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는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웠습니다. 그리고 말하길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묻지요. 그러자 예수께서 가련히 여기는 마음으로 파랗게 질리고 두려워 떨고 있는 여인을 한 참 바라보신 후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니 모두들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나갔습니다. <요8:1-11>
당시 유대교 율법은 공자의 유교사상보다도 더 지엄하여 이런 여인은 대중이 보는 앞에서 돌팔매를 맞고 죽음을 면치 못하는 관습이 있었지요. 예수께서 그런 엄격한 율법사회에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셨다는 것은 매우 쇼킹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율법을 초월한 이런 인간애적 모습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위대한 사랑이 아닐까요? 이런 마음을 쇼펜하우어는 ‘동고(同苦, Mitleid)’의 감정이라 하였습니다.

동고의 감정으로 중풍병자를 치료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하나라는 사실을 통찰하는 경우에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 자신의 고통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동고(同苦, Mitleid)’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참된 선은 칸트에서처럼 정언명령(단언적 명령)에 대한 복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인 에로스와 구별된 형태의 사랑, 즉 아가페(agape)와 카리타스(caritas-아가페의 라틴어역)인 것이다. 동고의 감정이 곧 진정한 사랑이다. ”모든 순수한 사랑은 동고이고, 동고가 아닌 모든 사랑은 사욕이다. 에로스는 사욕이고, 아가페는 동고의 감정이다. - - - ‘동고’의 감정이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과 같은 것으로 느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4권 의지로서의 세계. 윤리와 금욕주의 -
창세기 제1장 제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였지요. 이는 온 우주의 주인이며 주권자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안에서 동등한 피조물이며 ‘하나’라는 가르침이지요. 하여 아담스미스는 하나님의 것이며 인류공동의 유산인 자연을 어느 특정한 사람들이 경제권으로 행사하는 것도 잘못(죄)이라고 국부론에서 지적하였지요.
하나님 안에서 모든 인류는 하나이기 때문에 피조물의 아픔은 하나님의 아픔이요, 내 이웃의 아픔은 내 아픔이라는 것을 창조 이야기에서 은유하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늘 하나의 마음으로 사회로부터 소외된 자들을 위로하셨고 동고(同苦)의 감정으로 병자들을 치료하고 위로해 주셨지요. 이런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우리가 믿음이 부족하고 역량이 부족하여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직접 돌보진 못하더라도 심적으로나마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잘 되도록 하는 게 그리스도인의 최소한의 도리와 양심이 아닐까요?
코로나 19가 2단계로 이미 격상되었고 조심하지 않으면 곧 3단계로 격상되어 모든 국민경제활동이 중지될 위기의 때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자기 욕심만 차리는 사람들이 있군요. 히포크라테스의 박애정신을 선서한 의사들이 응급환자가 병원을 찾지 못하여 사망에까지 이르렀는데도 죽어가는 이들을 내버려 두고 데모하는 모습들 또는 전염병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교회모임을 자제해 달라는 방역당국의 신신당부를 무시하고 예배를 강행하겠다고 결의한 목사들도 있다니 이런 행위가 과연 옳은 일인가요? 주님은 어쩌면 이 시간 두터운 방호복을 껴입고 땀 흘리고 고생하며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겠다고 수고하는 의료진들과 최 일선에서 동고(同苦)하는 자들을 찾고 계시진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