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자화상]
렘브란트는 모두 63점이나 되는 자화상을 남겼다. 20대에서 60대까지 줄줄이 이어지는 자화상들을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왜 자기 모습에 저 정도로 집착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하지만 헨리 나우엔은 달리 말한다.
“렘브란트는 인간 내면의 신비를 꿰뚫어 보고 싶으면 빛이 드는 안방은 물론 음침한 지하실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자아를 파고 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이 거장은 비참한 존재에 몰린 자신을 인식하고 ‘용기와 새로운 젊음’을 발견할 수 있는 인간 경험의 고갱이를 건드릴 줄 알게 되었다. 병적이리만치 자신에게 집착하는 자세가 아니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는 이들을 섬기는 심정으로, 끊임없이 자화상을 그리고 또 그리지 않는 한 누군가를 진정으로 돌보는 것은 불가능하다.”(헨리 나우엔, 『나이 든다는 것』, 최종훈 옮김, 포이에마, 2014, 112쪽)
나이가 들수록 걱정이 많아지고 쉽게 노여움을 타고 외로움을 많이 느끼고 죽음이 점점 두려워지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늙음에 꼭 어두운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렘브란트에게는 인생의 깊이를 깨닫는 계기가 되어 그의 정신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는 이들을 섬기는 심정으로’ 자신을 성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역시 인간 이해의 폭이 뛰어난 영성가여서인지 나우엔이 렘브란트를 보는 시각은 남다르다.
마태 5-7장의 산상설교는 하느님 나라의 윤리들을 제시한다. 그 가르침에 따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는”(7,13) 도무지 다른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인다. 눈을 빼거나 손을 자르거나 왼편 뺨도 대 주거나 오리를 더 가주거나 내 눈에 들보를 빼거나 재물을 하늘에 쌓거나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여 자선을 숨기고 단식도 숨기고 기도도 숨겨야 한다. 심지어 자식을 죽인 원수까지 사랑하란다. 그러니 어디 숨이나 쉬고 살겠는가. 산상설교의 예수님은 자비심이라곤 한 치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8-9장이 남아있다.
복음서작가 마태오는 정리계의 대가답게 예수님의 기적사화들을 8-9장에 일목요연하게 늘어놓았다. 본디 기적사화라는 것이 그레코-로만 시대의 문학양식으로, 당시는 기적을 으레 있는 일로 받아들였기에 문학양식까지 출현했다. 오늘날 남미 어디인가에서 어느 남성이 하루 만에 나무를 말라죽게 만들었다는 보도가 나왔다고 해보자. 그러면 다들 생각할 것이다. 무엇인가 속임수가 있는지 우선 자세히 살펴봐야 하고, 만일 사실이라면 어떤 과학적인 설명을 해야 할지 따져봐야 한다. 그러나 2천년 세계는 달랐다. 그 시절엔 기적의 진위 여부를 따지기보다 이 기적을 통해 신이 무엇을 말하려는 지에 관심이 있었다. 따라서 누군가 나무를 삽시간에 말라죽였다면 우선 두려워할 테고 혹시 기근의 징조가 아닌지 걱정했을 것이다.
마태 8-9장에는 많은 기적사화들이 등장한다. 나병환자와 백인대장의 하인과 중풍 병자와 하혈 병을 앓던 여자와 벙어리와 소경을 고친 치유기적사화, 풍랑을 잠잠케 한 자연기적사화, 귀신들린 사람을 고친 구마驅魔기적사화, 죽은 사람을 살린 소생蘇生기적사화 등등. 이렇게 많은 기적이야기들을 한 곳에 정렬하려면 당연히 원칙이 필요했을 것이다. 기적모음집 전체를 관통하는 편집사상의 필요성이다. 사실 기적사화들을 가능한 한 많이 모아 단순히 나열만 한다면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마태오는 기적모음집 속에 8,14-17과 9,35-38, 두 개의 요약문을 실어놓았다. 첫 번째 요약문에서는 예수님이 많은 이들을 고쳐준 일을 두고,
마태 8,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이사 53,4)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 된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 온 유다를 두루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를 고쳐주었다는 사실을 정리한 두 번째 요약문에서는,
마태 9,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같이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의 것은 ‘성취인용문’으로 마태오가 만들어 넣은 구문이고, 뒤의 것은 원래 마르 6,34에 나오는 말씀의 위치를 변경해 여기에 실었다. 그러니까 둘 다 마태오의 편집 작업인 셈이다.
요약문에 따르면 예수님이 기적을 베푼 이유는 단 하나다. “군중을 보시고 불쌍하게 여겨서”인데,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스플랑크니조마이)는 원래 하느님에게만 적용되는 동사이고, 군중을 목자 없는 양으로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심성을 공유한 분이라는 증거다. 예수님이 행한 모든 기적은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신 그분께서 우리를 목자 없는 양떼처럼 불쌍히 여기신 까닭이다. 마태오의 편집 작업을 통해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하느님 나라의 윤리를 담은 산상설교의 결론은 황금률이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는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7,12) 그러므로 우리는 이기심을 떨쳐내고 오직 예수님의 명령대로 따라야 한다. 5-6장의 실천 강령들을 고려할 때 그 준엄함이 추상같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8-9장의 기적모음집에서는 색이 확 달라져, 인간의 나약함을 아시고 부드럽게 감싸주는 예수님의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
렘브란트의 자화상들을 하나하나 관찰하면 무엇인가 서글픈 느낌이 든다. 젊은 날의 그 잘생기고 패기 넘치던 모습이 슬금슬금 사라지더니 막판에는 거울 앞에서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초라한 늙은이만 보일 뿐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자신감이 어느덧 만사에 소극적인 자세로 바뀌고 만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그려왔던 자화상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동시에 바라보면서, 노년의 렘브란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우엔은 렘브란트가 단순히 ‘표현법을 연마하는 모델’로서가 아니라 ‘가장 내밀한 인성을 통해 영적인 것을 탐색하는 수단’으로 자신을 그렸다고 한다. 복음서작가 마태오도 분명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었다(정리습관을 보시라!). 그는 평생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면서 자신의 신앙을 꾸준히 성찰했을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말년에 공동체로부터 부탁을 받았다. “예수님 이야기를 깔끔하게 정리하실 분은 교회 내에 선생님 밖에 없습니다.”
복음서 집필은 마태오에게 일생일대의 도전이었다. 그는 엄격하면서도 자비로운,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비둘기처럼 순하지만 뱀처럼 약은 예수님을 그리고 싶었으며, 평생 다져온 자신의 신앙을 복음서에 투영하길 원했다. 1세기 교회에서 불꽃을 튕기며 부딪치는 극단의 입장들(예를 들어, 갈라 2,11-14)을 통합하는 중도(中道)의 길을 걸어가려 했던 것이다. 정의와 사랑을 하나로 합쳐야 교회가 산다. 여기 중도의 인물 마태오의 자화상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사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