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공다는 청(淸) 궁중에서, 황궁귀족들의 특별한 주목과 총애를 받았으며, 동시에 국가선물로 외국사절들에게도 주었다. 1793년에 영국은 전 인도말레이시아 총독일행 95명을 특파하여, 건륭(乾隆)황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러 왔을 때, 중국은 만수원(萬樹圓)에서 영국 사절단을 접대하면서, 대량의 선물을 보냈는데, 그 중에는 보이여아차, 보이차고 등이 있었다. 동시에 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도 보이차에 대해 그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 쓰고 있다.
공다중에서, 네모난 덩어리모양의 방다(方茶)는 조정에서 신하들에게 하사하는 것인데, 받는 사람에게는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증압(蒸壓)하여 정방형의 네모난 덩어리로 길이와 너비가 각각 10.1㎝이고, 매 덩어리의 순량이 250g 되게 만들었는데, 압제차(壓制茶)중에서 고급품이었다. 청나라 때 민간에서는 보이공다라고 불렀고, 황제가 신하들에게 하사하는 선물이었다.
1729년 옹정(雍正) 10년부터 보이차는 정식으로 공차가 되었으며, 1908년 광서(光緖) 30년 운남 지방이 혼란하고 도적이 각지에서 일어나 공다가 곤명부근에서 강도들에게 모두 약탈당하게 되자, 조정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보이차 공납은 폐지됐다 . 그러나 보이공다는 청나라 궁중에서 거의 200년 동안 마셔왔다.
1963년에 북경에서는 2톤 남짓의 청나라 궁중의 공차를 처리하였는데, 그 중에는 크고 작은 단차(團茶), 여아차, 보이차고 들이 있었다. 단차중 제일 큰 것은 수박만 했고, 무게가 다섯근 반 이었으며, 작은 것은 탁구공 크기만 했으며, 곰팡이가 생기지 않아 보존 상태가 양호하였으며, 단차의 표면에는 줄지어 찍힌 천 무늬 흔적이 있었다. 보이공다를 추산하여 보면, 적어도 慈禧太后(자희태후) 시기에 남겨둔 것이나, 훨씬 이전일 가능성이 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오랜 것은 약 150년 이상 묵은 것이 있었다.
〈보이다기〉 중에는 “보이차는 이름이 온 천하에 퍼지고 맛이 제일 진하며, 수도에서는 더욱 비싸다”는 기록이 있다.〈전해우형지〉에는 “산에 들어가 차를 만드는 사람이 수십만이 되고, 차객들이 구입하여 각지로 실어갔다”고 기록하였고, 서역시장의 필수상품으로, 국내에서는 차를 마시는 계층의 유행이 되기까지 하였다.
청 전기와 중기 약 1660년부터 1870년까지가 보이차 역사에서 가장 전성기였다. 서쌍판납의 육대다산의 최고 년간 생산량은 8만여 석에 이르렀다.
기록을 보면 집집마다 茶나무를 심고 팔았으며, 대상이 길을 점유하고, 행상들이 북적대었다고 한다. 차 시장에는 조정의 공차 관리들 외에 티베트, 인도, 미얀마, 스리랑카, 안남, 캄보디아와 국내의 상인들도 있었다. 매년 적어도 5만필의 짐수레가 육대다산 사이를 드나들었다.
그중 궁중으로 들어가는 보이공차는 약 700담이고, 서역지구에 파는 것이 약 3만담이 되었으며, 극소수양이 다른 나라에 팔리는 것 외에 대부분은 국내시장에서 소비되었다. 그러므로 육대다산의 차의 생산품이 해마다 약 2,3만석이 국민들에 의해 소비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에 운남지역 내의 많은 다산들이, 더욱 많은 차를 생산하여 마시는 풍조가 성행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