 조건으로 생각했으며, 토요일 안식일을 지켰다.
이것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이후에 1,500년 이상 내려오는 전통이요 관습이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유대인들은 더 이상 동물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특별히 안식일을 토요일에서 주일로 바꾸어 예배를 드렸다.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없이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변화이다.
다섯째,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예식은 세례와 성찬이라는 점이다. 세례와 성찬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무의미한 예식이다.
세례식 -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자신을 연합시킨다는 의미의 예식
성찬식 -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적인 임재를 상징하면서 식사하는 의식
기독교의 중요한 두 예식이 모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간접적인 증거이다.
여섯째, 기독교 교회의 출현이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부활을 전하는 종교이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사기였다면, 어떻게 지금까지 수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2,000년 동안 지속되어 오고 있으며, 지금 전 세계의 1/3이 믿고 있는 종교가 된 것일까? 기독교의 출현과 기독교의 지속적인 존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이다.
3.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신학적 의미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예수님이 부활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1)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종말론적 의미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 역사의 새 시대를 열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부활의 아침은 죄로 말미암은 죽음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새 하늘과 새 땅, 새 창조의 아침이 시작된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다.
구약 성경에서 부활은 ‘종말’과 ‘새 창조’와 관련 있다.(단 12:1-2 -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이 시대에 끝은 곧 오는 시대의 시작이며, 옛 세상의 끝은 곧 새 세상의 시작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다음과 같이 부활의 첫 열매라고 부른다.(고전 15:20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23-24절을 통해 새 창조의 부활에도 순서가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고전15:23-24 -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이 첫 열매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초실절 절기와 관계있다. 초실절은 유월절 안식일에 보리 추수의 첫 단을 하나님 앞에 흔들어 제물로 바치는 절기이다. 즉 초실절은 보리 추수의 시작이다. 초실절이 보리 추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듯 예수님의 부활은 새 창조 시대의 신호이다.
부활에도 순서가 있다.
제일 먼저 부활하신 분 -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두 번째로 부활하는 자 - 그에게 속해 있는 자들(예수 믿는 사람)
또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고난 받으실 것에 대해서도 열두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새 창조, 새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다.
2)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기독론적 의미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생애를 끝내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유대인의 눈으로 보면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자’라는 율법의 말씀에 따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죄인일 뿐입니다. 또한 로마인의 눈으로 보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은 로마 황제에게 반역죄를 범해 죽은 로마의 반역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은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었으며, 예수님이 하신 모든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즉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킴으로써 예수님이 주장하신 예수님과 신분과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이 사실이며 옳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준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 예수님의 교훈과 기적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최종 증거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4절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 준다.(롬1:4 -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대속적인 죽음이며, 새 언약 체결을 위한 죽음임을 증명해 준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에 대한 예수님의 이런 해석이 옳다는 것을 말해 준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로 예수님의 승귀가 이루어졌다.
그럼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실까? -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다.
그곳에서 무엇을 하실까요? - 날마다 성도들을 다스리시며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승귀는 예수님의 부활이 있음으로만 가능하게 된 것이다.
넷째,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성령님을 성도들에게 보내 주실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신자들의 완전한 구원은 성령님이 신자들에게 오심으로 이루어졌다. 성령님이 오심으로 신자들은 거듭난다. 신자들은 성령님을 통해 새 마음, 새 영을 가지게 되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내용들을 경험한다. 이런 성령 강림은 예수님의 부활로 가능해졌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내 주신 것이다.
다섯째,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이 있을 것을 말해 준다. 예수님은 재림하여 적들을 영원히 멸망시키실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을 위한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3)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교회론적 의미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기독교인들은 거짓말쟁이들이 된다.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헛것이 된다. 신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죄 용서받았다는 믿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장차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이라는 믿음, 부활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고난 받고 핍박을 받더라도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기독교인의 모든 믿음은 헛것이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살아가는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된다.(고전 15:17-19)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 복음 전파와 우리의 죄 사함과 미래 몸의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의 기초가 된다.
첫째,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 복음 전도의 핵심 내용이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믿었던 복음과 같은 것이다.
이 복음의 내용이 무엇일까? (고전15:3-4) 즉 복음의 핵심은 성경대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며, 또한 성경대로 삼 일 만에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 용서를 확신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내 죗값을 위한 대속적인 죽음이라고 믿는 신자들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모두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내 죄의 용서를 위한 죽으심이라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영수증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죄의 종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신자들은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신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산 자가 된 것처럼 이제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종이 되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의 정복과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했음을 보여 준다. 모든 인간에게 군림하는 최대의 세력은 죽음이다. 이제까지 죽음을 이긴 인간은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정복했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이 종노릇하는 이 땅의 인류에게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무덤 속에 있는 우리 몸도 예수님의 몸처럼 부활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자들의 미래에 대한 최고, 최대의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