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수도회의 개혁자 성인
원죄없는 잉태의 요한 바우티스타
(San Juan Bautista de la Concepción,
Reformador Trinitario)
1. 머리말
삼위일체 수도회는 800여년의 긴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수도회이다. 12세기 말 십자군 전쟁 때에 잡혀갔던 그리스도인 노예들을 구출하는 활동을 중심으로 사목 활동을 이어 나갔으며 자비 활동으로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 그리고 순례자들을 맞이하여 그들에게 식사와 쉴 곳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400여년 이어 오던 삼위일체 수도회는 유럽 내 흐름에 따라서 개혁에 따라 많은 것들 것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 교회 밖으로는 종교개혁과 식민지 점령이라는 굵직한 사건들이 발생하였고, 교회 안으로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여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가톨릭 신앙 교리를 적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이어져 오는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개혁자 성인, 원죄 없는 잉태의 요한 바우티스타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 수도회의 영적 쇄신을 이끌어내었다.
이미 오래 시간 이어 오며 그 의미가 무디어진 수도 공동체 생활에 다시 성령의 기운을 불
어넣었으며, 망각 속에 사라져 갔던 두 창설자 성인들을 기억과 전통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그렇게 개혁자 성인은 강한 의지로서 수도회가 생존하길 바랐었고, 두 창설자들을 성품을 보편 교회가 확인해 주길 청하였다. 그렇기에 로마의 성 카를리노 공동체 (Comunidad de San Carlino)를 창설하여 두 창설자의 성품이 인정되어 성인들의 목록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핵심적인 거점으로서 활용하였다.
성인은 일찍이 비범하였고 신앙에 일찍 눈이 뜨인 경건함을 품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어릴 때부터 많은 신부와 수사들과 어울렸으며 그들을 통하여 수도 영성을 천천히 키워 나갔다. 스페인의 가톨릭 황금 시기, 16세기 중엽, 십자가의 성 요한과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의 중심 인물이었던 ‘성 요한 데 아빌라 (San Juan de Ávila)와 ‘성녀 데레사 데 헤수스 (Santa Teresa de Jesús)’와도 직간접적인 연을 갖게 되었으며, 삼위일체 수도회의 주요 성인들인 ‘시몬 데 로하스 (San Simón de Rojas)’와 ‘미카엘 델로스 산토스 (San Miguel de los Santos)’, ‘가경자 토마스 델라 비르헨 (Venerable Tomás de la Virgen)’과 같은 시대에 사셨다. 삼위일체 수도회 안에서는 이 시기에 4명의 성인들의 시대라고 부른다.
2. 개혁자 성인, 요한의 탄생
삼위일체 수도회의 개혁자 성인으로 알려진 원죄없는 잉태의 요한 바우티스타는 스페인의 ‘알모도바르 델 캄포 (Almodovar del Camp)’에서 태어났다. 태어나고 일주일이 지난 날 자신의 삼촌 ‘알폰소 리코 (Alfonso Rico)’ [1]에게서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성인의 일곱명의 형제를 두었다.
3. 개혁자 요한의 가족
개혁자 성인은 가족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았다. 이는 중세 16세기 당시 수도원에 입회하여 축성생활을 시작하게 됨과 동시에 가깝게 지낸 이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가족과의 관계를 더 이상 이어오지 않는 관습 때문에 생긴 빈 공간으로 추정이 된다.
한 전기 작가 ‘메르초르 델 에스피리투 산토 (Merchor del Espíritu Santo)’의 말에 의하면 개혁자 성인 요한 가르시아 리코는 아빌라의 성 요한의 친척으로 추정이 된다고 한다. 아빌라의 성 요한 역시 같은 고향인 알모도바르 델 캄포 출신이기 때문이다. 전기 작가 ‘후스토 데 헤수스 (Justo de Jesús)’는 개혁자 성인과 함께 살아왔던 기간동안 그의 아버지의 성인 ‘히혼 Jijón’이 ‘아빌라의 성 요한’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전한다. 아빌라의 성 요한의 어머니의 이름이 카탈리나 히혼[2]이다. 즉, 개혁자 성인의 아버지 ‘마르코스 가르시아 히혼’의 외가 쪽 집안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3.1. 아버지와 어머니
스페인은 오래전부터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 둘 다 이어받았다. 그렇기에 개혁자 성인의 세속의 이름인 요한 가르시아 리코에서 첫번째 성인 ‘가르시아’는 아버지의 성을 딴 것이며 ‘리코’는 어머니의 성을 딴 것이다. 아버지는 본명은 ‘마르코스 가르시아 히혼 (Marcos García Gijón’이며 어머니는 ‘이사벨 로페즈 리코 (Isabel López Rico)’ 이다. 일반적으로 어머니의 성씨인 로페즈를 따는 것이 맞지만 성인은 입회를 하고 서원을 하면서 로페즈를 따지 않고 어머니의 두번째 성인 리코를 따오게 된다[3].
3.2. 형제
아버지 마르코스와 어머니 이사벨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총 여덟 명이다. 안토니오, 프란시스카, 이사벨, 알론소, 요한, 마리아, 안나 그리고 프란시스코이다. 개혁자 성인은 다섯째로 태어났다.
3.3. 양성과 수도자로서의 자질
성인은, 큰형 안토니오의 말에 의하면, 일찍이 4살때부터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학교가 아닌 교육을 해주는 기관으로 볼 수 있다. 그 곳에서 꼬마 요한은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어린 나이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다고 한다. 하지만 문법은 7살이 될 때야 가정에 방문을 하던 사제를 따라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어렸을 적 요한은 선행과 금욕을 행하는 것에 자유로웠다. 고향의 80세가 넘으신 이웃 할아버지는 꼬마 요한이 덩굴안에서 돌을 배게 삼아 자는 고행을 하는 것까지 목격했다고 증언하였고, 수도 규칙을 배우고 알기 위하여 마을의 가르멜 수도원에도 찾아가기까지 했다고 한다[4].
뿐만 아니라, 요한 성인은 수도자들 사이에서 예의 바르고, 겸손하며, 신심이 강한 자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 그의 행실이 그 어떠한 순간에도 순결에서 멀어지는 적이 없다고 증언해 주고 있다. 전기 작가, ‘후스토 데 헤수스 (Justo de Jesús)’는 요한이 아홉 살이 되던 때에 동정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순결을 서원하고, 이 서원을 지켜 나갈 수 있게 은총을 청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언급을 한다.
4. 다른 수도자들과의 관계
개혁자 성인은 예수회와 가르멜 수도회와의 관계가 많았다. 1556년경 예수회는 요한 성인의 고향인 ‘알모도바르 델 캄포’에 수도자를 파견하여 예수회 수도원을 창설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하지만, 수도회 내부적 여건과 환경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그리고 교회법적으로 창설이 매듭지어 지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회가 들어오면서 요한 성인의 집과 가까운 곳에 예수회 학교가 설립이 되었다. 이 학교에서 그 마을의 왠만한 아이들이 모여들어 읽고 글을 쓰는 법을 배웠다. 정확한 역사적 사료가 남아 있지는 않았지만, 확률적으로 요한 성인도 어렸을 적에 이 예수회 학교에서 4살부터 공부를 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회 수사들을 따라다니며 성찬의 전례 예절과 고해성사 예절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배웠으며 교리 역시 듣고 복습을 하였다고 한다.
14살이 되단 해, 어린 요한은 가르멜 수도자들과의 연을 맺게 됩니다. 예수회에서 가지고 있던 제산이 가르멜 수도회로 양도하면서 인연이 시작되게 됩니다. 가르멜 수도원에서 마을 주민들의 학문에 도움이 될 수 있게 라틴어 문법 가르쳤지만, 문학 (Arte)의 경우 수도자들에게만 가르쳤다. 하지만 어린 요한은 자신의 정리 정돈된 삶의 형태와 신앙생활 그리고 경건한 마음가짐을 높게 사서 가르멜 수도원에서 일찍이 문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가르멜 수도원과의 관계는 날로 발전을 하여서 가르멜 수도자들과도 친분을 쌓아 나갔다고 한다. 특히나 수도원에 하루 종일 머물면서 기도를 하고 묵상을 하며 수도자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수도자들의 삶을 보면서 그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에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자금을 모아들이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어린 요한은 가르멜 수도회의 스승 ‘아구스틴 델로스 레이예스’ (Agustín de Los Reyes)에게 교육을 1년 받으며 성장해 나갔다. 아구스틴 스승은 요한을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서 교육을 하지 않았고 그의 영적인 성장이 온전하게 이뤄질 수 있게 인도해 주었다. 그렇게 돈독하게 다져진 가르멜 수도자들과의 친분은 이후 개혁의 여정 속에서 큰 위기를 맞이할 때에 그가 찾아 갈 수 있었던 곳이기도 하였다.
5.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의 만남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또는, 성녀 데레사 데 헤수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 데레사로 알려진 성녀이시다. 이 만남은 요한이 가르멜 수도원에 매일같이 방문을 했던 시기에 성녀 데레사가 알모도바르 델 캄포를 방문을 하면서 가르시아 가문에서 묵으면서 일어났던 일이다.
성녀 데레사가 가르시아 가문의 집에 8~10일가량 머무를 당시 마르코스와 이사벨 (개혁자 성인의 부모)의 자식들을 하나씩 자상하게 바라보시다가 이사벨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모성애가 가득하신 당신, 이 여덟 명 중에 두 명, 그 중에서도 한 명은 위대한 성인이 되어 많은 영혼의 보호자요 먼 훗날 일어날 위대한 일의 개혁자가 될 것입니다’.
당시 ‘알모도바르 델 깜뽀’의 사목 책임 신부 ‘크리스토발 막시아 (Cristobal Maxía)’는 당시 데레사 성녀가 세비야에 새로운 공동체를 창설하기 위하여 오고 가면서 방문을 하였으며 어린 요한에게 장차 대단한 인물로 성장할 것이라는 예언적 대화를 직접 두 번 목격하였다고 언급을 한다.
6. 어린 요한의 첫번째 성소 식별: 가르멜 수도자가 될 뻔하였다.
어린 요한이 수도자 그리고 성직자 성소를 갖게 된 것은 어렸을 때부터 찾아가 함께했던 가르멜 수도자들의 영향이 크다. 그가 수도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릴 즈음, 그의 가르멜 수도자 스승인 ‘아구스틴 델로스 레에스’ (Agustín de los Reyes)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가르멜 수도회는 기쁜 마음으로 어린 요한을 받아들여 그에게 가르멜 수도복을 수여하려 하였지만,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어린 요한은 가르멜 수도복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삼위일체 수도자가 된 후 작성한 그의 저서 (Obras Completas)에서 이 알 수 없는 이유는 ‘끝없는 지혜’ (Sabiduría infinita)라고 하며 가르멜 수도자가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기록을 남긴다.[5] 몇 년이 흐른 뒤 삼위일체 수도자가 되어 다시 만난 아구스틴 스승과의 만남을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가 내가 톨레도 공동체의 삼위일체의 수도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엄청 아쉬워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나에게 수도복[6]을 입혀주길 원했다. 낙담을 한 나의 좋의신 스승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시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뭘 보시나요? 몇 년이 지난 뒤라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 같군요.’ 그가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의 지혜와 섭리하심을 지금 바라보고 있구나. 어떻게 네가 친분이 있고 사랑을 그렇게 받은 개혁 가르멜 수도회의 수도자가 되지 않고 삼위일체 수도자가 될 것이라고 상상이라도 했겠느냐! 주님께서는 적절한 목적과 섭리하심을 위하여 내 계획을 망치고, 그(주님)의 힘은 모든 수도회에 뻗쳐 있구나!’»[7]
이렇듯, 개혁자 성인의 어린 시절은 삼위일체 수도회와 깊은 연관이 없었고 오히려 예수회와 가르멜 수도회와 더 많은 연을 쌓아 나갔었다. 심지어 교리나 신앙의 기초를 배운 곳도 역시 가르멜 수도회였기에 그의 영적 스승이었던 ‘아구스틴 델로스 레예스’도 낙심을 하며 안타까운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하느님의 섭리하심은 이렇듯 메마른 황무지에서 꽃을 피어나게 하시고 아이 갖지 못하는 여인에게서 나라를 구원할 자식을 낳게 하시는 분이시며, 전혀 관련 없을 것 같은 곳에서 삼위일체 수도회의 성소를 꽃피우시는 것처럼 인간이 형용할 수 없는 하느님의 부르심이다.
[1] 개혁자 성인의 본명은 요한 가르시아 리코다. 가르시아는 아버지인 마르코스 가르시아 히혼의 성에서 따왔으며 리코는 어머니인 이사벨 로페즈 리코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기에 세례를 준 사제는 외가쪽 사람이다.
[2] 아버지는 알포소 아빌라, 어머니는 카탈리나 히혼이다.
[3] Juan Bautista de la Concepción: Su obras y Regado, Juan Pujana, Secretariado Trinitario, 2015, 26
[4] Idem, 42
[5] Obras Competas, San Juan Bautista de la Concepción, I, 9
[6] 가르멜 수도회 수도복
[7] Obras Completas, San Juan Bautista de la Concepción, II, 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