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한국의 고구마 전래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고구마를 처음으로 본 사람은 신유한이었다. 그는 1719년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가 막부의 쇼군직을 승계하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통신사 일행으
로서 일본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 때 그는 교토의 산죠바시(三條橋)를 지나 十里를 거쳐 작
은 고갯길을 넘어갈 때 길가에 주점들이 널어 서있고, 그 가게에서 놓고 파는 물건 가운데
술, 떡, 차 그리고 고구마가 들어 있었다. 신유한은 고구마를 「소우(焼芋)」라고 표기했다. 그
가 ‘소우’라 한 것은 「야키이모」, 즉, 군고구마를 일컫는 말이다. 다시 말하여 신유한이 갔었
던 18세기 초반 이미 교토에서는 고구마를 구워서 상품으로 길에서 팔고 있었던 것이다. 신
유한의 일행이 군고구마를 먹었는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이 이것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았는지에 대해서도 그 이상의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
는 것은 신유한의 일행이 고구마를 우리에게 전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
로 고구마를 본 사람임에는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고구마는 오쿠라가 주장한 것처럼 북방의 중국에서 전래된 것일까? 그의 이론에
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구마의 명칭문제이다. 즉, 1930년
대 우리나라 방언을 통한 고구마의 명칭을 살펴보면 전라남북도의 대부분 지방과 경남, 충남
등지에서는 고구마를 고구마라 하지 않고 오로지 감자라고만 하고 있는데, 그 어원은 물론
중국의 감저에 있으며, 그것은 일본에서 고구마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조선에 실물과 함께 전
래된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 재배 지역이 상당히 넓게 퍼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7)
이러한 해석에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조엄이 일본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전
하기 이전에도 고구마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 고구마의 도입과 재배에 힘을 썼던 이광
려(李匡呂: 1720-1783)의 행적에서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의 대표적인 양명학
자인 정제두(鄭齊斗)의 학문을 이어받은 강화학파(江華學派)의 일원으로 일찍이 민생구제에
눈을 뜬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가 중국 명나라 말기의 정치가이자 학자이었던 서광계(徐光啓:
1562-1633)가 쓴 농정전서(農政全書) 를 읽고 구황작물로서 고구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
다. 중국의 서광계는 고구마에 대한 효능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감서소(甘薯疏)」를 써서 황
제에게 올려 재배를 권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저서 농정전서 의 수부(樹藝), 나부(蘿部)
라는 장절의 한 개 절을 모두 고구마에 대해 썼던 것이다. 아마도 이광려가 읽었다는 고구마
의 기사는 바로 이 부분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광려는 농정전서 를 통하여 고구마에 대한 지식을 얻고 고구마를 “번저 또는 감저라고
부르며 중국 양자강 일대와 복건성(福建省), 광동성(廣東省) 등지에서 재배되고 있고, 중국과
일본에 가면 현재도 구할 수 있다. 이를 우리나라에도 재배한다면 풍흉을 가릴 것 없이 백성
들을 충분히 먹일 수 있을 것이다.”8) 하고는 “백성들의 기아를 면하게 하고, 도적을 그치게
하며, 백폐를 모두 해소할 수 있는 방도는 바로 감저(고구마)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확신
7) 小倉進平, 앞의 책, p.218.
8) 이광려(1991) 李參奉集(1805年), 강권열, 「우리나라의 고농서 -특수작물 도입연대 고증을 중심으로
-」 경상대논문집(30)<生農系編> 경상대, p.112에서 재인용.
540 동북아문화연구 제23집 (2010)
하며, 홍수와 가뭄, 풍년과 흉년의 근심을 모두 없애줄 수 있는 감저의 실용성이야말로 천하
의 기이한 보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광려는 고구마가 조선에도 도입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러한 흔적이 그가 1762년에 쓴 군방보 에서 찾을 수 있다. 그에 관련된 부분을 소
개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 감저종자를 우리나라에 들여오게 된다면 해마다 풍흉에 양식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바,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 가운데 먼저 식량걱정을 없게 만든다면 이는 나라의 반을 이미 다스
렸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감저를 심어 수확만 할 수 있다면 풍년에는 물론이요, 흉년
에도 이것으로 백성들의 유망과 굶어죽는 일을 면하게 할 수 있는 바, 자나깨나 국정을 보살피
는 분들이 어찌 이 일을 머뭇거릴 이유가 있겠는가? 내가 이 문제를 가지고 설득한 지 여러 해
되었는데, 마침 하씨가 지은 번서송(番薯訟) 이라는 글을 보고서는 더욱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9)
여기에서 보듯이 그가 얼마나 고구마를 구황작물로서 매력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가 있
다. 그러한 마음으로 고구마의 도입에 관해 조정에 여러 번 권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글에 등장하는 하씨란 명나라의 하교원(何喬遠)을 말한다.10) 그렇다면 조선의 선비 이광
려는 서광계와 하교원 등의 중국 명나라 사람들의 저서를 통하여 고구마가 복건성 지역에 전
래되어 구황작물로서의 역할과 효능을 크게 하고 있었던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
다.
고구마가 중국전역에 퍼진 것은 복건성이 큰 기근을 만난 후부터였다. 대략 1597년(萬曆
26), 1598(萬曆 27)에 고구마가 보급된 지 얼마 안되어 수재, 한재, 충재가 한데 덮쳐들어 그
어떤 낟알이든 한 알도 거두지 못했는데 고구마만은 적응력이 강해 강마르고 척박한 산비탈
에서도 여전히 풍작을 이루었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고구마에 의지해 일 년 동안의 재난을
이겨냈다. 고구마를 하찮게 여기고 심지 않은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견디기 어려운 기
근의 고통은 사람들에게 고구마의 좋은 점을 알게 했다. 그리하여 복건성 사람들은 고구마를
‘구명 고구마’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고구마 재배를 더욱 중시하게 되었으며 해마다 집집마다
적잖은 수량의 고구마를 심어 재난에 대처할 식품으로 비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광려가 읽
은 번서송 의 저자 하교원은 바로 이 지역의 복건성 출신 선비이었던 것이다.11)
이같이 고구마에 대한 상당한 지식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이광려는 관리에게 부탁하여도 들
어지지 않자 이제는 자신이 직접 고구마 종자를 중국으로부터 도입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리하여 두 차례나 연행사들을 수행하는 역관을 통해 종자를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고구마
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역관들은 고구마를 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만지지도 못한 채 돌아오고 만다. 이같이 손에 넣지 못해 애를 태우던 그에게 어느
날 반가운 소식이 날아든다. 그의 인척인 1762년 당시 호조판서인 서지수(徐志修: 1714-1768)
가 연행사로 북경에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서지수에게 고구마에 대해 피력한 서광계의
9) 오수경, 앞의 논문 p.14에서 재인용.
10) 오수경, 앞의 논문, p.15.
11) 박덕규(2008) 중국 역사 이야기(4) 합본 일송북, p.381.
조선통신사와 고구마의 전래 541
서적 내용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내어 고구마의 도입을 부탁했다.
감저(고구마)는 본래 해외의 산물인데 근래에 중국 땅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 식물은 아주 손
쉽게 자라고 종자는 적게 들면서도 수확량은 많은 물건입니다. 그리고 농사에 방해되지도 않고
가뭄이나 황충(蝗蟲)의 피해도 전혀 받지도 않으며, 그 맛 또한 오곡과 같으면서도 그 공용은
배나 됩니다. 그러므로 풍흉을 아울러 구제할 수 있는 바, 이는 바로 천하의 지극한 보물입니
다.12)
이러한 부탁을 받은 서지수는 드디어 고구마 종자를 얻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가지고 오는
도중에 관리를 잘못하여 그만 종자가 죽고 만다. 학수고대하던 종자의 도입이 실패로 끝나버
리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실망하지 않고 그는 고구마가 남쪽지역의 산물인 점을 감
안하여 그것이 일본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마침 1763년 친구의 아들이 통신사의 수행원으
로 일본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다시 고구마의 종자를 구하여 오도록 부탁하는 한
편, 혹시 그것이 부산지역에 들어와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그의 문하생 강계현을 동래로 보
내어 종자를 직접 구해보도록 했다. 강계현은 그해 4월 길을 떠나 동래에 도착하였을 때 마
침 조엄이 일본 대마도에서 구입한 고구마가 도착해 있었다. 그는 이를 밀양부사의 도움을
받아 그 중 하나를 구해 목궤에 담아 이광려의 집으로 가지고 갔으며, 이를 자신의 집 앞 마
당에 심어 재배에 성공을 거둔다. 강계현을 통해 고구마를 얻는 심정을 그는 다음과 같이 시
로 담아서 표현했다.
만력 시절 고구마가 민의 땅에 들어온 뒤
오늘날 중국에서는 굶는 사람 거의 없네
천리길 떠나가서 남쪽 해안 뒤진 이는
쉰살 먹은 외톨이 강영감 한사람 뿐이라네
萬曆番茹始閩, 如令天下少饑人, 寸根千里窮南海, 五十姜翁只一身13)
이처럼 고구마의 도입과 재배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이광려의 행적에서 보듯이 우리나
라에 있어서 고구마에 대한 지식정보는 중국으로부터 얻었고, 또 그곳으로부터 수입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또 실제로 가지고 온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면만 본다면 고구마는 오쿠라 신
페이의 주장대로 일본보다 중국에서 먼저 전해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이 운반도중
관리소홀로 고사하여 실패로 끝나버렸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 진정한 전래라 할 수
없다. 고구마의 정식 전래는 통신사행으로 갔던 조엄이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발견하고, 그 효
용성을 깨달은 그가 즉시 대마도인들로부터 구입하여 동래로 보낸 것에서 출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마는 오쿠라가 추정한 바와 같이 북방전래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
렇다고 해서 고구마에 대한 지식마저 일본에서 들어온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광려의 예에서
12) 오수경, 앞의 논문 p.15에서 재인용.
13) 이광려(2007) 「贈姜生啓賢」, 이현일 「이광려의 실심실학과 경세학」 민족문화사연구(35) 민족문화
사학회, p.107에서 재인용.
542 동북아문화연구 제23집 (2010)
보듯이 일본보다 중국을 통해 먼저 들어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고구마는 어떻게 한국으로 전래되게 된 것일까? 여기에는 앞에서 잠시 언
급한 조엄(1719-1777)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1763년 통신사의 정사로서 일본으로 갔을
때 대마도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해 10월 그는 대마도의 사수나포(左須奈浦)에 도착했을 때
고구마를 보고 수 말을 부산진에 보내어 재배하게 하였다. 그가 급하게 보낸 것은 자신이 사
행을 마치고 귀국하면 파종시기를 놓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다음 봄에 파종하기 위해서
그가 다음 기항지인 大浦로 가기 전에 서둘러 고구마의 종자를 부산으로 보냈던 것이다.
조엄으로부터 종자를 받은 부산진 첨사 이응혁은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가 다음 해(1764년)
봄 절영도 조도 맞은 편 야산에 재배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고구마 재배이었다. 현재
영도구 청학동 해안이다. 그곳을 지역민들은 ‘조내기’라고 불렀다. 그 어원은 고구마를 캐내는
곳이라는 의미라는 설도 있다.
그 때 같이 갔던 성대중, 김인겸 등도 고구마에 대해 관심이 높았다. 가령 김인겸의 일동
장유가 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도중이 토박하여 생리가 가난하니 효자토란(고구마) 심어두고 그것으로 구황한다 하기에 쌀
3되 보내어서 사다가 쪄 먹어보니 모양은 하수오(何首烏), 그 맛이 극히 좋다. 마같이 무른데,
달기는 더 낫도다. 어서 내어다가 우리나라에 심어두고 가난한 백성들을 흉년에 먹게 하면 진실
로 좋을 것 같다 만은 취종(取種)을 어이하리.14)
이처럼 김인겸은 쌀을 주고 고구마를 사서 먹어보고, 그것을 우리나라로 가져가 퍼뜨려 흉
년에 구황작물로서 사용하면 좋겠다고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종자를 적극적으
로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우리나라에 가져가 전파하고 싶지만, 종자를 어떻
게 구해야 할지 망설이고만 있었다. 이 때 조엄과 김인겸 등과 같이 있었던 남옥과 원중거도
고구마를 보았다. 남옥은 제술관 자격으로, 원중거는 그는 서기자격으로 따라 나선 것이었다.
남옥은 조엄과 같이 좌수포에서 고구마를 보고서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감저(고구마)를 얻어서 먹었다. 마와 비슷하나 그보다 짧고 토란에 비해서는 길다. 날로 먹으
면 단맛이 나고 구워 먹으면 더욱 맛이 있다. 찐 밤이나 찐 마와 다름이 없어서 요기하기에 딱
좋으나 많이 먹으면 사람을 취하게 한다. 자갈땅에 심기에 알맞다. 덩굴이 뻗는 것은 박이나 오
이와 비슷하다. 대마주에는 산이 많아서 곡식 심기에 알맞은 땅이 없다. 그래서 백성들이 이것
을 심어서 굶주림을 면한다, 그 종자는 중국의 남쪽에서 나왔다고 한다.15)
여기에서 보듯이 그는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맛도 보았다. 그리고 산이 많고 거친 자갈
땅에 심기에 알맞은 것도 알았고, 또 그것이 구황작물로서 효능이 있다는 것도 파악했다. 그
러나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어서 그가 이를 도입하려고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14) 김인겸(1981) 일동장유가 <이민수역> 탐구신서, p.111.
15) 남옥(2006) 일관기 -붓끝으로 부사산 바람을 가르다 <김보경 역, 이혜순 감수> 소명출판,
pp.229-230.
조선통신사와 고구마의 전래 543
이에 비해 원중거는 대마도의 도요사키(豊崎)에서 고구마를 보았다. 그리고는 그것에 대해
관심이 높았는지 일본인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부분에 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
했다.
풍기 아래 언덕 위 남향인 곳에 빈 장막이 수십 개가 있기에 왜인에게 물어보았더니, 왜인들
이 “고구마의 종자를 보관해 두는 곳입니다. 대개 고구마는 성질이 쉽게 얼고 습기를 싫어하며
더욱 화기(火氣)를 특히 꺼리기 때문에 따로 이처럼 장막을 설치해 땅을 파고 저장합니다. 날이
추우면 깊이 저장하여 두껍게 덮어서 얼지 않도록 하고, 조금 따뜻해지면 문을 열어서 바람이
통하게 하고, 많이 따뜻하면 싸놓은 것을 열어 햇볕이 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루 안에도 혹은
서너 번이나 바꾸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집집마다 각각 저장하지 못합니다. 봄이 되면 반드시
사서 취해 모종을 합니다. 그러므로 종자를 보관하는 사람은 마침내 이익을 내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라고 대답을 하였다.16)
이처럼 일본인들로부터 고구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원중거는 “이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
나라에서 비록 땅에 심는다 하더라도 종자를 오래 전하지는 못할 것이다.”하며 이것을 적극
적으로 도입하여 구황작물로서 이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엄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과감히 그것을 구해 부산으로 급하게 보냈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었다. 그는 그 이듬해 1764년 6월에 사행을 마치고 일본에서 귀국할 때 다시 대
마도에서 고구마를 구해 돌아왔다. 그는 이 때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는지 고구마에 대해 다
음과 같이 상세히 기술해놓고 있다.
이것은 생김새가 산약과 같고, 청근(菁根)과도 같으며, 오이나 토란과도 같아 그 모양이 일정
하지 않다. 그 잎은 산약 잎사귀와 비슷하면서 그보다는 조금 크고 두터우며 조금 붉은색을 띠
었다. 넝쿨 역시 산약 넝쿨만 한데, 그 맛은 산약에 비해 조금 강하고, 실로 진기가 있으며 반쯤
구운 밤 맛과도 같았다. 그것은 생으로도 먹을 수 있고, 구워서도 먹으며 삶아서 먹을 수도 있
다. 곡식과 섞어 죽을 쑤어도 되고, 반청(拌淸)하여 정과(正果)로 써도 된다. 떡을 만들거나 밥
에 섞거나 간에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가히 흉년을 지낼 재료로서 좋을 듯하다. 들으니 남경
(南京)에서 일본으로 들어와 일본의 육지와 여러 섬들에 많이 있다는데, 그 중에서도 대마도가
더욱 성하다고 하였다. 그 심는 법은 봄에 양지 바른 곳에 심었다가 넝쿨이 땅위에 올라와 조금
자라거든 넝쿨의 한두 마디를 잘라 땅에 붙여 흙을 덮어 주면 그 묻힌 곳에서 알을 안게 되는
데, 알의 크기는 그 토질의 맞고 안 맞음에 달렸다. 잎이 떨어지고 가을이 깊어지면 그 뿌리를
캐서 구덩이를 조금 깊이 파고 감저(甘藷)를 한층 펴고, 흙을 두어 치 덮고 다시 감저를 한층
펴고, 또 흙을 덮어 다지고, 이렇게 하기를 5-6층 한 뒤에 짚을 두텁게 쌓아 그 위에 덮어 비바
람을 막아주면 썩지 않는다. 또 봄이 되면 다시 위와 같이 심는다고 한다.
지난해 좌수나포에 처음 도착하였을 때 감저를 보고 몇 말을 구해서 부산진으로 보내어 취종
케 하였는데, 귀로인 지금에 또 이것을 구해서 장차 동래 교리배들에게 줄 예정이다. 일행 중에
서도 그것을 얻은 자가 있으니 이것들을 과연 다 살려서 우리나라에 널리 퍼뜨리기를 문익점
이 목면 퍼뜨리듯 한다면 어찌 우리 백성에게 큰 도움이 아니겠는가. 또 동래에 심은 것이 만약
16) 원중거(2006) 승사록(乘槎錄) -조선후기 지식인 일본과 만나다- <김경숙 역, 이혜순 감수>소명출
판, pp.87-88.
544 동북아문화연구 제23집 (2010)
넝쿨이 잘 뻗는다면 제주 및 다른 섬에 재배함이 마땅할 듯하다. 들으니 제주의 토성이 마도와
많이 닮은 듯하다고 하니 그 감저가 과연 잘 번성한다면 제주도민이 해마다 손을 벌리는 것과
나창(羅倉)의 배를 띄워 곡식을 운반하는 폐단을 거의 제거할 수 있겠다. 다만 토질의 적성이
아직 확실치 못하고 토산(土産)이 다 다르니 과연 그 번식이 여하할지를 어찌 기필(記筆)하겠는
가.17)
여기에서 보듯이 그는 중국 남경에서 일본으로 고구마가 전래된 것으로 보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고구마는 중국의 복건성에서 오키나와로 전해졌고, 그것이 일본으로 전래된
것을 그는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구마를 흉년에 구황작물로 지목을 했고, 또 그것
이 우리나라 전역에 퍼지는 것은 문익점의 목화씨앗을 목면을 퍼지는 것과 같은 것으로 비유
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고구마에 거는 기대가 컸다. 그리하여 고구마를 심는 재배법에 대
해서도 자세히 적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고구마는 동래부사 송문재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송문재는
신병으로 부사직을 사임하고, 그 종자는 신임부사 강필리에게 인계되었으며, 강필리는 그 재
배법에 대해서도 연구 개발하여 부산지방 뿐만 아니라 제주도를 비롯한 남해안 도서지방에도
널리 퍼뜨리게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