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태권도의 역사와 유래를 명확히 찾기란 쉽지 않다.
프로태권도라는 이름이 나온것을 유래로 본다면, 본 연맹에서는 1979년 프로태권도라는 이름을 만든 구판홍회장으로 본다.
구판홍회장은 한국킥복싱의 창시자로써 알려져있는 인물이다.
구판홍회장은 원래 대한태권도협회 오도관 전남 본관장이였으며, 제자들에게 태권도의 지도보급과정에서 기술적으로 가장 강한 무술을 만들고자 태권도, 복싱, 유도, 레슬링 등의 특성을 종합적으로 절충하여 치고,차고,던지고,꺽고,조르는 종합무술로 체계화하여 킹투기라는 무술을 독창적으로 창안하였고, 1968년 4월 일본의 노구치 오사무회장이 무에타이라는 태국의 전통무술과 일본의 극진가라데를 접목시켜만든 기꾸복싱과 한국의 킹투기를 킥복싱으로 명칭을 통일하기로하고 한일간의 국제교류를 합의하여 킥복싱이라는 무술을 한국에서 최초로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구판홍회장
윗글에서처럼 태권도오도관 전남본관장이자 한국킥복싱의 창시자인 구판홍회장이 1979년 프로태권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음은 1979년 2월23일 경향신문기사다.
기사내용보기
태권도의 프로화가 조심스래 정착지를 물색하고 있다. 이와같은 움직음은 세계프로태권연맹 사무총장이자 한국프로태권협회 회장 구판홍씨(43.공인9단.전오도관장.한국킥복싱협회회장)가 세계프로태권연맹 홍본부를 서울도봉구 미아3동 202의1에 개설하고 오는 6월 제1회 세계무술대회를 서울문화체육관에서 개최키로 확정되었다고 알림으로써 드러났다.
구사무총장에 따르면 현재 세계프로태권연맹 총본부는 재일거류민단 중앙본부 상임고문인 정경화씨를 본부장으로하고있으며 이번 한국본부의 신설로 11개 각국본부가 설치되게 되었다는 것.
오는 6월에 열릴 제1회 세계무술대회는 한국프로태권, 일본프로가라떼, 태국프로킥복싱, 중국 십팔기, 프로복싱선수들이 체급별로 풀리그를가져 우승자를 가린다고.
구사무총장은 [지난해말 일본에서 열린 제1회 한국프로태권대 일본프로가라떼대회에서 한국프로태권 경중량급 1위 이혁(31)과 일본 프로가라떼 경중량급 2위 가미류(22)가 겨루기를 벌여 이혁이 2회에서 왼팔골절상을 입고서도 5회에 가미류르르 찍어차기, 돌려차기로 KO시켜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전했다.
손가락찌르기, 정권으로 치아공격 및 국부공격은 반칙. 프로태권도도의 해외원정경기 개런티는 승자1천달러, 패자 5백달러선.
한국프로태권협회에는 50명의 회원이 있는데 프로태권도가 정착지를 확보하여 흥행에 성공할지는 두고볼 일이다.
그 이후에도 여러가지 자료에서 프로태권도를 찾아볼수 있다.
아래는 또하나의 1981년 1월19일 경향신문에 실린 또하나의 프로태권도 기사이다.
이때부터 프로태권도는 손과발에 사용하면서 글러브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아마추어 태권도에서는 보지못하는 타격으로 초반에 K.O가 속출함으로써 프로태권도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이후 여러 프로태권도단체가 생겨나게 되고, 경기가 열리게 되는데 그중 주목할만한 것이 1999년 10월 서울힐튼호텔에서 미르메컵 프로태권도 대회가 공중파 방송인 MBC에서 녹화 중계 됨으로써 크게 알려지게 되었다. 총 상금 3천 3백 만원이라는 당시로서는 큰 규모의 상금이 걸린 대회로 상당한 이슈가 됐었으나 흥행은 500여명 정도의 관중만이 들어오며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대한프로태권도연맹과 (주)태권도신문사의 공동 주관으로 진행이 된 이 대회에는, 네덜란드(Nelissen Jean-Michie), 스페인(David Vives de Jong), 일본(Akeomi Nitta)에서 각각 초청된 3명의 실력이 검증된 선수들이 참가를 하였고, 참고로 총 8명의 선수들이 K-1과 같은 방식의 토너먼트 대회로 1명의 챔피언을 가리는 방식이었으며 우승상금 2천 만원은 준결승전에서 닛따 아케오미를 누르고 결승에서 박현곤 선수를 화끈한 KO로 물리친 임치빈 선수가 차지하게 되었다.
흥행여부를 떠나서 이 대회는 한국 격투기의 역사상 한 획을 그은 대회로 평가받게 되었다.
국내에서 최초의 팔각형 링을 도입했고 새로운 형태의 경기용 안전 장구 개발 그리고 공중파 방송인 MBC의 중계가 있었다는 점, 과거 킥복싱 스타일의 프로태권도 대회에서 탈피한 마케팅과 홍보 전략 등은 나중에 태권도의 프로격투기 대회를 기획하는 여러 단체들에게 하나의 표본이 되었다.
2001년 4월 21일에 사단법인대한프로태권도연맹의 인정하에 (주)세계태권도신문사와 (주)용프로모션주관하고 (주)미르메컵프로태권도조직위원회가 주최한 제2회 미르메컵 프로태권도대회가 성남 종합운동장 실내체육관에서 개최된 이후 현재까지 제3회 미르메컵프로태권도대회는 개최되고 있지 않다.
2003년 이종격투기 바람과 더불어 개최된 세계태권도헤비급 최강전이 프로대회의 성격으로 2004년에 개최되었으나 태권도 룰에서 큰 변화는 주지 않고, 포인트를 기술의 난이도에 따라 1∼4점으로 세분화 시켰으며 선수가 15초 동안 공격이 없을 시에는 1점 감점시키는 점수제를 체택하였으며 프로 대회의 성격에 따라 오픈된 매트 위가 아닌 8각형의 링에서 도복 대신 갑옷 형태의 경기복을 착용하고 경기를 하였다. 그러나 이대회는 프로대회의 성격을 가졌으나 주먹에 의한 안면공격은 허용하지 않아 올림픽태권도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주먹에 의힌 안면가격이 태권도경기에 있어서 많은 이슈가 되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2005년 대전청도관동대전도장의 후예들이 주먹에 의한 안면가격은 아마추어 룰에서는 허용되기가 힘들것으로 판단하여 프로라는 이름하에 자유롭게 주먹에 의한 안면가격 허용 룰을 만들어 태권도의 무도성과 실전성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국제프로태권도연맹을 창설하게된다.
태권도청도관동대전도장 1972년 6월3일 경향신문기사
국제프로태권도연맹 이외에도 국제프로태권도협회, 대한프로태권도연맹, 세계프로태권도협회등 몇개의 협회들이 활동을 하고있다.
또한 국제프로태권도연맹에서는 프로태권도프로그램을 성인태권도프로그램 및 생활체육으로 보급하기위하여 전국생활체육프로태권도조직위원회를 결성하고, 국내프로태권도단체로써는 유일하게 대전중구에는 생활체육의 한종목으로 프로태권도가 결성 가입되어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