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헤어져! 그럼 편할까?
마음이 진정될 시간이 필요했던 주리는 한동안 해율의 연락을 피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해율이 참지 못하고, 주리의 집을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기태의 도움으로 혜주는 자리를 피해준 상황이었고, 집에 혼자 우두커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던 주리. 집안의 정적을 깨트리는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겠거니, 무신경한 태도로 천정만 바라보며 침대에 누워있는 주리.
초인종을 눌러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해율은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톡톡’ 거리며 두드렸고, 역시나 아무런 반응은 없었다. 도저히 견딜수가 없어 기태를 통해 도어락 비밀번호를 전해 받은 해율.
[띡. 띡. 띡. 띡. 띡. 띡. 띡. 또르릉.]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주리는 혜주이겠거니 생각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그 말에 이어 들리는 상대의 더 낮은 중저음 목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아 현관문이 열리는 쪽으로 시선을 옮겨 확인하는 주리.
“여, 여긴 어떻게... 아니,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허... 다시 존칭. 쟈기, 무슨 일 있었어? 휴가 이틀 동안 못 본다더니 내내 연락도 안 되고, 톡을 보내도 답도 없고, 집에 찾아와서 아무리 벨을 누르고 두드려도 반응이 없더니 안에 있었던 거야?”
“.......”
“쟈기, 어디 아파?”
혹시나, 여행 다녀와서 아파서 연락이 안 됐던 건가 싶어서 냉큼 달려와 주리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보려는 해율의 손길을 무심결에 ‘탁’ 쳐내버리는 주리. 그런 주리의 태도에 조금 당황한 듯 선 해율.
“쟈기, 왜 그래...”
“.......”
“하... 말을 해야 뭔지 알고, 내가 무슨 방법이라도 찾아볼 거 아냐. 왜 그러는 건데? 내가 뭘 잘못한 거야?”
“정말, 몰라서 묻는 거?”
“그럼! 몰라! 왜 그래애~ 왜 그러는 거냐구우~”
“....차마 내 입으론 말을 못하겠네. 자, 봐. 이거.”
해율의 앞으로 휴가를 떠나있던 그날 메시지로 받은 사진 한 컷. 그 것을 보자 해율은 머릿속에서 그날의 일들이 너무도 선명하게 스치듯 그려졌고, 본인도 이상하다고 계속 생각했던 그날의 일 중 기억하지 못하는 딱 한 컷이었다.
“아, 아니 이게 그러니까... 이 사진 누가 보냈어?”
“지금 그게 중요해? 이걸 보고도? 그 말 밖에 할 말이 없어?”
“내가 전에도 말한 적이 있었잖아, 이전에 만났던 친구라고.”
“전에 만났던 친구면 이런 사진 찍고 그래도 되는 건가? 난 왜 아무 말도 납득이 안 되는 걸까? 내가 너무 이상한건가?”
주리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처럼 큰 두 눈에 눈물이 그득하게 고이고 있었다. 그런 주리를 보는 해율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프다. 하지만 어르고 달래서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란 것쯤 해율도 잘 알고 있다. 한번쯤은 주리와의 사이에서 닥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단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마주하게 되리란 생각은 못한 해율이다. 그래도 그날의 상황을 주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변명처럼 들릴 설명이라도 해야만 했던 해율.
“내 딴엔 한다고 했는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졸음이 쏟아져서 내가 잠든 사이에 그런 사진이 찍힌 것 같은데, 그니까...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해도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어, 이해 안 돼. 헤어진 사람과 아직도 이정도로 가깝게 만나고 있다는 걸로 밖에. 아무리 생각을 하고, 또 해봐도 도대체 어떤 식이면 이럴 수 있는 건가 싶고. 아니, 생각하고, 생각해 봐도 이 사진은 설명이 안 돼 더라고. 내가 그 7년이란 연애의 기간을 너무 쉽게 나로 잊혀 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봐. 내가 너무 자만했던 거지... 지금 이 한번으로 끝이 아니겠지. 앞으로도 또 이런 일이 없으리란 보장도 없고.”
“안 돼. 그만, 그만 말해.”
마치 이별을 암시하는 주리의 말에 해율은 더 듣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매달리듯 뱉어낸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해율에게 주리는 어쩌면 모질어보일 만큼 냉정했다.
“헤어지자.”
“.......”
단호하고, 간결하게 뱉어낸 이별통보에 해율은 서있던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풀썩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그리고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주리를 바라본다. 주리는 해율을 보면 냉정하게 마음먹지 못할 것 같아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려 버린다.
“자기가 그렇게 힘들었다면... 알았어. 자기 마음 추스를 때까지 내가 기다릴게. 꼭 연락 줘. 기다리고 있을게.”
해율의 말이 끝나고서도 시선을 맞추지 않는 주리를 한참동안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해율이 발길을 돌려 주리의 집을 빠져나온다. 현관문이 ‘철컹’ 닫히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해율은 현관문 밖에서 문에 기대서서 흐느끼듯 눈물을 흘려내고, 주리는 침대에서 조금도 옮기지 않고 한참을 펑펑 운다.
* * * * *
[1주일 후]
누가 봐도 시련당한 여자임이 팍팍 느껴지게 쓸쓸함을 풍기고 다니는 주리. 회사 내에서 ‘봉주리 남자한테 차였냐?’는 질문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모든 자초지종을 알고 있는 혜주는 주리를 설득해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해주고 싶지만 남녀사이는 둘이 알아서 해결해 나가야된다는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 관여하지 않고 지켜보고만 있는 상태다.
“봉대리, 점심 먹으러 가자.”
“안 먹을래. 생각 없어.”
“그러다 쓰러지겠어. 뭐라도 좀 먹자. 응?”
“.......”
혜주의 걱정스러운 말에도 울컥 눈물이 글썽이는 주리. 조금만 더 건드리면 ‘툭’하고 터져버릴 것 같아서 혜주는 말없이 자리를 벗어난다. 기태와 마주하고 앉아서 요 근래 늘 대화의 화두는 해율과 주리의 이야기다.
“둘 어떡하면 좋지? 해율씨도 같은 상황?”
“나야, 해율이랑 같이 사는 건 아니라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그 일 얘기 듣고 그래도 평소보다 자주 연락하는 편인데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 그냥 미친 듯이 업무숙지에만 몰두하는 것 같더라고.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견디지 못할 것 같은지...”
“아니 서로 그렇게 힘들면서 도대체 왜 헤어진 거야?”
“해율이는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 팩트 대로 말하면 주리씨가 이별통보하고, 힘들어하는 거지...”
“뭐야, 지금 이 상황에서 주리 탓하는 거야?”
“아니, 그렇게 힘들어 할 거 왜 이별을 고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 뭐 그런 거지.”
“주리는 원래 그래. 남녀 사이에 신뢰가 무너지면 끝이라고 생각하거든. 근데 그 날 그 일이 해율씨에게 신뢰가 무너졌다고 생각한 거 같아. 그래서 관계를 지속해도 그 일이 계속 다툴 때마다 화두가 될 거고, 결국은 그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겠지. 사실 그 일을 만든 건 다 복우리 그 년 짓인데, 왜 아무 문제없던 두 사람만 이렇게 된 건지... 진짜 길 가다가 우연이라도 내 눈에 안 뗘야 돼. 나 진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거든.”
애써 더 말을 잇지 않고, 입을 앙 다무는 혜주. 그런 혜주의 성격을 잘 알기에 기태는 더 이상 부추기지 않는다. 만일 부추기게 되면 당장이라도 그 당사자를 어떻게 해서든 찾아가서 사단을 내고도 남을 성격이기 때문이다.
* * * * *
하루에도 몇 수십 번 휴대폰을 집어 들어 보지만 벌써 일주일째 아무런 연락이 없는 주리. 수차례 전화를 걸려다 말고를 반복하고 있는 해율. 오늘도 역시 실무숙지를 위해 SSO본사 사무실 한편에서 전산사용법, 이런저런 양식들 이해도를 위한 업무를 배우면서도 온통 머릿속에는 이러는 동안 혹시 주리에게 온 연락을 못 받고 지나치지나 않을까 싶어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놓지를 못한다.
“해율군. 기다리는 연락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안 그래도 회장님이 만나고 있는 여성분을 언제 데려 올 거냐고 성화십니다.”
“요즘 업무량이 갑자기 많아져서 시간이 안 나서요. 조만간 시간 내서 약속 잡고 말씀드리려고요.”
“하하, 어서 그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해율군이 요 근래 그렇게 행복해보일수가 없었는데. 어떤 힘든 업무를 설명하고, 알려줘도 귀찮아하는 거 없이 어찌나 열정적이던지... 보기 좋더군요.”
“최실장님, 제가 또 언제 그렇게 귀찮아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다음은 또 뭐해야 되죠?”
해율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계속해서 주리의 얘기를 하고 있다 보면 참고 있던 인내심이 견디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회사 앞이든 집 앞이든... 아니면 연락이든 뭐라도 하고 말 것 같아서 말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게 처신을 제대로 못한 자신의 탓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리의 마음이 단단해질 시간을 줘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힘들지만 꾸역꾸역 참아내며 견디고 있는 거다.
‘당신, 내가 이렇게 힘들게 버티며 기다리고 있는 거 알아요? 너무너무 보고 싶지만, 만지고 싶지만, 듣고 싶지만... 또 오늘도 참아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