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의학을 하는 이유
--仁山 김일훈선생님은 관음불(觀音佛)이자 미륵불(彌勒佛)이시다--
도(道)란 무엇인가?
道란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대자연의 理致를 깨닫는 것이며, 道를 깨달은 자를 覺者라한다. 각자는 곧 부처(佛)이다.
( 陰陽은 가까이는 人間으로부터 멀리는 宇宙의 가장 기본적 구성 요소이며 원리이다.
陰陽은 다시 五行으로 나뉘어지며 오행의 각 요소는 또한 무한히 세분되어진다. )
그럼, 부처란 무엇인가?
부처라는 우주의 정기(精氣)를 함축하여 종기(鐘氣)한 대광명과 대지혜와 대각을 이룬 분으로 모든 세상 삼라만상을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다. 그런데 석가모니라는 분이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 중 대표적인 분이지만 위대한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는 석가모니 같은 覺者가 상당수 존재한다.
(2003년에 출간된 “석가모니의 역사적 진실-박병역 지음”에 보면 석가모니의 일생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석가모니는 우리 배달국의 사람으로서 옛적에 이미 부처가 된 분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인산선생님도 석가모니에 대해 말씀하셨다.)
〔“석가모니2- 前身은 경주 황룡사(黃龍寺)터에서 대각한 파모니(巴牟尼)..” ← 관련글 〕
제대로된 우리의 역사를 찾다 보면 신화나 중국 역사속 인물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수 많은 분들이 사실 우리 민족으로 이들이 신선이나 불로 還道하시거나 佛靈이 還道人生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 대표적 예를 들면 화서, 태호복희, 여와, 삼황오제, 환인, 환웅, 단군 등의 고대 제왕부터 김수로왕의 일곱아들 7불(탐랑여래불, 거문여래불, 녹존여래불, 문곡여래불, 염정여래불, 무곡여래불, 파군여래불), 고운 최치원(전생은 단군), 광성자, 뇌진자, 적송자, 안기생, 양봉래 등과 조선시대의 사육신(死六臣) 중 박팽년(朴彭年)과 성삼문(成三問)은 산신(山神)으로 생육신(生六臣) 중 김시습(金時習)은 불령(佛靈)으로 환도(還道)했다. 또한 불경에 나오는 아미타불은 배달국의 첫 번째 桓雄天皇人이신 ‘거발환’ 桓雄임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동양의학의 원전이라고 하는 중국의 黃帝內經에서 처음 거론되는 경락과 경혈은 중국 지나족이 그들의 시조로 잘못 알고 있는 皇帝가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라, 자부선인 (배달국 제 13대 천황인 사와라환웅 (BC2774~2706 재위년수 67년)때의 仙人. 천문을 측정하고, 오행의 수리를 추리하여 칠정운천도 (책력)와 삼황내문을과 윷놀이를 만듦)에게서 배운 ‘古代의 道’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神仙道를 자부선인도 스승 발귀리에게서 배움) 를 베낀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한의학의 뿌리1" ← 관련글
"한의학의 뿌리2”← 관련글 〕
그러면 古代의 道는 무엇인가?
儒· 佛· 仙 三敎의 근원인 仙道이며 이는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자연의 理致를 깨닫는 것인데 이것은 하늘(양)과 땅(음)의 이치를 아는 것이며, 이는 곧 삼라만상이 전개되는 원리를 통찰하는 것이며, 만물이 轉變(易)하는 이치를 아는 것이며, 이는 결국 인간의 生老病死의 이치를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이므로 자연의 이치를 깨달은 覺者에게 治病은 손쉬운 일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위에 열거한 분들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古代의 道를 修學한 조상’들은 현재의 CT나 MRI 등의 정밀진단 기계 없이도 사람의 걷는 모습 · 얼굴빛만 보아도 사람의 병을 알내고 능히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그러한 능력이 보편화 되었었지만, 지금은 어떤 사람이 ‘그런 능력'이 있다면 ‘미친사람’ 이고 그를 따르는 자들은 ‘사이비 종교 집단’취급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仁山 金一勳’ 선생님이다.
(인산선생님 일생에 대한 일반적 약력은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인산선생님은 어떤 분인가? 바로 ‘覺者’이다. 사람들이 흔히 칭하는 관음불이요 미륵불이다.
〔인산 선생님은 전생에 대각한 관음불.....화서는 태호복희씨 생모요
삼천년 후 관음불이요 삼천년후 미륵불... ← 관련글 〕
「.....나는 전생의 대각한 불(佛)이라. 약은 천상 별을 봐도 땅속에 무슨 약이 있는 걸 어려서 환히 알고 있었으니, 나는 인간에 자주 올 수 있는 인간은 아니다..... 」
그러면 인산선생님이 부처라는 증거로 예를 들어보겠다.
인산선생님은 의학(醫學)뿐만이 아니라, 종교(宗敎), 역사(歷史), 천문학(天文學), 물리학(物理學), 인문학(人文學), 사회학(社會學), 철학(哲學), 심령학(心靈學)은 물론 전기자기학(電氣磁氣學), 양자역학(量子力學), 고분자화학(高分子化學)등 전문가도 어려워하는 분야에서도 놀라운 비밀을 밝히셨고 그 중 극히 일부나마 지금에서야 사실임이 검증되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 과학의 "증거”를 좋아하는 미국식 접근법으로 검증이 안되면 가짜요 증거가 없으면 미신이라는 현대 과학(의학)자들은 자신들의 과학적 수준이 아직 미개하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있는지 되묻고 싶다. 또한, 현대과학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지 겨우 20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인체의 오묘한 신비와 무한한 자연현상을 오로지 자기들만의 잣대로 규정하는 짓이 얼마나 큰 “오만”인지를 조금이라도 깨닫고 있는지 알고 싶다. 참으로 오만 방자한 人間들이다.
아래에 열거한 神藥은 인산선생님이 최초로 만들거나 발견하거나 기존 미비점을 보완하여 완전하게 만드신 것들로 이 ‘말도 안 되는 물질’로 기존 의학이 손도 못 대는 불치병을 부작용 전혀 없이 완치 시킨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1. 죽염 (竹鹽)
『 핵비소(核砒素)는 지구가 처음 만들어져 바다가 이루어진 뒤 바닷물이 오랫동안 지구 속의 불기운을 받아 최고의 毒素로 이루어 졌는데 서해안 연평도가 그 성분이 가장 많으므로 천일염은 반드시 (연평도에서 가까운) 서해안에서 난 것을 써야한다. 』(신약 37p)라고 하셨다.
인산의학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이 神藥이라는 책인데 가장 먼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처음 바다가 이루어져? 땅속 불기운을 받아? 그러면 지구가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안다구? ”
나 같은 범인은 핵비소가 있는 지는 모르지만 죽염은 먹었더니 여러 질환이 낫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확신한다. 먹어보고 발라보니 죽염이 참으로 신비한 물질임을 알겠더란 말이다.
수천년 내려온 의서부터 첨단이라 자랑하는 현대 의학까지, 치료법은커녕 원인조차 밝히지 못한 많은 병들이 죽염 하나 만으로 고친 사례가 너무 많다.
당뇨 (강아지 당뇨도 나을수 잇는게 죽염이다), 간질 (간질의 원인이 모두 뇌의 잘못이라고 알고 있으나 인산선생님은 ‘위에서 뇌로 올라가는 신경에 붙은 담’이라 하셨으며 죽염으로 고친 예는 얼마든지 있다), 각종 궤양·염(죽염의 적응증 중 가장 빠르게 반응하는 것이 각종 염증이다), 고혈압 (당뇨나 고혈압 같은 성인병은 평생 약을 먹으며 금기사항을 지키며 ‘관리’해야하는 것으로 이것은 진정한 ‘약’이 아니다. 무슨 짓을 해도 괜찮아야 치료아닌가?) 등 여러 괴질을 며칠에서 몇 달만에 완치시킬수 있는 신비한 물질이 죽염이다.
2. 쑥뜸 (靈久法)
쑥뜸의 효과는 말로 형언하기 매우 어렵지만 간단한 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다.
『....우주의 영력을 인신에 합성하는 방법은 5분이상 쑥뜸을 단전(靈泉)에 뜨는 것이며 이는 우선 무병장수케하고 마음에 신통력을 얻으며 천지간의 영력을 종기한 최고의 영물이 돼서 마침내 대각성불한다.... 』
약쑥(반드시 강화도 싸주아리 쑥으로만 떠야한다고 하셨는데, 그냥 약쑥도 많은데 왜 궂이 싸주아리 쑥으로만 해야 한다고 하셨을까?)으로 오래 단전에 뜸을 뜨면 도를 깨우치는 것은 고사하고 일단 “500℃나되는 무시무시한 불을 배위에 올려 놓고 5분 이상 견딘다는 것이 가능한지가 문제이다.
아무리 지능이 높은 사람이라도, 아무리 병을 고치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도 자기 배 위에 주먹만한 불덩이를 올려 놓고 견디면 병을 고침은 물론 더 높은 차원의 정신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이것을 알 수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렇게 무지막지한 불을 배에 직접 올린다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하지만 인산선생님은 쑥과 불과 몸의 오묘한 상호작용을 이미 다 통찰하신 분이므로 아무런 의문 없이 직접 몸에 뜸을 뜨시고 일반인도 가능하다고 방법을 알려 주셨다.
그런데 5분이 아니라 15분 35분짜리도 가능하다(35분짜리는 어른 주먹정도의 크기이다) 게다가 이것을 한 두장 뜨는게 아니라 수십 일 동안 수천 장을 뜬다.
이 정도면 배가 불에 익어 내장이 터지거나 타서 구멍이 뚫리는게 상식이나 오히려 불치병까지 치료가 되고 심지어 훈훈하고 미묘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전생의 영(靈)이 환도인생 명을 받아 모태 중 입태시의 쾌감과 같다고 하셨다
『 전생에 영(靈)이 모태 중 입태시 명부세계(冥府世界)의 유음지정(幽陰之精)으로서 원하는 사바세계에 양명지기(陽明之氣)로 화하는 순간 ....... 정령(精靈)의 쾌감은 구불가형언(口不可形言)이라. 뜸뜰 때 그런 쾌감이 오면 주야로 자지 말고 계속하여 뜨다 처음같이 뜨거우면 바로 그만 두라.』
“전생? 영? 환도인생? 이 양반 정말 뭔가 알고 말하는거야?
그런데 이 방법으로 암을 고치고 괴질을 고치고 뇌성마비를 고치고 소경을 고치고 죽염으로 고칠 수 없는 나머지 모든 병들을 고칠 수 있다. 인산의학을 25년 이상 접한 본인은 쑥뜸으로 새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무수~히 많이 봤다.
쑥뜸은 정말로 불가사의한 힘을 가졌다.
건강증진뿐만이 아니라 업장소멸과 영력증강은 쑥뜸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내가 아는 분은 쑥뜸으로 전생을 보았다고 하셨는데 이것도 신약책에 인산선생님이 이미 밝히신 내용이다.
가스중독자 음독자 등도 급사자도 중완에 15분 짜리 쑥뜸을 뜨면 심장이 멈추더라도 영혼이 떠나지 않은 자는 살릴 수 있다.
인간의 몸과 자연의 원리와 자연의 힘을 완벽히 이용할 줄 아는 慧眼이 아니고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또 예를 들어보자.
3. 유황오리
옛날 진시황이 영원히 죽지않고 살 수 있는 不老草를 찾아 한반도에 수많은 약초꾼을 보낸 일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참고 - 분서갱유라는 희대의 사건도 실은 우리 배달민족의 신서(神書)들을 태우고 이를 배우는 유학생을 죽인 것을 말함을 지금 사람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가 만든 만리장성(사실 만리장성은 진시황때 모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 이들이 말하는 흉노족 (사실은 북부여 해모수단군임을 감추기 위한 꼼수)이 너무도 무서워 만든 것임을 아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진시황은 지금의 만리장성을 쌓은 적이 없다 ← 관련글〕
그의 영원할것 같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도 오래지 않아 죽고 마는데 중국에서 의서가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잘난 의사가 없어서였을까? (동양의학의 원조라고 떠드는 황제내경 등의 의서가 사실 우리 민족에게서 건너간 아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아직도 인산선생님이 그냥 능력이 조금 뛰어난 인간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진시황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불노초가 사실 극약인 유황에 있다는 것을 인산선생님이 처음 밝히셨는데 수많은 물질 중에 왜 하필 극약인 유황인가? 유황을 제대로 법제하는 방법이 수많은 방법 중에 왜 하필 오리에게 먹이는 것일까? 오리는 유황을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인산선생님은 어떻게 알았을까? 우연의 일치로? 머리가 좋아서? 사람을 치료하는데 특별한 기술이 있어서?
또 예를 들어 보자 예는 얼마든지 댈 수 있다.
4. 난반
땅속 광물인 백반을 오래 구워 오골계 흰자와 섞어 분말 한 것이 난반이라는 물질이다. 난반을 만들 때 백반과 계란의 비율이나 재료의 (최상의) 질을 정확하게 맞춰야 하는데 숙련된 사람도 만들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이 난반은 간질, 공황장애, 우울증, 정신병, 각종 (난치)피부병, 치질, 각종 암 (궤양)등에 두루 쓰이는데 앞서 언급한 물질처럼 인산선생님이 처음 만드신 합성신약이다.
난반의 가장 큰 작용은 정상 세포조직 사이에 촘촘히 박힌 독소와 이물질을 부작용 없이 쉽게 제거하기 위해 조직을 부드럽게 만들고 정상세포와 분리하는 역할을 한다. 난반이 견고한 조직을 파헤치면 죽염이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위에서 뇌로 올라가는 신경에 보이지 않는 담(조직검사를 하든 현미경으로 보든 인간의 눈으로는 절대 알아 낼 수 없는것이 담이다)을 녹여서 토하게 되면 실제로 노란 가래같은 물질이 나오는데 이것이 다 나와야 간질병이 치료된다.
인산 선생님은 사람의 뇌와 위를 매일 들여 본다 해도 원인조차 모르는 간질의 원인이 뇌가 아닌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는 위에 붙은 담이라는 물질임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15년이 걸렸으며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기 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사람의 병을 고치는 신약물질 하나 개발하는데 일생을 다바치고도 못 만드는 경우가 허다한데 인간의 두뇌로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
5. 복어알
복어알은 종류를 막론하고 테트로톡신(tetrodotoxin)이라는 독을 지니고 있는데, 0.5mg이 성인 치사량으로, 청산가리의 1,000배에 달하는 맹독이다.
그런데 이 복어알을 생강에 3회 법제하면 폐암약이 되며 (폐암환자는 사실 법제를 안해도 된다고 하셨다) 9회 법제하면 정상인의 폐를 강화시키는 약이 된다.
복어알로 폐암환자를 고쳐?
실제 법제복어알로 암환자가 치료된 것을 본인은 여러번 보았고 어떤 이는 법제도하지 않은 복어알로 (암,아토피) 그야말로 떼돈을 번 사람도 있다.
6. 칠점사
까치살모사라고 불리는 이 뱀은 우리나라 최고의 맹독을 가진 뱀이다.
『 까치독사를 암환자의 엄지 손가락에 물게 하고 대가리를 꼭 쥐고 있으면 30분 후에 뱀은 죽고 환자는 하루만에 회복된다. 암환자의 암균독수 36%와 독사독수 36%는 서로 중화되어 보양제로 변하고 나머지 64%의 암균독수는 뱀을 죽게 만든다 - 음공 ․ 양공법 』
본인도 독사 치침법을 암환자에게 실시한 경험이 있는데 뱀이 30분 만에 죽은 반면 환자는 이빨 자국을 제외하곤 아무렇지 않게 멀쩡하게 치료되었던 신비한 경험을 했다. 하지만 칠점사가 아닌 일반 독사는 독사치침법을 7시간 동안이나 실시했는데도 살아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독사가 아마도 수입산이지 않았나싶다 ㅠㅠ)
더 자세한 기술은 어렵지만 독사 치침법은 암치료에 있어 무한한 가능성을 본인은 보았다.
그런데 겨우 몇 년 전 국내 의료연구진이 칠점사 독에서 ‘삭사틸린’이라는 물질이 항암효과에 탁월하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것이 ‘첨단·현대 과학의 수준’이다.
복어알이나 독사를 이용한 항암제 개발은 국가적 차원에서 연구가 시급히 서둘러져야 한다.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데 과학적 우열이 어디 있겠는가?
7. 홍화씨
홍화씨가 뼈에 좋다고 알려진 것을 지금은 일반인들도 알고 있는 상식이나 홍화씨가 대중화 된 것은 몇 년되지 않았다. 예전에 어혈(瘀血)이나 통경약(痛經藥) 정도로 썼던 홍화에 그 씨가 뼈에 좋다고 인산선생님이 밝히신 이후 실제 홍화씨를 먹어본 사람들이 효과를 보자 입소문으로 일반 화 된 것이다.
실제 뼈가 부러졌을때 홍화씨를 살짝 볶아 분말내어 1근 정도 죽염에 섞어 2~3일 이내에 다먹으면 부러진 자리에서 열이 나면서 뼈가 완전히 붙는데 일주일 밖에 걸리지 않는다. 인산선생님은 재래종은 하루만에 붙는다고 하셨다.
현대의학으로 뼈가 부러지면 최소 4주이상 걸리지 않는가?
8. 종교
가. 인산선생님은 앞으로 다가올 환란(患亂)과 대비책에 대해서도 밝히셨다.
『 앞으로 공해 독이 극강해지면 암보다 무서운 괴질이 많이 창궐하는데 손도 못 써보고 죽는 사람이 허다할 것이다. 잠자다 죽고 길가다 피토하며 죽고.... 또한 3차대전이 종교 때문에 일어나는데 이로 인한 핵전쟁으로 인류가 거의 멸망하는 날이 오는데 이를 대비하여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면서 미리 미리 쑥뜸 뜨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사리간장이나 돼지창자국이라도 먹어야 방사능(독가스) 독을 견뎌내서 살 수 있다.....
환란이 오기 전에 그걸 피하는 법을 일러주고 사람 많이 죽는 괴질이 온다면 그것을 치료하는 법을 가르치고, 싸움하지 않고 살 수 교화, 덕화가 있어야 성자요 구세주 아닌가?...』
나. 인산선생님은 1909년 함경도 흥원군에서 탄생하셔서 1982년 84세의 일기로 仙化하실때까지 총 78번의 이사를 다시실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사셨으나 당신이 관음불(觀音佛)이요 미륵불(彌勒佛)이라고 밝히신 것은 임종을 앞두고 였다. (인산선생님은 靈이 관음불과 미륵불로 나뉘셨음)
『미륵은 극귀(極貴)하되 평범하게 태어나고, 대지혜로되 바보처럼 살고, 성스럽되 비천한 것처럼 보이는 그런 존재다. 자식조차 아버지가 미륵인 줄 꿈에도 몰랐다.
중생이 미륵인 줄 알아보는 그런 존재는 이미 미륵이 아니다. 혹세무민하는 가짜일 뿐이다.
성인이 살아서 성자로 대우받는 그런 성자는 이미 성자가 아니다.
색계(色界)의 중생 또한 공계(空界) 대지혜의 큰 굴레를 벗어날 수 없으니 미륵(彌勒-클 미, 굴레 륵) 대도(大道), 자연의 법칙이다. 커다란 원(圓)의 굴레 속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도움이 없다. 미륵(彌勒)이란 자연대도(自然大道)요 우주대원칙이라 예외도 없고 사정(私情)도 없다. -최광춘』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매우 큰 착각하고 있는 점이 있다.
바로 부처(예수)는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가 아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개인의 소망을 들어달라고 기도하고 구원을 청하고 재산을 기부하고 절하고 간청한다. 자식(가족) 잘되게 해달라고, 병 낫게 해달라고, 돈 많이 벌게 해달라고, 유명하게 해달라고, 시험에 합격시켜 달라고, 취직시켜 달라고, 천당(극락)가게 해달라고 (도대체 천당과 지옥이 어디 있나?)....
예수(부처)를 진실히 믿고 성경(불경)의 내용대로 (착하게)살면 천당(극락)에 간다는 심한 착각에 살고 있다.
(기독교는 논할 가치가 없으므로 생략하겠다. 구체적인 이유는 ‘종교(宗敎)․인간(人間)․영(靈)’에 자세히 있으니 참조바람.)
『예수(부처) 열심히 믿으면 자꾸 의지하게 되니 靈이 자꾸 줄어 다음에는 똥간에 구더기로 태어난다. 그러니, (부처) 예수에게 기도하고 절하지 말고 네가 네 배위에 직접 뜸을 떠서 오래 살고 영력 키우면 나중에 네 자신이 부처가 될수 있다.
정 소원을 이루고 싶으면 부처에 절하지 말고 조상에 기도하라..... 부처는 인간 도울 힘이 없지만 (조상)산신은 그럴 힘이 있다.... 부처에게 왜 절하나 차라리 개한테 절해라. 개는 불성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하신거 어느 경전에 남아있나? 불경에 석가모니 설하신거 없다.... 』
석가모니가 사바세계에 인간의 몸으로 탄생하셨던 시대에는 식인문화가 만연했던 때로 어렵게
환도인생한 몸으로 같은 사람을 먹는 죄를 저지르면 다시는 인간으로 태어날 수 없으니 절대로 악연을 짓지 말라는 말씀 이상의 고차원적 철학과 윤리를 설파하실 수 없는 수준의 인간 세계였다. 게다가 석가모니의 말씀을 기록할 도구나 글자가 제대로 없었으므로 제자들에 의해 구전 되다가 수백년 후 수도선사에 의해 덧붙여지고 잘려지면서 오늘의 우리가 알고 있는 불경이 되었다.
그래서 인산선생님은 당신의 말씀이 왜곡되거나 폄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강연한 말씀을 한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녹음해 책으로 펴내게 하셨는데 이 책이 ‘神藥本草’이며 인산선생님 死後에 靈前에 바쳐졌다.
(인산선생님이 부처인데도 죽느냐는 우스운 질문에 ‘부처가 인간세계에 줄 수 있는 가르침을 다 밝혔는데 苦海인 사바세계에 계속 남아있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느냐’ 면 답이 될까?)
인산선생님을 믿고 안 믿고는 개인의 선택이고 자유이다.
인산선생님이 부처라는 위의 몇가지 예만으로는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정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마음을 열지 않으면 그 어떤 미사여구(美辭麗句)가 귀에 들리겠는가.
억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연임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죽염하나 먹는 것도 뜸을 뜨는 것도 전생에 인연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 이 글은
보려해도 보이지 않는 글이요,
알려해도 알수 없는 글이다.
인산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일반 대중이 알 수 있는 시기는 환란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고,
인연이 있는 자는 앞으로 닥쳐 올 재난을 대비해 생명을 구할 준비를 할 것이다.
절로 되는 시기가 눈앞에 왔으니 따르는 자는 살고
반대하는 자는 모두 해를 받을 수 밖에 없다.
반대자가 저절로 멸절되어
자씨미륵(慈氏彌勒) 용화세계(龍華世界),
사람마다 명의(名醫)요. 신선(神仙)이니
신인세계(神人世界) 신국(神國)이 절로 되는 날이 멀지 않았다.
절로 된다는 말처럼 무서운 말이 없으니 지자(知者)는 명심하라!!!
나는 전생에 각자(覺者)라, 금생에 영제(靈帝)이신 세존의 제도중생(濟度衆生)하는 자비대도(慈悲大道)를 지구에 대명(大明)하여 세존의 웅지대업(雄志大業)을 중흥시킬 뿐이다. 나는 금생에 생이영명(生而靈明)하니 신성노자(神聖老子)는 대지(大智)는 무지(無智)라 하고 나는 대명(大明)은 무명(無明)이라 한다. - 神藥 427쪽
나는 시방 삼세(十方三世)를 관통하는 대지혜를 지니고도 음덕이 부족한 탓으로 아는 바를 말하지 못함으로써 대중(大衆)의 신뢰를 받지 못한 채 벌써 80에 다다랐다. ....중략.... 생생불멸(生生不滅)의 장구(長久)한 세월이 흐른 금생(今生)에 이르기까지 도(道)만 닦았지 음덕을 쌓지 않고 지내온 삶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으나 한 생애의 시간은 만족할 만큼의 음덕을 쌓기에는 너무 짧은 것이었다. ....중략.... 이루 형언하기조차 힘든 갖가지 고행을 감내하며 수많은 사람에게 인술(仁術)을 베풀어 온 나의 음덕은 앞으로 후세의 온갖 병고(病苦)로부터 구제할 것이다. - 神藥 432쪽 우주의 대광명(大光明)을 인신(人身)에 이루는 우주등(宇宙燈)은 영력(靈力)이다. 영(靈)은 우주와 신(神)의 주(主)요, 우주생물(宇宙生物)의 조물주이다. 인신의 단전은 영천(靈泉)이요, 영천은 우주등(宇宙燈)이다. 우주등의 광명을 따라 영명대각(靈明大覺)하니 인간단전구법(人間丹田灸法)은 영천개발법(靈泉開發法)이다. 나는 영천개발법(靈泉開發法)을 중생제도(衆生濟度)하기 위하여 전하니 영원히 인류에 무병장수(無病長壽)하고 불로장생술(不老長生術)로 이루어지는 신선(神仙)과 신인(神人)이요, 불생불멸(不生不滅)하며 영명대각(靈明大覺)하는 성불대도(成佛大道)이다.
세상은 나를 오늘까지도 모욕하려고 애쓰고 음해(陰害)하는 사람이 계속해. 이건 뭐이냐? 인간은 미개하게 돼 있어. 지구에 내가 와서 살고 있다는걸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저, 도깨비 붙은 무당들이 처음에 신(神)이 내리면 날 보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전생(前生)에 관음불(觀音佛)이올시다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나를 전생에 관음불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내 자신은 얻어먹는 날은 거지고 일하는 날은 노동자요, 농사짓는 날은 농부인데, 내가 전생에 관음불이라는 이유가 닿질 않아요. 그러면 한평생이 비참하게 살아오는 내가 만주서 왜놈의 총에 죽었으면 객귀(客鬼)가 되었을 거고 원혼(怨魂)이 되었을 건데. 내가 전생에 관음불이라는 증거를 세상에 나타낼 힘이 없어니까 난 그런 거 안 믿어요. 안 믿으나 앞으로 영원히 인류를 구하는 힘은 내게만 있는건 알아요 - 神藥本草 294쪽
내가 묘향산에 가 있을 때, 전생(前生)에 대각(大覺)한 관음불(觀音佛)이 아무날 몇 시에 들어온다 하는 걸 현몽(現夢)해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일이 있어요. 불심(佛心)이 강한 신도들한테 그런 현몽을 시킨 건, 산신(山神)도 현몽시키고 그 어떤 보살도 현몽시키고 석가모니 자신이 직접 현몽하더라 이거야. - 神藥本草 448쪽 내가 우스갯소리 삼아 하지. 석가모니가 내 앞에 와도 고개를 못 들 건데, 천지간에 내 앞에 와서 아는 척할 사람이 있느냐? 그건 지금 미개한 자들이 와서 제가 아는 척하지. 신(神)은 내 앞에 아는 척할 수는 없어. 그래서 내가 우주의 비밀을 어느 정도까지 밝혀 놓으면 요령은 끝나. 그 뒤에는 많은 사람이 경험으로 하나하나 더 알아 놓으면 금상첨화(錦上添花) 될 거요. ....중략.... 내가 세상의 많은 사람을 살리는 중에 사람으로선 상상 못할 일을 많이 해왔는데 그건 뭐이냐? 전생에 전무후무한 대각한 관음불이 후세에 다시 나타나 가지고, 문전에 걸식이나 하고, 쉰밥이나 얻어먹어도, 아는 건 귀신보다 더 알아. 그래 놓으니 인간에 인간대우를 받을 수 있느냐? - 神藥本草 450쪽
그러면 전생에 대각이라는 자가 금생에 할 일이 뭐이냐? 이 시기가 얼추 장벽에 부딪치는 때가 오니 그땐 나도 인간 세상을 떠날 시기지만 짧은 시기래도 아는 걸 다소 전하고 가면 된다. 그래서 의학이라는 게 이번에 완전무결한 의학을 창조한다. 그건 뭐이냐? 어린 애기도 저희 부모의 암을 고칠 수 있는 능력, 약학(藥學)도 간단, 치료법도 간단해야지, 옛날에 본초강목(本草綱目)을 외워 일르고 약쓸 줄 안다. 그 약쓸 줄 안다면 거기서 지금 괴질을 고칠 수 있는 치료법이 있으며, 약을 제조할 수 있느냐? 없어요. - 神藥本草 451쪽
나는 전생의 대각한 불(佛)이라. 약은 천상 별을 봐도 땅속에 무슨 약이 있는 걸 어려서 환히 알고 있었으니, 나는 인간에 자주 올 수 있는 인간은 아니다. 죽은 뒤에 내 기록을 보면 알 거 아니냐. 죽기 전에 써 놓은 기록이 죽은 뒤에 다 열람해 보면 참으로 다시 오면 좋겠다 하는 생각 할 거다. 그렇지만 그런 인간도 다시 오느냐? 이 미개한 인간세계에서 얼마나 피가 마르는 비참한 세상을 살았는데 그 세상을 또 오겠느냐? 석가모니 붙들고 또 오라고 해봐야 고해중생(苦海衆生)이 얼마나 괴로운 걸 아는데 고해를 또 오겠느냐? 나도 이렇게 비참하게 살며 전하고 가는데 일해 놓고 갔으면 끝났지 일꾼이 다시 오느냐? 나는 이번에 일을 다하고 가는데. 만고성장(萬古聖者)의 미흡한 점을 하나 빼지 않고 다 하는데. 내가 공자님의 문학을 더하진 않을 거지마는, 모든 우주의 비밀을 만고성자가 못하고 간 것, 앞으로 성자가 와두 손댈 거 없이 싹 해놓고 갈 거다. 그런 말은 했어요. - 神藥本草 487쪽
나는 어려서부터 육신은 개값도 못 가도 나의 지혜(智慧)는 만고의 태양보다 밝은 광명(光明)을 전할 거다. 그건 내가 어려서부터 알고 있는 거다.·······나는 아마 거진 전할 게요. 비밀이 수백종에 빠지는 예는 있겠지만 그 수백 종이 없어도 수만 수천 종을 전하면, 사람 사는 데는 별 차질이 없으리라고 봐요. 그래서 나는 사람 세상을 위해서 내 일생을 바치는 거지 - 神藥本草 489쪽 경주에 가게 되면 황룡사(黃龍寺)가 있다. 황룡사 터는 석가모니 전신(前身)에 파모니(巴牟尼)가 있는데, 파모니라는 사람이 수도하던 곳인데. 왜 파씨(巴氏)라고 했느냐? 각(覺)을 하고 보니까 당신 후신(後身)은 석가모니가 된다. 후세의 석가모니라 한다. 그러면 당신은 석가모니라는, 다음 세대에 당신이 가서 석가모니 된다. 그러면 그걸 당신 살아서 각(覺)한 후에 대각자 파모니야. 당신이 파모니라고 했다. 그래서 그 이름을 후세의 파모니로 알거든. 그래 황룡사 터에서 수도하던 파모니에 대한 기록 사찰이 황룡사라. 거 신라 때의 도사들이 그걸 사찰 정한 건데. 그러면 신라 때에 히말라야에서 석가모니가 도를 편 후에 꽃이 피기는 경주에 와서 꽃이 피었어요, 신라말에. 그래 가지고 선사(禪師)가 많은 사람이 쏟아져서, 전라도에도 있지만 몇 사람 안되고, 거 앞으로 칠산 바다 도읍(都邑:首都) 후에 전라도에 많은 사람이 나는데 그건 저 태평양에서 큰 산이 서해로 뻗칠 적에 그건 화구 분출한 후의 얘기지. 그때 달라져요. 그런데 파모니라는 사람이 파씨(巴氏)인데, 각(覺)을 하고 난 후에 당신의 후신이, 석가모니가 후신이 된다는 걸 전제적으로 파모니라고 하고 전한 이름이라. 그래서 육신을 버리고 마야(摩耶) 부인 몸에 가서 영태(靈胎)한 분인데, 그래 영태한 후에 우협(右脇)으로 나온 분이라. 불가(佛家)에, 다 그 경전에 있는 말이겠지, 이런데. 그 이상, 세상이 아는 건 할 필요 없고. 그래서 그 양반의 전신(前身)이 파모니야. 파모니의 수도처는 황룡사, 황룡사터고, 이런데.그런데 파모니는 왜 히말라야에 갔느냐? 그거이 황룡사 터의 원 뿌럭지[뿌리]가 히말라야. 그러니까 거기에 가서 탄생하신 거고. 나는 히말라야에서 천 리 이상 떨어진 곳에 와서 인도에서 전생의 관음불(觀音佛)이라는 인간이었는데. 거, 왜 이쪽으로 오느냐? 그건 석가모니하고 정반대라. 석가모니는 경주서 히말라야에 갔고 나는 거기서 한국에 와 태어났다, 그럼 석가모니는 영태고 나는 영태라고 할 수 없다. 그저 아버지 어머니 몸에서 태어났겠지. 그래서 내가 어려서는 전생의 대각자, 관음불의 후신이란 걸 어려선 알지만 내가 위대한 인간이라는 건 생각지도 않은 이유가 뭐이냐? 난 위대한 인간 노릇 할라면 왜놈의 손에서 십자가를 져야 하고 또 코쟁이 앞에 광복 후에 십자가를 져야 하고 또 빨갱이한테 비명에 가야 하고, 그럼 난 살 수 없는 인간이라. 그렇게 어려운 시기기 때문에 거 지혜없는 양반들은 괜히 날뛰다가 십자가를 지고 모두 이러겠지만 아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느냐 그거야. 그래서 7살부터 내가 지게질 한 거야. - 神藥本草 500쪽 황룡사 절터에서 대각한 파모니는 히말라야에 가서 석가모니였고, 전생의 관음불은 금생에 이 지역에 와서 내라는 인간인데. 죽은 후엔 천고에 대우받을 자가 살아선 그렇게 추한 짓을 해. 그러면 그 기록은 만고에 전무후무하다고 봐도 한 짓은 잘못한 일이 너무 많아. 그래서 그 파모니의 수도하던 비밀이 내게 있어. 그 비밀을 하나하나 전하는 거라, 전하는데. 그거이 지금 백두산 천지가 파모니가 생기는 증거고, 그 힘이야. - 神藥本草 503쪽 내가 지금 와서 내 정체를 밝힌다, 밝힌다고 해도 과히 어려운 일은 아니야. 앞으로 내게는 십자가란 게 이제는 없어. 송장을 죽이는 법은 없어요. 산 사람을 죽이는 걸 살인이라고 하지, 다 살고 죽어 가는 송장을 죽일라고 할 사람은 없으니, 나 이제는 우스갯소리 삼아 막 해요. 내 정체를 지금은 막 해대지, 이런데. 이것도 내 자신은 무척 잘못하는 걸 알고 해요. 자기 정체를 밝혀가지고 자기한테 대접이 온다? 그게 불행이라. 대접이란 건 모르는 사람이 볼 적엔 대우받는 건데 다른 사람의 영화를 내가 중간치기 하는 거라. 그건 안되게 돼 있어요. 나는 영화(榮華)의 인간이 아니라. 비참하게 살다가는 인간이라. 영화는 내꺼 아니야. 중생 거야. 중생을 위해서 남겨 놓는 힘이 필요하지. 그게 지혜야. 중생은 그 속에서 광명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오늘처럼 암흑에서 살아서는 안되니가 광명에서 살게 해주는 거라. 지혜는 만고의 태양보다 밝은 광명이라고 해놓고 그 광명을 전해 주는 거이 중생의 행복이라. - 神藥本草 504쪽
석가모니는 모든 이 중생제도(衆生濟度)에 거름을 하고 간 분이라. 그러면 거름하고 갔으면 꽃 피고 열매 열어야 된다, 그거야. 내가 이제 말한 거. 나는 꽃 피우고 열매 여는 데 필요한 사람. 그랬다고 해서 꽃 피는 걸 영화라고 하지만 그건 내게 영화는 아니야. 지구의 중생의 영화지, 그래서 꽃 피는 세상을 나는 이번에 모든 기록으로 남기고 가는데. - 神藥本草 506쪽 백두산에서 모든 힘이 모아져 가지고, 지구에 있는 힘을 종기(鐘氣)해 가지곤 그 종기한 힘이 어디로 왔느냐? 경주로 오더라 이거야. 경주에 와 가지고 석가모니의 전신(前身) 파모니가 대각을 하더라. 그래 가지고 뿌럭지를 인연이 따라댕기는 걸 말하는 건데. 고 뿌럭지를 찾아서 도를 폈다. 그러면 거기서 천 리 밖에서 관음불이 있다가 그 영력이 다시 이쪽에 와서 태어나는데 하필이면 쪼다로 태어났어요. 석가모니는 굉장한 천지거물인데 나는 천지간에 쪼다야. 보따리를 들고서, 월세를 안 냈다고 쫓겨 달아난다. 내가 쫓겨 달아나서 거, 창경원 담장 밑에서 하루 저녁 잔 일이 있어요. 쟤들 어머니지. 둘이 보따리를 깔고 앉아서 밤을 세웠는데. ······전생에 그런 대우받던 관음불이 금생에 그렇게 천대받는 천치로 태어난다. 그건 마음이 아무리 천지간에 독보적 존재래도 행세가 그렇게 추하면 추물이야. 내 과거가 추물이야. 그런데 아무리 추물이래도 똥거름을 주고서 수박 심었다고 수박 내버리는 법이 없어요. 추물이래도 그 책은 만고의 전무후무라. 이제 앞으로 그 책이 나오겠지. 그래서 금년에, 그 동안에 얘기하던 이야기는 이 파모니가 석가모니다. 히말라야가 경주까지 온 이야기라. - 神藥本草 509쪽
宇宙領內 地球村에 獨尊者先覺의 慧明으로 人智發達이 道에 부족한 지구촌 가족의 건강장수와 행복과 繁榮을 위하여 신비세계를 개척함에 深奧한 비법을 80이 지난 오늘에 하나하나 공개한다. - 神藥本草 963쪽 나는 의학과 약학 창조에 전무후무(前無後無)하고 지감혜명(智鑑慧明)한 선각자이다. 옛적 지구촌의 선각자는 아세아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자'가 고금을 통하여 계승한다. 그러나 今日은 人智未達한 사회에 지도자의 선법폐단(宣法弊端)은 위험하고 무능에 손색이 없으니 얼마나 무서운가. 암과 난치병으로 생명과 재산을 바친 수십억의 대중에 나는 무능하여 미안할 분이다. 선각자의 무능은 대중의 무지에서 빛을 가리고 만다. 그러나 지금은 核毒의 피해가 극에 달하는 시점이므로 나의 지혜는 대중의 전도를 밝히는 광명이요, 태양등이며 救命鏡이다. 현재 지구촌 가족이 50억에 달하나 그 생명을 좌우하는 난치병 중에서 제일 두려운 癌病치료법은 이 사람 掌中에 있고 後日에 영원히 지구촌 가족의 운명은 이 사람이 전하는 기록 중에 있는 태양 같은 慧明에 있다. 그러나 선각자를 속박하는 無智人 소행에 팔십일년간 괴로운 심정은 仰天하며 일생을 비참하게 살아왔다. 智慧는 이 세상 지구촌 가족에게 억천만년을 명랑하고 행복하게 하는 水晶宮 寶鏡이다. 그리하여 지구촌의 광명을 水平으로 이룩하고 갈 이 사람은 최악의 세파에 파죽지세로 孤帆行路가 險難하기만 한 일생 풍운아였다. - 神藥本草 980쪽
지혜가 부족한 지구촌의 가족은 화학자의 유산인 화공약 피해로 너무나도 비참하게 사라져 간다. 나는 인간적으로는 최하등 인간이나 지혜는 神과 동등하다. 지구촌 가족을 영원토록 구하러 왔으나 구하는 神法을 전하고 나면 오랫동안 무지한 인간들의 陰害로 비참하게 살아온 나는 다시는 오지않고 지구촌을 떠날 것이다. - 神藥本草 995쪽
옛적의 의술은 괴질과 급사병을 불치병으로 알고 있으니 지구촌에 人類를 구원하는데 신인세계를 창조하는 태양보다 밝은 나의 慧明은 神藥本草에 기록하여 지구촌에 끝없이 흐르는 동시에 완전히 물러간 전설과 같은 의학을 하루 빨리 개선한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지구촌에 사는 가족이 행복하다면 외면할 사람은 누구도 없으리라. - 神藥本草 1011쪽
나의 지혜는 태양보다 밝은 대광명을 지구촌에 사는 중생에 전하여 밝은 신비의 세계를 창조한다.....지구 일겁(一劫)의 주인공은 석가 세존이요, 종교의 창조자이며 천하교주의 시조도 석가모니다. 미륵불은 창조자의 후계자이다. 창조자는 암흑에서 대광명을 전하는 태양과도 같은 이요, 미륵은 대광명천지에 신비의 난경에서 헤매는 중생의 시야를 밝혀주는 광명을 전하는 대지혜를 전하는 자이다. - 神藥本草 후편 608쪽 나는 석가모니의 대업을 계승하는 후계자라. 전성미완처(前聖未完處)를 완전 보충하면 지구촌에 가변사원(家變寺院)하고 인인성불하여 지구촌은 극락세계로 바뀌나니라. 나는 금겁에 종말까지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기나니 나는 전생에 대각한 관음불이라. 금생에 석가모니의 대업을 완수하여 혜명천지하고 智光法界하여 신인세계를 창조하느니라 - 神藥本草 후편 611쪽 복희씨(伏羲氏) 생모(生母)를 화서(華胥)라 함은 사해(四海)를 제도(制度)하는 동해(東海) 용궁(龍宮)은 화전(華殿)이오 화세계(華世界)라. 그리하여 성(姓)을 화(華)라 하고 용왕녀(龍王女)라 오색채운(五色彩雲)과 서기(瑞氣)로 장신(粧身)하여 명왈(名曰) 서(胥)라 하니 서(胥)는 서야(瑞也)며 조야(朝野)며 길야(吉也)니 용화세계(龍華世界)에 서기(瑞氣)하리라. 용궁(龍宮)의 용녀(龍女)가 인간(人間)으로 화(化)하여 신인여성(神人女性)이니 복희씨(伏羲氏) 생모(生母)요 삼천년후(三千年後)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로 화현(化現)하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삼천년후(三千年後)에 미회(未會)와 신회(申會)에는 이만일천육백년간(二萬一千六百年間) 여천국(女天國)의 용화세계교주(龍華世界敎主)라. 세존(世尊)은 미륵불(彌勒佛)이오. 기시(其時)에 대웅전(大雄殿)은 용화전(龍華殿)이오 대웅전(大雄殿)의 대웅(大雄)은 별칭(別稱)이다. 대처자삼백장사(帶妻者三百壯士)와 단산자이백장사(單身者二百壯士)는 천하에 용명(勇名) 높은 나한배오백명(羅漢輩五百名)으로 세존의 영상회상대법회에서 세존을 일견(一見)하고 무수배례(無數拜禮)하고 성심(誠心)으로 열복(悅服)하며 대웅존자(大雄尊者)라 하여 대웅전(大雄殿)이라 명(名)하니라. 사바세계(娑婆世界)는 변(變)하여 용화세계(龍華世界)라. 용화세계(龍華世界)는 사해용왕(四海龍王)의 신술시대(神術時代)라. 핵(核)으로 살인(殺人)하는 때라도 아세아(亞細亞) 인종(人種)은 동해용왕(東海龍王) 여식(女息) 화서(華胥)의 후손(後孫)이니 화서는 생자복희(生子伏羲)하고 복희(伏羲)로부터 지구산천(地球山川)의 산신(山神)이오 불보살(佛菩薩)이라. 생중생(生衆生) 제도(濟度)는 관세음(觀世音)이오 불보살(佛菩薩)과 산왕대신(山王大神)은 화서(華胥)의 자손(子孫)이니 핵피해(核被害)는 심(甚)하지 않나니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전신(前身)은 동해용왕(東海龍王) 여식(女息) 영애(令愛)로 복희씨(伏羲氏) 생모(生母)이시고 명(名)은 화서(華胥)라. 천선(天仙)으로 삼천년 후(三千年後)에 관세음(觀世音)으로 화현(化現)하고 관세음(觀世音)은 사바세계(娑婆世界)의 교주(敎主)이시고 남섬부주(南贍部洲)에 자주 화현(化現)하니 좌보처(左補處)에 남순동자(南巡童子)요 우보처(右補處)에 동해(東海) 용왕(龍王)이라. 남순동자(南巡童子)는 옥황(玉皇)의 명(命)으로 남섬부주(南贍部洲)에 순천사(巡天使)로 왔다가 관세음(觀世音)을 만나 제자(弟子)되기를 원(願)하니 수미산(須彌山)에서 도각(道覺)하여 동자불(童子佛)이오 동해(東海) 용왕(龍王)의 화서(華胥)는 용왕(龍王)의 여식(女息)이라 동해(東海) 용왕(龍王)과 깊은 인연(因緣)이 있어 제자되기를 원하니 우보처(右補處)라. 남순동자(南巡童子)는 옥화상제(玉皇上帝)의 남섬부주(南贍部洲)의 순천사(巡天使)라. 상제(上帝)의 중신(重臣)이니 좌보처(左補處)요 동해(東海) 용왕(龍王)은 상제(上帝)의 일년간(一年間) 지구(地球)에 연사(年事)를 맡은 중신(重臣)이라 우보처(右補處)니라. 관세음후신(觀世音後身)은 용화세존미륵불(龍華世尊彌勒佛)이니라. 다음 세대(世代)는 여성천국(女性天國)이오 사원(寺院)은 용화사(龍華寺)라 용궁신전(龍宮神殿)이오 속승(俗僧)은 법승(法僧)으로 화(化)하니 여천위일(如天爲一)이로 여신동위(如神同位)라. 고해(苦海)는 법해(法海)로 화하고 법해 중생은 법계도장(法界道場)에 해탈법문을 인인수료(人人修了)하니 차위(此謂) 선사시대(禪師時代)며 불보살안락궁(佛菩薩安樂宮)이며 극락세계(極樂世界)니 해탈(解脫) 중생(衆生) 세계니라.
유(儒)의 시조(始祖)는 천성(天聖) 복희지문(伏羲之門)이오 중흥자(中興者)는 신성(神聖) 제순지문(帝舜之門)과 신성(神聖) 주공지문(周公之門)이다. 불(佛)의 시조(始祖)는 신인여성(神人女性)으로 화(化)한 사바교주(娑婆敎主) 신성(神聖)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오 중흥자(中興者)는 천선(天仙)으로 환도(還道)한 사바세존(娑婆世尊)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오 관세음후신(觀世音後身)으로 용화세존미륵존불(龍華世尊彌勒尊佛)이다. - 신약본초 후편 772쪽
인간(人間)은 상고(上古) 신성(神聖) 복희씨(伏羲氏)를 탄생(誕生)하신 성모(聖母)이신 신인(神人) 여성(女性) 화서(華胥)라. 성모(聖母) 화서(華胥)는 동해(東海) 용궁(龍宮)에 신령(神靈)한 용왕녀(龍王女)로 삼단호흡(三壇呼吸)하여도 여성(女性) 자궁(子宮)에 음기음정음백(陰氣陰精陰魄)이 극성(極盛)하면 우주(宇宙)의 양기영정양백(陽氣陽精陽魄)을 흡수(吸收)하여 상합(相合)하니 도태대신(道胎代身)에 신태성태(神胎聖胎)가 화(化)하여 신성(神聖)을 탄생(誕生)하시니라. 성모(聖母) 화서(華胥)는 기시(其時)에 인간(人間)은 난폭(亂暴)한 야수(野獸)같은 식인종(食人種)도 있으니 신인(神人) 여성(女性) 혜안(慧眼)으로 보고 그런 자손을 두고 싶은 생각(生覺)을 하니 차라리 무후(無後)할지언정 부부생활(夫婦生活)을 단념(斷念)하나 과년(過年)하니 음양(陰陽)의 힘을 피(避)하기 극난(極難)하여 최종(最終) 생각(生覺)으로 얻은 바 단전호흡(丹田呼吸)으로 천지정기(天地精氣)를 흡수(吸收)하니 남자(男子)의 큰 영물(靈物)은 도태(道胎)요 여성(女性)은 큰 영물(靈物)을 잉태(孕胎)하나니라. 세상에서 공자를 따르는 선비 신봉자들은 '인류가 생긴 이래로 공자님보다 훌륭한 인물은 없다' 한다. 석가 세존을 따르고 신봉하는 법승들은 '천상천하 무여불'이라 한다. 선술(仙術)을 신봉하는 도가에서는 노자를 '태상노군)은 천지와 함께 무궁하다'라고 한다. 주 예수를 신봉하는 교황과 추기경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구세주라 하니 앞으로 만일 나의 사후 천년 후에 나를 따르고 신봉하는 후생(後生)은 나를 과대과장하여 존대하는 이름(名辭)은 어떤 것일까? 완전한 기록이 전하여지면 나의 정체는 후세가 알 것이다. - 의사여래 155쪽
나는 전생(前生)에 대각(大覺)한 불령(佛靈)으로 환도(還道)하나 금생에 빈천하여 일생을 중노동자라 칠십육세까지 사는 동안에 마음에 무한한 대광명도 흐려지니 우주에 무한한 대광명도 따라서 흐려진다. 선망후실이라. 중생의 대각해탈을 위하여 말년에 대중 마음에 무한한 대광명을 밝혀주고자 불철주야 생각하고 있다. - 의약신성 127쪽
吾生은 神聖한 靈空의 靈素而核의 色素合成之物이오, 靈母인 天地가 人身의 小天地를 完成한 聖靈이니라. 然이나 前生의 苦行作福之功과 忍辱修德之恩을 不備하야 今生은 一生을 空白이니라. 雖然이나 至是末年하야 爲億兆蒼生之無病健康及不老長壽하야 對將傳之醫藥秘傳及靈心靈血하야 著述焉하노라. - 우주와 신약 73쪽
날 믿는다는 건 사람에게 힘든 일이라. 20시절에 집안에 무서운 환란 들올 때 사흘을 내게다 빌고 환란을 면했다, 내가 젊은 시절에 내가 부처다 하는 걸 알면서, 조금만 애가 큰 소리 하면 누가 믿어주나? 그러니 본색대로 살 수밖에. 본색이 그러니, 쪼그맹이는 쪼그맣게 살아야지. 12자 짜리 행세하니 그게 되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본색대로 살고 있잖아? 그러나 죽은 후에 유업이 있어. 난 그렇게 덕망이 높은 사람으로 오지 못했어. 그래서 육신의 세계에서는 최하의 인간으로 살고 법(法) 세계에서는 최고의 인간으로 살고. 난 인간으로 대우 받을 만한 존재는 아니야. 그렇지만 사후는 달라. 내 얘기는 글로 남게 되고 걸 이르는 무늬, 문채, 건 빛나는 거, 글로 빛나니까, 언제고 후세에는 대우 받기로 돼 있어. - 신의원초 526쪽 1909년 已酉 탄생 조선 순종 3년
음력 3월(己巳) 25일(甲戌) 하오 10시쯤(乙亥) 합경남도 흥원군 용운면 연흥리에서 아버지 金慶參과 어머니 江陵 劉氏 사이의7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꿈에 구름 속에서 神龍이 품 안으로 날아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잉태하였다 하며 같은 날 밤 할아버지 金冕燮은 꿈에 구름 속에서 鳳凰이 날아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하여 처음에는 이름을 雲鳳이라 불렀으나 얼마 뒤 雲龍으로 고쳤다.
1912~1913 4~5세
한글 自得. 네 살 위의 누나가 당시 儒學者이자, 名醫로 이름 높던 할아버지 金冕燮으로부터 '가갸거겨...'를 외우며 한글 배우는 것을 결에서 지켜보다가 한글이 陰陽五行의 원리에 따라 제정된 것임을 간파하였다. 한글의 구성 원리를 自得한 뒤 玉篇을 뒤적이며 한글본 (춘향전)을 읽고 이어 漢文本(春香傳)을 읽은 뒤 계속해서 한문본(明沙十里) (능라도) (趙雲傳) (忠烈傳) (三國志) (啓明篇) (唐詩) (杜詩) (康熙字典) 등을 차례로 독파하였다. 말과 글에 눈뜨면서부터 인간과 宇宙의 諸現象을 비롯 人身의 조직체계와 질병의 有無, 禍福壽夭 등에 대한 豫知능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였으나 가족들은 동네 사랑들로부터 '귀신붙은 아이'로 소문이 날까봐 크게 걱정하였다. 특히 조부 김면섭은 손자가 '神童'으로 소문나기 시작하자 日帝치하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못할까 저어하여 재주가 드러나는 것을 엄중 단속하였다. 아버지 김경삼의 學行이 널리 알려져 여러 곳에서 글방 선생으로 초빙된 까닭에 자주 이사를 다녔는데 이 무렵에는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天摩里에서 주로 살았다. 김경삼은 詩와 거문고에 능한 유학자로서 조선 고종 9년(壬申 · 1872)에 태어나 1952년(壬辰)에 8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이 무렵 동네 할아버지들의 서양 천문학예찬에 대한 비판론을 제기, 물의를 빚었다. '서양의 천문학은 망원경 등 관측기기의 발달에 비례하는 극히 편협된 것' 이라고 지적하고 '全宇宙를 빠짐없이 觀하고 그것을 토대로 쓰여진 글이 아니므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천박한 내용일 것' 이라고 말했다가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이때 처음으로, 자신의 뇌리에 비치는 우주의 온갖 현상과 時空을 초월하여 보이는 과거사 미래사의 비밀에 대하여 '아는 것'을 이야기해도 그것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915년 乙卯 7세
비 개인 하늘의 5色 무지개를 보고 우주의비밀과 藥理를 豁然大悟하여 공간 色素中의 藥分子 합성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病名조차 모르고 죽어가는 이웃의 불치 · 난치병 환자들을 救療하기 시작하였다.
1916년 丙辰 8세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에게 마른 명태(속초 黃太) 다섯 마리를 달여 먹이도록 했는데 할아버지(당시 이름난 儒醫)에게 건의하여 그대로 한 결과 후유증 없이 치료되었다. 동네 아이 중 같은 또래의 어느 아이가 不足症(폐암의 일종)으로 죽음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 그 아이를 유인하여 땅벌 둥지근처로 데리고 가서 벌집을 부셔서 수백 마리의 벌에게 쏘이게 하는 방법을 이용, 아이의 생명을 구하였다. 또 다른 부족증 환자에게 까치독사 한 마리를 잡아다가 엄지손가락을 물게 하는 방법을 써서 다른 부작용 내지 후유증 없이 완치시켰다. 이후 할아버지의 처방이라고 하며 자신의 처방을 제시, 病苦로 신음하는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제하였다.
1917년丁巳 9세
할아버지가 대나무통 속에 천일염을 넣고, 구워서 그것을 이용해 양치질도 하고 눈도 씻고 약이 된다며 그대로 삼키기도 하는 것을 보고 아홉 번 반복해서 구워야 하고 또 아흡 번째 구울 때는 송진 관솔 등으로 火力을 돋구어 소금을 용해시켜야만 제대로 효과가 날 수 있다는 사실과 원리를 할아버지께 설명하였다. 이로써 조상 대대로 이어져오던 약소금의 제조방법은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된다. 당시까지 전해지던 약소금 제조방법은 장작불에 한두 번 구워서 사용하거나 겻불에 구워 썼는데 그렇게 하여 쓸 경우 고치기 어려운 병에 대한 약리적 효능을 기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역한 냄새도 나므로 우주의 원리에 따른 지혜로운 제조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 방법으로 하면 소금 속 독극물의 완벽한 제거와 天上 太白星의 辛鐵粉, 대나무, 소나무, 황토 중의 妙藥합성이 가능하다는 논리다. 1924년 甲子 대한민국 임시정부 6년 16세
이해 가을, 의주에서 친구들 네 명과 힘을 합해서 당시 한국인 아이들을 괴롭히고 횡포를 일삼던 같은 또래의 일본인 아이 열댓 명을 때려눕힌 뒤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가서 광복운동에 투신하였다. 모화산 부대(대장 변창호) 대원으로 몇 번의 전투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쫓겨 소련, 백두산, 묘향산 등지로 도피 하였다. 주로 공사판과 금점판, 산판 등을 돌아다니며 막노동으로 연명하였고 때로는 산속에서 약초를 채취하여 그것을 100리 거리의 장터에 나가 팔아서 양식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가는 곳마다 독특한 仁術로써 病苦로 신음하는 환자들을 구제하였다.
1926년 丙寅 18세
평안북도 영변군 북신현면 묘향산 기슭에서 대나무에 소금을 다져 넣고 굽는 것을 아흡번 만복하여 '竹濫'을 완성시켰다. 11월 25일 할아버지 金冕燮옹이 향년 75세로 별세하였다. 철종 3년(壬子, 1852)에 태어나 향교의 典校를 역임하였고 儒學者이자 名醫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다.
1927년 丁卯 19세
평안북도 영변 장터에서 두 번째로 竹鹽을제조하였다. 손수 풀무를 만들고 드럼통을 구하여 소각로를 제조한 뒤 전남 담양에서 대나무를 구하여 천일염 50kg들이 50포대를 구워내 경비를 댄 친구들과 나누어 썼다. 이때 죽염을 이용, 만성위장병 환자들을 치료해주었고 쑥뜸요법과 병용하여 통장진 수력전기 6호 갱에서 일하는 노무자의 진패증을 고쳐주었다. 이 무렵 황해도 봉산군의 석탄광산인 사리원 탄광에서 함께 일하던 광부가 진폐증으로 죽게 되자 죽염과 한약, 쑥뜸요법을 병용하여 건강을 되찾아 주었다. 白芥子(妙末), 杏仁(妙末), 대추, 생강, 원감초를 각각 1근 반씩 한데 두고 달여서 그 탕액을 죽염과 함께 하루 10여 차래씩 복용하여 10일 이 경과하니 호흡이 편해지는 등 효과가 나기 시작하였으며 쑥뜸요법을 병용하여 6개월 만에 죽음의 병 진폐증을 완치시켰다.
1934년 甲戌 26세
봄철의 어느 날, 금강산에 숨어 있던 철원경찰서 습격사건의 주동자 변창호의 부탁에 따라 철원으로 가던 도중 金化郡 金城面에서 서로 얼굴을 아는 조선인 일본형사 李熙龍에 의해 붙잡혀 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춘천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년 6개월 되던 어느 날 작업 도중에 탈출하여 묘향산으로 들어갔다. 이 무렵 오대산의 方漢岩, 예산 덕숭산의 宋滿空, 金水月, 백벽산의 姜보살(이름 未詳) 등 善知識들과 道要를 문답하기도 하였다.
1942년 壬午 34세
充齋 金斗運, 康齋 文昌洙 등의 주도하에 추진되던 총독부 습격사건 계획에 참여, 활동하다가 이듬해 일본경찰의 예비검속에 의해 주동 인물이 모두 체포됨에 따라 또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가 설령암, 강선암에 은거하였다. 이때 김두운 문창수 김형로 최니학(최용컨의 父)이 주동인물로 검거되어 사형이 확정돼 문창수 형제와 최니학은 사형이 집행되고 김두운과 김형로는 1945년 8월17일에 사형을 집행할 예정이었으나 8월15일 조국광복을 맞아 석방되었다.
1943년 癸未 35세
평안북도 구성군 천마면의 인동 張씨 집안과 인연이 닿아 1942년부터 왕래가 있던 중 이해 여름 그 집 규수(소녀) 張永玉과 약혼을 하였다. 장영옥은 1930년(庚午)생으로 이때 열네 살이었다. 충재 김두운 선생도 이때 女息과의 定婚을 제의하였으나 장씨 집안과의 先約으로 인해 이뤄지지 못하였다.
1945년 乙酉 37세
8월 15일 조국 광복을 맞아 은신해 있던 의주 천마산 靈德寺에서 下山하여 충재 김두운 선생 댁을 예방한 뒤 16일 밤 기차를 이용, 이튿날 오전 서울에 도착하였다. 여운형 선생 댁에서 하루 묵고 이튿날 松雲 방주혁 선생 댁으로 초청되어 주로 그곳에서 머물면서 김규식 백성욱 이명룡 최영호 백운계 송진우 김성수 김범부 정인보 장덕수 김준연 조병옥 김병로 등 애국지사들과 從遊하며 國事를 의론하였다. 1948년 戊子 40세
광복 직후 松雲 방주혁 선생과 김규식 박사댁에 머물며 宋鎭禹 金性洙 金凡夫 鄭寅普 張德秀 金俊淵 趙炳玉 金炳魯 등과 從遊하며 國事를 論議한다. 白性旭 박사와 세 차례 비밀리에 만남을 갖고 庚寅사변(6·25)에 대한 대비책을 수립했으나 당시 내무부장관으로 있던(50년 2월~8월) 白박사의 進言이 묵살됨에 따라 좌절되고 만다.이에 앞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최영호, 이명룡 선생의 인도로 경무대에 있던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 한방의학과 서양의학의 장점을 상호 수용하여 국민보건향상에 이바지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양방 종합병원의 설립과 한의과대학설립, 防凌의 한방이용 등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당시 보건행정의 실권을 갖고 있던 미국인 보건담당 고문의 반대와 한방의학을 무시하는 양의계 보건행정당국 관리들의 비협조로 '한국 의학 발전을 위한 百年大計'는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이후 계룡산으로 落鄕하여 불암리 우적동(골) 삼신당, 불암리 1구 불암사, 불암리3구 백암동 서문달 등지에 머물면서 五核丹, 竹鹽 등 암약 실험과 글방 訓長, 산판木物 등으로 生計를 이어갔다. 계룡산 삼신당에 살 때는 독립지사 정원경의 큰 아들 鄭運福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한해 여름을 그곳에서 宿食하였다. 이때 만주에서 독립 운동하던 독립지사 이현익도 그곳에서 함께 기거하였다. 정운복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殉國한 아버지 정원경을 생각하여 논밭을 팔아서 독립지사 생활비를 지원하였다. 당시 정운복의 가족은 경찰관으로 일하는 世福과 광복(6.25때 사망)이 있었다. 백암동 서문달에서는 나무를 해다가 엿 달이는 집에 공급하는 것으로 생계를 꾸렸다. 김 옹은 이에 앞서 고향에 있던 아버지 경삼 옹, 구성군 천마면에 있던 아내 張永玉과 함께 越南하였다. 이해에 첫 아이로 딸 부남을 얻는다. (1950년에 딸 부남은 사망)
1950년 庚寅 42세
내무부장관 백성욱 박사와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 대한 대비책을 논의하였으나 백박사의 進言이 묵살됨에 따라 실현이 불가능하게 되자 이 해 3월에 부산으로 가서 世春한의원을 개설, 운영하였다.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1951년 辛卯 43세
충남 공주군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 마곡사 냇물 건너편 참나무쟁이 지와막 김효생씨(기와공장 기술자) 곁방서 살았다. 지와막에서는 주로 산판에서 木物일로 생계를 삼았다. 1952년 壬辰 44세 윤 5월에 아버지 경삼옹이 8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조선 고종 9년(壬申 , 1872)에 태어나 1910년 순종으로부터 通川郡守로 발령받았으나 한일합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했다. 마곡사서 북쪽으로 약 2km 거리의 동해리 태화산 기슭에 묘소가 있다. 음력7월에 장남 윤우 얻음.
1953년 癸巳 45세
겨울에 논산군 삼월면 상도리 桃花洞 박살미 계룡산 감나무골 정두채 씨(농부) 사랑방으로 이사하였다. 상도리는 본디 노성군 상도면이었는데 일본 통치이후 논산군 상월면 상도리로 개편되었다. 박살미는 그곳에 朴씨들이 주로 많았으므로 朴山메라 부르다가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대개농사를 지어 살았다. 삼도리 상월 국민학교까지는 20여리나 되는데 아이들은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1955년 乙未 47세
여름 6월에 계룡산 서편 上道里 龍華寺 골짜기 정두채씨 사랑방서 次男 윤세 얻음.
1955~56년 47~48세
서울 종로1가 평택여관(화신여관)에 묵으면서 이기붕 방조기관성격이 짙은 삼일정신선양회 조직에 참여 활동. 同會의 총재는 당시 부통령 함태영 선생이고, 부총재는 김병로 선생이었다. 이 회는 처음에 이승만 대통령의 제안으로 함태영 부통령에 의해 추진되었다. 은진의 최영호 선생이 김일훈 옹을 찾아와 대통령이 만나고 싶어 한다고 하여 上京, 경무대 서장 金長興의 안내로 들어가니 이 대통령은 '함 부통령에게 부탁해 놓은 일이 있으니 꼭 힘써 추진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서소문 함 부통령 댁으로 찾아가니 함 부통령은 삼일청신선양회 전국포직책임을 맡아달라고 하여 이를 거절하였으나 함 부통령과 김병로 선생의 强勸으로 조직 작업에 착수하였다. 먼저 구한말 남판서의 아들로서 독립 운동가이며 함 부통령과도 친한 사이인 낭상철 선생을 찾아가 중앙회 회장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 승낙을 받았다. 이에 서울의 조직과 기타 작업은 남 회장이 맡고 김 옹은 지방조직을 맡기로 약정하고 이후 조직 업무를 마친 뒤 곧바로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삼일정신선양회의 설립 취지는 좋았지만 실제로는 선거운동에 이용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재앙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56년 丙申 48세
충남 대전시에서 차녀 윤정 얻음
1957년 丁酉 49세
여름에 계룡산 도화동을 떠나 전북 남편과 운봉에서 한 달 가량 살다가 경남 咸陽으로갔다. 함양에서는 名醫로 이름난 郵泰振의정약국 사랑채에서 두어 달 지내고 하한조의 백연리 山亭에서 또 두어 달 지냈다. 이때 함양읍에서 가깝게 지낸 인물들로는 정약국, 정태진, 함양 양조장 대표 노영인, 유림면장 허사원, 함양군 교육감 정연섭, 정연창, 휴천양조장 대표 정낙현, 하한조, 윤일병, 민영조(상월면 사람) 등이었다. 겨울에 함양읍을 떠나 휴천면 행정리(살구쟁이) 삼봉산 골짜기 마을로 들어가 이계춘, 최동기, 林尙允 씨 등의 소유 빈집 또는 곁방서 살면서 함지박을 깎아 팔아다가 生計를 이어갔다. 함지박을 잘 파서 함지박 하나의 값으로 쌀 서 말 값을 받았다. 이때 함지박을 팔기 위해 지게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오도재를 넘어 마천 장터까지 70~80리 산길을 오가기도 하였고 뒤에는 주로 30리 거리의 함양 장에 내다 팔았다. 이 무협 한 친구의 부인이 胃와 膽의 오랜 고질로 고생하기에 중완에 침을 깊숙이 놓았다가 갑자기 뽑으니 피 고름이 분수처럼 솟구쳐 한동안 방안을 적시었다. 부인은'10년 묵은 체증이 확 뚫리는 듯하다'고 시원함을 토로하였다. 침을 맞고 난 이후 그 부인의 오랜 고질병은 완전히 해결되었다.
1959년 已亥 51세
여름에 三男 윤수 얻음
1960년 庚子
4월19일, 학생들의 義擧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었다. 여름에 아내 장영옥이 세상을 떠났다. 장영옥은 과거 계룡산에 살 때 그네뛰기에 능숙하여 자주 그네를 탔다. 한 번은 누가 그네의 상단 부분을 통으로 거의 잘라놓은 것을 모르고 그네를 타다가 마침 그네가 하늘 높이 솟구쳤을 때 그네 줄이 끊어져 떨어지는 바람에 重傷을 입은 적이 있었다. 이때 김옹이 약첩을 지어 복용케 하여 목숨은 구하였으나 후유증이 있을 것을 염려, '쑥뜸'을 뜨자고 권하였다. 그러나 장영옥은 '이런 세상에 무에 그리 애착을 갖고 살고 싶은 마음이 있겠느냐'며 사양해왔는데 이때 아이를 낳고 나서 腸 파열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삼남 윤수는 한동네 임상윤의 딸 순덕(당시 열서너 살) 등이 업어 키웠는데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오징어 마른명태를 자주 먹였으므로 횟배를 심하게 앓아 죽게 되었다. 김 옹은 이 무렵 서울로 갔다가 한동안 머물다 오곤 하였는데 언젠가 살구쟁이에 돌아와 보니 아이가 횟배로 죽게 되었으므로 급히 죽염을 제조하여 '活命水'에 타서 먹여 치유시켰다. 겨울이 시작되자 아이들을 데리고 삼봉산을 떠나 주거지를 서울로 옮겼다. 중구민 현동에 있던 제자 이영복의 집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고향 사람 金義煥의 요청으로 중구 주교통에 있는 그의 집으로 옮겼다. 김의환은 평북 의주군 피현면 사람으로서 김 옹과 나이가 같았으며 주교동에서 사탕집을 하였으므로 '사탕집 영감'으로 불리웠다. 1961년 辛丑 53세
주교동 김의환 씨 댁과 종로 5가 施衆한의원(피현 출신 박 장로와 공동 경영)에서 수많은 난치, 불치병 환자를 고쳐주었다. 이 무렵 서울 장안에서는 '妙香山 活佛이나타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제해주고 었다'는 소문이 한동안 사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5·16 무렵 上京하여 親知들의 집에 머물며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많은 난치병 환자들의 병을 치료해 준다.이때 쑥뜸으로 광나무 某寺의 소경 魚大師의 눈을 뜨게 하는 치료에 성공한다. 당시48세의 어 대사는 17세 때 열병을 않다가 視神經이 끊어져 소경이 된 이래 30여년동안 절에서 부처님께 다시 눈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으나 영험이 없자 좌절해 있던 참이었다. 절에 온 기도객으로부터 묘향산의 活佛이 서울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물어 물어 찾아와 '靈灸法'에 대한 가르침을 들은 뒤40일 동안 극심한 고통을 감내하며 뜸을 뜬 끝에 視力을 회복, 잃었던 光明을 되찾은 것이다. 어 대사는 그 뒤 10여 년 동안 7명의 소경을 손수 뜸으로 고쳐주고는 58세 되던 해 生을 마쳤다. 이 무렵 소문을 듣고 아들과 며느리를 보내온 마포의 어느 할머니는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는데 자신의 눈도 보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청하여 이에 뜸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할머니는 단 하루만 살아도 좋으니 꼭 눈을 보게 해달라고 졸라대어 부득이 또 '靈灸法'을 일러준 것이다. 그 할머니는 단 한 번만이라도 밝은 세상을 보고 싶은 일념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뜨더니 마침내 40일 만에 기적 적으로 광명을 되찾았다. 30대의 어느 여인은 결혼하기 전에 척수염을 않은 적이 있었는데 결혼하여 아이를 출산한 뒤 급작스레 악화되어 허리가 굽어지고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 '앉은뱅이'가 된 것이었다. 김옹의 지시에 따라 단전과 양쪽 足三里혈에 쑥뜸을 뜬지 60여 일 만에 허리가 펴지고 다리에 힘이 붙기 시작해1백 여 일 만에 가까스로 제 힘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3년간을 계속 뜨더니 몰라볼 정도로 치유되었다. 이때 간질환자, 곱사, 뇌염, 폐암, 폐결핵등 고치기 어려운 병으로 고생하던 사람들을 救療하였다. 「仁山」이라는 號는 독립운동시 묘향산 등 名山에 은거하며 仁術로 活人救世의 異蹟을 보였다 하여 石溪 文彬 先生과 希山 金承學(임시정부 독립운동 사장 겸 주필) 先生, 充齋 金斗運(平北의 大儒) 先生 등이 붙여준 호이고, 一勳이란 이름은 해방 후 스스로 改名한 것이다. 舊韓末 義兵대장 柳麟錫 선생의 제자인 김두운 선생의 門人으로서, 해방 직후 華西 金恒老의 손자인 李廣庵 先生에게 易秘傳과 中庸圖看 등을 전수받은 바 있다.
1962년 壬寅 54세
삼양동 북한산 기슭에서 산을 파내고 지붕을 얹어 토굴을 만들어 살다가 셋방을 얻어 전전하였다. 이때 1년 평균 4~5차례씩 이사를 다녔다. 재취 양씨를 맞아 四男 윤국을 얻음.
1964년 甲辰 56세
삼양동 북한산 기슭 임야에 15평 규모의 기와집을 손수 건립하여 입주함으로써 최초의 살림집 장만. 이해 8월 20일 취적신고하고 12월 30일 아이들의 출생신고로 이곳이 본적이 되었음. 당시 주소 성북구 미아동산111번지, 원적은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친마리 153번지.
1965년 乙巳 57세
재취 양씨와 이혼하고 충남 대전시 신흥동으로 주거지를 옮겨 과거에 잠시 동거하다 별거해온 대덕군 탄동의 재취 김씨와 재결합하였음.
1967년 丁未 59세
서울 중구 충무로 5가로 주거지를 옮겨 聖惠한의원 개설. 이 무렵 某 기업 회장 아들이 飮毒으로 인한 사망 직전에 쑥뜸으로 구하는 등 수많은 환자와 急死者들을 구제하였다.
1969년 己酉 61세
충무로 5가 양모 변호사 소유 2층 집으로 주거지 옮김. 환갑 맞음
1970년 庚戌 72세
주거지를 종로구 수송동 혈액은행 건물로 옮김. 이때 家財를 기울여 오핵단, 죽염등 각종 암약을 실험. 이 무렵 (대한화보) 71년 11월 호부터 72년 7월 호까지 8면에 걸처 '神宗哲學 易秘傳' 기사 연재. 극심한 火傷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오이생즙을 먹여 구하는 등 무수히 구제.
1973~74년
수송동에서 종로구 창신동, 중구 장충동등지로 이사 다니다가 7월 14일 경남 함양군 함양읍 상동으로 주거지를 옮김.
1975~78년
함양읍내에서 교산리 봉강, 상동 155-3번지 등으로 주거지를 옮겨 다니다가 78년 11월 서울 도봉구 수유동 397의 1번지로 이사함. 이 기간 중 '醫藥富國의 길'을 제시하는 내용의 대통령께 올리는 建議文을 일곱 차례 제출. 서울역 앞 동자동 고려한방병원에서 난치병 담당 고문으로 病者구제에 힘썼다.
1980년 廣申 72세
수유동 399의 9번지에 거주하며 (字宙와神藥) 저술하여 출간. 1981년 辛酉 73세 (宇宙와 神藥)의 한글화를 시도한 (救世神方)을 출간. 12월 31일 경남 함양읍 하동586-3번지로 가족을 데리고 낙향.
1983년 癸亥 75세
주거지를 하등에서 상동(운림리) 154의3 번지로 옮김 (45년 광복 이후 78회째)
1986년 丙寅 78세
암 난치병과 각종 괴질에 대한 일생의 경험 醫方을 모아 (神藥) 출간. 6월 20일 한국일보 12층 대강당서 (神藥) 출간 기념강연회 갖고 '神蒸의 實相과 그 활용방법'이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1987년 丁卯 79세
이준승, 조백간, 남기민 등의 발기로 서울프레스센타 19층에서 2백여 명의 발기인이 동참한 가운데 민속 神藥연구회가 창립되고 김옹을 終身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이 모임은90년 3월 '건강문제연구시민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89년 己巳 81세
김옹의 仁術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바램에 따라 월간 (民醫藥) 89년 7월호로 창간돼 김옹을 회장으로 추대
1990년 庚午 82세
월간 (民醫藥)의 제호를 4·5월호부터 (건강저널)로 변경하여 발행. 이 잡지는 김옹의 특이한 醫方을 연구 실천 보급하는 한편 東西醫學의 상호 수용을 통한 발전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4월에 상동(을림리) 154의 3번지 自宅을 처분하고 함양읍 竹林里 山194의 3번지에 낡은 집을 허물고 26평 규모로 조립식 판넬 주택을 지어 입주하였다. (79회 ) 그러나 이집이 무허가 주택이라는 이유로 철거됨으로써(자진철거) 다시 竹林里 1048-2 인산죽염 제조장 부지내로 옮겨 지은 조립식 주택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이로써 김옹은 1945년 광복이후 모두 80회의 이사기록을 갖게 되었다.
1992년 壬申 84세
84세 때인 1992년 임신년 음력 3월 3일, 가족들을 모이게 한 뒤 '세상에 남기고 가는 말'을 녹음토록 한다. " 인업을 중시함이 부국의 지름길 " 이라는 요지의 이 말씀은 유언이 되었으며, 그 녹음한 전문이 시사춘추 92년 4월호에 수록되었다.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 대한 사랑과 나라에 대한 충정, 세상 사람들에 대한 효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선생은, 1989년부터 1992년초까지 삼남댁인 신약당에서 거처하시다가 1992년 5월 19일(음력 4월 17일) 오후 11시 25분 경남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함양아파트 차남 윤세 씨 집에서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감하고 선계로 떠났다. 선생이 가신 뒤 생전에 환자들을 맞아주던 이곳 삼봉산 인산농장 산등성이에 법구를 안장하였으며, 7월 6일 지리산 실상사에서 봉행된 사십구제때는 평소 자신의 사후에 나오리라고 예언하였던 '神藥本草'를 영전에 바쳤다.
출처 : 神醫 김일훈 |
첫댓글 난반을 드실 때는 따뜻한 물과 함께 드시면 안 됩니다.
난반이 불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홍부원장님이 알려주신 내용이에요.
그리고 2044년 완전한 미회가 시작되기 전에 핵이 폭파할 수도 있다고 하니, 미리 준비하시고요.
미회의 시기에는 서양에서 태어난자는 900년의 수명, 동양에서 태어난 자는 1800년의 수명을 누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생에서 부터 인산 선생님이 일러주신 방법을 해 온 사람은 그 보다 더 많은 수명을 누리고요.
이제 23년이 남았네요. 이렇게 짧은 시간안에 극난의 시기이자 개벽의 시기가 오는 줄 몰랐습니다.
저도 정신 차리고 영구법에 집중을 하려고 합니다.
돼지작은 창자를 구하려고 하니, 검색으로는 나오지 않네요.
그래도 어떻게든 구해봐야지요. 저는 영구법을 하니 괜찮은데 저희 가족들 때문에 구해야 합니다.
사리장은 비싸서 제 형편에 무리이고, 황태는 동해산이나, 북한산이 이제 안 보이니 사용을 못하겠고요.
러시아산은 북한산에 비해 맛이 확실히 못해요....
그럼 준비 잘 하셔서 어려운 시기 잘 버텨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