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여기 저기 산재한 정보를 종합하여 인용하여 적어 봅니다.
다음은 새만금일보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안악이씨(安岳李氏)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6/08/23 [00:22]
시조 이견 (李堅)은 고려 공민왕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그는 1360년(고려 공민왕 9년) 홍건적이 의주(義州), 정주(定州), 서경(西京) 등지에 침입했을 때 도원사(都元師) 이방실(李芳實)을 도와 개성부사 신부와 함께 상장군으로 출전하여 대승을 거두고 함종(咸從)전투에서 순절, 공신이 되었다.
시조 이견은 경남 의령군 궁류면 지동리 일원재 설단에 봉향중이다.
이견의 아들 이정림(李挺林)이 황해도 안악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세거 하면서 가세를 일으켰다.
이견의 손자이자 이정림의 아들인 이의만(李義萬)이 고려 말에 문하찬성사에 임명되었으나 화를 입고 경상도 창원 지방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쳤으므로 후손들이 창원, 의령, 단성, 함안 등지에 집단 세거하게 되었다.
이몽득은 이성계와 함께 황산전투에 출전, 왜구를 섬멸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몽득은 그러나 최영 장군의 자주노선을 지지했다. 결국 최영 장군이 실각, 처형되자 벼슬을 버리고 평남 숙천에 은거했다. 포은 정몽주도 안악이씨 이영진의 처남으로 안악이씨는 이래저래 반이성계 노선에 서며 박해를 받게 됐다.
3세 이의만(李義萬)도 고려 말에 화를 입어 영남 땅에 유배됨으로써 창원에 세거지를 이루었다.
4세 흥부(興富)는 우왕(禑王) 때 경상도 지병마사에 임명되어 밀성(密城 : 지금의 밀양) 지역에 내침한 왜구를 격퇴시켜 예의판서(禮儀判書)로 승격되었고 그의 동생 흥인(興仁)은 진주만호(晋州萬戶)에 재임 중에 내침한 왜구를 격파하고 전함을 포획하여 왕으로 부터 백미 20석을 하사받았으나「이것이 어찌 나 혼자만의 공이겠느가」하고는 그 쌀로 술을 빚어 병사에 마시게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 임금 자리에 오르자 안악이씨 후손 이계을(李桂乙.판전리사사)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계을은 이흥인의 손자다. 이계을의 아들 이신(안악감무)도 두문동 산기슭에 아버지를 장사지낸 뒤 그 묘 앞에서 따라 자결했다.
이신(첫이름은 양소)은 두문동 72현에 꼽힌다. 뒷날 조선의 세종은 부자의 충절을 기려 이신을 안악군에 추봉하고 그때까지 양산이씨(楊山李氏)로 써오던 관향을 안악(安岳)으로 고쳐 일컫게 했다.
이신의 아들 이구관은 세종의 명으로 명으로 안악군수, 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후에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에 터를 잡아 후손들이 그 지방에 살게 되었다.
(이 카페지기 판단으로는 괴산 거주 후손들이 시조 이진으로 족보를 편찬한 것으로 봅니다)
임진왜란 때 이운장(李雲長)은 의병장으로 정암진에서 왜적을 섬멸하고 전사했다.
이잠(李潛)은 진주성을 사수하다가 왜적과 격전 후 순절했다.
이현우(李鉉祐)는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다 계미년 7월 5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투옥 중 심한 구타에도 물구하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짖다가 을유년 8월15일 출옥했다. 그러나 심한 통증으로 52세로 별세했다.
한말 평양에 주둔했던 무관 이기호의 아들이자 6.25 때 운봉(雲峰)에서 비행기 사고로 순직한 이용문(李龍文) 장군은 안악이씨의 인물이다. 그는 육군정보구장, 수도사단장, 서부지구경비사령관 등을 지내며 과단, 강직한 군인으로 부하들의 존경을 받았다. 해군참모총장을 지냈으며 제3공화국 때 해외에서의 반(反) 박정희정권 활동으로 화제를 일으켰던 이용운 예비역 중장과 법조계의 이건개 법무연수원기획부장 겸 대검검사도 있다. 이용운 중장은 바로 이용문 장군의 형이며, 이건개 검사는 이용문 장군의 아들로 이 중장이 이 검사의 큰아버지가 된다.
현대 인물은 이배석(경남대경영대학원장), 이찬국(국제신용금고감사), 이갑천(대한수퍼마켓사장, 대종회장), 이희억(의학박사, 병원장), 이방치(대한항공연구회장), 이현도(대호산업사장), 이영술(백일제면사장), 이규석(군농협이사), 이병진(산청향교전교), 이관기(풍미제약사장), 이덕제(서부산업상무이사), 이훈경(국문학자), 이화석(대화의원장), 이영석(동명한의원장), 이건종(검사), 이도순(한국상운대표), 이상호(대우개발이사), 이필낙(울산수산조합장), 이후직(용산구청시민국장), 이상건(서울대병원의사), 이기증(구도중감문분교장), 이민희(영월초등교장), 이만희(진주식품공업사 상무이사), 이병수(산청군향교전교), 이영화(새마을본부 성남연수원교수),이용호(이사관, 대종회감사), 이훈경(국문학자, 대종회총무), 이세준(대종회부회장), 이석진(대종회부회장), 이순계(대종회부회장), 이규환(대종회고문), 이규택(대종회고문), 이석만(대종회고문), 이종철(대종회고문), 이문현(대종회고문), 이갑철(대종회총무간사), 이석필(대종회총무), 이녹식(대종회총무), 이석구(대학서무과장, 대종회감사), 이용득(대종회감사), 이명제(동대구상사대표, 대종회종무간사), 이종림(평통자문위원), 이중철(대구조미식품대표), 이영호(연지회관대표), 이대호(태화토건대표, 대종회종무위원), 이하원(영풍전무이사, 대종회종무위원), 이규철(음성요식협회장, 대종회종무위원), 이근식(쌍패초교장), 이영이(고양여중교감), 이근명(초등교장), 이화석(의학박사, 대화의원장) 씨 등이다. (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됨)
주요파는
군수공당한파(郡守公唐漢派),
무당공이수파(無憂堂公耳壽派),
죽림공운기파(竹林公雲起派),
죽헌공운장파(竹憲公雲長派),
진사공욱파(進士公郁派),
진사공침파(進士公沈派),
참봉공기파(參奉公奇派),
참봉공운행파(參奉公雲行派),
참봉공팽령파(參奉公彭齡派),
참봉공해파(參奉公瀣派),
참의공잠파(參議公潛派),
첨정공송령파(僉正公松齡派),
학생공맹파(學生公孟派),
학생공억정파(學生公億楨派),
학생공운승파(學生公雲勝派),
학생공응벽파(學生公應壁派),
학생공의파(學生公誼派),
호당공희순파(湖堂公希舜派) 등이다.
본관 안악(安岳)은 황해도에 위치하는 지역으로 고구려 때에는 양악군(楊岳郡)이라 했고 신라 때에는 장구진(長口鎭)에 속하였다. 고려 초에 안악으로 개칭되어 1018년(현종 9) 풍주(豊州)에 편입되었다가 1106년(예종 1) 감무를 두었다. 1348년(충목왕 4)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589년(선조 22)에 잠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08년(선조 41)에 다시 군이 되었다. 8?15해방 당시에는 안악읍?대원면?용순면?은흥면?대행면?서하면?안곡면?용문면?문산면 등 1개 읍 8개 면 113개 리였다. 북한은 1952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안악군의 일부를 은천군으로 분리시켰고, 신천군의 일부를 넘겨받아 안악군의 영역을 조정하였다. 1954년에 재령군의 신환포리 일부가 덕성리로 편입되었고, 남정리 일부를 평정리로, 구와리 일부를 복사리로, 대추리 일부를 굴산리로, 노암리 일부를 한월리로 각각 편입시켰다. 1974년 에는 유설리 일부를 덕성리와 노암리에 편입시키고 나머지 유설리는 오국리와 통합시킨 후 유설리는 폐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북한의 행정구역상 황해남도 안악군이다.
집성촌은
경남 의령군 궁류면 다현리,
경남 고성군 개천면 좌연리,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
경남 산청군 오부면 오전리,
경남 의령군 칠곡면 산남리
충북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 등이다.
특히 3세 이의만의 후손은 670여 년 동안을 경남 의령군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조선시대에 모두 29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문과 5명, 무과 11명, 사마시 12명, 역과 1명 등이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안악이씨는 1985년에는 총 1,980가구 7,973명, 2000년에는 총 2,961가구 9,507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1천여 가구, 2천여 명이 늘어났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1387명, 부산 1733명, 대구 438명, 인천 184명, 경기 464명, 강원 169명, 충북 429명, 충남 87명, 전북 40명, 전남 78명, 경북 265명, 경남 2691명, 제주 8명이다. 경남, 부산, 서울 지역에 많았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1,451명, 부산 1,845명, 대구 607명, 인천 248명, 광주 17명, 대전 103명, 울산 336명, 경기 1,118명, 강원 199명, 충북 478명, 충남 113명, 전북 60명, 전남 48명, 경북 264명, 경남 2,606명, 제주 14명이다. 경남, 부산, 서울, 경기 지역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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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카페지기(참고로 저는 견의 23세손ㅡ 판서공8세손통정대부공예복파ㅡ관직이름 생략하고 줄여서 에복파)의 의견과 족보를 편찬하신 22세손 작고하신 고 이찬수 님의 의견을 정리한 것입니다.
(의만의 차남인 흥인ㅡ흥인의 차남인 호의 관직이 판서이고, 호의 8세손이 예복이어서 이렇게 칭함)
경남 의령군 궁류면 다현리 지동(절골)에서 작고하신 22세손 이찬수님께서 시조 이견 할아버지 제실을 관리를 하셨습니다.
지동 입구 안쪽으로 들어가면 一原濟(일원제)라는 제실이 있습니다.
이찬수님께서 편찬하신 족보에 보면 연락처가 나와 있고, 제실과 시조 이견 할아버지의 세적비를 관리하셨으며, 몇년전에 일원제는 문화재 등록 업무를 진행중 이찬수님에게 들었습니다.
약 10여년전? 충북 괴산에서 이진을 시조로 하는 족보가 제작되어 전국에 있는 안악이씨들이 과연 이진(한무제 시절 인물)인지 이견(고려시대 인물) 할아버지가 시조인지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왕족을 제외하고는 고려 태조 왕건이 개국 공신들에게 성을 하사하였고 합니다. 이때 하사받은 또는 기록이 명확한 그분을 중시조로 하여 시조로 하고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광주이씨 대종회 카페 참조)
그리하여 고려사부터 기록이 분명한 이견 할아버지를 시조로 하기로 합천군 삼가면 두모리 거주(의령군 용동ㅡ용동파, 또는의령군 칠곡면 삼남리에서 이주한 후손으로 의만의 차남 흥인의 후손)하였던 23세손들은 이견 할아버지를 시조로 하기로 몇년전에 결정하였습니다.
그 이유중 가장 큰 하나는 기록이 분명하고, 이견ㅡ정림ㅡ의만ㅡ의만의 장자 흥부ㅡ의 장자 설 할아버지 후손들이 의령군 궁유면 다현리 지동에서 족보를 편찬하신 22세손 이찬수(작고)님께서 이견 할아버지를 시조로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의만의 장자 흥부의 후손은
의령군 궁유면 다현리에서,
이의만의 차남 흥인의 후손은
의령군 칠곡면 산남리에서
또는 구전에 의하면 의령군 용동ㅡ이찬수님 족보에 의하면 용동파ㅡ후손들이 살아왔습니다.
(세계표 하단 참조)
충북 괴산에서 작성한 족보(시조 이진)가 전국에 많이 보급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찬수님께서 이를 아시고 몇년전 살아 계실때 마지막 족보를 편찬하시면서조상을 욕되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시조 이견의 족보로는 이찬수님이 제작한 것이 마지막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후세분들은
어쩌면 이진을 시조로 할지도 모릅니다.
판단은 각자의 몫으로ㅡㅡㅡㅡ
다음은 세계표의 출처입니다.
세계표 세번째는 참의공 8세손 통정인춘파에서
작성한 것입니다.ㅡ이 세계표에 의하여 "파"를 구분하여 칭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파"는 조상중에 판서 등 관직이름을 붙여서 대부분 칭하고 있습니다.
세계표 두번째는 카페지기가 작성한 것이고
세계표 첫번째는
청남 권영한님 홈페이지입니다 http://me2.do/xi6gso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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