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잠두교회 김동수·김남수·김영구 순국 이야기
글 · 이은용
1907년 강화진위대(구 한국군)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였다. 1905년까지 진위대장 이었던 이동휘 참령이 군직을 사임하고, 보창학교를 세워 교육운동에 전념하고 있던 시기이다.
나라가 기울어져 가는 상황을 간파한 이동휘를 비롯한 김동수·김남수 등 기독교인과 대한자강회회원들은 그해 7월 24일 강화읍 연무당에서 군중 집회를 열고 ‘일제에 결사 항전하자’는 강연을 하였으며, 7월 30일 길상면 전등사에서 이전에 병정이었던 사람 등 400명이 모여 ‘합성친목회’라는 이름으로 반일집회를 열었다.
군민들의 항일정신이 고조되었던 8월 9일, 군대가 해산당한 것이다. 그 날 밤에 해산당한 군인들이 앞장서고 기독교인들과 주민들이 합세하여 500여 명이 연무당에 모였다. 하정도 하사를 비롯한 병정과 군중들은 무기고를 탈취하여 총과 탄환으로 무장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다음날 인천에서 출동한 일본군과 갑곳진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 6명을 사살하고 8명을 부상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한국 측은 1명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기관총 2정을 무장한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강화읍으로 후퇴하였다. 다음 날인 8월 11일 일본군이 읍내를 점령하고, 친일 단체인 일진회원을 앞세워 가택수색을 하였다. 봉기 주동자를 찾고 탈취당한 무기를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이 과정에서 이동휘의 주택을 비롯한 여러 가옥이 불탔으며, 무고한 주민들이 50여 명이 학살당하였다.
이 무렵 일진회 간부의 모함으로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 교인 김동수(45세)·김남수(44세)와 김영구(23세)가 일본군에 피체되었다. 뚜렷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김동수가 보창학교 교사로 활동하였고 보창학교에 기부금을 낸 것, 교회에서 강론할 때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말을 한 것, 태서신사(泰西新史)를 읽은 것, 항일 집회를 주도한 것 등이 일본에 눈엣가시였을 것.
강화경찰서에 구금되었던 이들은 8월 21일 재판을 받기 위해 포승줄로 묶인 채 서울로 압송되던 중 강화군 선원면 신정리 더리미 해변에서 일본 헌병이 쏜 총을 맞고 순국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들의 가정이 풍비박산되었고 잠두교회가 풍랑에 휘말렸다.
이 사건에 대하여 선교사 데밍(都伊明, Charles. S. Deming, 1876~1938)은 1908년 감리교회 연회에서 “피의 세례(a baptism of blood)"라고 보고하였으며, 믿음을 지키다가 희생당한 ‘순교자들’이라고 말하였다.
강화중앙교회는 순국자들의 정신을 기리며 추모하고 명예를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96년이 지난 2003년에 교회와 더리미 순국현장에 추모비를 세우고 매년 8월에 추모예배를 드린다.
2020년 강화기독교역사연구소 이은용 소장과 후손 강우명씨 등이 ‘김동수·김영구의 묘소’를 찾았으며, 2022년 봄 기독교 사학자인 감리교신학대학 이덕주 명예교수가 답사하여 확인하였다.
2022년 11월 <국민일보>에 ‘김동수·김영구의 묘소 발굴’ 기사가 보도되었으며, 2023년 8월 강화중앙교회에서 한규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이덕주 교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순국사건에 대한 학술세미나’가 개최되었다.
한편, 2022년 11월 이은용 소장이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이 순국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신청하였으며, 2024년 7월 9일 ‘김동수·김남수의 강화에서의 항일운동’이 진실규명으로 결정되었다. 이를 근거로 7월 22일 국가보훈부에 독립유공자포상을 신청하였다.
보훈처 관계자에 따르면, 2025년에 보훈심사 결과가 날 예정이며 진실이 규명된 사안인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렇게 될 경우 순국 118년 만에 명예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