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변씨(原州 邊氏)
황주 변씨에서 분적한 계통으로
시조 변안열은 황주변씨의 시종인 변려의 17세손이다.
고려 말에 절신(節臣)으로 유명한 대은 변안열은
포은 정몽주와 함께 기울어져 가는 고려 사직을 일으키기 위해
강인한 절개를보여주었다.
대게 이방원이 지은 하여가의 답가로 정몽주의 단심가가 전해지나
이외 안열의 불굴가가 있다.
......."가슴팍 구멍 뚫어 동아줄로 마주 꿰어
.......앞뒤로 끌고 당겨 갈켜지고 쏠릴 망정
.......임 향한 그 굳은 뜻을 내 뉘라고 굽히랴"
안열은 고려 충정왕 때 원주 부원군에 봉해져
원주에 정착해 살았으므로
후손들이황주 변씨에서 본관을 나누어
원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시조 변안열(邊安烈: 자 忠可, 호 大隱)은
본래 중국 사람으로 원(元)나라에서 원수(元帥)로 있다가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행하여 고려에들어와 귀화했다.
<원주변씨세보(原州邊氏世譜)>에 의하면
송(宋)나라말에 우리나라 황주(黃州)에 와서 정착한
변요(邊요)의 아들
여(呂)가 고려를 섬겨 태천백(泰川伯)에 봉해졌고, 그의 현손
순(順)이 다시 원나라로 들어가 심양후(瀋陽侯)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 양(諒)이 이를 계승했다고 한다.
변안열은 양의 둘째아들로 원나라에서 원수(元帥)를지내다가
공민왕비인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종,
고려에 들어와 장군으로 많은 공을 세워
원주부원군(原州府院君)에 봉해져서 원주(原州)를 본관으로 삼았다. 안열은 1361년(공민왕10) 안우(安祐)와 함께 홍건적을 격퇴시켜
2등 공신으로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에 승진,
이듬해서울을 수복하고 1등공신이 되었으며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승진되면서
추성보조공신(推誠補功臣)에 올랐다.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최영(崔營)과 함께 제주를 정벌한 후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문하평리(門下評理)를 역임했다.
우왕때
양광(楊廣).전라도 도지휘사(都指輝使)겸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다.
이어 도순찰사(都巡察使) 이성계(李成桂)의 부장으로
운봉(雲峰)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정방제조(政房提調)가 되었다.
단양.안동의 왜구를 몰아낸 후
원주부원군에 봉해지고
판삼사사(判蔘司事).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시조의 묘소는 남양주군 진건면용정리에 있으며
매년 음력10월 첫째 일요일에 향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