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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믿음과 행함의 상관관계 글: 김강석 목사 ( A4 13포인트 75페이지 분량이라 두번에 나눠 올렸습니다. ) 믿음과 행함의 문제는 일찍이 종교개혁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자들에게 큰 오해와 혼란을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믿음을 주시고 인간이 그 믿음으로 열심히 행해서 믿음을 키워 주기를 바라보는 입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를 행함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소관이고 행함은 우리들의 소관이라고 오해하여 그 행함의 책임론을 강조함으로써 믿음으로 구원을, 행함으로 상급을 기대하면서 믿음과 행함을 분리시켜 이해합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으니 신자는 당연히 그 받은 믿음을 잘 활용해서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함이 없다면 믿음이 게으른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함을 기준으로 해서 믿음을 판단해 버립니다. 믿음이 좋으면 그만큼 행함도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행함을 소위, 교회생활이라는 틀 안에서 행해지는 것들 즉, 이 세상의 도덕과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선행 등을 믿음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에게 있어서 행함은 신앙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의 기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혹자는 알미니안 주의 성향을 갖고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의 조건을 두 가지로 이야기 하면서 인간 측에서의 행함을 믿음과 함께 영생의 조건으로 주장하여 오직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하는 것을 포함하여 믿음+행함으로 보고 야고보서를 빗대어 행함이 없으면 구원이 없다 라고 까지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행함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니까 이 역사 속 현실 속에서 주어지는 선하고 착한 일, 즉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행함을 내세워 도덕과 윤리적인 선행과 헌신, 구제, 봉사, 전도, 이웃 사랑 등의 종교적인 실천을 예로 들어 이야기 합니다. 그런 행함이 있어야 참된 믿음이고 의인이 될 수 있는 조건의 행함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다른 타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들입니다. 도덕과 윤리적인 착한 삶과 종교적인 것들은 기독교인에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종교를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제나 전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신자의 믿음에 삶에 도덕과 윤리와 종교적인 모습이 포함이 되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지만 반면에 정작 윤리와 도덕과 종교적인 것들이 믿음의 의한 삶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질적인 믿음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다른 세상을 소망하며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세상을 소망한다는 것은 기존 세상의 가치에 대해서는 소망을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가 추구하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적 믿음은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 거류민, 외국인일 뿐이고 내가 영원히 거할 본향을 찾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고, 하나님으로만 가능한 것이 구원문제인 것입니다.(막10:27/엡2:8)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으로 말미암아 이제 온 세상에 하나님의 의가 공포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에 공포로 말미암아 생겨난 세상이 바로 은혜의 장이요 믿음의 장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믿음이라는 것은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와서 오늘 우리에게 당도한 것이지 우리 쪽에서 십자가로 나아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인간 편에서 나온 것을 부정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새롭게 주어진 것입니다.(엡2:-9)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처음부터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의 자질로는 예수님을 믿을 가능성이 단 1%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믿음의 주체를 인간자신에게 둘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고 우리에게 그 믿음을 잘 키워서 좋은 믿음으로 만들라고 하신 것이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치 못한 믿음을 주셨고, 완전치 못한 믿음을 완전한 믿음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들 소관이라는 의미가 돼 버립니다.
그러나 믿음은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인 자기백성을 통치하시고 다스려 가시기 위한 한 방편으로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믿음이 신자를 장악하고 다스림으로써 구원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나”라는 주체가 부정이 되고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의존이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그 믿음에 의해 새롭게 된 “나”라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생각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신자의 그 모든 것의 그 옛 사람적 자기의 뜻, 자기생각, 자기열심, 자기의지가 삭제되어진 것입니다.(갈5:24) 왜냐하면 옛 사람의 특징 안에 머무르는 신자는 결과론적으로 자기 뜻이나 의지, 자기 열심의 모든 것은 다만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한 성향으로 발휘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주어짐으로써 세상이 아닌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된 신자는 더 이상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한 길을 가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고 그 뜻이 이루어지는 길에 복종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 소원이 그 마음에 있는 신자라면 더 이상 그의 뜻이나 의지, 자기열심 등의 이 모든 것들은 자기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증거 되는 방향으로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마음을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얹어 놓기 위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보내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시고 땅의 것을 소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소망하도록 하는 실상이 되어 하나님의 의지대로 사용되어지도록 이끌고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비워지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끌고 가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우리 안에 착한일(구원=영생)을 시작하신이가 그리스도예수의 날까지 반드시 완료 된다고 말함으로써 그 행하심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면서 믿음을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하여 그 행하심에 의해서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흔적(증거)을 가리켜 선한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바울은 그 믿음을 가리켜서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것 즉 다른 말로 나의 존재가치와 이 세상의 허무함을 깨닫게 되어지는 자기부인의 삶을 가리켜 믿음에서 발휘되는 행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행함과 믿음은 같은 말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야고보 사도도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함과 믿음은 같은 것인데 이걸 분리해서 설명하니까 그래서 야고보가 그 행함이 있는 믿음의 예로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라합의 경우는 자기나라까지 팔았던 여자입니다. 자기나라를 팔았다는 것은 죽은 목숨과도 같습니다. 바꿔 말하면“나는 이제 죽었으니 하나님이 살려주세요! 라는 자기부인의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복을 받은 신자는 그렇게 자신의 옛 사람적 육적자아가 살해되는 현장으로 내몰리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선한 행함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에서 비롯된 모든 것이 부정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그 지향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의 신앙은 이제 어떤 지향성으로 끌려가느냐 하면 ”나“라는 존재를 이 역사와 우주에 주인공으로 삼아 살려고 했던 그 모든 행위들을 내어놓는 그 삶에 하나님이 방해꾼으로 개입을 하여 예수님만이 내가 의존해야할 존재이며 하나님의 나라만이 내가 소망해야할 곳이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그런 자기부인의 삶으로 가시로 막고 담으로 막으면서까지 몰아가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신자에게 허락 된 모든 것에서 부인되어지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드러나는 삶의 자리로 밀려 내려가는 것이 자기부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함은 믿음에 의한 자기부인의 몸짓인 것이지 믿음을 부여받은 자가 자기의지를 발동하여 신앙의 현실화의 측면에서 성취해 내야하는 짐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야고보 사도도 행함이 없는 믿음이 어찌 있을 수 있니! 라고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 야! 너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착한 일 안하면 니네들 다 가짜다! 이런 말이 아니라 믿음과 행함이 같은 이야기인데 그런데도 너희들은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엉뚱한 행함을 이야기하고 있구나! 이것이 당시 유대주의에 대한 일갈이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니네 믿음 있는데 왜 착한일 안 하니!가 아니라 믿음은 그 자체가 행함이기 때문에 너의 행위와 가치를 부정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자각과 인식 속에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재창조의 사역인 예수그리스도의 행하심을 의존하는 것, 그걸 받아들이고 믿고 그것만을 의지하는 것이 착한 행함인데 너는 왜 다른 착한 일을 갖고 와서 이게 믿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현대 기독교 신앙인들이 유교적인 전통과 동양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야! 믿음 있는 자가 왜 그렇게 착하게 안 살아!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양의 사상이나 종교나 철학은 존재의 궁극적 근원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그들의 관심은 존재를 있게 한 어떤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립 된 존재로 인식 된 보이는 인간에게만, 즉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동양사상에서는 그 존재자체의 그 행위와 수고에 의해서 그 존재의 향후 미래의 양태가 결정이 되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논리가 핵심사상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존재가 원인이 되어서 향후의 결과를 도출해 낸다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이런 동양사상에서는 나의 어떤 행위나 삶이 다른 이들의 삶에 반드시 영향을 준다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원인이 되는 삶을 지금 살아서 현실을, 일상을 살아서 나의 미래를 결정짓는 삶을 끌어당기는 것도 내가 도출해 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의 수련이나 성실함이나 착한 삶 등을 통하여 미래의 자기 위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마치 공식처럼 정확하게 원인에 의한 삶에 대한 결과로서의 삶이 분명 우리에게 이렇게 계산 되어 주어진다 라는 것입니다. 이게 동양철학입니다.
그런데 이게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 차등 상급론으로 변화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의 자체가 동양사상에 이미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상에 기인한 신자들은 너나할 것이 없이 하늘로부터 복이 주어지는 것은 인간의 행위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여 복이라는 것도 인간이 잘한 것에 대한 댓가로 또는 상으로 주는 것이지 잘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에게 복이 주어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도 행위가 보태져야 온전한 믿음이고 믿음다운 믿음이지 행위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한국교회는 중국의 워치만니의 영향을 받아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그러한 신앙의 현실성을 독려하기 위해 그렇게 교훈적 설교와 권선징악의 설교를 함으로써 오히려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결과로 초래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의 행함에 대해서 미래의 되어질 날을 보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미래의 되어질 날을 이미 확보 받고(하나님보좌 아래에 앉혀진 자로) 이 역사 속에 내려온 창세전에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이든, 상이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댓가로 주신 것이 아니라 댓가성이 아닌 은혜로서, 선물로서 공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늘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신자들의 삶 속에서 어떤 상(象)이 맺혀져야 합니까? 구제, 봉사, 선행, 종교행위 등은 당연히 맺혀져야할 상(象)이지만 그러한 것들은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서 나타나야할 상(象)은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나는 죽고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의존하여 그분의 이끄심에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나”라는 주체가 부정이 되고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이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나는 다 비워지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끌고 가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통치하심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상(象)을 드러내는 이들은 자기 뜻대로 뭐가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대교회가 인간의 열심을 믿음으로 강조하고 복을 받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내세워 인간의 종교적인 열심을 부추겨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열심을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도구로 삼아 믿음 하나 있으면 세상의 모든 일이 해결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믿습니다 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것입니다. 이룰 줄 믿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그렇게 됩니까? 아닙니다. 신자는 자기의 뜻과 의지를 부인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요 21:18절 이하에서 베드로에게 주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나서 이제는 베드로의 뜻대로 못 산다고 하신 것입니다. “젊어서는(자기가 주체가 됐을 때) 네가 스스로 띠 띠우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성령이 오심으로 성령께서 주체가 됐을 때) 남이 네 팔을 벌려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간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또 다른 혹자는 말하기를 성화에는 영적성화와 육적성화가 있는데 영적성화는 구원과 관계가 되고 육적성화는 이 세상에 살면서 복과 관계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영적성화는 믿음에서 온 것이므로 생명이냐 사망이냐? 로 나누어지고, 반면에 육적성화는 율법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축복이냐 저주이냐? 가 달려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은 단번에 온 것이고 복과 저주는 점진적으로 우리 인간의 삶의 노력에 따라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 점진적으로 오는 성화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들으면 그럴 듯하게 맞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럴 듯하다는 것은 이 세상의 보편적인 상식선의 카테고리에서 봤을 때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혹자의 주장처럼 성경에 나타나난 인물들은 하나 같이 육적인 복을 못 받는 사람이겠네요? 특히 신약의 사도들은 말할 것이 없고요? 왜냐하면 그들은 감옥에 갔고 장 돌에 맞고, 매도 수없이 맞았던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사십에 감한 매를 태장으로 5번이나 맞고 배를 타고 가는데도 강풍이 일어났고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심지어 잠도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함으로(고후6:5) 인하여 고생을 찍사라게 했는데 그럼 구원은 받았지만 이 땅에서 복을 받지 못하고 죽었네요? 그럼 한 번 볼까요?
고후 11:23-30절 “ 11: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11:25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11: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11: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11: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 한 번 생각 해 보자구요? 머리에 생각이 있으시면? 이렇게 고생한 사도바울은 혹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 땅에서 전혀 복을 받지 못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구약의 요셉은 어떻습니까?(창39장) 성경의 저자는 요셉이 바로의 시위대장 애굽사람 보디발의 가정총무로 들어가고, 그 주인의 처가 동침하자는 요청에 거절하여 감옥에 있을 때를 가리켜 형통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성경을 왜곡 시키냐구요?
야곱은 어떻습니까? 야곱은 어머니 태중에 만들어지기도 전인 영원 속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완성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에게는 복 받은 자라는 확정된 미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반드시 그 복 받은 자의 자리로 수렴되고 완성이 되어져야 합니다.
야곱이 아무리 자기의 꾀와 지혜를 동원하여 날고 기어도 그의 인생은 그리로 반드시 수렴되어져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 전체의 야곱의 삶을 아주 작은 그림으로 축약하여 보여주는 것이 바로 얍복강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의 후손들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같이 미련하고, 우매하며, 유약하고, 야비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에 깊이 간섭하시며 씨름하셔서 그들의 옛 사람이라는 그 육적자아로 포장되고 위장된 옷을 벗겨 버리시고 마침내 당신이 확정해 놓으신 복 받은 자들로 회복시켜 내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야곱이라는 옷을 벗기시기 위해 그를 쫓아 다니시면서까지 그가 복 받은 자라는 것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열심히 자기의 꾀를 이용하며 자기 살 궁리를 하고 있었고, 그런데도 하나님은 계속 그를 쫓아가시면서‘내가 너에게 복을 주고 네 자손을 번성케 하겠다. 네 자손을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번성케 할 거야! 하시면서 계속 쫓아다니셨습니다. 야곱은 이미 세상적 관점에서 봤을 때에 많은 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쫓아 다니시면서까지 복 줄게? 너는 복 받은 자야! 라고 확인시키셨던 것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옛 세상 안에서 야곱이라는 옛 사람의 옷을 입고 거기에 만족하고 거기에 안주하기를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야곱이라는 옷에 금장을 둘러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은 그와 씨름을 하여 그가 걸치고 있는 그 옛 사람의 옷을 벗겨버리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철저하게 패배해야 할 야곱의 모습을 계속해서 폭로합니다. 일은 전부 다 야곱이 저질러 놓았는데 하나님이 그 뒤를 쫓아가시면서 해결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야곱이라는 옷을 다 벗기 전에 야곱이 죽으면 안 되기 때문에 살려놓아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지키고 보호 하신다라는 의미는 바로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식으로 완성시키시기 위해 우리를 죽지 않게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죽여가시는 것입니다. 그게 지키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복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야곱의 인생 속에 나타난 수많은 갈등과 시비와 다툼은 사실 형과의 싸움도 아니었고 외삼촌 라반과의 싸움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야곱의 싸움은 바로 하나님과의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원하는 자기 욕심을 따라 살려고 했던 그 야곱에게 하나님이 씨름을 걸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복 받은 자는 반드시 그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과의 씨름을 하고 있어야 됩니다. 만약 그 씨름과 관계없는 자라면 로마서 1장에 저주 받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이 내버려두신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반면에 하나님이 내버려두시지 않고 그 자녀로 택한 이들은 반드시 좇아가시면서 씨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는 반드시 그 씨름이 있어야 됩니다. 야곱의 인생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우리의 옛 자아가 얼마나 강한지 우리는 하나님마저도 적으로 간주하여, 하나님도 이길 수 없을 만큼 집요하게 어두움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게 인간의 절대자아 챙기기의 추악한 집요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는 그와 씨름하시는데 야곱이 안 집니다. 이것이 “나”라는 우상들을 섬기는 우리 인간들의 고집입니다. 나는 나를 절대 못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을 이길 수 없었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하나님을 이겼다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살려고 하는 그 옛 사람에 대한 연정, 우리가 내어 놓은 그 옛 사람에 대한 그 연정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못 이기더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계획과 야망,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마저도 적으로 간주하여 씨름하며 죽여 버리려 하는 인간의 더럽고 집요한 그 죄성이 가장 확실하고 극명하게 폭로된 곳이 어디입니까? 십자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이 죄인들과의 씨름에서 그들에게 져 버린 꼴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졌습니다.
창세전에 복을 받기로 택해진 어떤 일련의 야곱들이 그 자리에서 그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이스라엘로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자기는 계속해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여 그 분을 죽이려고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은혜가 불가항력적으로 닥쳐와서 그를 예수 안에 넣어서 죽이고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 해 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마저도 이기려 하는 인간들의 이기심과 탐욕과 자아숭배를 자기 아들의 품에 넣어 죽이시는 사건을 야곱의 환도 뼈가 위골되는 것으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마저도 이겨서 자신의 유익을 챙기려 했던 야곱의 추악한 고집이 하나님의 의해 꺾여버리는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 환도 뼈라는 것은 전인(全人), 전 존재를 총칭하여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환도 뼈가 위골 됐다라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죄인으로서의 야곱의 전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사실상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죽지 않고 그 자리에 그를 품어 안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이스라엘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야곱이 환도뼈 위골이 되자 그는 지팡이가 없으면 다닐 수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나님! 저는 절대 하나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니 하나님 말씀에 항복하고 순종하는 자로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지팡이신 하나님! 나를 도와주옵소서! 그게 성도의 인생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환도뼈의 위골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평생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위해서는 하나님과 이웃을 짓밟고 심지어 죽여 버릴 수도 있는 그러한 자였다는 것을 폭로당하고, 확인하며, 수긍하고, 인정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단 한순간도 서 있을 수가 없는 절름발이입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성도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왜 나는 십자가라는 지팡이만 짚고 나는 병신(절름발이) 되어서 그렇게 살아야 되는지를 배우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김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았던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지팡이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단 한 순간도 올바로 설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된 야곱이 평생 지팡이를 의지하여 자신의 죄된 실체를 반추하고 기억했으며, 결국에는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고 자신의 전 존재를 그 분께 의탁한 자로 그 분의 품에 안기게 된 것입니다. 죽을 때에도 그 지팡이만 의지하며 죽었습니다. 이게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게 복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신이 되어버린“나” 하나님에게도 지고 싶어 하지 않는 그“나”를 죽이러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법을 가지고 이미 들어와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에게 전쟁을 선포하시고 이 육의 사람, 즉 옛 사람적 그 육적 자아를 죽이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고 이제 예수 안에서 몸과 법이 하나가 된 새 몸으로 나를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갈5:24) 이게 그리스도와 나와의 연합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이게 새 언약입니다.(렘31:31-34/겔36:26-28)
이렇게 법이 몸과 일체가 되면 그 몸에서 나오는 게 모든 것이 선의 재료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 방식이기 때문에 새 언약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들은 법과 몸이 하나가 되어서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몸과 법이 일체가 된 자로, 법을 지킨 자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being=존재 됨) 이제 성도는 법 지킴이 의무사항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새 언약 하에서 몸과 법이 일체를 선물 받은 자들이 내어 놓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다 합력하여 선의 재료로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 언약 하에서의 신자는 자기를 부인하며, 완성된 미래에서 흘러오는 시간을 인식하면서, 창세전에 확정된 결론으로 지향하는 자신들의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미래에다가 자신들이 이루어내서 채울 업적이나 공로나 외모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 속에 결정되고 확정된 자신들의 결국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까지 그 묵시 속 완성된 결론을 얼마만큼 배우고, 알아차리고, 인식하면서 살아 왔는가와 지금 내가 그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감격하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 현재 내가 바로 그 삶을 살고 있는가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인간의 본질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때론 우리의 인생의 밑바닥으로( 경제적인 여건과 이 세상의 신분의 추락을 말함) 끌고 가심으로써 그 자리에서 우리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하시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도 대개는 예수님을 믿으면 자신의 삶이 편안해 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신자를 편한 인생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사랑이며 예수님의 동행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반대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예수님의 고난에 자기백성을 끌어 들이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자기백성들이 그와 같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가 생명이심을 믿으며 그 그리스도로 기뻐하게 하는 복음의 능력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로 인하여 멸망의 세상에서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보배로운 분이심이 증거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주어진 믿음은 신자인 우리를 밑바닥으로 끌어가고 그 자리에서 우리 인간의 본질을 바라봄으로써 예수그리스도가 왜 생명일 수밖에 없는가를 절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더욱 주님께 붙들리는 것을 믿음의 자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람이라는 것은 외적인 행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의 자람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우리를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이끌어 가고 그 관계에 붙들어 놓고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자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강하게 내 안에서 부각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 은혜는 밑바닥까지 추락한 인간의 본질에서 크게 부각되는 것으로 그 인간의 본질을 보게 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환상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 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에 대한 환상은 점차 희미해져 가고 대신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 됨으로 감사하는 것이 믿음의 자람입니다.
이러한 자람은 성령이 함께하신 신자에게서는 자연히 발생되는 현상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힘과는 상관이 없는 자람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바울도 그의 서신서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들의 믿음의 자람과 함께 사랑이 풍성해지고 핍박과 환난 중에서 인내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믿음이 자란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의 자람은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세상의 조건은 천국에서는 전혀 쓸모없다는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형제를 만나거나 인간관계를 가질 때 이 세상의 조건을 전혀 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처럼 인간의 혈연관계나 인간의 친분관계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만을 나누고 교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의 자람은 다른 이들에게 바로 이러한 사랑의 풍성함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자 안에서 믿음의 자람은 그 어떤 시련과 환난에서도 주님의 고난을 보게 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의 현실을 보기 때문에 시련과 환난 또한 신자가 가는 생명의 길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당연한 것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믿음의 자람으로 인해 나타나는 흔적들입니다.
믿음에 의해서 인간의 본질로 끝없이 내려가고, 자신의 본질을 바라보는 자리에서 그동안 자랑거리였던 세상의 것을 내려놓은 채 생명 되신 예수님을 자랑하게 되는 심령이 늘어가는 것, 이것이야 말로 교회의 참된 부흥입니다. 이 믿음의 자람이 곧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부흥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소중한 것은 자기가 개척하고 개발하고 이루어 내야할 이 세상에서의 미래나 거기에서 뭇 사람들에게 얻어내는 평판이나 평가가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미래를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거나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확정된 미래를 향한 하나의 거쳐야 할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영적인 복과 육적인 복을 나눌 수 있다고요? 아닙니다. 절대 이원론적으로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도 그의 서신서 롬 8:9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고 ---또 롬 8:14절에서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가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성도 안에 살아계신 보배로 오신 성령에 의해 살아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지, 그 성령이 떠난 상태의 성도는 역시 죽은 자에 불과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죽은 질그릇 안에 산 보배이신 성령을 담은 자로 살고 있기 때문에 신자는 반드시 그 보배를 드러내는 삶으로 살게 되어있지, 자신의 열심과 노력으로 그 질그릇에 금칠하는 삶을 못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도 요 6: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성령이니) 육은 무익하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그의 서신서 롬 6:11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겨주신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을 반복해서 입버릇처럼 그의 서신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구조를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갈 2:20절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처럼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 성도의 몸은 죽고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다시 살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내 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로 신령적 한 몸 관계로 연합되어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성도는 이렇게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 된 관계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함께 죽고 그가 부활하실 때 함께 영원히 산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개별적인 자기의 몸을 주장할 수가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주체가 되시고 성도 자신은 객체의 자리로 밀려 내려가야 맞다는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며 자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후 4:7절 이하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4: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
이처럼 신자가 당한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 즉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그러한 환란이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인생은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진 인생이었습니다. 자신을 치장하거나 자신을 위한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짐으로 그 죽음이 자신에게 흡수되고 침투되어서 자기 속에 확산되기를 원하는 인생이었습니다.
마치 임신한 엄마의 몸 안에 새 생명이 잉태되면 그 엄마의 모든 영양분이 그 아이에게 빨려 들여 흘러가 아들로, 자녀로 출산되기 위해 성숙되어지는 것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씨를 받은 사람은(요일 3:9=성령) 그의 옛 사람을 죽여서 그 안에 뿌려진 생명의 씨가 온전한 생명으로 성장하도록(자라나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애를 쓰는 모습으로 필연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엄마의 몸이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잉태되는 그 아이에 의해 보기 싫은 모습으로 망가지는 원리처럼 우리가 이 육신의 몸을 새 생명에 의해 먹히고 점령당하여 자기를 부정당하고 결국에는 새 생명으로 확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이 세상 속에서 가시적으로, 영의 눈으로, 믿음으로 바라보는 걸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 자신도 어떤 환난도 이겨낸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인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보배를 품고 살아가는 질그릇의 인생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깨어질 연약한 질그릇으로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흙에서 나서, 흙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살다가, 흙으로 다시 돌아가는 흙으로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피조물은 창조의 은혜 아래에 있을 때 비로소 존재이며 그리고 그때에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가치 있는 존재로 고후4:7절 이하의 바울의 표현대로 질그릇 안에 보배가 담겨 있는(보배를 품은 형국으로)구조로 살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내 안에 들어가신(내주하신)예수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도바울도 자신을 깨어질 질그릇으로 표현을 하면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 라고 했던 것입니다. 본래 질그릇의 특성은 토기장이가 질그릇을 만들 때에 그 필요에 따라 내용물의 용도에 맞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만들어진 질그릇은 그 주인의 용도에 맞지 않을 때에는 깨어서 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질그릇의 가치는 질그릇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질그릇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쌀을 담고 있으면 쌀 항아리가 되고, 쓰레기를 담고 있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값진 보화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보화를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사사기 7장의 말로 바꾸면 기드온의 전쟁에서 미디안을 부수는 항아리 속의 횃불로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그 횃불을 감싸고 있는 질그릇인 항아리가 깨어져야 그 항아리 속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그 횃불의 역할로 말미암아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전쟁의 주체자이신 하나님이 승리케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보배를 가진 질그릇으로 자신의 자격과 조건과 능력과 열심히 치러지는 전쟁이 아니라 철웅성 같은 인간자아 숭배의 현장을 치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육적 자아 해체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렇게 육적자아가 해체되어야, 항아리가 깨어져야 그래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관계가 평화(화목)의 관계로 회복 되어지는 것이고 이게 자기부정이고 자기부인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는 큰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질그릇 자체는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그릇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드러내 보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질그릇을 깨뜨림으로 그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방법과, 또 하나는 그 속에 무엇인가를 가득 채우면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아~! 그 속에 무엇이 들었구나! 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질그릇의 가치는 질그릇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물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 내용물의 가치를 올바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내용물이 밖으로 반드시 드러나 보여 져야 합니다. 호두열매는 단단한 껍질이 겹으로 싸여 있기 때문에 망치 등으로 깨뜰어져야 호두라는 속 열매가 우리 머리에 좋다는 견과류를 보고 먹을 수 있듯이 사도바울도 고후 4장에서 예수그리스도와 성도와의 관계성을 깨어질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로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신자)을 보배를 담는 질그릇이라는 이 비유의 설명을 통해서 그 보배를 담은 그릇은 그 보배를 나타내기 위해서 반드시 깨어져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육적자아인 옛 사람입니다.
옛 사람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기 이전의 우리의 세상에 대한 꿈과 비전과 야망을 이 땅에서 이루려고 했던 세상의 가치들을 말합니다. 또 다른 말로 힘의 노리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이 세상의 가치질서인 문화와 전통과 풍습과 관습, 상식에 따라 움직이며 살던 습관들이 이미 내 몸에 수년 동안 살아오면서 익숙하게 체질화 되어 있어서 그것이 양파껍질처럼 하나하나 겹겹이 쌓여서 나를 사로잡아 이 세상에 안주하도록 움직이고 있는 동인의 역할을 하는 그걸 가리켜서 옛 사람적 육적자아, 또는 자기아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자아가 뭡니까? 본래 철학에서 사용 된 용어입니다. ego = 개개인의 존재를 가리킵니다. 내면의 실체를 말합니다. 한자로는 “ 스스로 自, 나 我”자를 씁니다. 어떻게 씁니까? 손수 변(手)에 창과(戈) 자를 씁니다. 이걸 해석해 보면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내 손에 잡고 있는 것이 ”자아“입니다.
그런데 이걸 신앙 안에서 실행하거나 성숙시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자기지식( 자기상식)에 기반을 두고 자기 열심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못하고 자기 의를 드러내는 삶으로 지향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롬 10:23절 기록에서처럼 자기 의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걸 가리켜 죽음(사망)이고 죄라는 것입니다. 악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스로 붙들고 있는 이 창(戈=我)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사는 것이고 이게 성도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체(주인)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인생의 주체가 되어서 나를 통치하시고 주관해 가심으로 인하여 나는 객체의 자리로 밀려 내려가는 것을 가리켜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어져야할 “나”라는 그 육적 자아의 질그릇들이 겹겹이 쌓여서 자기의 방어 기재로 삼고 숨기면서 위장하고 포장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존재의 가치와 영광과 평판과 인기와 명예를 챙기고 있을 때에는 항상 침묵합니다.
그런데 반면에 그러한 자신의 옛 사람적 육적자아가 다른 이들로부터 공격을 받게되면 어떻게 됩니까? 핏대를 세우며 결사적으로 대항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숨겨진 자신의 육적자아의 실체가 드러나니까 자존심상하고, 수치스럽게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때려죽인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열심히 율법대로 잘 지켰는데 어느 날 예수라는 자가 나타나더니 그들이 지키는 율법에다가 초를 치니까 자존심이 상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마16:24절에서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했던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정체성을 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기 이전의 자신의 실상, 자신이 갖고 있던 자격, 조건, 능력, 배경, 열심 등으로는 하나님께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러한 실체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식하는 것이 아! 나는 참으로 무능한 존재였구나! 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옛 사람적 육적자아는 하나님나라 백성 됨의 삶의 원리적인 면에서는 예수 안에서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마치 공동묘지에 그 수많은 시체들처럼 이제 더 이상 세상과 교통이나 교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도 시체들은 아무런 반응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두렵다거나, 공포스럽다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일들에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시민권을 갖고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사는 성도는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이 세상에서 시체들이라고 자처하며 사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처하는 환경이나 그들이 성취하는 성공이나 실패, 소유의 다소, 이런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공격에도 반응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자요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 시체이니까요? 세상에 대해서는 죽었다고 했으니까? 그리하여 본래 피조물의 죽은 흙의 자리,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고 자각하는 자기를 부인하는 그 자리로 변해 가는 것이 성도입니다. 따라서 순종은 내 뜻과 내 의가 하나님의 뜻 앞에서 꺾이고 부수어지는 자기부인의 삶을 순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세례요한은 요 3:30절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이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여 왔다고 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면서 참 된 보화를 드러내기 위해 세례요한 자신은 깨어져야할 질그릇으로서의 역할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삽니다. 내가 망해야 예수가 드러난다고 하는 말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릇이라는 정체성은 무엇을 담는 가에 의해서 그 내용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요강은 배설물을 담는 그릇으로, 보석함은 보석을 담는 그릇으로서 그 그릇의 자격과 됨됨이와 조건은 그의 정체성 확립에 아무런 기여를 못합니다. 그릇은 주인이 그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그릇의 정체성이 되기 때문에 따라서 그릇의 기능은 그 안에 담긴 내용물에 영광을 위해 쓰여 지고 소모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지, 그 그릇 자체의 가치나 위상 확립에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이 되면 그릇은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아도, 어떻게 훼손이 되어도 어떻게 평가를 받아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불쾌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들어 있는 그 내용물이 그 가치와 영광을 인정받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난 우리의 질그릇이 잘못 구워지고, 깨어지고 금이 가고 땜질을 했다하더라도, 내 안에 보화로 계신 그리스도만 간직하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망하는 것도, 깨어지는 것도, 멸시를 당하는 것도 질그릇 뿐, 보화는 어떤 경우에도 여전히 보화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나는 계속 후패해지고 내 안에 예수의 은혜만이 더욱더 빛나게 되는 그런 과정 속에 있는 이들을 가리켜서 성도, 또는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바울도 그의 서신서 고후 4:15,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질그릇 됨에 자아인식 속에 있는 이들은 점점 자신의 치장이나 겉모습 외모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일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몸에 짊어질 십자가의 삶이며 자기부인의 삶입니다.(고후 4:7-12) 그게 우리가 진짜 살아가야 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렇게“나”라는 세상나라가 하나님나라의 침공을 받게 되면 육신의 나라가 조금씩 점령을 당하면서“나”라는 나라 속에 갇혀있던 새 생명이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되고 결국 육으로서의 "나는" 천국으로부터 침공을 당해 멸절되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새 생명이 잉태되면 이 새 생명에 의해 어미가 먹히고 결국 새 생명이 출산되는 것처럼?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어미의 몸이 아이의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잉태 된 그 아이에 의해 보기 싫은 모습으로 망가지잖아요? 그 원리에 의해 우리가 이 육신의 몸을 새 생명에 의해 먹히고 점령당하고 결국에는 새 생명으로 확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의 뜻과 의지가 이 세상 속에서 자꾸 부인 당해지고 저와 여러분의 희망과 야망과 비전과 뜻이 하나님의 의해 기각 당해지는 경험을 할 때에 그러면서 점점 내 뜻은 이거 아무 것도 아니구나! 성취되어져 봤자! 별 것 아닌 거구나! 라는 것을 마음으로 깨달아 가는 그 상태가 천국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 진짜 보배이신 그리스도가 담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포함하고 있는 귀한 그릇으로 간주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질그릇에 불과한 것에 보배를 두신 것은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고후4장) 이것이 사도 바울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이게 성도의 삶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성숙되면 성숙 될수록 이 자기부인이 잘 되어져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토를 달지 않고 바로 꼬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게 잘 되면 잘 될수록 타인에 대한 용서와 관용과 배려와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고후 6장에서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심정이) 넓어졌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판단과 정죄가 절제가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더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내가 아니까? 깨달아지니까요? 예수님도 이 자기부인의 삶을 이 땅위에서 사셨습니다. 그게 체휼하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도 인간의 자리로 내려가 인간과 같은 성정을 가지시고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고 계신 분이 인간의 눈높이 내려가서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육적 자아가 변화되는, 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도의 육적 자아인 그의 뜻과 의지가 부인 당함으로 말미암아 그 질그릇 같은 성도의 육적자아 안에 들어와 계신 보배로우신 예수가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성숙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종류의 성숙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 안에 머물고 계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 성령님의 일하심의 열심의 역사로 나타나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 안에는 우리 스스로 이루어 내는 성숙과 변화가 없다고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갈 5:24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면서--- 이제 성령에 이끌린 삶을 사는 자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산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본질의 상태입니다. 이미 존재(being) 된 자로서의 그의 삶을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은 내 안에 계신 보배를 드러내는 존재로서 서야하는데 그 보배인신 성령께서 들어나기 위해서는 질그릇인 내가 반드시 깨어져야 그 때 비로소 내 안에 담지하고 있는 그 보배이신 그리스도가 내 밖으로 드러나서 나를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로 이끄시면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내주하는 신자에게는 이미 그가 구원받은 자로 하나님의 상급이라는 복을 받는 자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하고 있는 혹자의 주장처럼 영적인 복과 육적인 복으로 설명하게 되면 결국 인간의 열심과 노력에 의한 육적인 복도 함께 챙겨야 한다는 논리는 가당치도 않는 어불성설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이라는 것이 인간 스스로가 실천을 기반을 둔 종교적인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편으로 사용 된 하나님의 언약적 용어로서 그 믿음의 주체 또한 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논리의 주장은 성경을 전체적인 문맥을 고려한 통전적인 시각에서 통일성과 다양성의 토대로 견지해 가고 있는 성경의 전체적인 구속사의 흐름의 맥락을 잘 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본질상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칭의와 더불어 성화와 영화가 동시적이며 현재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역사 속에서는 아직 유한한 존재로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 속에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이라는 그러한 긴장 관계성에서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성령의 소욕을 좇아 거듭난 새 인격을 발휘해 나감으로서 칭의적이고, 성화적이며 영화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14:20-24절에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그리스도와 연합 된 성도는 주님이 예비한 처소의 내용인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거하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분은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복되고 영광스런 약속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에 이 역사 속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로 그걸 자연스럽게 삶의 실질로 나타나는 삶의 지향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바울도 그의 서신서 빌립보서 2:12절 이하에서“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신자가 지향해 가야할 방향을 잃지 말라는 뜻입니다.)---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리스도와 연합 된 관계에 있는 신자는 하나님의 뜻에 나의 뜻이 완전히 맞추어 지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 위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는 양육의 훈련 과정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의 과거시제와 구원의 현재시제와 더불어 미래시제를 선취적으로 맛보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당신의 처소로 만드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이미 운명적으로, 신분적으로, 선언적으로 완성이 되었기에 절대 중도에 포기되거나 실패되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지는 그 길에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수많은 자기부인의 사건들과 상황들을 거부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 당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자기를 비워 내시는 작업이 우리가 해야 할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 일을 예수님이 이미 이루셨고, 지금도 이루고 계시기에 우리도 그 일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로 이 역사 속에서 성숙되어져 가는 지향성을 띄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긴장 속에서 지어져 가고 있는 하나님의 처소로서의 성도의 현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완성된 지점에서 과정을 바라보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따라서 믿음의 본질은 신자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이 세상의 현실적 가치를 넘어선 본질적 가치를 소유해 가게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의에 행하심에 의해서 우리의 실체를 폭로 당하고 그리고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시고 기뻐하신 뜻대로 정해놓으신 목적지로 끌려가는 것이 우리 신자의 삶의 목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의 삶은 주체이신 하나님의 이끄심에 의해서 반드시 완료지점으로서의 지향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 세상에서 빚진 자로 증인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털리는 삶을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성도간의 연합은 강한 쪽이 약한 쪽을 먹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강한 쪽이 약한 쪽에게 먹히는 방식으로 그 연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내어줌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방법입니다.(요6:56절) 그게 새 언약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불가능하고 연약하고 추악한 하나님의 의해 버려질 수밖에 없는 그러한 자들에게 떡이 되시고 생수가 되셔서 그들의 음식이 되어 그들에게 먹히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연합을 이루어내십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 삶의 원리이며 창조의 질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 원리는 먹고 먹히는 힘의 원리가 아니라 창조주가 아무런 조건 없이 자기를 내어주는 은혜의 원리이기 때문에 자기를 비우고 낮아져서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삶의 원리인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의 원리가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축약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영광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과 내 이웃의 영광을 위해 손해와 상함과 불이익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곳을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 라고 칭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저 우주 저편에 숨겨져 있는 어떤 유토피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 된 어떤 이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십자가의 삶이 터져 나올 때 (협의적인 의미에서)거기가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세상의 통치자와 하나님의 나라 통치자가 다른 것은 세상의 다스림은 강자가 약자 위에 군림하는 다스림이지만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 다스림은 강자가 약자를 섬기는 다스림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통치자, 하늘의 왕인 내가 이 땅을 다스리로 왔는데 그게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섬김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맥락을 이해하고 있는 신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오해하여 엉뚱한 것을 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 권세는 섬김을 받는 권세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이를 섬겨주는 권세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다수의 신자들이 믿음을 자신들의 열심과 노력을 대변하는 것으로 곡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예수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라고 할 때 그 믿음의 주체가 내가 됨으로 인해서 그가 하는 말이 내가 예수를 믿었더니 구원 받았어! 그러니까 너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을 수 있어! 자~예수 믿으세요! 그럽니다. 물론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을 자신의 행위(행함)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신앙생활 또한 산기도, 천일기도, 40일 금식기도 등등의 것들을 내가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마지막 담판을 보는 것으로 이해하여 어떻게 하든지 응답을 받아보겠다는 자기 아상을 쌓는 자리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신자는 그와는 다르게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행함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에 의한 신자의 열심은 자의적인 열심에 의한 행함이 아니라(롬10:2-3절) 주님을 향한 열심을 말합니다. 그것은 죄인과 저주에 자리에 있던 우리를 십자가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어 의롭다 라고 칭해 주셨기 때문에 그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그분의 의를 전가 받은 우리가 기뻐하고 찬송하며 그 의만을 높이고 자랑하는 자리로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의한 신자의 실천이고 행함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각기 자신에게 주어진 형편과 환경에서 그냥 믿음의 길을 따라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재물이 많아도 재물을 힘으로 여기지 않고 여전히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돈이 자신을 생명에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생명에 있게 했음을 생각하고 자신에게는 재물보다 예수님의 은혜가 더 귀함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자기 수중에 있는 재물도 자기 소유로 여기지 않게 하는 것이고, 이 믿음으로 구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제는 구제한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구제 하게 하신 주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행함도 자랑할 것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자신의 삶에서 살펴야 하는 것은 ‘내가 열심이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삶에서 어떤 것이 십자가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인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살피게 되면‘역시 나는 신자답다’라는 생각보다는 ‘나는 십자가에서 멀어진 채 살아가는 존재에 불과 했구나’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나조차도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입은 바 되었고, 믿음을 선물로 받았음을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이 감사함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실패에서도 유일하게 감사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는‘왜 이렇게 하십니까?’라는 원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일에서도 다만‘주님이 옳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주 안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혹자는 믿음과 행함에 대해 잘 못 이해함으로 인해서 로마서와 야고보서에 대해서도 오해를 합니다. 즉 사도 바울은 믿음을 말했고 야고보는 행함을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약2:17절을 들어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구절을 말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루터도 복음의 본질이 비어있다고 해서 야고보서가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르친다는 잘못된 주장과 행위를 강조함으로 행위에 의하여 구원받는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하기 때문에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서신이라고 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는 바울 사도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 라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루터는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다 보니 야고보의 행위를 강조한 서신에 대하여 성경으로서 받아드리기가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루터는 야고보와 바울을 조화시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율법과 행위를 뒤섞어놓는다는 이유로, 그리고 야고보가 성경의 정신을 침해하고 있다는 이유로 지푸라기 서신이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요구되는 행함은 다른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도 열심을 부려서 행하고 있는 무슨 도덕적, 윤리적 착한 행위정도가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이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행함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믿음으로 하는 행함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자신의 이해와 사고로 예수님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간의 이해와 사고에 부합 된 것이고 인간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믿음을 말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그의 서신서 고후 10:4-5절에서 10:3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10: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10: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 역사와 우주를 경륜하고 계신 유일한 이유는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이 역사 속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의 힘의 논리적인 원리와 목적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신 뜻대로 이끌어 가시면서 나만을 위해서 뛰던 심장을 내어주신 주님의 심장으로 점차 옮겨가는 자기부인의 삶을 지향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가 삶과 역사의 주체가 되어서 인간이 중심이 된 아름다운 인간세상, 아름다운사회, 아름다운 나, 아름다운 인간, 이걸 구축하려고 하는 그러한 행위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칭찬과 박수를 받습니다. 일간지에서도 대서득필합니다. 교회다운교회가 나왔다고, 목사다운목사가 나왔다고, 세상부귀 다 뿌리치고 농촌에 가갖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섬기며 그렇게 목회를 하더라! 박사학위 다섯 개 버리고 아프리카에 가서 평생을 선교했다더라고 박수를 쳐 줍니다. 이렇게 말씀을 인간의 선악 구조 하에서 인위적으로 해석을 해서 인간보편의 자존심을 챙겨주는 것이 인본주의 즉 율법주의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선해지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은 인간 보편이 모두 지향하는 것으로 복음과 상관없이 사는 이들도 인간 보편의 목적지를 선으로 정의하고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살아낸 사람들에게 상도주고 박수도 보내줍니다.
문제는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인간보편이 모두 인정하고 박수를 보내는 일은 인간이면 누구나 추구하게 되는 목적지인 반면에 인간보편이 이해할 수 없고 추구할 수도 없는 진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착한 행함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착한 행위들로 근사하게 자신을 위장하고 포장 된 그 실체를 드러내 폭로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는 마치 근사한 회칠한 무덤처럼 죄의 성향으로 위장되어 있는 자신의 거짓됨을 폭로 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 자신의 성숙이나 변화나 업적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언약의 기둥에서 부정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만이 오롯이 드러나고 자랑되고 칭찬되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부인의 삶입니다.
이처럼 인간을 부정하고 죄를 말하고 그리스도를 의존하고 그분만을 높이는 신앙은 이 세상 누구도 칭찬해 주지 않는 이걸 하나님이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유일한 착한 일입니다. 그 하나님의 착한 일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나의 스펙으로 쌓고자 했던 내 꿈, 내 비전, 내 야망, 내 희망이 삭제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존재가치, 자기위상과 자기명예, 자기영광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던 나의 일상이 삭제가 되고, 소멸되어져 가는 것이 하나님의 착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옛 사람적 육적자아가 삭제되어야 그 빈자리에 하늘의 것이 채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요3:30절에서 나는 쇠하고 그분이 흥해야 한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믿음이 바로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나를 그렇게 비워내고 삭제되어지는 삶의 자리로 이끄는 것이 믿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이해와 생각과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엡 2:8절의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 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과 지혜를 초월하여 주어지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믿음으로만 가능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인간의 지혜와 말로 권하여서 예수님을 믿게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이성과 지혜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십자가이며 그 십자가에 흘린 예수님의 피의 은혜는 오직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로 작정하시고 택하시고 부르신 자기백성에게만 해당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사람의 이성과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만이 믿게 할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셔야만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사고와 이해와 상식에서 벗어나 계신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히11:1절과 2절에서도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바라는 이 세상의 것은 이미 실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믿음이 없어도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반면에 하늘의 것은 실상이 없기 때문에 즉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하늘의 것의 실상이 믿음이므로
따라서 신자에게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 하늘의 것을 볼 수는 없지만 신자가 바라는 하늘의 것의 실상을 가졌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 실상을 가졌기에(담지하고 있기에)하늘의 것을 알 수 있는, 보는 자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고전13:12절의 기록에서처럼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볼 수 있으나 그러나 지금은 희미하게 보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직 실현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현 된 것으로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본 것처럼 선명하게 인정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보이는 것을 보고 그것이 이러하다 라고 인정하는 것을 우리는 인식, 혹은 인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인식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만지고 인식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러한 능력을 누군가에게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받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고 여전히 보여주면 믿겠노라는 세상 사람들과의 구별을 위해 믿음을 보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노아홍수 때에 하나님의 경고를 받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에 노아의 행동은 뭇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여 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고를 사실로 믿었던 노아에게는 방주를 만드는 것이야 말로 노아의 현실세계에서는 가장 지혜로운 것이고 시급하고 절박한 삶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노아가 바라보는 세상의 현실은 하나님에 의해 망해간다는 사실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그에게 장악 된 신자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다른 현실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 믿음에 의해 말씀을 따라가며 묵묵히 자신의 일상을 살아갈 뿐입니다. 멀쩡한 세상을 바라보며 심판을 말해야 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어리석다할 지라도 말없이 말씀의 현실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것으로 세상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눈앞의 현실에 메이게 된다면 결국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처럼 말씀의 현실에 대한 긴장감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된 현실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 이것이 지혜이며 이 지혜는 신자로 하여금 현재 가장 시급하고 절박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세상 사람들의 믿음은 보는 것이 믿는 것이고(seeing is believing) 그와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믿으면 보인다(believing is seeing)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인간 측에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세전에 택한 자기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선물이라는 사실에 그 초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로마서와 야고보서를 두 수레바퀴로 비유하면서 어느 한쪽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으로 말합니다. 믿음만 말해서도 안 되고 행함에 치우쳐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야 온전한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행함 없는 믿음을 말한 것이 아니고, 야고보 또한 믿음 없는 행함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와 야고보의 신행일치(이행일치) 교리는 결코 상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당시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록했다면, 야고보는 믿음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누구인가? 그는 정말 행위로 말미암는 의를 가르치므로 바울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사상을 견제한 율법주의자였는가? 아니면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는 것처럼 그도 같은 주제에 대하여 조금 다른 관점을 제시했을 뿐인가? 물론 정답은 후자입니다.
모든 개혁자가 루터처럼 야고보서를 낮게 평가한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루터의 절친한 동료였던 멜랑히톤입니다. 그는 바울과 야고보의 서신이 상충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칭의론과 관련해서 현재 일부에서는 '행함 없는 믿음'을 가진 한국교회 현 상황과 관련해 이신칭의를 '구원파적'이라고 비판하는 부류도 생겨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와 관련하여 우리한국교회의 위기 요인은 무엇보다 인본주의에 기초한 율법주의와 기복주의, 실용주의, 그노시스주의(영지주의), 번영신학의 영향을 받아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리고 또한 " 이러한 인본주의 신학인 율법주의와 기복주의, 실용주의, 번영신학은 성경을 백지수표로 여기고 현세적인 복을 강조하는 등 기독교를 부매랑 신앙의 패러다임 즉 '기복종교'로 전락시킨 중요한 매카니즘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반면에 구원파적인 그노시스주의(영지주의)는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논리로 이미 구원 받은 자는 그 육은 썩어져야할 더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구원 받은 이후의 삶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이것은 바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잘 못 이해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행함은 인간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능력에 의해 발휘된(격발 된) 열매고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믿음에 의해서 격발되어(발휘되어) 당연하게 나타나고 맺어질 수밖에 없는 결과가 곧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함의 관계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기찻길의 레일처럼 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믿음은 행함의 원리가 되기 때문에 행함은 믿음의 구체적 실현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인간 스스로가 실천을 목적으로 기반을 둔 종교적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편으로 사용 된 언약적 용어입니다. 여호수아 24:2절에 기록하고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믿음이 홀로 일을 하여 강 저편에서 우상을 섬기며 다른 신을 의존하고 있던 자에게 찾아가서 강 이편으로 끌고 나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도 신자들이 이 믿음을 자기의 소유로 여겨 자신들의 열심과 노력을 대변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자신의 행위로 보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약 내가 예수님을 믿어낸 것으로 몰고 가면 신앙생활도 어떻게 해서라도 산기도 한다든지, 40일 금식기도 한다든지, 천일기도, 3,000번 기도 등등의 명목을 세워서 소위 그들이 말하는 하늘보좌라도 흔들어서 하나님과 마지막으로 담판 보는 응답 받는 다는 쪽의 신앙으로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내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종교적 열심의 행위로 몰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흔히들 자신이 생각하는 교회상을 기준으로 해서 교회의 교회됨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나누는 교회, 섬기는 교회, 구제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 등등의 행위들을 통해 결국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이 생각하는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교회 상이고, 이것을 기준으로 교회를 평가합니다.
우리교회는 나눔과 섬김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라는 식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교회를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사람들이 좋아하고 칭찬받는 일에 지향하여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나눔과 섬김, 구제, 봉사, 이러한 것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다면 굳이 보혜사이신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은 성령이 없이 인간의 노력과 열심과 도덕과 윤리적인 착한 희생과 헌신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누고, 섬기고, 구제하고, 봉사하고, 선교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냐? 는 관점에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믿음이지, 교회가 하는 일을 통해서 교회 됨을 보여주고 자 하는 것은 잘 못 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믿음은 믿음으로 자신의 행위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엡1:17절 이하에서 기록하고 있는 말씀처럼 계시의 영, 성령의 내주함이 있어야 올바른 자기인식과 올바른 하나님 인식을 하게 됨으로써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자리에서 자기가 부정되고, 부인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 때에 진짜 겸손한 성도의 행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진짜 헌금이 나오고 진짜 섬김이 나오고 진짜 예배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실 예가 야고보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그러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아브라함의 믿음을 들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18-22절에서 “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드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그러니까 여기서의 믿음은 하나님의 열심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강 저편에서 다른 신을 섬기며 우상을 팔고 있던 자에게 찾아가서 강 이편으로 끌고 나오게 하시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홀로 약해지지 않고 아브라함에게도 이 믿음이 홀로 견고하게서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게 하더라는 것이 약 2:18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아브라함과는 별개로 활동을 하면서 아브라함 안에서 일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 믿음을 사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한 믿음으로 그를 끌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밖에서 볼 때에는 아브라함의 것처럼 보이지만 아브라함의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때로는 그 믿음의 반대편에서 있었을 때는 믿음이 홀로 일을 해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인 그 약속을 의지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만일 이 믿음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믿음 안에서 견고하게 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자 위를 하나님의 믿음이 덮어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죽음으로 부활을 경험한 것입니다. 자기아들 이삭의 가슴에 칼을 꽂는 행위 자체가 자기부정입니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러한 야고보의 말은 바울의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야고보 역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 1:22절에서 야고보사도는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은 행함이 아닌 믿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두 성경은 서로 충돌한 듯한 내용 때문에 어떤 사람은 “사도바울은 믿음을 강조하고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사도바울은 아브라함의 예까지 들어가면서 행함을 거부하는 것처럼 비춰지고 있고,
반면에 야고보는 약2:22절에서 ”우리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재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행함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바울과 야고보가 신학적인 문제로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렇다고 해서 야고보가 말한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실천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분명 사도바울의 말과는 충동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한 죽은 믿음은 인간의 종교행위 즉 도덕과 윤리와 종교적 실천이 없는 유대주의, 율법주의, 인본주의적인 종교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없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영, 성령이 거하지 아니한 인간 자신의 독립 된 존재성과 주체성과 가치성을 높이는 삶 자체를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기 자신 안에 스스로 사유하고 있는 자원이나 힘이 있어서 자신을 드러내어 증명하고 자랑하는데 사용되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가 행하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엡1:17절 이하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 성령을 주시사 그 성령의 내주함이 있는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 마음의 눈을 열어 보여주셔서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고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를 구한다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알게 되고 깨달은 신자의 삶의 모습은
믿음이 가입되기 전에는 나만을 위해서 살았지만 이제 믿음에 의해서 성령의 조명하심과 이끌림에 의해서 다른 이에게 지향하게 되는 삶을 사는 것이 온전한 믿음일진데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시고 행하게 하시는데 어떻게 우리가 아무것도 안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믿음을 갖고 우리 안에 뚫고 들어와 버렸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 신자는 보이지 않는 그 믿음에 의해서 이끌림을 당하면 오히려 눈에 보이는 가치들이 기각이 되고 보이지 않는 그 믿음에 의해 우리가 점점 사물이나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이 반드시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에 눈과 귀가 열리게 되면 그럼 이제 자유자이기 때문에 막살아도 되요! 로 밀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하면 내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에 의한 올바른 신앙의 행위를 할 수 있을까? 를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사람이 전혀 관심 두지 않았던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그 하나님의 일에 모든 마음을 두게 하는 것이고 그 믿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세상을 보는 새로운 안목(세계관)이 열리는 것이며 더 나아가 사도바울처럼 세상의 모든 가치에 값을 매기고 있던 것들에 대해서 배설물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참 된 복 생명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전부로 여기고 그 기쁨을 누리는 자로 머무는 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이 하신 그 일을 믿게 되는 쪽으로 지향되면서 예수님만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바울도 그의 서신서 롬 11:16, 17,18절을 통해서 당시 자연법칙의 농사법인 접붙임의 원리를 들어 역설적인 표현법으로 믿음과 행함의 본질적인 관계인 주체와 객체의 삶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가루가 거룩한 즉 떡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 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가지는 아니고 뿌리가 거룩한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신자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입은 신분이기 때문에 점차 거룩해 가는 성화는 성경에 없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애당초 우리 신자의 행함과는 아무 상관 없이 예수그리스도의 행하심으로 베풀어주신 은총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함을 가지고 거룩에 차별을 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나를 거룩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거룩해지겠다고 하는 것은 거룩하게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의를 멸시하는 것이고 인간의 힘과 공로로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키겠다는 악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백성과 함께 하심으로써 자기백성을 통하여 말씀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신자에게서 사랑이 나타나고 인내가 나타나고 절제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신자의 실천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성취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자기부정, 자기부인입니다. 이 자기부인이 믿음으로 인해 나타나는 신자의 성화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성화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점차 완성되어 가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주어졌다고 해도 인간의 죄의 본성은 여전히 살아서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본성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자기개발이나 자기자아실현 등은 성화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가 믿음으로 인해서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세계관과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보이는 성숙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죄의 성향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거룩으로 점진적으로 성화되어져 간다라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
계속 이어서 롬11:17-18절 보겠습니다. 또 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찌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여기서 돌 감람나무는 우리를 가리킵니다. 참 감람나무라는 것은 알레떼이아! 진리의 감람나무란 뜻입니다. 하나님, 그 진리, 예수그리스도를 지칭, 뿌리의 진액을 받는 걸 생명이라 합니다. 가지가 뭘 맺고 안 맺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뿌리의 진액을 받는 네가 왜 잘 난 척 하느냐? 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너를 보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
19절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20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함으로 꺾이우고 (여기서 믿지 아니하는 것은 유대인들처럼 행함으로, 율법을 지킴으로, 제사를 지냄으로 뭔가를 하려고 하는 이들은 꺾이우고 라는 뜻입니다.)--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절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
이처럼 사도바울은 당시 농사법인 접붙임의 원리를 들어 존재됨(being)에서 발휘되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잘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바른 해석은 이렇습니다.
본래 자연법칙에서 농사법은 돌 감람나무에다가 참 감람나무가지를 붙이는 것이 올바른 농사법입니다. 접붙임 할 때에 항상 열매는 가지의 성질, 가지의 속성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돌 감람나무에다가 참 가지를 접붙여 놓으면 이 가지에서는 가지의 성질을 따르는 참 열매가 맺습니다. 이게 자연법칙의 농사법입니다. 이게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농사법의 원리입니다. 이 자연법칙의 원리는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와 반면에 바울은 이러한 자연법칙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반대의 원리를 들어 거꾸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연법칙의 원리인 농사법과는 정반대의 역설적인 논리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자연법칙에서는 돌 감람나무에 참 감람나무 가지를 접붙여 놓아야만 참 감람나무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이치이지만 그와 반면에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그것과는 정 반대로 참 감람나무는 하나님, 진리, 예수님이신데 그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는 돌 감람나무는 바로 너희들이잖아! 그러면 너희들에게 맺히는 열매는 뭐겠니? 라고 바울이 지금 묻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연히 자연법칙에 따라 세상의 상식에 기반을 둔 세상의 상식에 따라 지금까지 농사를 지어 왔기 때문에 접붙임의 원리도 그 가지의 성질에 따라 돌 나무열매가 맺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의 상식에 기반을 둔 가치체계로 하나님의 나라 또한 그렇게 지향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하나님이 맺는 그 열매를 자신들이 맺는 것으로 엉뚱하게 흉내를 내고 있으니까 바울이 열 받아서 접붙임의 원리를 예로 들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 너희들이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돌 감람나무잖아! 그러면 여기에서는 당연히 인간너희들의 열매가 맺히는 게 당연하지! 그런데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왜 너희들이 가지가 열심을 부려서 너희들의 열매를 맺으려고 그래? 그러면 너희들이 맺는 열매는 돌 열매 밖에 못 맺는다니까? 아무리 너희들이 열심히 맺어봐야 너희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그것 밖에 못 만드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되니! 여기서 참 감람나무( 예수그리스도 )로부터 그 뿌리의 진액을 받아서 그냥 살아야 돼! 라고 바울은 이것 자체가 열매 맺다 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자연법칙과 정 반대로 참 감람나무기둥에 돌 감람나무인 그들이 접붙임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맺는 열매는 참 감람나무의 성질의 가지가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참 감람나무 열매가 맺게 되는 것입니다. 참 감람나무의 그 뿌리의 진액을 받아 살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이 자신의 열심으로 접붙임을 당한 돌 감람나무인 그들에게 열매를 반드시 맺어가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Union Christ,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존재(being) 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새로운 존재가 됐다는 뜻인데 그것은 바로 내 주체성과 존재성이 부정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자기존재를 올바로 깨닫고 자기존재를 부인 당하여 예수 안으로 흡수되는 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예수님을 머리로 한 지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를 머리로 하면 자기의 존재성이 부정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머리가 명령하지 않은 어떤 행위를 지체가 스스로 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중풍이고 뇌성마비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머리라는 것은 예수님의 뜻 안으로 내가 흡수되어 버린 그러한 상태를 연합이라고 하고, 그렇게 연합 된 상태를 순종이라 하고 성화라고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은 하나님이 지키라고 하는 율법의 세목 몇 개를 지켜내는 순종이 아니라 그 순종, 샤마라는 단어 자체가 완전이라는 뜻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순종이 되는 것은 예수 안으로 항복되어 들어갔을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기가 자기인생의 삶의 주체가 되어 선악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살던 그 자신의 왕 됨의 자리에서 내려와 본래의 피조물의 자리, 하나님으로부터 생명력을 거저 부여 받아 그분에 의해 움직여지는 그 피조물의 본래의 자리로 다시 회복되어 내려가는 것이 우리의 목적지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의 옛 사람의 육적죽음, 즉 다나토스의 죽음의 그 자리가 우리의 목적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신자를 믿음으로 장악하여 자기의 뜻과 의지를 부인당하며 날마다 죽노라의 방향으로 끌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그 옛 사람적 육적 자아의 죽음의 아래에 있게 하는 그 죽음의 자리가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 안에서 살고 죽어도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걸 위해 예수님이 다나토스로 죽으시고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적 육적 자아를 부정당해야 되는 것이지 말씀을 에너지 삼아서 개발하고 발전시키고 성숙시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어떤 자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성숙이나 성화는 머리라고 하는 예수님의 뜻 안으로 내가 흡수되어 버린 그런 상태, 자기의 뜻과 의지를 완전히 부인 당하는 자리로 서는 것을 가리켜 자기가 온전히 부정, 부인되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아래의 것이 위의 권위에 완전하게 장악이 되어 종속 된 상태, 즉 위엣 것에게 완전히 장악되어서 내 존재를 몰 수 당하는 걸 순종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한 것입니다.
반면에 불순종이라는 것은 한 몸 된 그 연합에서 떨어져 나간 객체의 상태를 불순종의 상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원래 없음입니다. 원래 우리의 처음 자리는 없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없음이 스스로 “나”라는 자아를 구축하거나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래“나”는 없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없음이 “나”라는 존재가 되기 위해선 외부에서 어떤 대상이 나에게 “나”라는 내용을 주입해 줘야 가능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 없음이라는 존재가 “나”라는 자아를 구축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나는 하나님이 생기를 후! 불어넣지 아니하면 그냥 죽은 흙이 맞구나! 이 자리로 들어가서 하나님! 이제 내 삶에 하나님의 뜻을 그려내세요! 라고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나의 옛 자아가 죽고 새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진정한 샬롬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나의 옛 자아의 죽음의 마지막 지점이 육적자아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걸 자기부정,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기부인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지 않으면 나는 그냥 죽을 흙에 불과한 존재로 원래 없음의 나를 확인해 가는 걸 자기부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도구로, 캔버스로 사용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그려내신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질그릇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은 언제든지 깨어짐을 감수하며 없음이라는 그 흙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순종하는 자로 사는 자입니다. 그게 질그릇입니다. 그러니까 순종은 내 뜻과 내 의지가 그리스도의 뜻 앞에서 꺾이고 부수어지는 걸 순종이라고 그럽니다.
따라서 그릇의 기능은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의 영광을 위해 쓰여 지고 소모되는 것이어야지, 그 그릇 자체의 가치나 위상 확립에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이 되면 그릇은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아도 어떻게 훼손이 되어도, 어떻게 평가를 받아도 두렵지 않고, 불쾌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들어 있는 그 내용물이 그 가치와 영광을 인정받으면 그만입니다.
나는 그렇게 계속 후패해지고 내 안의 예수의 은혜만이 오롯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질그릇 됨의 자아인식 속에 있는 이들은 점점 자신의 치장이나 겉모습 외모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일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돌 감람나무일 뿐이므로 절대 자긍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돌 감람나무 가지는 참 감람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돌 감람나무들이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것도 자기들의 공로나 업적이나 노력을 근거로 하여 그리 된 것도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 돌 감람나무에 맺히게 되는 열매도 돌 감람나무의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열매는 뿌리의 진액으로 맺어지는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삶에 맺히는 열매는 그 자체가 인간의 존재됨과 인간의 자기가치 확보에 어떤 힘이 있거나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아가고 인간의 무력함을 인정하여 십자가를 꼭 붙드는 데에 필요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지 하나님마저도 감격시킬 수 있는 인간들의 공로와 업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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