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차
공차로서의 보이차
청(淸)나라 옹정(雍正)7년(1927년) 운남성(雲南省)의 총독(總督)(중국 명청(明淸)시대의 성(省)의 장관)인 악이태(顎爾泰)는 제일 좋은 보이차청을 선택하여 단차(團茶), 산차(散茶)와 차고(茶膏-차를 달이어 고약같이 만든 것)로 만들어 황실에 최상품 차를 공물로 받치며, 보이차는 공다(貢茶)들중에 하나가 되었다.
「보이차는 이름이 온 천하에 퍼졌고, 맛이 제일 진하였으며, 수도에서는 특히 비쌌다.」 더욱이 「여름에는 용정(龍井)을 마시고 겨울에는 보이(普洱)를 마신다」는 궁정미담(宮廷美談)이 있었다.
정부에서는 최상품 차의 품질과 수량을 규제하기 위하여 「공물을 바친후에야만이 비로서 민간에서의 매매를 허락하다」고 명문으로 규정하였고,
「산에 들어가서 차를 만드는 사람이 수십만명이 된다」고 하였고, 보이차의 사업은 한동안 매우 성행하게 되었다.
「차는 은생성(銀生城)경계의 여러 산들에서 나오고, 흩어져서 거두어 들이며, 따서 만드는 방법이 각각 달랐다.」
보이차도 원래는 산차였었는데, 언제부터 보이차를 형태가 갖추어진 차로 만들었을까?
唐宋(당송)시기, 혹은 그 이전에 대부분 여러 가지 차를 덩어리로 만들었다는 것만 알고 있으며,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에는 매우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明태조는 명나라를 세우고 즉시 「단차를 폐지하고 산차를 진흥 시켰다」. 단차는 돈이 있는 사람이나 귀족들이 좋아하는 사치품이라고 인정하고, 투차(鬪茶)(차 시연 겨루기 대회)의 쓸데없는 유희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단차의 생산을 금지하고, 산차로 제조하라는 법령을 세웠으며, 동시에 산차로 공물을 바치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전통적인 團茶의 모습을 보유하고 있고, 때려 부수어 散茶로 변하지 않은 것도, 역시 고증할 바가 없는 것이다.
운남의 총독 악이태는 보이부 녕이현에 공차차창(貢茶茶廠)을 세우고, 보이공다를 근 200년 동안 만들어 왔다. 중요한 점은 단차인 보이공다를 제조하였을 뿐만아니라, 더욱이는 크기가 서로 다른 단차 형태를 만들었다.
「보이차의 덩어리는 大, 中, 小 세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큰 것은 덩어리 하나에 다섯근씩 되고, 마치 사람의 머리모양과 같아서 인두차(人頭茶)라고 불렀으며, 해마다 공물로 바쳐져서 민간에서는 구하기 힘들었다.」 이 때문에 그런 다섯 근 짜리 큰 덩어리 공차를 「인두공차(人頭貢茶)」라고 불렀다.
공차로서의 보이차는, 모두 어린 새싹의 여아차(女兒茶)로 만들어 진다. 「여아차도 역시 어린 새싹인데, 곡우(穀雨)후의 것을 골라서, 1근으로부터 10근까지 덩어리로 만든다.」 여아차는 이족(夷族) 소녀들이 딴다는데서, 이름이 붙여졌다. 「모두 이족 소녀들이 따서 만들어 판 돈으로, 혼수비용을 모은다. 하여 이름지어졌다.」
「이른바 보이차라는 것은, 보이부의 부근에서 생산하는 것이고, 모두 부(府)에 속하는 사모청(思茅廳)경계에서 생산한다. 사모청이 다스리는 차생산지는 여섯곳이 있다...... 2월사이에 극히 가늘고 흰 잎을 따고, 모첨(毛尖)이라고 부르며 공물로 바친다.」 인두공다를 제조하는데 쓰이는 보이차엽은, 모두 1급의 아차(芽茶) 였으며, 오랫동안 보관하면, 황금빛 색깔로 변해버릴 수 있기에, 「금과공다(金瓜貢茶)」,혹은「금과인두공다(金瓜人頭貢茶)」라고도 불렀다.
운남의 총독 악이태는, 사모청을 경영하는 차엽총점을 설치하고, 제일 좋은 보이차를 선택하여 조정에 공물을 받쳤으며, 사모로 하여금 육대다산의 차엽을 구입 판매하는 곳이 되었다.
지금의 보이자치현의 현성인 녕이에는, 옛날에 보이차를 집결하여 마차가 빈번하게 다녔던 길 하나가 남아 있다. 보이공다의 다청은, 운남성의 제일 남쪽 경계의 육대다산에서 부터 왔고, 말의 도움으로 2.3백리의 옛 차 유통로의 길을 걸어서, 보이부 녕이현 현성의 보이차창으로 운송하여 왔으며, 다시 정제가공을 거쳐 여러 가지 유형의 보이공다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